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현 수필가 겸 시인의 네 번째 산문집 『봄, 불가능이 기르는 한때』가 <푸른사상 산문선 30>으로 출간되었다. 일상과 자연과 주변 사물들을 예민한 감각과 허무주의적이면서도 심오한 사유를 토대로 담백하고도 섬세한 문체로 그려냈다. 문장 사이사이 배어나오는 저자 특유의 무덤덤한 유머와 사투리 말씨는 독자들에게 재미는 물론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 2020년 2월 5일 간행.
■ 저자 소개
1966년 대전에서 태어나 보문고등학교와 서강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산문집으로 『충청도의 힘』 『슬픔을 권함』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등이, 시집으로 『유랑』이 있다. 2013~2014년 『중앙일보』에 칼럼 「남덕현의 귀촌일기」를 연재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세계가 불완전하게 감각될 뿐,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을 때 비로소 사유가 시작된다.
까닭을 모르고 넘어질 때에만 ‘넘어짐’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고, 까닭 없이 눈물이 흐를 때에만‘슬픔’에 대한 사유가 시작되며, 까닭 없이 한숨이 나올 때에만 ‘허무’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그래서 이 세계는 나에게 ‘앎’을 요구하지만 동시에 ‘모름’을 요구한다.
이 세계는 나에게 통찰을 요구하지만 끝내 통찰할 수 없는 세계이며, 결국 통찰되어서는 안 되는 모순의 세계다.
모순의 세계는 신이 형벌처럼 던진 대답 불가능의 질문이기도 하고, 스스로 자초한 자학이기도 하다. 형벌이든 자학이든 분명한 것은, 그 모순의 세계 속에 사물의 세계가 있고 그 사물의 세계가 배양하는 상념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물의 세계를 산책하며 상념을 배양하는 일이 나는 무척이나 행복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자학의 기록이자 행복의 기록이다.
■ 책 속으로
피기는 하였으나 아직 향이 어린데, 그래도 꽃이라고 바람 따라 진다.
꽃잎은 어찌나 얇은지 통째로 바람에 질망정 둘로 갈라지지 않고, 거미줄은 어찌나 가는지 허공에 날려도 토막 나지 않는다.
갈라지고 끊어질 면적과 두께가 없는 불가능한 것들이 지천인 봄, 봄은 불가능의 세계가 기르는 한때다.
나는 봄이 기르는 불가능의 꿈에 젖어 골목을 걷는다.
골목 끝에서 끈 풀린 조막만 한 강아지 한 마리가 전력으로 달려오고, 나는 엉겁결에 주저앉아 맞을 채비를 하며 생각한다.
아, 저놈이 코뿔소였으면!
전력으로 달려와 무릎 꿇고 기다리는 내 가슴에 뿔을 박아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한다.
뿔을 박고 한참이나 씩씩거리면서, 내 갈빗대를 부수고 심장까지 깊숙이 뿔을 박아주면 어찌 아니 좋으랴 생각한다.
겨우내 얼어버린 심장이 뚫리고 내 가슴이 다시 온통 더운 피에 젖어 상념이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한다.
봄이 코뿔소처럼 달려와 내 심장에 뿔을 받으면 더할 나위 없겠노라 생각한다.
아이는 어디를 만져도 그곳이 아이의 전부이듯, 내 어디를 만져도 그곳이 봄의 전부였으면 좋겠노라 생각한다.
아직은 봄바람이 겨울바람 위에 기름 막처럼 흐느적거리며 굳다가 녹고, 녹다가 다시 굳는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아침에 짜 주시던 염소젖, 딱 그 기름막이다.
바람에서 염소젖 냄새가 난다.
그 고소하고 비릿한 냄새가 봄의 말초신경을 건드려, 봄의 따뜻한 혀가 난폭하게 내 혀를 휘감아 뽑아내 버렸으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불가능의 봄」(140~141쪽)
■ 추천인의 글
사막의 봉쇄 수도원에서 쓴 것 같은 이 책은 아주 위험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갈피에 독약을 묻혀 독자들이 죽어가는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처럼 이 책에도 페이지마다 ‘허무의 독약’이 묻어 있어 치명적이다.
아무래도 이 세상은 진실 같은 건 원치 않는 눈치고 남덕현 시인은 처음부터 진실 같은 건 존재할 리 없다는 듯 사물의 세계를 떠돈다.
시인은 기를 쓰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시적 언어를 얻고도 매몰차게 사다리를 걷어차지 못한다. 낯선 타향을 배회하듯 시의 세계를 어슬렁거리다 다시 사다리를 타고 비루한 세계로 내려오고야 마는 시인의 운명은 처연하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때 읽으면 정말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허무에 지독하게 허기진 글이다. 행간마다 시의 뼛가루가 풀풀 날린다. 이번 생도 아닌 것처럼 다른 생도 아니다. 남덕현 시인은 길을 가다가 문득 연기로 변할 것 같은 시인이다. 그런 자연연소를 꿈꾸는 시인의 영혼에 촘촘히 박힌 가시가 나를 찌른다. 오늘 조문 갈 상갓집 점심은 ‘육개장이 짤 것’ 같다.
― 이산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