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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연구』와 제자들
『도쿄독립잡지』 폐간 후 『성서의 연구』 제1호(9월 30일 자)가 1900년 10월 3일에 출간되어 서점에 진열되었다. 잡지 첫머리에서 우치무라는 『성서의 연구』가 『도쿄독립잡지』의 후신이라고 천명하면서 요한복음 1장 17절을 인용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도쿄독립잡지』가 ‘의’를 가르치는 모세의 율법이라면 『성서의 연구』는 ‘사랑’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본 것이다.
『성서의 연구』는 일본 최초의 성서 잡지이고 그것이 팔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지만, 『성서의 연구』는 의외로 잘나갔다. 발매 후 사흘만인 10월 6일에 창간호 3,000부가 거의 매진되어 2쇄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 후 『성서의 연구』는 한때 2,000부 정도로 발행 부수가 줄어든 일도 있었지만, 만년에는 4천 수백 부로 올라갔고, 우치무라가 별세할 때까지 필생의 중심 사업이 되었다. 우치무라는 이제야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천직을 만난 셈이었다.
『성서의 연구』 발간으로 천직을 발견했으나 우치무라가 진정 원했던 건 직접 전도였다. 우치무라는 1901년 여름부터 『성서의 연구』 독자들을 대상으로 자택 서재에서 성서 강의를 진행했다. 공간 문제로 수용 인원은 25명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나 한 독지가 등장하여 성서연구회 공간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도쿄독립잡지』의 애독자로 오사카의 향료상(香料商)였던 이마이 구스타로(今井傽太郞)의 미망인이 우치무라를 위해 기부한 돈으로 1908년 이마이칸(今井館)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마이칸은 이후 무교회 기독교의 본거지가 되는 건물이 되었다.
1909년 가을에는 성서연구회의 성격에 변화를 가져다줄 일단의 회원들이 입회했다. 도쿄영어학교 시절부터 우치무라의 절친이었던 니토베 이나조는 당시 제일고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의 지도로 독서회 그룹을 형성하고 있던 학생들이 니토베의 소개장을 들고 우치무라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니토베의 독서회에는 일고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해서 도쿄대학이나 교토대학에 진학한 학생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도쿄대학 법학부 출신이 많았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 문부대신이 4명이나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불경사건’으로 한때 일본 교육계에서 가장 위험시되고 기피되었던 우치무라의 문하에서 패전 후 국가 교육의 최고책임자가 이렇게 많이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쓰카모토 도라지(塚本虎二), 구로사키 고키치(黑崎幸吉), 후지이 다케시(藤井武) 등도 이 무렵에 우치무라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의 모임은 가시와키회(栢會)로 불렸다.
가시와키회에 속한 사람들은 우치무라의 제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취직이나 다른 일로 니토베의 신세를 지는 기회가 자주 있어서 니토베를 일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은 우치무라와 니토베 두 사람을 같이 인생의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우치무라가 인생의 ‘아버지’라면 니토베는 인생의 ‘어머니’였다. 이렇게 약간 유형을 달리하는 두 스승의 인도를 받은 것이 그 청년들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룻의 죽음
우치무라는 ‘불경사건’ 후 재혼한 시즈와의 사이에 남매를 두었다. 1892년에 태어난 딸 룻과 1897년 태어난 유시였다. 이름을 룻이라고 한 것은 구약성서의 룻기에서 따온 것이다. 룻은 외모가 부친 우치무라와 아주 닮은 꼴이었고, 그래선지 우치무라도 룻을 몹시 사랑했다. 그런데 1911년 여학교를 졸업한 봄에 갑자기 병상에 눕는 일이 거듭되었다. 아마도 결핵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치무라는 딸의 병구완을 하느라고 성서 강의를 제대로 준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해를 넘기고 1912년 1월에 나온 『성서의 연구』에는 부활, 내세, 희망이 여러 차례 언급되고, 죽음은 ‘생명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단언하는 말이 나온다. 우치무라는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일 뿐”(누가복음 8장 52절)이라는 상경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아무리 우치무라라 해도 자식을 가진 어버이였다. 자식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러나 룻은 기도의 보람도 없이 1912년 1월 12일 숨을 거두었다.
임종하기 3시간 전에 우치무라는 룻에게 세례를 주고 성찬을 받게 했다. 병으로 여윈 손으로 잔을 받아 마신 룻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분명한 목소리로 ‘감사, 감사’를 되풀이했다. 룻은 임종의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젠 갑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우치무라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영혼 불멸은 명백히 증명되었다”라고 썼다.
1월 13일에 치러진 룻의 장례식을 우치무라는 영원한 이별로 보지 않고, 룻을 천국으로 시집보내는 결혼식이라고 했다. 성서연구회에 출석하기 시작해서 얼마 되지 않은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처음 참석한 기독교 장례식에서 이 말을 듣고 놀랐다. 더구나 묘지에서 매장 예식을 치를 때 우치무라가 관에 뿌릴 흙을 쥐고는 그 손을 높이 쳐들고 “룻 만세”라고 절규하는 것을 보고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선 채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들어가는 것이 대단한 일이로구나 하고 긴장감을 느꼈다. 당시 19살 청년이었던 야나이하라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사건이다.
룻의 죽음은 우치무라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나, 신앙적으로는 영생, 내세, 부활이라고 하는 세계의 실재감을 한층 깊게 해주었다.
재림신앙
우치무라가 후반생에 힘을 쏟은 최대의 운동은 1918년에 시작한 재림운동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시작한 전쟁은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교전국들은 하나같이 소위 기독교 국가였다. 우치무라는 비전(非戰)을 주장하는가 안 하는가가 종교의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시금석이라고 주장했다. 전쟁을 벌이는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는 모두 허위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즈음하여 우치무라에게 현저히 나타나는 사상은 ‘근대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근대인에 대한 우치무라의 정의는 이렇다.
‘근대인’은 자기중심의 인간이다. 자기의 발달, 자기의 수양, 자기의 실현과 자기, 자기, 자기, 무엇이든 다 자기다. (「근대인」)
우치무라는 근대인은 자아는 발달해 있지만,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근대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을 ‘근대문명’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인류의 최선, 이것을 가리켜 문명이라고 한다. 정치, 경제, 생산, 공업이라는 것. 그리고 그 귀결은 전쟁이다. 국민은 문명이 발달한다고 하면서 실은 열심히 전쟁 준비를 하는 데 불과하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노동의 결과는 모두 이와 같다. 대포 연기 속에 사라져 버린다. 문명을 최선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헛수고라고 해야 한다. 문명은 사람을 속이는 사막의 신기루에 불과하다. (「문명=포연」)
우치무라는 인류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자신의 지혜와 힘에 의지해서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문명’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것이 근대문명의 특징이며, 그 근대문명이 낳은 ‘응석받이’가 ‘근대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는 문명은 자기중심의 ‘근대인’을 기르고, 자기중심적인 ‘근대인’은 국토 확장의 야심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전쟁은 하나님이 없는 인간주의 문명의 소산이었다.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일은 기독교 국가 미국에 의한 평화 회복의 희망마저 완전히 깨버렸다. 인류 역사가 호전되기를 바랄 수는 없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가 바뀌려면 그 역사가 질적으로 바뀌는 때를 기다려야 했다. 역사의 질적인 변화는 예수가 다시 한번 인간의 세상에 강림함으로써 시작된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그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치무라의 믿음이었다.
재림운동
1917년 10월 31일,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우치무라는 종교개혁 400주년 기념강연회를 열었다. 집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우치무라는 일본에도 종교개혁의 때가 오고 있다고 느꼈고, 이를 위해 일어설 때라는 각오를 다졌다. 1918년 1월 6일 우치무라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림운동의 막을 올렸다. 그날 우치무라의 강연 제목은 「성서 연구자의 측면에서 본 예수의 재림」이었다. 우치무라는 교회를 위시한 평화주의자나 사회주의자의 노력으로는 지상에 평화가 오지 않으며, 그 사업을 완성하는 이는 예수라는 것, 진실로 이것이야말로 성서의 중심적 진리라는 것이었다. 성서를 재림의 희망을 보여주는 책으로 읽을 때 성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약동한다고 했다.
우치무라의 신앙 생애에는 세 단계가 있었다.
제1단계는 삿포로농학교에서의 입신이고, 그것은 예수의 품으로의 초대였다.
제2단계는 애머스트대학에서의 회심이었다. 속죄신앙으로 죄에서 해방된 것이다.
제3단계는 재림신앙이다. 죄로부터 해방은 되었지만, 아직 세상에 그 영광은 찾아오지 않았고, 예수의 재림에 의해서만 우주의 완성이 가능하다는 소망을 갖게 된다. 우치무라는 이제 현세를 인간의 행위로 궁극적으로 개량할 수 있다는 사상과 완전히 단절했다. 이 단계에서 우치무라의 마음속에 작으나마 남아있던 행위주의의 요소가 온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우치무라는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인도하는 인간에 의해 어쩌면 현세가 개량되고 평화가 도래하는 영광스러운 상태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인간은, 설령 그가 하나님의 도구로 일한 것에 불과했어도 그 사람에게 영광이 나타날 수 있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재림신앙의 단계에서는 어떠한 인간이라도 현세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신앙이 깊은 사람일지라도 한 조각의 영광도 나타낼 수가 없다. 현세적 행위는 물론 신앙적 행위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신앙인 것이다. 행위주의의 철저한 부정이다. 우치무라의 재림신앙은 행위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한 인간관 위에서 가장 높고 깊은 곳에 도달했다.
우치무라의 행위주의 부정은 영국 시인 존 밀턴의 「실명(失明)의 노래(On his blindness)」를 떠올리게 한다. 한창나이에 시력을 잃고 자신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쓸 수 없음을 한탄했던 밀턴은 행위주의의 부질없음을 깨우친다. 그리고 절대자 앞에 묵묵히 견디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밀턴 역시 예수의 재림과 천년왕국을 대망한 청교도였다. (게다가 밀턴은 우치무라가 존경했던 올리버 크롬웰의 혁명정부에서 10년간 외교부 장관을 맡으면서 전 유럽을 상대로 잉글랜드 공화국의 대의를 옹호하고 천명한 종교개혁가이기도 했다.)
내가 이제는 앞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니
이 어둡고 넓은 세상에서 내가 살날의 반도 아직 지나지 않았구나.
그리고 숨겨두면 죽고 마는 한 재능이
나와 함께 쓸모없이 머물고 있다. 나의 영혼은
그 재능으로써 창조주를 섬기기를 열망한다.
그분이 돌아와 나의 삶을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은 내가 앞을 못 보게 하시고는 낮의 노동을 강요하시는가?”
나는 어리석게 묻는다. 그러나 인내는
나의 불평을 막으며 이내 대답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나 재능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의 순한 멍에를 가장 잘 견디는 자가 그분을 가장 잘 섬기는 것. 그분의 나라는
장엄하도다. 천 천의 천사들이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육지와 대양으로 쉼 없이 내달리고 명령을 전하거니와,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다.”
밀턴은 인생의 한창때인 44살 나이에 앞을 못 보게 된 것을 생각하며 불평하고 있다. 그것은 육체적인 것 이상 영적인 죽음까지 의미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을 인용해, 달란트 곧 그의 문학적 재능이 시력 상실과 더불어 땅에 묻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에 괴롭고 슬프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나를 앞 못 보게 하시고는 낮의 노동을 강요하시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 ‘낮의 노동’이란 밀턴이 가진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절망 속에서 절규하며 하나님 앞에 항의한다. 이때의 밀턴은 구약성서의 욥과도 같다.
그러나 이때 그의 내면에서 음성이 들린다.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요, 암흑의 심연에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재능이나 업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로 행위나 업적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보증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자 앞에서 피조물이 이뤄야 얼마나 이루겠는가.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나 업적 아닌 믿음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각자에게 주어진 순한 멍에를 잘 견디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