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0회 지혜서 1장-9장
라틴 전통에서 “지혜서”라고 불리는 이 책은 직접 그리스어로 작성되었고 칠십인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졌다.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작품의 통일성은 문학적 구조에 의해서도 입증될 수 있다. 또 그 문학적 구조에 따라 이 책의 문학 유형을 결정지을 수 있는데, 문학 유형은 전형적인 그리스·로마적 유형인 찬가(Elogium)에 속한다.
지혜서는 구약성경의 지혜문학에 속하는 문헌들 가운데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쓰여진 작품으로, 이스라엘 지혜 사상의 매우 발전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의 불사불멸’ 사상을 통해 전통적 지혜사상의 주요 원리인 ‘상선벌악’에 입각해서는 해명될 수 없었던 현실적인 부조리, 즉 현세에서 악인이 누리는 행복과 불행한 의인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의인화된 지혜의 특성과 본질 그리고 역할에 대한 지혜서의 내용은 기존의 지혜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될 하느님 은혜의 활동을 예시하고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혜서의 내용은 언제 누구에 의해 형성되고 최종 편집되었을까?
지혜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 디아스포라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인용되고 전수되지만 그 배경은 완전히 유다교적이며, 특히 이집트 탈출을 회상할 때에 무수히 이집트를 암시한다는 점은(지혜 10,15-19,21) 이 책이 나일 삼각주의 항구 도시에서 엮였음을 생각하게 한다.
구약성경 중에 가장 늦게 기록된 지혜서는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기 시작할 무렵, 장차 아우에티오피아투스 황제가 될 옥타미아누스가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기원전 31년 초 직후에 편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지혜서는 가톨릭교회의 경전에 속한다.
1. 저자와 서술시기
지혜서는 이전에 ‘솔로몬의 지혜’라 불리어졌다. 실상 솔로몬이란 이름이 지혜서 안에 전혀 언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솔로몬이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서술했던 지혜서 저자의 문학적 기법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이스라엘 지혜 전승의 대표적인 인물인 솔로몬 임금의 권위 아래 자신의 사상을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실제 지혜서 저자는 당시 가장 큰 디아스포라, 즉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하나인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어느 무명 유대인이었을 개연성이 가장 높다. 왜냐하면 지혜서에는 창세기, 탈출기, 이사야 예언서, 잠언, 집회서 등 이미 존재하고 있던 성경들에 관한 폭넓은 지식이 사용되고 있고, 동시에 지혜서의 많은 내용들 안에서 헬레니즘의 사상적 영향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와 관련하여 일각에서는 지혜서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기 상이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까닭에 여러 명의 저자에 의해 쓰여졌을 것이란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특징은 저자가 개인 삶의 각기 다른 시기에 가졌던 관심사들이 반영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지혜서 안에 사용되는 표현 방식과 사상적 배경 역시 일관성을 가지는 까닭에 한 사람의 저자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혜서의 최종 편집시기는 내용이나 표현 방식 등을 고려해 볼 때, 구약의 작품들 가운데 신약 시대와 가장 가까운 기원전 50년경에서 로마 황제 아우에티오피아투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던 기원전 30년 사이로 추정되어진다.
2. 지혜서의 구조
지혜서는 크게 3부분(1-5장; 6,1-11;11,5-19,22)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부분은 명확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특히 하느님의 정의와 불멸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1부와 지혜 예찬에 관한 솔로몬의 연설을 담고 있는 2부는 내용상 중앙 집중 구조와 대칭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①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인간의 운명(1-5장)
여기서 저자는 의인의 운명과 악인의 운명을 대조하는 가운데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제시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키도록 가르치고 있다.
② 지혜 찬가(6,1-11,4)
지혜의 특성과 본질 그리고 역할을 핵심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
③ 출이집트 사건에 대한 숙고와 다른 주제들(11,5-19,22)
이 부분에서 저자는 출이집트 사건을 배경으로 이스라엘의 운명과 에집트인들의 운명을 일곱 차례에 걸친 대조를 통해 비교하면서 야훼 신앙의 가치를 옹호하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들을 경계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하느님 자비의 목적’과 ‘우상 숭배에 대한 고발’과 같은 소주제들도 함께 언급되고 있다.
3. 중요한 신학 사상
① 전통적인 하느님 사상의 종합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인 신앙을 토대로 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만드셨으며(2,23), 세상과 인류의 참된 주인으로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특히 어려움 가운데 있는 의인들과 함께 계시는 분(3,1-9)임을 증언하고 있다.
② 의인의 불사불멸 사상
지혜서 첫 번째 단락(1-5장)에서 의인의 불사불멸 사상은 악인과 의인의 운명이 대조되는 가운데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악인들은 비록 세상에서 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들의 옳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실로 말미암아 스스로 죽음에 속한 자들이 되고 만다.(1,16-2,24) 반면 의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불행한 것 같지만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3,4)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아간다.(3,9) 나아가 의인들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인데(5,15), 그들이 누릴 불사불멸은 하느님과 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며 그들이 차지할 몫은 거룩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5,5)
이러한 맥락에서 자식을 낳지 못하여도 정결한 여인은 하느님께서 찾아오실 때 결실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의 덕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3,13-4,6) 또한 하느님 마음에 들어 그분께 사랑 받던 의인은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악이 그의 이성을 변질시키거나 거짓이 그의 영혼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들어올리셨기 때문이다.
결국 영예로운 나이는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으며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라는 새로운 가치가 제시되고 있다.(4,7-19) 이처럼 의인이 누리게 되는 불사불멸은 근원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③ 지혜의 의인화
지혜서는 잠언 1-9장의 전승을 계승하여 의인화된 지혜사상을 발전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먼저 지혜가 가지는 특성들로 명석, 거룩함, 선을 사랑함, 자유로움, 자비, 항구함, 평온함 등이 제시되고 있다.(7,22ㄴ-24) 또한 지혜는 본질적으로 하느님 권능의 숨결,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 영원한 빛의 반영,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 하느님 선하심의 형상이며(7,25-26), 지혜의 역할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고, 거룩한 영혼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들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하는 것이라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지혜의 노고에 따르는 덕으로써 후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사추덕(四樞德)이 제시되고 있는데, ‘절제’, ‘예지’, ‘정의’, ‘용기’가 바로 그것이다.(8,7)
이러한 지혜의 유일한 원천은 하느님이시며(7,15-22ㄱ), 그분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지혜를 얻을 수 없다.(8,21) 따라서 인간은 기도로 지혜를 구해야 하며, 지혜로 인해 하느님의 구원을 받게 된다.(9장)
지혜서의 저자는 이러한 지혜의 구원 능력이 아담으로부터 출이집트사건에 이르는 역사의 흐름 안에서 실제적으로 드러났음을 밝히고 있다.(10,1-11,4)
지혜 1,1-15 주님을 찾고 악을 피하라
1-5장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지혜’라는 점이다. 지혜서는 첫머리에서 말한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1). 지혜서는 ‘주님을 생각하고 순순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이 지혜를 찾는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시험하지 않는 이들을 만나 주시고 당신을 불신하지 않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2). 반대로 당신의 권능을 불신하며 인생을 부정하는 이들에게 당신을 감추신다(3-4).
하느님은 모든 것에 침투하는 지혜의 영을 통해 드러낸다. “6지혜는 다정한 영, 그러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는 그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7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6-7). 하느님은 이미 나쁜 지향을 알고 계시며 이를 죽음으로 벌하실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여 쓸데없이 투덜거리지 말고 비방하지 않도록 혀를 잡도리하여라. 은밀히 하는 말도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고 거짓을 말하는 입은 영혼을 죽인다”(11). 그러나 불의한 것에 대한 징계에 대해 하느님의 계획과는 다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기 때문이다. “13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14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존재하라고 창조하셨으니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고 그 안에 파멸의 독이 없으며 저승의 지배가 지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15 정의는 죽지 않는다”(13-15). 곧 정의가 죽지 않는다는 불멸성은 지혜의 선물이다. 15절에서 정의는 결국 그것을 실천하는 의인들들 뜻한다. 저자는 나중에 의인들이 불사불멸에로 부름을 받았다고 밝힌다.
지혜 1,16-2,24 악인의 생각과 계획에 대한 판결
악인들은 죽음이라는 표지 아래 삶을 영위한다. “악인들은 행실과 말로 죽음을 불러내고 죽음을 친구로 여겨 그것을 열망하며 죽음과 계약을 맺는다. 그들은 죽음에 속한 자들이 되어 마땅하다”(16). 그들의 삶이 초월적인 모든 것에 대한 거부(2,2-9)와 모든 도덕적 가치에 대한 멸시로(2,10-11)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지혜서가 그리는 악인과 의인의 모습을 살펴보자. 2,1-5은 악인들이 생각하는 인간 삶의 기본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악인들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인간 삶에 대한 그들의 철학을 설명한다. 삶은 짧고 슬프다. 삶은 우연에 내맡겨져 있다. 우리의 콧숨은 연기이고 생각은 심장이 뛰면서 생기는 불꽃이다. 인생의 시간은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 실상은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죽음에서 되돌아올 수도 없다. 죽음은 우리를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아숏던 것과 같게 만들 것이다. 우리 육신은 먼지가 되고 우리에게 생기를 주는 숨결은 덧없는 공기 속에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이름도 잊힐 것이고 아무도 우리의 행위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1절에서 “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삶은 짧고 슬프다. 인생이 끝에 다다르면 묘약이 없고 우리가 알기로 저승에서 돌아온 자도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삶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말한다.
아테네 시인 소포클레스(기원전 497-406년)의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작품에 이런 말이 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운명이다. 그 운명에 가까울수록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빠르게 돌아간다.” 삶은 우리의 본래 자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는 것이 그래서 힘들고 어렵고 낯설다. 악인의 삶을 ‘우연한 것’이라고 말한다(2,2). 우연이라는 말은 삶의 근원과 이유 그리고 목적을 배제한다(2,3). 그래서 창조주 하느님도, 그분의 가르침과 지혜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다. 콧숨이 연기라는 말이 이를 더욱 확증한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몸, 뒷날 우리는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우리의 콧숨은 연기일 뿐이며 생각은 심장이 뛰면서 생기는 불꽃일 따름이다”(2). 숨은 창조의 때를 가리키고(창세 2,7), 연기는 삶의 무너짐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시편 102,4). 존재의 시작도 없고, 존재의 이유도 없는 것이 삶이고, 다만 ‘잊힐 것’이 삶이다(2,4). 악인들이 생각하는 삶이란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한평생은 지나가는 그림자이고 우리의 죽음에는 돌아올 길이 없다. 정녕 한번 봉인되면 아무도 되돌아오지 못한다”(5).
지혜서의 악인들은 값비싼 포도주, 향료, 심지어 화관까지 언급하면서 세상의 승리를 노래하지만(2,7-8), 그들이 다다를 곳은 그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악인들이 삶에 대해 가지는 부정적인 생각은 동시대를 사는 이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게 폭력으로 다가서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나가는 행복의 얼마 안 되는 순간들을 최대한 누리고 열정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2,6-9). 호라티우스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붙잡아라”)을 중시했고, 이사야는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이사 22,13)라고 말한다고 했다. 바오로도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말을 다시 인용할 것이다(1코린 15,32).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현재의 쾌락과 방탕함, 장미가 지기 전에 그 향기 속에서 지내는 봄의 축제, 강물과 같은 포도주뿐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생각을 “패배한 개선”이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지혜서는 ‘가난한 의인’을 억누르는 악인들을 언급한다. 악인은 이렇게 외친다. “가난한 의인을 억누르고 과부라고 보아주지 말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라고 존경할 것 없다”(10).
악인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10절-20절에서 그들과 생활양식을 공유하지 않는 모든 이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가난한 의인, 가진 것이 없는 과부, 힘없는 노인은 악인들의 눈에 무익한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힘이 의로움의 척도이다! 그래서 가진 것도 없고 그들의 악한 삶에 동참하려 하지도 않는 이 소외된 이들을 괴롭히기로 결정한다(2,10-11).
게다가 의인은 악인들을 미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마치 사냥감처럼 추격하고 올가미를 놓는다. 의인이 그들의 생활양식을 꾸짖고, 그들이 하느님의 법을 어기고 받았던 교육을 버렸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다(2,12-16).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견딜 수 없다. 의인의 삶이 다른 이들의 삶과 다르기 때문이다. 의인은 그들의 길을 피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 피하며, 그들을 순수하지 않은 이들, 서자들이라고 여긴다. 반대로 그 자신은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고 부른다”(2,13) 가난한 의인들은 악인들에게 ‘성가신’ 존재이다. 악인들의 삶의 방식을 지적하고 나무랐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를 질책하니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짐이 된다”(14).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유신헌법을 반대했던 인물들 가운데 민청학련 사건으로 끌려간 8명은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상소가 기각된 지 20시간도 채 되기 전에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전격적으로 사형 집행을 당했다. 8명 가운데 학원강사였던 이수병 전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죄는 단지 똑똑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짐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형을 받은 것이다.
“그는 우리를 상스러운 자로 여기고 우리의 길을 부정한 것인 양 피한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2,16). 의인은 아직도 악인들과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지만, 그 관계는 긴장된 관계다. 의인은 그들의 행동을 꾸짖을 뿐이고 더구나 악인들이 그들의 담론 첫머리에서 제시한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철저히 반대되는 그의 신앙을 주저 없이 선포하기 때문이다. 율법과 하느님을 아는 지식에 익숙한 의인들의 삶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악인들의 삶과 달랐다. 의인들은 종말을 행복으로 규정하는 반면(2,16), 악인들은 종말을 죽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스러운 자’인 악인들은 주님의 자짓이라 자처하는 의인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비난을 받은 악인들은 그에게 반격하려 한다(2,17-20). 이제 그들은 의인의 말을 받아 그의 주장이 확실한지 확인하려 한다. 그래서 그에게 모욕과 고통을 당하게 하고 그의 항구함과 인내력을, 한마디로 그의 신념의 확고함을 시험할 것이다. 그다음에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선고하여,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그 의인을 하느님께서 구하여 해방하러 오시는지 볼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그를 찾아 오시리라고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의인들은 하느님을 배신하지 않고 하느님은 친히 그들을 방분하시지만, 악인들은 그러한 의인과 하느님의 관계를 부정하고 급기야 죽음으로 그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20). “19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가 정말 온유한지 알 수 있을 것이고 그의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0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19-20).
악인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죽음으로 점철된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악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졌다. 악인들을 죽음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두가이파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사두가이파는 율법과 하느님에 대한 지삭에서 근본주의자이기에 지혜서가 말하는 악인과 거리가 멀다. 어떤 이들은 악인들을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에피쿠로스파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내적 평정을 갖기 위해 과도한 즐거움을 회피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이들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지혜서의 견해와 다르다. 또 어떤 이들은 지혜서의 악인들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유다 전통을 버리고 헬레니즘의 유혹에 빠진 유다인이거나 기원전 1세기에 바리사이파를 박해한 알렉산드르 얀네 임금, 또는 헤로데 임금을 이해했다. 그러나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악인들은 헬레니즘 문화 속에서 과도한 현세적 기쁨을 추구하며 죽음이 끝이 양 살아가는 이들로 이해한다면 큰 무리가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22).
23절에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불멸의 가치를 부여하시는 하느님이 나타난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에게서 주어진다는 생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23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23-24).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다. 하느님의 계획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반면, 사탄과 곧 고발자의 계획은 죽음으로 방향 지어져 있다. 생명과 죽음의 대립이 하느님을 두고 나타나는 의인과 악인의 대립이다. 악인은 죽어가겠지만, 하느님의 계획 안에 머무는 이는 죽지 않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하느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지혜 3,1-12 의인들과 악인들의 운명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며 하느님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의인들은 누구인가? 의인이란 어떤 시대의 누구를 가리킬 수도 있고, 시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율법과 가르침에 순종하는 모든 세대의 신앙인을 말할 수도 있다.
악인들의 말(지혜 2,1-20)과 이에 대한 비판 (지혜 2,21-24)은 이집트에서 박해받을 때 유다인들을 괴롭히던 물음을 제기한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의인들이 악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심지어 살해까지 당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불멸의 삶, 곧 내세에서의 보상에 대한 믿음에서 나타난다. 어리석은 악인들은 의인들을 죽임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소명시켰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들의 믿음은 착각일 뿐이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에, 아무런 고통이 없는 평화 속에 있다. 이 세상에서의 고통은 벌이 아니라, 단지 그들을 시험하고 단련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 곁에서 누리는 행복에 비하면 세상에서의 고통은 아주 가벼운 수련에 불과하다(1-6절).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4-5).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7). 이 의인들의 구원은 그들이 찬란하게 빛날 때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7절). 그리하여 의인들은 민족들을 다스리며 그들의 주인이신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신뢰하였으며, 이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고, 영원히 그분의 사랑 안에서 보호받게 될 것이다(8-9절).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9).
그러나 악인들은 의인들을 무시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사실 때문에 응분의 벌을 받게 될 것이다(10절). 지혜의 가르침을 멸시하는 자들은 악인들의 운명에서 보는 것처럼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이미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실패한 것이다(11절). 이 사실은 악인들이 가정에서도 드러난다. “그 아내들은 어리석고 자식들은 사악하며 후손들은 저주를 받는다.”(12절)
지혜 3,13-4,6 자식 없는 의인과 자식 많은 악인
지혜서의 저자는 구약 성경의 전통적인 견해와는 달리, 불임이나 다산 그 자체에 부정적 또는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자식을 낳지 못하는 여인의 덕성스러운 행동과 자식을 많이 낳은 여인의 악한 행실을 대비시킴으로써, 덕을 기리고 악을 비난할 따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동정성과 혼인을 대비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신앙을 저버림으로써 악인들의 가족들이 당하게 되는 결과에 대한 언급은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을 괴롭히던 두 번째 물음으로 인도한다. 악한 부모들이 많은 자식을 두는 반면에 경건한 부모들이 자식 없이 죽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물음은 당의 종교적, 사회적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은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의 복으로 인정되었다.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그리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수많은 후손이 약속되었다. 반면, 후손이 없는 것은 큰 수치로 하느님의 벌이라 여겼다. 또한 순전히 사회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도 자녀들, 특히 아들들 많이 가지는 것은 모든 부모의 소망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자식들만이 가정의 경제적, 사회적 존립을 확실히 보장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식을 낳지 못해도 정결한 여자! 죄 되는 잠자리에 들지 않은 여자! 하느님께서 영혼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는 결실을 볼 것이다”(3,13). “자식이 없어도 덕이 있는 편이 더 낫다. 덕이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덕에 대한 기억 속에 불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4,1). 3장 13절과 4장 1절은 독신 생활을 권유하는데, 이를 결혼을 포기하도록 권고하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저자의 관심은 자식 없이 고통 받는 기혼자들에게 있다. 의인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새로운 인식 때문에 전에는 멸시당했던 아이 못 낳는 여인도 이제는 복되다고 찬양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이 금지된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처지일지라도 깨끗한 생활 때문에 천상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3,13).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는 남자들도 주님에 대한 충성 때문에 주님 성전에서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노력과 의지는 언제나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3,14-15). 반면에 부정한 관계에서 생긴 자녀들에게는 언제나 나쁜 운명이 닥친다. 그들은 오래 살아도 존경을 받지 못하며 일찍 죽어도 심판의 날에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다(3,16-17). 이러한 악한 가정의 슬픈 운명 때문에 자녀가 없는 의인의 운명이 더 나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과 사람들은 의인의 덕행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인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본받으며, 내세에서는 그들의 승리를 축하할 것이다(4,1-2). 그러나 나무가 나쁜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 오래 살아남을 수 없고 쓸모 없는 열매만 맺듯, 악인들의 자녀들도 심판의 날에 부모들이 저지른 잘못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4,3-6).
지혜 4,7-19 의인의 이른 죽음
사후에 의인들이 누릴 생명에 대한 믿음은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을 괴롭혔던 또 다른 물음, 곧 ‘어떻게 하느님께서 의인들이 요절하는 반면에 악인들은 장수하도록 허락하실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의인들에게 장수를 약속하지 않으셨는가?’에 답을 준다.
명예로운 인생은 나이가 아니라 예지와 티 없는 삶에 의해 좌우된다. “7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 8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 9사람에게는 예지가 곧 백발이고 티 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이다”(7-9). 일찍 죽은 의인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7-9절).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에녹처럼(창세 5,24) 당신께로 데려가셨다. 그것은 당신께서 그를 사랑하시어 악의 세력이 유혹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10-12절). 그리하여 의인은 이 지상에서의 짧은 일생동안 긴 생명을 산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는 의인의 이른 죽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지임을 깨닫지 못한다. 악인은 이 죽음을 불행으로 보며, 결국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오해하고 업신여기게 된다. 그리하여 일찍 죽은 의인이 오래 사는 악인들을 단죄하게 될 것이다. 악인들은 의인들을 비웃지만,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실 것이다(13-18절). 19절은 악인들이 받게 될 법을 선명하게 묘사한다. 악인들은 영원히 부끄러움과 멸시를 받으며 멸망과 고통을 당하고 사람들에게서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그들은 나중에 수치스러운 송장이 되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영원히 치욕을 받을 것이다. 그분께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그들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시고 밑바탕부터 뒤흔드시어 그들은 완전히 쇠망한 채 고통을 받고 그들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질 것이다”(19).
지혜 5,1-14 심판대 앞에서 선 의인과 악인
5장에서 악인들이 내세에서 영광스럽게 된 의인을 보고서 할 말을 상상한다. “1 그때에 의인은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자기를 괴롭힌 자들 앞에, 자기의 노고를 경멸한 자들 앞에 나설 것이다. 2 악인들은 의인을 보고 극심한 공포로 떨며 그 뜻밖의 구원에 깜짝 놀랄 것이다”(1-2). 악인들은 2,1-20에서 말했던 흥청망청 현실을 즐기며 의인의 어리석음을 말했던과는 달리 노선을 거꾸로 다시 취한다. 이번에는 그들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저자는 우리가 한때 웃음거리로, 놀림감으로 삼던 자가 아닌가? 우리는 어리석기도 하였구나! 우리는 그의 삶을 미친 짓이라고, 그의 죽음을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였지”(5,4). 저자는 우리가 모욕하고 그의 죽음이 수치스럽다고 여긴 그 사람이다(2,17-20 참조). 그가 살아 있으니, 하느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지금 그는 하느님의 아들들 축에 든다(5,5). 그가 주장하던 대로이다(2,12-16 참조). 우리는 출구 없는 길을 걸었고 주님의 길을, 그분의 법을 알지 못했다(5,6-7). 이는 그들의 생활양식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2,6-9 참조).
삶에 대해 우리가 가졌던 생각은 우리에게 너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우리의 악행 때문에 그림자처럼 지나갔고 흔적도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우리의 이론이 결국은 정확했던 것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덕성이 없었기 때문이다(5,8-13; 2,1-5를 보라).
5,15-16은 의인이 여러명 으로 나오는 복수로 사용되었다. 어떤 시대의 누구를 가리킬 수도 있고, 시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모든 세대의 신앙인을 의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의인들이 모든 이가 겪어야 할 공통 운명인 물리적 죽음을 넘어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보상으로 받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된다. “15그러나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상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보살피신다. 16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손에서 영화로운 왕관을 받고 아름다운 머리띠를 받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오른손으로 그들을 감싸 주시고 당신의 팔로 그들을 지켜 주실 것이다”(5,15-16).
모든 것은 ‘묵시적인 전투’(5,17-23) 안에서 이루어질 것인데, 이때에 주님은 우주적 힘으로 무장하고 모든 악을 무너뜨릴 것이다. 땅은 황폐해지고 악인들의 세력은 뒤엎어질 것이다. 의인들의 왕관만이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육체의 부활을, 다시 말해 어떤 형태로든 우주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본다. “17주님께서는 당신의 원수들을 징벌하시려고 당신의 열정을 갑옷으로 입으시고 온 피조물을 무장시키실 것이다. 18또 정의를 가슴받이로 두르시고 어김없는 공정을 투구로 쓰시며 19거룩함을 무적의 방패로 잡으시고 20 준엄한 진노를 갈아 칼로 만드실 것이다. 그러면 온 세상이 주님 편에 서서 미친 자들과 싸울 것이다”(17-20).
지혜 6,1-21 지혜를 찾고 사랑하라는 말씀
6장에서는 임금들에게 지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1 임금들아, 들어라. 그리고 깨달아라. 세상 끝까지 통치하는 자들아, 배워라. 2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수많은 민족을 자랑하는 자들아, 귀를 기울여라”(1-2).
지혜가 자신을 내어 줌을 강조한다. 지혜를 찾고 거기에 시간을 들이는 사람은 힘들지 않게 지혜를 발견한다. 6장 12-16절은 인간이 먼저 지혜를 찾아 나섰다 해도 지혜가 먼저 자신을 원하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고, 지혜에 상응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찾아다님을 묘사한다. “지혜는 바래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12).
6장 17-21절에서 저자는 그리스인들처럼 소위 연쇄논법(sorites)을 사용한다. 즉 연쇄논법이란 가=나→나=다→다=라 형식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어지는 명제-들이 서로 연쇄적으로 연결되어 단계적인 추론을 이룬다. 이것은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갈망하고 지혜에게 복종하며 하느님에게서 불멸성을 얻도록 권고하기 위한 방법이다.
“17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
18 가르침을 받으려고 염원함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를 사랑함은 그 법을 지키는 것이며 법을 따름은 불멸을 보장받는 것이고
19 불멸은 하느님 가까이 있게 해 주는 것이다.
20 그리하여 지혜를 향한 소망은 사람을 왕위로 이끌어 준다.
21 그러니 민족들을 다스리는 군주들아 너희가 왕좌와
왕홀을 즐기거든 지혜를 존중하여라. 그러면 영원히 다스리게 될 것이다.”(17-21).
이렇게 지혜라는 주제는 서설 전체를 비추어 준다.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내세에서 복을 누릴 수 없다.
지혜 6,22-7,21 솔로몬이 알려 주는 지혜
6장 22-25절은 지혜의 기원을 말한다. “이제 나는 지혜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는지 알려 주겠다. 너희에게 어떠한 신비도 감추는 일 없이 지혜가 생겨난 시초부터 자취를 더듬으며 그에 대하여 아는 바를 분명하게 드러내는데 진리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23 사람을 좀먹는 시기를 결코 길벗으로 삼지도 않겠다. 시기는 지혜와 자리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6,22-23). 솔로몬은 이제 지혜를 정의하려는 자기의 원의를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지혜를 정의하는 일은 자기 체험을 길게 이야기 한 뒤 7,22에 가서야 시작한다. “너희에게 어떠한 신비도 감추는 일 없이”라는 말에서 솔로몬의 신비의 종교의 용어를 이용하여 자신을 비밀 의식의 전수자처럼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입회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르침을 전수하는 그러한 종교의 행태에 반대한다. 자기가 계시하는 지혜는 모든 이가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청하는 이, 솔로몬도 한낱 인간이다. 인간의 허무한 존재 가치가 지혜 7장 1-6절에서 언급된다. 이것은 비단 솔로몬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현실을 조망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본 현실은 죽음에 지배받는 것이고, 지혜는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되짚는다. “임금도 모두 인생을 똑같이 시작한다. 삶의 시작도 끝도 모든 이에게 한가지다”(5-6). 이는 아무리 임금이라고 해도 죽어야 할 존재라는 지혜서의 생각이 헬레니즘 문화 안에 신성시되었던 임금들과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7장 7-14절에서 지혜는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최우선적 선택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내가 기도하자 나에게 예지가 주어지고 간청을 올리자 지혜의 영이 나에게 왔다”(7). 솔로몬이 기도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1열왕 3,4-14를 가리키는 이 말로도 여실히 드러난다. 기브온에서 지혜를 청하는 기도를 올리는 솔로몬에게 하느님은 다음과 같은 응답을 주신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신을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신을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주겠다”(1열왕 3,11-12). 여기서 지혜에 대한 청은 다른 현세적 축복을 물리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은 부와 명예, 그리고 기나긴 수명도 함께 보장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지혜를 추구함이 다른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지혜를 통해 다른 현세적 축복 또한 얻어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더불어 있기 때문이다. 지혜서는 이러한 점을 놓지 않고 짚어낸다. “지혜가 이끌어 왔으므로 나는 그 모든 것을 즐겼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혜의 소산임을 몰랐다”(12).
지혜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혜는 만물의 이치와 질서 그리고 그 활동을 알게 하는 지식을 제공한다. 창조주 하느님의 일이 곧 지혜의 일이며, 지혜가 베푸어 주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베풀어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15 하느님께서 내가 당신의 뜻에 따라 말하고 내가 받은 것들에 맞갖은 생각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빈다. 그분께서 바로 지혜의 인도자이시고 현인들의 지도자이시며 16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말이, 모든 예지와 일솜씨가 그분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7,15-16). 지혜의 원천은 하느님이고, 지혜의 결과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안에 하느님의 선물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선물을 깨닫고 누리고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 7,22-8,1 지혜의 특성
이 대목은 솔로몬이 행한 설교의 중심이자 정점인 지혜에 대한 찬가이다. 먼저, 지혜의 특성들이 열거되고(7,22-24) 그 기원이 밝혀진다(7,27-28), 지혜의 영광스러움을 찬양한다(7,29-30).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지혜의 활동을 요약한다(8,1).
저자는 의도적으로 지혜가 지니고 있는 21가지 특성을 열거한다. 21은 숫자의 상징법에서 충만함을 뜻하기 때문이다(7=충만함, 3=완전함, 3*7=절대적 완전함). “22 모든 것을 만든 장인인 지혜가 나를 가르친 덕분이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23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22-23). 이는 불변, 견고, 평온함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리스 철학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용어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지혜를 그리스 철학의 지혜와 의도적으로 빗대어 설명하려는 지혜서 저자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지혜는 정신(프네우마)으로 등장한다. 이 21개의 속성들은 일정한 순서로 이어진다. 먼저 영의 우월한 본성을 정의하기 위한 두 개의 형용사가 열거된다. ‘명석하고 거룩하다.’ 첫 번째의 것은 스토아 학파에서 유래하며, 두 번째 것은 성경에서 유래한다. 다음 두 개의 형용사는 첫 번째 정의를 보충한다. ‘영은 유일하고 다양하다.’ 즉 비길 수 없으면서도 여러 면으로 되어 있다. 다음에는 영의 활동이 지극히 효과적임을 보여 주는 여섯 개의 속성이 열거된다. ‘영은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며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다.’ 이어지는 열거의 중심에 “선을 사랑한다”는 형용사가 들어 있다. 이것에서 목록의 후반부가 시작하는데, 이제는 우주를 통치하는 일에서 영의 활동이 지닌 속성들을 정의한다.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다.’ 영의 항구함은 세 개의 형용사로 표현된다.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다.’ 또한 영의 지식과 능력은 무한하여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가장 섬세한 영까지 포함하여 모든 영을 통찰한다.’
이러한 영을 지닌 지혜는 모든 것의 가장 깊은 곳까지 통찰하며, 어느 것도 지혜를 가로막지 못한다(죄는 예외이다. 1,4-5). 그러면서도 지혜의 순수함은 손상되지 않는다(7,24). 지혜서의 저자는 이렇게 모든 존재와 세상의 중심에 지혜가 현존함을 말하려 하고, 그의 어휘는 물질적 개념을 넘어서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전히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지혜 안에 있는 영의 이러한 본성을 강조하면서 그는 지혜의 의인화를 향한다(잠언 8장; 9,1-6; 집회 24장 참조).
이제 저자는 지혜가 그렇게 순수한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그것은 지혜가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지혜의 본성은 그 기원을 바탕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지혜의 유일한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몇 가지 표상을 사용한다.
그는 먼저 그 관계의 역동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혜는 “하느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다(25). 지혜 자신과 구별되는 그 지혜의 기원에 의해서가 아니라며, 어떻게 지혜가 그 자신의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느껴지는 향기는 장미가 아니고, 유출(발산)은 그 원천을 전제한다. 지헤의 이러한 원천은 영광스런 주님이시다.
두번째 표상은 정적(靜的)인 비유를 제시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체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 선하심의 모상이다”(26). 지혜는 하느님의 찬란한 빛이 아니지만, 그 빛을 반사한다. 깨끗한 거울은 그 안에 비치는 얼굴을 완전하게 반사한다. 모상이나 또는 어떤 사람의 그림은 그를 현존하게 한다. 지혜가 활동적이라면 그것은 하느님의 빛나고 은혜로운 활동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가 7,22-24에서 지혜에 대해 말수 있는 모든 것은 지혜와 하느님의 특전적 관계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설명된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자신의 실재를 받는다.
지혜는 이러한 모든 활동을 모든 세대를 통하여 모든 장소에서 할 수 있다. 그것은 지혜가 하느님 활동의 순수한 모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나쁜 것들도 지혜를 침범할 수 없으며 어떤 악도 지혜를 이길 수 없다.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활동이 지혜의 활동으로 인정된다.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은 반드시 그 목적을 이루고야 마는 하느님 지혜의 인도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지혜의 활동에 대해 7,27-8,1까지 말하다. 첫째로, 지혜는 활동을 해서 소진되거나 변화되지 않는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7,27). 활동을 하면서도 지혜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지혜의 활동은 두 가지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새롭게 한다. 세상 안에서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펼쳐지면서 세상이 선한 방향을 향하도록 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 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8,1). 다른 한편으로는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이러한 지혜 찬가를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할까? 저자는 잠언(잠언 8장; 9,1-6 참조)이나 집회서(집회 24장 참조)의 해석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저자에게 지혜는 오히려 유다교에서 세상과 인간 안의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접한다. 철학자들은 하느님의 내재라고 말할 터인데, 그것은 하느님의 초월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주님은 당신 창조 안에,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활동적으로 현존하신다. 지혜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은총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찬가에서 바오로는 지혜서에 나오는 두 가지 표현을 그리스도께 적용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십니다”(콜로 1,15; 참조 지혜 7,26).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콜로 1,17; 참조 지혜 1,7). 여기에서 자극을 받아 교부들은 흔히 지혜 7,25-26을 그리스도의 신비에 비추어 해석했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는 그의 <원리로>(Ⅰ,2,5)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 하느님의 지혜에 대하여 말한다. 그 지혜는 홀로 만물의 근원이시며 그분으로부터 태어난 분에게서 실체적인 존재를 받았다. 그리고 이 지혜는 홀로 본성상 아들이신 분과 동일하므로 외아들이라 불린다.” 아우에티오피아티노는 예를 들어 <요한 복음 주해>(Ⅲ,2)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혜는 어떠한 움직임보다 재빠르고 그 순수함으로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7,24)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그리스도가 아닐까?”
지혜 8,2-21 삶의 반려자를 찾는 지혜
8장2절부터는 지혜가 다시 솔로몬의 삶 안에서 재조명된다. 솔로몬은 지혜를 찾아 나선 이로서, 지혜를 삶의 반려자로 찾고 있다. 역사적으로 솔로몬은 수많은 여인을 찾아 나선 임금이지만 여기서는 오직 지혜만을 찾아 나서는 이로 서술된다.
“나는 지혜를 사랑하여 젊을 때부터 찾았으며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에 빠졌다”(2).
성경에서 솔로몬은 여러 사람과 사랑을 나눈 슬픈 기억을 남겼다(1열왕 11,1-3; 느헤 13,26; 집회 47,19-20). 저자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약점을 드러내기 이전의 솔로몬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훨씬 젊고, 정략결혼이나 그에 따른 종교적 결과와 도덕적 잘못을 겪지 않았다. 저자의 머릿속에 있는 솔로몬은 주님께 지혜만을 청하고 지혜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젊은 임금이다. 그는 지혜만을 사랑하므로, 지혜가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되고 그의 배우자가 되기를 바란다. 8,2-21의 본문은 이 같은 분명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며, 이는 세 번이나 명시적으로 언급된다(8,2.9.16-17). 그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젊은이가 아버지에게 딸과 혼인하게 해 달라고 청하듯이, 주님께 지혜를 청해야 한다(8,21).
현인이 지혜에게서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혜가 창조의 차원에서 실현하는 일을 그의 삶에서도 실현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있듯이 그와 함께 있으면서 영감을 주고 활동한다(8,3-6). 지혜는 덕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솔로몬에게 스토아 학자들이 말했던 사추덕(四樞德)을 가르친다(8,7). “누가 의로움을 사랑하는가? 지혜의 노고에 덕이 따른다. 정녕 지혜는 절제와 예지를, 정의와 용기를 가르쳐 준다. 사람이 사는 데에 지혜보다 유익한 것은 없다”(7). 이 네 덕은 그리스 철학자들에 내세운 주요 덕목으로 성경에서 여기에서만 말한다. 이것들을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사추덕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지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란다(8,8). 통치하는 것은 예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지혜가 그에게 조언자가 되는 것이다(8,9; 참조 잠언 8,12-16). 지혜에 힘입어 그는 위대한 임금이 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다(8,10-15).
지혜가 이렇게 풍성한 선물(불멸, 기쁨, 부, 예지, 영예)을 지니고 있기에 솔로몬은 어떻게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까 하고 곰곰이 생각한다(8,17-18). 그는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깨끗하지만 지혜는 결코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8장 19-20절은 영혼이 이미 육체가 생기기 전에, 그리고 육체와 상관없이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 플라톤의 견해를 전제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저자는 당시의 유행을 따라 철학적 표현을 사용할 뿐이다. 실제로 8장 20절은, 사람에게 결정적인 것이 영혼이 아니라 육체임을 강조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는 8장 19절의 표현을 수정하고자 한다. 지혜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솔로몬은 선조들의 자비로운 하느님이시며 만물과 인간의 창조주이신 분께 간청한다.
창조주의 도구는 말씀(창세 1,3 참조)과 지혜이다. 지혜서에서 지혜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포괄하기 때문에 결국 여기서 말씀과 지혜는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지혜를 갈망하는 젊은 임금의 기원이고, 이러한 사랑은 불사(不死)를 담보한다. 그래서 그렇게도 갈망하는 지혜를 받기 위해서는 지혜를 허락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인 주님께 지혜를 청해야 한다(8,21). “그러나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지 않으시면 달리 얻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혜가 누구의 선물인지 아는 것부터가 예지의 덕분이다. 그래서 나는 주님께 호소하고 간청하며 마음을 다하여 아뢰었다”(8,21). 지혜를 소유하려는 갈망이 아무리 강하고 그의 인간적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인간은 스스로 지혜를 차지할 수 없다. 오직 청할 수 있을 뿐이며, 주님께서 좋게 여기신다면 그분의 손에서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기도는 지혜를 얻기 위한 유일한 효과적 수단이다. 이렇게 하여 9장은 7,1-22ㄱ; 8,2-21의 논리적 결론이 된다.
지혜 9,1-18 지혜를 청하는 기도
지극히 치밀하게 작성된 이 기도는 세 연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중심에는(9,4.10ㄱㄴ.17ㄱㄴ) 청하는 –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 요청이 있다. 첫연은 (9,1-6) 그러한 요청의 근거로 창조주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에 비하여 인간이 나약하다는 점을 말한다. 둘째 연은(9,7-12) 지혜가 주님 곁에 있듯이 기도자의 곁에 있어 그가 자신의 소명을 다하도록 도와주기를 청한다. 셋째 연은(9,13-18) 다시 인간의 약함으로 돌아온다. 주님의 뜻을 식별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셨듯이 지혜를 내려주실 때에만 가능하다.
모든 인간의 사명과 지혜의 선물(9,1-6)
“1 “조상들의 하느님, 자비의 주님! 당신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말씀으로 만드시고 2또 인간을 당신의 지혜로 빚으시어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통치하게 하시고 3세상을 거룩하고 의롭게 관리하며 올바른 영혼으로 판결을 내리도록 하셨다”(1-3). 기도자는 조상들 특히 선조들에게, 그리고 시나이 산의 모세에게(탈출 34,6) 당신 자신을 알려 주신 하느님을 향하지만, 이어서 다시 창조주의 업적으로 돌아간다. 창조하시는 하느님과 구원하시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시다(9,18ㄷ 참조). 창조 1장에서 되풀이하여 말하듯이, 하느님께서는 당신 말씀으로 우주를 만드셨다. “말씀하시기를 … 그대로 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 당신 지혜로 인간을 만드셨다. 말씀과 지혜는 여기서 병행을 이룬다. 오경의 아람어 번역본인 타르굼은 이미 창세 1,1을 “지혜로써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읽는데, 이 번역은 지혜를 주님께서 하신 업적들의 “시작, 첫 작품”이라고 부르는 잠언 8,22ㄱ에 기초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자는 인간이 이러한 그의 역할을 “거룩하고 의롭게” 수행하고 “올바른 영혼으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말한다.
지혜를 청하는 것은(9,4) 기도자가 인간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당신 어좌에 자리를 같이한 지혜를 저에게 주시고 당신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십시오”(4). 그에게 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그를 하느님의 자녀들 가운데에서 배제시키는 셈이 되고, 밧 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은 그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주님을 섬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라 연약하고 덧없는 목숨을 지니고 있으며, 법적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하다(9,5). 1열왕 3,7은 임금의 나이가 젊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지혜서의 저자는 이를 일반화한다.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지혜가 없다면 하느님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지혜 9,7-12 개인적 소명과 지혜의 선물
가운데 놓인 이 연은 솔로몬의 개인적 소명을 다시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통치하도록 부름 받은 그는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성전도 지어야 할 것이고 주님께서 “천막을 치시려고”(9,8ㄴ: 참조 집회 24,8ㄴ) 결정하신 도성 안에 제단을 세워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지혜를 청하기에 앞서 솔로몬은 마치 근거를 말하듯이 주님께 그분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지혜가 그분 곧 주님을 도와 드렸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린다(9,9).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아는 지혜는 당신과 함께 있다. 당신께서 세상을 만드실 적에도 지혜가 곁에 있었다. 지혜는 당신 눈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 계명에 따라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9).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 프레스코화에서 미켈란젤로는 창조주 곁에, 눈길을 인간에게 조성시키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젊은 지혜를 그려 놓았다.
이어서 기도자는 다시 기도를 되풀이한다(9,10).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파견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어좌에서 지혜를 보내시어 그가 제 곁에서 고생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10). 그의 관점에서, 지혜는 창조주 곁에 있었듯이 그의 곁에도 있어야 한다. “지혜가 제 곁에 있게 하시어”(9,10ㄴ). 그러면 그는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지혜가 그의 행위에서 그를 이끌고 그를 보호할 것이기 때문이다(9,11). “지혜는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제가 일을 할 때에 저를 지혜롭게 이끌고 자기의 영광으로 저를 보호할 것이다”(11). 그래야 그는 재판을 하고 하느님의 집을 짓는 임금의 소명을 올바로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9,12).
이렇게 읽으면, 이 연은 솔로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다. 저자는 그의 계획에 줄곧 충실하다. 이 책의 첫 줄에서부터 그는 통치자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솔로몬의 예는 7-8장의 찬가에서도 뼈대가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형상 뒤에서 현인의 형상을 직감할 수 있다. 현인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임금이고, 벤 시라(집회 4,5)는 현인이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했으며, 욥은 자신을 군주하고 여겼다(욥 29,25; 31,37).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교회 헌장>(34-36항)에서, 그리스도인을 구세주의 제자 공동체에 들어가게 하는 세례에 힘입어 그리스도인은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임금이 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각자 자신의 차원에서 왕직을 수행한다. 사회의 통치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며, 특히 신앙 공동체이며 가족인 주님의 집 곧 교회를 건설해야 한다(1코린 3,16; 에페 2,21; 1베드 2,5 참조).
지혜 9,13-18 인간의 약함과 지혜의 선물
셋째 연은 첫 연에서 이미 전개된 주제를 반대 순서로 다시 다룬다. 9,13-17ㄱ은 9,5-6보다 더 길게 인간의 근본적인 약함에 대해 말한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알 수 있고, 누가 그분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각은 덧없고 변덕스러우며, 게다가 플라톤적 전통에서 강조하듯이 우리의 육적인 조건은 우리의 이성과 수많은 생각을 짓누른다. 우리는 손에 닿는 것도 간신히 찾아내는데, 하물며 하늘에 있는 것(요한 3,12 참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더욱 어렵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면, 그분의 거룩한 영을 허락하지 않으시면(9,17). “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17). 여기에도 한 가지 요청이 암묵적으로 들어 있다. 앞선 두 연의 중심(9,4.10ㄱㄴ)에서 했던 바와 같은 요청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지혜와 영이 완전히 하나되며, 7,22ㄴ-23은 그것을 설명해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위격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계시되었음을 기억할 것이다(요한 14,16.26; 15,26; 16,6-7).
기도자가 주님께 이러한 청을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조사들에게 이미 지혜의 선물이 주어졌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9,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다”(18). 지혜 덕분으로 이미 그들은 올바른 길을 걸었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으며 구원될 수 있었다. 결국, 요청의 기반은 거룩한 역사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내리시어 지혜를 청하는 이에게 인간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며(9,2-3), 또한 조상들이 그를 앞서 갔던 거대한 구원의 흐름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