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사)우리 역사학당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솔뫼님의 문화재탐사 스크랩 왕의 남자 사실과 허구 사이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95 14.07.28 14: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왕의 남자 사실과 허구 사이

 

 

 

 

<왕의 남자>가 궁금하다

 

영화 <왕의 남자>가 예상치 못한 흥행 돌풍을 일으켜, 한국 영화의 흥행 신화를 다시 썼습니다. 연희(演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연희를 소재로 한 영화의 대중적 흥행은 다소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작 ‘이(爾)’가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을 때에도, 탄탄한 구성을 지닌 이 연극이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연극과는 다른 영화적 각색이 있었고, 진정한 광대 감우성, 카리스마 연산 정진영, 오묘한 여성적 매력의 이준기 등 배우의 연기력이 한 몫 했음은 당연하겠지만…

 

이 글은 전적으로 같이 일하는 동료의 지극히 평범한 물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느 날 이 영화를 보고 온 친구가, 그래도 명색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다는 저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진짜 그렇게 왕 앞에서 공연할 수 있었어? 아니, 왕의 면전에서 왕을 풍자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 경극을 했던 거야? 정말 궁 안에 놀이꾼이 살았어? 매번 크게 인기를 얻는 사극에 있어 - 작년 한해를 풍미했던 <불멸의 이순신> 역시 그러하지 않았든가 - 단골처럼 등장하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공방’은 어쩌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작(創作)의 산물이므로… 
 
그러나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느 부분은 허구인지 궁금해 하는 것 또한 호기심 많은 이들로선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이 글은 그러한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물론 저의 공부가 짧아 이러한 물음을 속 시원히 풀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혹 글이 궁금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할 지라도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길…

 

그럼, 들어가기 전에 공길과 장생의 기록을 잠깐 보면

 

 

 

아참! 영화 속 공길과 장생의 은밀한 관계, 작가님의 상상이라는 건 익히 알고 계시죠? 
 


궁금증 하나, 천민이 감히 왕 앞에서 공연하다니

 

광대, 즉 배우들은 사회의 최하층 천민집단이었습니다. 수척(水尺)-후에 백정-과 무계(巫界) 등이 그들인데, 이렇게 최하층의 천민집단이 과연 왕의 면전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궁에서는 섣달 그믐날 밤에 나례(儺禮)를 했는데, 나례란 궁중에서 하는 액막이 행사를 말합니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 기원전 770~기원전475) 이전부터 행해지던 귀신과 역병을 몰아내고, 복을 구하며 재앙을 떨치는 세시 무속의식이, 한대 이후로 들어서 규모가 커지고 예절과 의식의 요소가 증가하면서 ‘나의(儺儀)’ 혹은 ‘나례(儺禮)’라 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나례는 궁중에서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완전한 의례로 형성되어 송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후대로 갈수록 신비하고 장중한 의식적 성격이 약화되고 대신 가무와 오락적인 면이 강화되는 현상을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례에 대한 첫 기록은 고려시대 정종(靖宗) 6년(1040) 중국의 궁중나례가 고려의 궁중나례에 수입되었다는 것인데, 이미 그 이전에 들어왔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주문(呪文)을 외면서 귀신을 쫓는 구역(驅疫)의식보다 잡희의 비중이 커지면서 나례희, 즉 나희(儺戱)로 인식되어 갔는데, 이는 나례가 쓰인 여러 가지 용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즉 나례[나희(儺戱)]는 종합적인 오락연희물의 대명사로 쓰인 것입니다.
 
나례와 관련해서 관나(觀儺), 설나(設儺), 구나(驅儺)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들이 지칭하는 행사는 그 내용이 달랐습니다. 구나는 본래적 의미의 나례인 역귀를 쫓는 의식을 말하며, 관나와 설나는 순전히 공연 오락물로서, 관나는 임금이 배우들의 놀이를 구경하는 공식적인 오락행사를, 설나는 중요한 행차를 환영하고 칭송하기 위한 의전적인 행사를 지칭합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왕이 보는 연희의 형태는 바로 관나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사료는 관나가 정치적인 이유로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관나는 임금이 ‘정사의 잘잘못이나 풍속이 좋은가 나쁜가를 알기 위해’ 공식적으로 벌이는 행사인 것입니다. 이 때에는 12면으로 된 나무막대기를 던져 승부를 가리는 윤목희(輪木戱)를 하거나 운자를 내어 시를 지어 상벌을 주는 등 임금과 신하 간의 격식 없는 친목 도모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대비나 초청받은 내외의 부인까지도 이러한 놀이를 구경했습니다. 물론 이들 부녀자들은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과 조금 떨어진 장소나 협실에 발을 치고선 말입니다.
 
그러나 사관의 우려에서도 보이듯 이러한 정치적 기능보다는 놀이적 성격이 강화되어 본뜻을 잃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관나를 할 때마다 배우의 희롱에 지나지 않는 나례를 열지 말자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정작 관나를 하기로 하면 왕과 신하들을 공식적인 관람객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민간의 예능인들은 임금과 가장 가까이 가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관나에는 서울에 사는 연희자와 경기도의 재인들인 경중우인(京中優人)이 참가하였는데, 이들을 관나재인(觀儺才人)이라고 불렀습니다.

 

 

궁금증 둘, 왕의 풍자 가능한 일인가

 

왕의 앞에서 정치시사적인 내용의 놀이를 하는 관나는 흡사 정치 풍자 코미디를 연상시킵니다. 이슈화 되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를 조롱하고 풍자함으로써, 날카롭게 사건의 핵심을 찌르는 코미디 말입니다.
<왕의 남자>에 등장하는 공길 같은 배우는 다른 왕의 재위 시절에도 존재했습니다. 사료에 등장하는 광대가 공길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전 함북간(咸北間)이나 명종 시절의 귀석(貴石) 역시 유명한 배우였으며, 연산군 시절에는 공길 외에 공결(孔潔)이라는 배우도 있었습니다.
 
우희가 어떤 내용으로 공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조금 남아 있는데, 이를 보면 임금 자신이나 조정 대신들까지 논란거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나의 표면적인 이유가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되었고, 실제로 이들 우희를 보고 잘못을 바로 잡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습니다. 물론 우희의 골계, 풍자와 해학은 관객층이 이를 용인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가능한 것이었기에, 자신을 풍자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왕은 자신을 조롱하는 내용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이들에게 큰 벌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공길은 영화에서는 그렇지 않았으나 실상은, 연산군을 비판하는 우희로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고, 공결 역시도 곤장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다음은 연산군 시대의 또 다른 배우 공결이 연산군을 풍자하는 기록입니다.

 

 

삼강령과 팔조목은 《대학》에서 밝히고 있는 학문의 목적과 방법으로, 명명덕(明明德)·친민(親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 삼강령이요, 평천하(平天下)·치국(治國)·제가(齊家)·수신(修身)·정심(正心)·성의(誠意)·치지(致知)·격물(格物)이 팔조목입니다. 이를 들어 자신을 풍자하니 연산군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곤장을 치라 명하고, 옆의 신하들은 그저 배우의 역할을 다한 것이니 그를 탓할 수 없다 한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경우 그 대상이 왕이 아니라 탐관오리의 부패와 횡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노유희(老儒戱), 즉 양반[儒者]를 조롱거리로 삼는 연희는 가장 중요한 우희입니다. 현존하는 여러 가면극, 특히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는 봉산탈춤의 양반과장에서 우리는 양반을 통렬하게 비판하며 한낱 조롱거리로 전락시키는 내용은 익히 들어 알고 계실 겁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이나 어숙권(魚叔權, 생몰년 미상 1500년대)의 『패관잡기』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 야담(野談)을 수록한 책이며, 마지막 『지양만록』은 조선 태조에서 정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엮은 사서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우희는 수령이 국가 중요 행사에 소용되는 물품을 진상하는 공식적인 의무보다는 사사로운 뇌물에 더욱 신경을 쓰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고, 두 번째는 공금을 개인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공금횡령에 대한 내용이며, 세 번째는 고위직 인사의 인사 청탁에 대한 내용입니다. ‘진봉색리(進奉色吏)’는 진상품을 조달하던 말단 이속을 말하며, ‘도목정사(都目政事)’란 해마다 음력 유월과 섣달에 벼슬아치의 근무 성적이나 공과(功過) 유무에 따라 벼슬을 떼거나 올리던 일을 말합니다. 이들 우희는 지금 우리가 거의 매일 접하다시피 하는 신문기사와 비슷하니, 지금까지도 유효한 내용임에 틀림없겠죠?

 

 

궁금증 셋,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경극이?

 

 

 

이 영화에서는 짧지만, 다양한 종류의 연희가 펼쳐집니다. 줄타기, 방울받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그리고 그림자와 손가락 인형극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놀이를‘산악·백희(散樂·百戱)’라고 하는데, 명절마다 텔레비전에서 꼭 한번은 방영해주는 서커스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곡예, 기예, 놀이, 연극의 총칭인 산악백희는 줄타기, 땅재주, 솟대타기, 방울받기, 칼받기, 칼 삼키기, 나무다리걷기, 환술, 동물 재주 부리기, 배우의 골계희, 괴뢰희(인형극) 등 매우 다양합니다. 이들 산악 ·백희를 글이 아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고구려 고분 벽화나 중국 한(漢)나라 화상석(畵像石), 그리고 일본의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 등이 있는데요, 화상석이란 돌로 만든 무덤이나 사당의 벽면, 기둥 등에 새겨진 조각을 말합니다.

 

산악·백희가 동아시아 연극의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모태로 작용했음은 이미 각국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유산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듯 각기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연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경제력을 갖춘 막강한 후원자가 있어 무대양식으로서 발전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민간예술차원에서 연행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패왕별희>로 대중에게 친숙해진 중국의 경극이며, 일본에는 노오(能), 교겐(狂言)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경극은 불 토해내기, 물구나무서기, 공중제비, 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는 유술(柔術), 창칼 재주부리기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연희가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 탄생된 양식화된 무대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 교류는 현재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최근 신라를 가리켜 로마문화왕국이라 지칭하는 책까지 출간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경극이 놀아졌을까요? 아쉽게도 현재 기록으로는 조선과 명·청의 연희문화 교류 양상에 대해 정확하게 확인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조선은 유교로 통치되는 국가였으며 경박스럽고 천한 연희가 기록조차 되지 않았으므로, 궁중에서 행해진 연희의 전모를 조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교훈적인 내용이나 연희를 금하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고는 기록조차 될 수 없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으며, 그나마도 연희 자체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술뿐입니다. 더불어 궁중 연희에 대한 연구는 그간 연희의 민중성, 80년대 탈춤에 있어 민중의식의 성장이라는 다소 편향된 시각 때문에, 많은 연구가 축적되지 못한 점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다만 경극이 18세기 들어 안휘성(安徽省) 출신의 극단을 중심으로 북경에서 형성되었으므로, 연산군의 재위 시절인 15세기 말~16세기 초에는 경극 자체가 없었다는 사실만은 확실합니다.

 

 

궁금증 넷, 궁궐에 놀이꾼이 살았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강력한 후원자, 특히 지배층들의 후원이 연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연희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국가기관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 지원은 막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경중우인(京中優人)이라 하여 궁궐에서 호출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설나처럼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재인들을 불러 모았구요.
 
<왕의 남자>에서 공길과 장생이 마지막이라 약속한 연희, 그리고 연산의 광기를 폭발시킨 문제의 공연은 책의 내용을 공연으로 옮겨 연습한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러한 자극적인 내용의 연희는 불가능했겠지만, 특정한 목적을 위해 연희의 주제를 선택하고 연습을 통해 연행되었던 과정은 다음 사료를 통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빈풍 칠월(?風七月)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주(周)나라의 무왕이 죽고 나서 어린 성왕(成王)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당시 섭정(攝政)으로 있던 주공(周公)이 지은 시를 말합니다. 내용은 농사의 시기에 대한 것을 서술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그림으로 그려 경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가 칠월에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서쪽으로 흐르거든[七月流火]으로 시작해서, 십이월에 얼음을 떠서[二之日鑿氷沖沖]에서 끝이 나므로, 이를 모두 연희로 각색하여 연습을 시키라는 분부인 것입니다.
 
다른 사료에서는 나례를 앞두고 2개월 동안 연습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또한 연희가 배우의 개인기만으로 이루어진 즉석 공연이 아니라, 일정한 연습 기간을 필요로 했으며 대본 및 배우에 관한 일정한 교육이나 정책적인 배려가 더해진 사실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탐구 없이는 불가능 했던 일

 

성공을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하라! <왕의 남자>의 흥행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영화가 노력 없이 만들어졌겠냐마는, 잊혀지고 덮여진 사실을 파헤쳐온 이 분야 연구자들과, 사실과 사실의 빈 자리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극작가, 또한 영화적 각색을 통해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낸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그저 전적으로 감독의 상상력에 의지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에게, 앞으로 이 분야를 공부할 사람으로서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소외된 연희문화를 연구한 선학의 연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쓴 <왕의 남자> 또한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 어떻게… 궁금증은 좀 풀리셨는지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 학예연구사 김은영

 

 

************************************************** (블로그/문화재청)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