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사실과 허구 사이
<왕의 남자>가 궁금하다
영화 <왕의 남자>가 예상치 못한 흥행 돌풍을 일으켜, 한국 영화의 흥행 신화를 다시 썼습니다. 연희(演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연희를 소재로 한 영화의 대중적 흥행은 다소 어리둥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원작 ‘이(爾)’가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을 때에도, 탄탄한 구성을 지닌 이 연극이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에도 이렇게까지 대중적인 인기를 끌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연극과는 다른 영화적 각색이 있었고, 진정한 광대 감우성, 카리스마 연산 정진영, 오묘한 여성적 매력의 이준기 등 배우의 연기력이 한 몫 했음은 당연하겠지만…
이 글은 전적으로 같이 일하는 동료의 지극히 평범한 물음에서 출발했습니다.
어느 날 이 영화를 보고 온 친구가, 그래도 명색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다는
저에게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습니다. 진짜 그렇게 왕 앞에서 공연할 수 있었어? 아니, 왕의 면전에서 왕을 풍자할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에서
경극을 했던 거야? 정말 궁 안에 놀이꾼이 살았어? 매번 크게 인기를 얻는 사극에 있어 - 작년 한해를 풍미했던 <불멸의 이순신>
역시 그러하지 않았든가 - 단골처럼 등장하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공방’은 어쩌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창작(創作)의 산물이므로…
그럼, 들어가기 전에 공길과 장생의 기록을 잠깐 보면
아참! 영화 속 공길과 장생의 은밀한 관계, 작가님의 상상이라는 건 익히 알고
계시죠?
광대, 즉 배우들은 사회의 최하층 천민집단이었습니다. 수척(水尺)-후에 백정-과
무계(巫界) 등이 그들인데, 이렇게 최하층의 천민집단이 과연 왕의 면전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이후 나례는 궁중에서 정기적으로 거행하는 완전한 의례로 형성되어 송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후대로 갈수록 신비하고 장중한 의식적 성격이 약화되고 대신 가무와 오락적인 면이 강화되는 현상을 보입니다.
관나는 임금이 ‘정사의 잘잘못이나 풍속이 좋은가 나쁜가를 알기 위해’ 공식적으로 벌이는
행사인 것입니다. 이 때에는 12면으로 된 나무막대기를 던져 승부를 가리는 윤목희(輪木戱)를 하거나 운자를 내어 시를 지어 상벌을 주는 등
임금과 신하 간의 격식 없는 친목 도모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대비나 초청받은 내외의 부인까지도 이러한 놀이를 구경했습니다. 물론 이들
부녀자들은 놀이가 벌어지는 공간과 조금 떨어진 장소나 협실에 발을 치고선 말입니다.
궁금증 둘, 왕의 풍자 가능한 일인가
왕의 앞에서 정치시사적인 내용의 놀이를 하는 관나는 흡사 정치 풍자 코미디를 연상시킵니다.
이슈화 되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를 조롱하고 풍자함으로써, 날카롭게 사건의 핵심을 찌르는 코미디 말입니다.
삼강령과 팔조목은 《대학》에서 밝히고 있는 학문의 목적과 방법으로,
명명덕(明明德)·친민(親民)·지어지선(止於至善)이 삼강령이요,
평천하(平天下)·치국(治國)·제가(齊家)·수신(修身)·정심(正心)·성의(誠意)·치지(致知)·격물(格物)이 팔조목입니다. 이를 들어 자신을
풍자하니 연산군은 참지 못하고 그에게 곤장을 치라 명하고, 옆의 신하들은 그저 배우의 역할을 다한 것이니 그를 탓할 수 없다 한 것입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이나 어숙권(魚叔權, 생몰년 미상
1500년대)의 『패관잡기』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해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인 야담(野談)을 수록한 책이며, 마지막 『지양만록』은
조선 태조에서 정조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엮은 사서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보입니다.
궁금증 셋,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의 경극이?
이 영화에서는 짧지만, 다양한 종류의 연희가 펼쳐집니다. 줄타기, 방울받기, 땅재주, 접시돌리기, 그리고 그림자와 손가락 인형극 등이 그것입니다. 이들 놀이를‘산악·백희(散樂·百戱)’라고 하는데, 명절마다 텔레비전에서 꼭 한번은 방영해주는 서커스 공연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곡예, 기예, 놀이, 연극의 총칭인 산악백희는 줄타기, 땅재주, 솟대타기, 방울받기, 칼받기, 칼 삼키기, 나무다리걷기, 환술, 동물 재주 부리기, 배우의 골계희, 괴뢰희(인형극) 등 매우 다양합니다. 이들 산악 ·백희를 글이 아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고구려 고분 벽화나 중국 한(漢)나라 화상석(畵像石), 그리고 일본의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 등이 있는데요, 화상석이란 돌로 만든 무덤이나 사당의 벽면, 기둥 등에 새겨진 조각을 말합니다.
산악·백희가 동아시아 연극의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모태로 작용했음은 이미 각국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유산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듯 각기 다른 문화적 토양 위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데, 연희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경제력을 갖춘 막강한 후원자가 있어 무대양식으로서 발전하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민간예술차원에서 연행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 <패왕별희>로 대중에게 친숙해진
중국의 경극이며, 일본에는 노오(能), 교겐(狂言) 등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경극은 불 토해내기, 물구나무서기, 공중제비, 몸을
자유자재로 구부리는 유술(柔術), 창칼 재주부리기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연희가 거대한 용광로에 녹아 탄생된 양식화된 무대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교훈적인 내용이나 연희를 금하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고는
기록조차 될 수 없는 것이 당시 상황이었으며, 그나마도 연희 자체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술뿐입니다. 더불어 궁중 연희에 대한 연구는 그간 연희의
민중성, 80년대 탈춤에 있어 민중의식의 성장이라는 다소 편향된 시각 때문에, 많은 연구가 축적되지 못한 점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궁금증 넷, 궁궐에 놀이꾼이 살았다?
중국과 일본의 경우 강력한 후원자, 특히 지배층들의 후원이 연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말은 이미 했습니다. 연희자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국가기관이 있었을 정도이니, 그 지원은 막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경중우인(京中優人)이라 하여 궁궐에서 호출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설나처럼 많은 인원이 필요한 경우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재인들을 불러 모았구요.
빈풍 칠월(?風七月)은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으로,
주(周)나라의 무왕이 죽고 나서 어린 성왕(成王)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당시 섭정(攝政)으로 있던 주공(周公)이 지은 시를 말합니다.
내용은 농사의 시기에 대한 것을 서술하였는데, 후세에 이를 그림으로 그려 경계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이 시가 칠월에 대화심성(大火心星)이
서쪽으로 흐르거든[七月流火]으로 시작해서, 십이월에 얼음을 떠서[二之日鑿氷沖沖]에서 끝이 나므로, 이를 모두 연희로 각색하여 연습을 시키라는
분부인 것입니다.
진리탐구 없이는 불가능 했던 일
성공을 위해서는 기본에 충실하라! <왕의 남자>의 흥행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느 영화가 노력 없이 만들어졌겠냐마는, 잊혀지고 덮여진 사실을 파헤쳐온 이 분야 연구자들과, 사실과 사실의 빈
자리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생명을 불어넣은 극작가, 또한 영화적 각색을 통해 또 다른 창작물을 만들어낸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그저 전적으로 감독의 상상력에 의지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에게, 앞으로 이 분야를 공부할 사람으로서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소외된 연희문화를 연구한 선학의 연구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쓴 <왕의 남자> 또한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 어떻게… 궁금증은 좀 풀리셨는지요. 국립고궁박물관 전시홍보과 학예연구사 김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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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원문보기 글쓴이: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