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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시작 전 11일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님의 영명 축일을 미리 준비해 주신 대치2동 주임 신부님과 교우분들의 정성에 더욱 감동스럽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본당 사목하실 때에도 영명 축일이 돌아오면 항상 어딘가로 피정을 가셨다고 합니다. 쑥스러움이 많으셔서... "대치2동에서 기습적으로 축하를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주임신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하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셨어요.
지난주까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이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부분은 탈출기 1장~19장까지의 이야기고, 뒤따르는 이야기가 민수기 10장부터 시작해서 민수기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중간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탈출기 20장에서 십계명이 나오고, 그리고 계약책이, 덧붙여 추가적인 법전의 내용들이 나옵니다.
탈출기 20장부터 탈출기 마지막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땅에서 살기 위해 지켜야 할 법.
그리고 레위기가 나옵니다. 레위기는 책 전체가 법전입니다.
레위기가 끝나고 민수기가 나오는데 민수기도 10장까지는 법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모세오경을 쭈욱 펼쳐놓고 봤을 때, 한가운데에 법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읽기가 녹록지 않는 부분도 나옵니다. 그 레위기에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menstruation)나,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 등의 내용들을 보면서…
하지만 신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내시기에는 좋으셨다고 합니다.
"이번에 중간고사는 오경의 법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1번, 소 한 마리를 훔쳤으면 몇 마리로 보상해야 합니까?"
이 부분을 가지고 신앙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해서도 또한 녹록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2025년을 살아가는 유다인들에게도 오경의 법 안에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하느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관해서.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서로서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 법전 안에서 법전의 형태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혼자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법적인 규정에 마음이 묶일게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시는가?라는 관점에서 법전의 내용들을 일독하시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더욱이 놀라운 것은,
나중에 신명기에 가도 12장~ 26장까지가 신명기 법전입니다. 그 부분을 보면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나옵니다. 그 사회적 약자들을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것에 대해서 나오고,
우리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만나서 중요한 대화의 주제 중에 하나가 "정부에서 15만 원을 지원해준다고 한 부분" 그 정책이 좋은 정책인가? 아닌가? 그것이 멀리 보면 좋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에 대해서도 우리가 논의하듯이 구약 성경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정부의 틀로 봤을 때, 사회 복지 쪽이 직전의 정부보다는 조금 더 강화될 것 같아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저희 그리스도교 신앙의 입장에서 봤을 때 환영할 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정책을 폈는데, 스웨덴에서는 성공하고 그리스에서는 실패했어요.
어떤 사람이 일을 못하게 되면 나라에서 실업 급여를 얼마씩 준다!라는 정책이 있다고 합시다.
스웨덴에서는 사람들이 '내가 혹시라도 일을 못하게 되면 정부에서 이만큼의 돈을 줄 거야.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일원으로 내가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남유럽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 일을 안 해도 돈을 준대!! 그러면 낼부터 직장 안나가~~~'라고 생각을 했던 같아요.
똑같은 정책인데 어떤 사회에서는 성공하고 어떤 사회에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이런 사회 복지 정책을 강조하면서 눈여겨보고 애써야 할 것은 그 사회에 윤리적인 도덕성이 높아지지 않는 이상 이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정치 문제와 무관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의 윤리를 세상의 문화로 만들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면서 법을 통해서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위의 사람들에게 '아! 한 사람의 완성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모습입니다.'라는 모범을 보여야 할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쓰레기가 떨어져 있을 때 '저기 쓰레기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니까 나도 버려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할 수가 있고
'아, 저기 쓰레기가 떨어져 있네. 내가 주워서 깨끗이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사회의 문화가 어떻게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의 미래는 굉장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셨을 때 우리에게 어떤 삶을 요청하셨는지, 우리들이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이 세상은 훨씬 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갖춰갈 수도 있고 하느님 나라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고 우리들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 보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가짐은 종종 우리들의 옷차림에서도 나타납니다. 그 사람의 옷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신부님이 로마에서 학생신부로 계실 때 호주에서 한 신부님이 신부님과 함께 기숙사에서 2주 정도 묵게 되셨어요. 그 신부님을 환대하기 위해서 식당으로 가셨는데 그 신부님이 머리를 허리춤까지 길어 묶으시고 귀걸이도 하신 모습을 보고 '와! 무지하게~~ 신세대의 신부님이 오셨군, 이야기하면 재밌겠네.' 하고 생각하시며 식사를 함께 하셨는데 대화를 나누시다가 느끼신 것은 굉장히 보수적인 신부님이셨다는 것을... '아,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탈출기 법전에서 나오는 내용중에 사제의 복장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 많은 분들이 질문을 하셔서 사제의 복장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짤막하게 설명해 주시고, 오경에 남은 부분과 신명기계 역사서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로 하셨어요.
사제의 복장
에폿 - 가슴받이
에폿 - Ephod
탈출 28,6-14
탈출 39,2-7에서 나옵니다.
모자와 아래부분에서부터 여러 가지 옷들 관한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우리가 평소에 듣기 힘든 단어라서 히브리말 단어 그대로 사용한 에폿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에폿을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앞치마??!!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사제는 이미 옷을 입고 있는데 그 위에 에폿을 입습니다. 어깨 걸이가 있고 아래로 내려오면서 화려하게 장식된 에폿이라는 옷입니다.
그 에폿 위에 가슴받이라는 것이 고정됩니다. 그 가슴받이에는 보석이 열두 개가 꽂혀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보석, 아니면 각각 다른 종류의 돌들이 열두 개가 가슴받이에 꽂힙니다.
그리고 그 가슴받이는 주머니 형태로 되어있는데 그 주머니 안에 우림과 툼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우림과 툼밈도 번역이 어려워 히브리어 그대로 사용)
오늘 배운 히브리어 세 가지 기억해 봅니다^^
에폿, 우림과 툼밈
우림과 툼밈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몇몇 주석학자들도 그렇게 주장하고 신부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사제에게 찾아와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제가 이런 이런 결정을 해야 하는데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새로 집을 짓는데 문을 남쪽으로 낼까요? 북쪽으로 낼까요?"라는 선택부터 시작해서.."이번에 대학을 지원하는데 문과로 갈까요? 이과로 갈까요?".. 등의 궁금한 게 많이 있으니까요.
심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의 15%로 정도가 결정 장애를 갖고 있어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볼 때에도 어떤 것을 볼까? 하는 것으로 1시간 이상 고민을 해야 하는 분들도 있을 실 테고요.
사람들이 사제에게 와서 속되게 이야기하면 우림과 툼밈은 점을 치는 도구였던 것 같아요. 그 우림과 툼밈으로 점을 치는데 하느님께서 자세하게 알려주시지는 않고 "예"와 "아니요"라고만 대답을 해주신 듯해요.
누군가가 물어보고 사제가 주머니 안에서 꺼냈는데 우림이 나오면 "예"
툼밈이 나오면 "아니요"라는 방식으로 우림과 툼밈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있고 신부님께서도 일단은 '그게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신부님의 개연성은 항상 열려있으세요^^
언제가 되면 알 수 있을까요?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알 수 있으니 지금 너무 단정 짓지 않아도 됩니다.
가슴받이는 때때로 성경에서 판결가슴받이라고 부릅니다.
판결 가슴받이 ㅡ Breastplate of Judgment
탈출 28,15-30
탈출 39,8-21
하느님께서 정의로우시다. 하느님께서 판결하신다.
또 우림과 툼밈은 재판할 때도 쓰였을 겁니다.
A가 B를 도둑질했다고 고발하는데 B는 도둑질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정말 증거도 증인도 없을 때, 우림이 나오면 '일단, 넌 도둑'
라는 재판 내지는 판결의 도구일 수도 있어요.
이와 같은 경우는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됩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열두 사도와 함께 지내시다가 유다가 배반을 해서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서 베드로가 "이렇게 해서 유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둘이라는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도를 한 명 뽑습니다." 하고 말하고 나서 두 명의 후보자를 놓고 제비 뽑기를 합니다.
교회의 어떤 전통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주교가 되신 최광희 신부님, 신부님께서 긴 시간 알고 지내셨는데 정말 성실하고 좋은 뜻으로 가득하신 분으로 저희가 새로우신 주교님을 위해서 하느님께 은총과 지혜를 청하며 함께 기도드렸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에폿과 가운데 부분의 가슴받이, 허리 띠등...오늘날 우리들의 관점으로는 주교들의 복장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지금 관심있게 볼 것은 에폿과 가슴받이입니다.
구약 성경에 다른 부분에서도 에폿이 나옵니다. 크일라의 다윗이라는 부분에서 나오는데 크일라는 지명입니다.
에브야타르가 크일라에 있는 다윗에게 도망쳐 오는데 에폿을 손에 들고 옵니다.
그리고 야훼에게 묻기 위해서 에폿이 필요했습니다.
사제의 복장에서는 에폿과 가슴받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이미 그 이전에 에폿만으로 하느님의 뜻을 묻기 위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에폿 안에는 우림과 툼밈에 준하는 하느님의 뜻을 묻는 무언가의 기능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고, 에폿은 사제나 누군가의 복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에폿 모양(앞치마 모양)의 것을 이미 불렀다는 기록들을 역사서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치클락도 지명입니다.
여기에서도 다윗은 에폿을 가져오게하여 야훼에게 묻습니다. 야훼의 응답을 듣고 다윗은 아말렉을 쫓아가 두 아내를 되찾는데,
다윗은 무슨 질문을 했을까요?
"아말렉이 우리에게 와서 나쁜짓을 했는데 저희가 아말렉을 쫓아갈까요? 말까요?"라고 질문했을 거예요. 에폿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알아내고 실행하는 다윗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판관기 8장의 기드온의 이야기에서도 판관기 17장~18장에서도 에폿의 활용에 관해서 나옵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대학을 상징하는 문장에서 하버드의 문장은 라틴어로 베리타스입니다. 우리말로 진리
그런데 오른쪽의 대학에서는 히브리어로 우림엣 툼밈이라고 써있어요. 그러니까 우림과 툼밈이 이 대학의 엠블럼이고 예일대학이에요.
아마도 예일대학이 유다인들의 후원을 받아서 지어진 대학인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림과 툼밈이 예일대의 엠블럼으로 들어가면서 유다 전통에서 나중에 우림과 툼밈이 무슨 뜻이냐? 라틴말로 룩스 엣 베리타스다.(LUX ET VERITAS)라고 유다의 랍비들이 중세 때 해석한 것 같아요.
LUX : 빛
VERITAS : 진리
빛과 진리로 해석한 우림과 투밈이 예일대학교의 엠블럼으로 반영되어 있는데, 우림과 툼밈은 성경에 나와있는 그것이고 또 그것은 아마도 점치는 도구였을 것입니다.
시나이 계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최종적으로 성막을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이동을 합니다.(카데슈라는 지역까지)
이동시 진영을 짤때 가운데에 성막(만남의 천막) 내지는 계약궤를 두고 그리고 세 지파, 세 지파, 세 지파, 세 지파가 동서남북으로 계약궤, 성막을 보호하는 모습으로 천막(성막)을 짜고 밤을 지내게 됩니다.
그런데 성막, 계약 궤는 당연히 레위지파가 지켜야 합니다.
나머지 열두 지파가 3,3,3,3으로 필요한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레위 지파가 빠지니 열한 지파가 되어서 요셉 지파가 므나쎄와 에프라임으로 둘로 나뉩니다. 위에 사진상으로 보면 열세 지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이유로....
위의 것은 텐트를 치고 정착하여 자리 잡았을 때의 모습이고요.
이동할때는 두 가지의 전승이 나옵니다.
오경을 읽다 보면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만남의 천막이 있습니다. 그 천막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그리고 나중에 탈출기에서 보면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 모세가 성막을 짓습니다.
그렇다면,
만남의 천막과 성막의 관계는 도대체 무엇인가?
만남의 천막은 성막을 짓고 나면 없어지는 거야? 아니면 성막을 짓고 나면 그 안에 있는 건가? 밖에 있는 건가?라는 것들에 관해서 성경의 텍스트를 아무리 읽어봐도 해명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주석가들은 만남의 천막에 대한 전승이 하나 있고 성막에 전승이 또 하나가 있는 두 가지 전승이 겹쳐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동하는 모습에서도 만남의 천막 전승에서는 아래의 모습으로 세 지파가 앞장서고 가운데 만남의 천막이 있고 그 다음에 세 지파가 뒤를 따릅니다.
그런데 성막일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맨 앞에 계약 궤가 서고 세 지파가 뒤따르고, 그 다음에 성막에 필요한 집기들이 있고, 그리고 다시 세 지파가 뒤따릅니다. 이어서 성막에 딸린 가구들이 뒤따르고, 세 지파가 뒤따르고, 마지막 세 지파가 후미를 뒤따릅니다.
따라서 성막 전승과 만남의 천막 전승이 독립적으로 있는데 행진할 때에도 두 가지 전승이 있다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남의 천막은 이동에 용이합니다.
성막이라는 것은 무언가에 오랫동안 자리잡았을때 유용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적인 면에서도 만남의 천막과 성막, 두 가지의 신앙에 대한 태도에 관해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에서 하나의 습관처럼 자리 잡는 게 나쁘지 않겠죠?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항상 그럴수 없겠지만 12시나 6시 이럴 때는 삼종기도를 하고, 그리고 식사 전 기도와 식사 후 기도를 하는 습관적인 모습이 좋겠지요.
그렇다면 매일 습관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과 매일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중에는 어떤 것이 더 좋을까요?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들의 신앙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고정되는 형태로 나아가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들의 신앙은 매일매일 새롭게 성장하고 움직일 수 있는 그러한 양면성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서도 우리들이 어떤 사람에 관해서 계속해서 만나고 그 안에서 일정한 만남을 키워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새롭게 만날 수 있는, 나도 매일매일 변하고 있고 상대방도 매일매일 변하고 있다는 역동성을 중심으로 우리들의 만남을 계속해 나가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들에게 누군가가 "여기 로보트 개가 있고, 살아있는 개가 있어요. 어떤 것을 선택하실 건가요?"묻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살아있는 개를 선택할 것이에요. 로봇 개는 뻔한 프로그램으로 작동하겠지만, 살아있는 개는 의외성을 지니고 있어요. 오히려 그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신앙도 역시 우리들의 삶안에서 한편으로는 고정된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움직이는 형태로 두 가지의 양면성을 갖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언어에 명사도 있고 동사도 있듯이~~~ 그렇게 명사와 동사를 통해서 한 문장이 완성되니까요.
우리들의 신앙도 그 양면성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볼 내용은 신명기계 역사서입니다.
신명기계 역사서 - 여호수아기
신명기는 모세오경의 다섯 번째 책입니다. 신명기는 사실상 모세의 연설입니다.
그 모세의 연설의 내용이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의 내용을 다시 한번 되짚는 것이 신명기의 모세의 연설입니다. 그래서 신명기를 라틴말로 데우테로 노미온이라고 합니다.
데우테로 : 두 번째
노미온 : 법
따라서 신명기는 둘째 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신명기에서 "신"자는 "재"신자를 씁니다. 신명기는 신명기 하나로도 특별한 책인데 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그 신명기를 쓴 사람들의 신학이 뒤따르는 역사서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신명기만을 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자신들의 신학을 가지고 기술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저자들이 신명기를 쓰고 나서인지 쓰기 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저자들이 쓴 책이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입니다. 중간에 빠진 룻기는 역사서라기보다는 역사 설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룻기는 빼놓고,
신명기계 역사서로;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그중에 여호수아기 내용을 봅니다.
여호수아
• 모세의 시종
• 에프라임 지파
• 민수 13,16 : Hoshea Bin - Nun - Joshua
여호수아는 이미 모세의 시종으로 불리어졌고, 에프라임 지파에 속합니다. 본래의 이름은 호세아 빈 눈인데, 눈의 아들 호세아라고 성경에는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번역하는 것을 찬성하시지는 않습니다.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오사마 빈 라덴이라고 있잖아요. 그사람은 신문에서 라덴의 아들 오사마라고 쓰지 않아요.
빈, 벤, 븐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와 아랍어에서 아들을 뜻합니다.
호세아 빈 눈이었는데,
호세아 : 구원한다는 의미(호세아)에 + 야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요수야가 되는데, 야는 야훼를 뜻합니다.
요수야 : 야훼께서 구원하신다
이 요수야가 그리스말로 넘어오면 예수스가 되고 우리말로 넘어오면 예수가 됩니다.
여호수아기에 주인공인 여호수아는 예수님과 같은 의미를 가진 이름이고,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 탈출 17장 : 아말렉과의 전투
• 탈출 24장 :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으로 올라감
• 탈출 32장 : 모세와 함께 시나이 산에서 내려옴
• 탈출 33장 : 만남의 천막
17장, 24장, 32장, 33장에서 기술된 인물입니다. 민수기에서도 여러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여호수아
• 신명 1,38 ; 3,21. 28
• 신명 31, 3.7. 14. 23 : 모세의 후계자 임명
• 신명 32,44 : 모세의 노래
• 신명 34,9
여호수아
• 1장 : 여호수아의 권위
• 2장 : 라합
• 3장 : 요르단 강
• 4장 : 돌 열두 개
• 5장 : 길갈에서의 할례와 파스카, 야훼 군대의 장수
• 6장 : 예리코 점령
전반부의 1장, 2장에서의 라합이라는 여인에게 도움을 받는 이야기....5장에서는 길갈에서의 할례와 파스카, 야훼 군대의 장수, 6장에서는 예리코를 점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리코 점령입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자 마자 이스라엘이 첫 번째로 지나쳤던 지명은 길갈입니다.
옛날에 사람을 사는 지역을 분류할 때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냥 마을인가, 성벽이 있는가로 분류합니다.
아마도 성벽이 있으면 도시의 형태를 갖춘 곳이고 성벽이 없으면 촌락으로 구분됩니다.
길갈은 촌락이었습니다. 예리코는 성벽이 있는 곳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길목이었던 것 같아요.
그 예리코의 성벽이 이중 성벽이었습니다. 하나만 있어도 뚫고 들어오기 어려운데 성벽이 두 개였으니 얼마나 어려웠을까요? 그래서 이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예리코를 지나가야 하는데 그곳을 점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점령하지 않으면 더 전진했을 때 후방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예리코 성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싸우지 않고 예리코 성을 점령합니다.
일주일이 걸리는데 처음에 한 바퀴를 돌고 둘째 날에도 한 바퀴를 돌고,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면서 뿔나팔을 부니까 성벽이 알아서 무너졌더라~ 라는 말씀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워주셨다는 이야기와 함께 예리코가 이스라엘에 의해서 점령당하는 이야기를 여호수아기는 감동적으로 전합니다.
탈출기에서 감동적인 장면중에 하나가 갈대바다를 건너는 장면이었다면 여호수아기에서 감동적인 장면은 예리코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이 될 것 같아요. 이게 전반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7장, 8장에서는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제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내용들이 나오는 반면에
여호수아기
• 7장 : 아이, 완전 봉헌물(HEREM), 아칸
레위 27,28-29; 민수 18,14; 21,1-3; 신명 13,18
• 8장 : 아이 정복, 에발 산의 제단
신명 11,29; 27,12-13
9장, 10장에서는 그렇게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우선 남부를 점령하고(우리가 알고 있는 예루살렘부터 남쪽 지역) 11장부터는 북부를 점령하는(스켐부터 시작해서 사마리아, 그리고 맨 끝쪽의 단에 이르기까지) 내용,
12장부터는 요르단 강 동쪽을,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땅은 요르단 강 서편인데 동쪽으로 점령지가 추가적으로 발생했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내용
여호수아기
• 9-10장 : 기브온, 가나안 남부 점령
• 11장 : 가나안 북부 점령, 점령의 완결
• 12장 : 요르단 동쪽 임금들
31명의 가나안 임금들
여호수아기
• 13장 : 남아있는 땅, 요르단 동편 영토
르우벤, 가드, 므나쎄
• 14-15장 : 요르단 서편, 유다(칼렙)
• 16-17장 : 요셉(므나쎄 + 에프라임)
• 18-19장 : 실로, 나머지 7지파
벤야민, 시메온, 즈불룬, 이사카르, 아세르, 납탈리, 단
(여호수아)
그리고 13장은, 남아있는 땅은 어떻게 가질 것인가?
14-15장은 요르단 강 서편
16-17장은 요셉 지파인 므나쎄와 에프라임에게는 어떤 땅이 돌아가나?
18-19장은 실로와 나머지 7지파에 관해서
여호수아기
• 20장 : 도피 성읍
• 21장 : 레위인들의 성읍
약속의 성취
• 22장 : 요르단 동편 지파들의 귀환, 제단
20장의 도피 성읍은 어떤 특정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자기가 무고하다고 느낄 때 도망가서 안전하게 도피할 수 있는 도피 성읍
도피 성읍은, A가 B를 어쩌다가 죽였는데 이스라엘의 법에서는 B의 친척중에 하나가 A를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의 고대 법입니다.
그런데 A가 B를 고의로 죽였다면 이스라엘법에서는 B의 친척중에 하나(피의 복수자)가 A를 죽이는 것이 이스라엘의 고대법입니다.
그런데 A가 B를 고의로 죽였다면 B에 친척중에 하나는 피의 복수자라고 부릅니다. 그 피의 복수자는 무조건 A를 죽일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습니다.
하지만 A가 B를 고의로 죽인것이 아니라 사고로 죽였다면 피의 복수자가 A를 죽이기 전에 A가 도망갈 수 있어요. 바로 도피성읍으로 도망갈 수 있어요.
도피성읍 중에서도 제일 안전한 곳은? 도피성읍은 예외 없이 레위지파에 속한 지역인데, 그 레위 지파에 속한 곳은 제단들이 있어요. 각 제단에 있는 뿔을 붙잡고 있으면 죽일 수 없어요.
그래서 탈출기에서 보면 제단을 만들때 뿔의 용도에 대해서 말하는데
제단의 뿔은, 제단에서 제물을 바칠 때 제물을 고정시키는 용도로서 쓰였을 것이고, 두 번째 용도는 누군가가 와서 제단의 뿔을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쓰였을 겁니다.
도피 성읍으로 도망가서 제단의 뿔을 잡은 사람은 피의 복수자가 따라 들어와서 죽일 수는 없습니다.(유다의 율법)
그리고 그 도피성읍으로 도망온 사람은 그곳을 벗어나면은 안됩니다. 벗어나면 피의 복수자가 와서 죽여도 그것은 결코 범죄가 아닙니다.
도피 성읍 안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가 도피성읍을 떠나서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시기는? 그 도피 성읍을 관할하던 사제가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을 읽으시면서 그 도망온 사람이 사제를 죽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불안 불안하셨는데 그 사람이 제단의 뿔을 잡고 사제의 보호를 받으면서 도피 성읍에 있다가 적어도 사제가 죽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규정이 구약 성경과 유다 전통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고대의 법은 그렇게 누군가가 죽어서 살인을 했다면 그 사람의 죽음에 피의 복수자가 살인자를 무조건 죽어야 한다는 법이었다면, 이제 하느님의 토라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 수 있는 길을(그가 일부러 죽인 것이 아니라면),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토라의 정신입니다.
사형제도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질문하셨습니다.
나는 사형제도에 대해서 반대한다! 에 손을 드시고 그리고 나머지는 잔인하다고 생각하셔서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기본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휴머니스트들이 반대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유입니다.
세속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 지금까지 사형제도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형을 받았는데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보니까 그 사형당한 사람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형제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은:
그런 이유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회개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그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건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여인이 죄를 지어서 사람들이 그 여인을 데리고 예수에게 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여인이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돌로 쳐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가서 더 이상 죄짓지 말아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은 돌아가서 죄를 지었을까요? 죄를 짓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그 부분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은 그 여인이 이제 회개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그와 같은 가능성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 교회의 정신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성장기를 보아야 한다고 하셨어요.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끝없이 하느님을 거스르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기회를 받으면서 하느님을 알아가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과 함께 보낸 세월을 글로 남겼습니다.
그들이 글로 남기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가 하느님을 믿을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글과 함께 그리고 그런 구약 성경에 있는 내용을 완성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함께 또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을 만나며 우리들도 신앙의 삶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앙의 삶 안에 들어온 우리는 잘 걸어왔습니까? 아니면 때론 넘어졌습니까? 우리는 때론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혹은 하느님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셨죠.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용기를 얻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람 안 변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인간은 변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런 질문을 하시면 많은 분들이 "인간 안 변해요. 신부님..."하고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에요." 말씀이 진리인 것처럼 말씀하신다고...
하지만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어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느님은 인간이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있는 겁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믿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를 안 믿어요. 하느님이 참 불쌍해요.
이스라엘이 최초로 점령한 지역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었어요.
단 지파는 필리스티아에게 빼앗겨서 이동하였고, 남쪽을 먼저 정복하고 북쪽을 정복함. 열두 지파가 전체 지역을 나누어 갖고 여호수아기 마지막 부분에서는 스켐에서 축제를 벌입니다.
우리가 사이좋게 힘을 합해서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우리가 사이좋게 그것을 나누어 가졌다는 굉장히 해피한 이야기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그런데 여호수아기를 판관기를 들어가면 1-2장에서 여호수아기의 역사가 압축되어 등장하는데 거기에서는 그 내용이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요. 그들이 함께 이 땅을 잘 정복한 것도 아니고,
르우벤이 요르단 강 동편을 차지하고, 다른 곳을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내가 내 땅을 차지했는데 굳이 내가 왜 가야 해? 난 전쟁 안 할래."라는 식으로 뒷걸음질 칩니다.
그런 내용들과 함께 판관기 1-2장을 읽다 보면 이 땅의 정복과 땅의 분할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똑같은 것을 보는데 이 부분을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기라면,
판관기 1-2장에서는 굉장히 그렇지 않은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어저께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진지하게 토론하던데...라고 누군가가 이야기하였어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핏대 대고 싸우던데."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사도들에 관해서 굉장히 비판적입니다.
루카 복음서는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함께 뒤이어서 읽다 보니 사도들에 관해서 굉장히 호의적입니다. 나중에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바오로가 예루살렘에 와서 사도들과 함께 이방인들의 할례라던지 여러 가지 이방인들이 유다의 전통을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될 것인가? 에 대한 토론을 하다가 그들 나름대로 일정한 합의점에 도달하고 바오로는 행복하게 이방인 지역으로 떠나갔다. 는 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인데 갈라티아서라는 바오로의 편지를 읽게 되면은 바오로가 아직 화가 나고 있어요.
바오로가 엄청나게 화가 나서 베드로에게 “위선자”라고 부릅니다.(당시에 최고의 비방하는 언어)
여호수아기에서는 그들이 행복하게 정복했고 행복하게 나누어 가졌다고 나오는데 판관기 1-2장에서는 " 그렇지 않았어, 사실은 정복도 쉽지 않았고 땅을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맛있는 케이크가 있고 형제가 있는데 그들 부모가 이 형제에게 어떻게 나누어 주던 불만이 생길 거예요. 가장 좋은 방법은 형에게 케이크를 나누라고 하고 동생에게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형은 사력을 다해 똑같이 나눌 것이고 동생은 먼저 선택할 수 있어 불만이 없을 거예요)
신부님께서 사목 하시는 동안 일곱여덟 번 형제들 관의 소송을 보신 적이 있는데 사이가 좋은 형제들도 부모님들이 자식을 너무 믿은 나머지 정리를 안 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시면 인간은 그런 욕망 앞에서 참 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시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자녀들에게는 늘 정의로운 분배를 해주어야 하고 공평한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대해주어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는 적어도 공평하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라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이제는 판관기로 넘어갑니다.
판관 : 히브리말로 샤팥인데 그 샤팥은 "나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옳고 그름을 나눈다라는 의미입니다.
판관이라는 말은 샤팥이라는 어근에서 나와서 "쇼펱"이라 하고, 그 앞에 "음"이 붙으면 "미슈팥'이 되어 우리말로는 "공정'이라고 합니다.
판관, 쇼펱은 미슈팥, 공정을 행해야 한다 : 매우 중요한 성경의 정의
히브리말로 배우다는 표현은? 라맛이라고 합니다. 그 라맛 앞에 "트"가 붙으면 명사가 되어 "배움"이 됩니다. 바로 탈무드예요.
어떤 동사 앞에 "ㅌ" "ㅁ"발음이 오면 히브리말에서는 그 말이 명사화됩니다.
우리말에서도 "므" 발음이 마지막에 오면 명사가 되기도 합니다 :
보다 : 봄
듣다 :들음
판관기에서 판관들의 일차적인 기능은 재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재판하는 곳이 법정이 아니라 성문 근처(성문 앞)였습니다.
히브리 남성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아침 먹고 성문 앞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면 그날의 뉴스를 들을 수 있고 임금의 명령등을 들을 수 있었어요.(일종의 게시판)
그리고 누군가가 잘못했다는 고발도 성문 근처에서 열립니다. 그때에는 판관들이 등장해서 누군가의 고발 또는 진술로 그 사람이 받게 될 벌과 혹은 상들이 정해집니다.
누군가가 정말 나쁜 범죄를 지었고 그것이 판관들의 심문을 통해서 밝혀졌다면 그는 성문 밖으로 쫓겨납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보면 포도원 주인이 하루 일꾼들을 찾을 때도 성문 앞에서 만나게 됩니다. 성문 앞은 사람들이 모이는 집합의 장소입니다.
판관기
판관?
- 대판관과 소판관
판관 1장의 문제
판관시대에서 왕정시대로 :
- 임금의 정치적 -종교적 역할
판관기를 읽다 보면 판관과 소판관이 나옵니다.
대판관 : 그 판관들의 전기가 자세하게 기술된 사람들
소판관 : 그들의 기록은 짧습니다.(누구는 누구의 아들로 태어나 판관으로 일하다 죽었고 묻혔다는 내용으로 짧게 서술)
그런데 대판관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사람이 판관으로서 활동한 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대판관들은 소위 지파의 영웅들이었는데, 이스라엘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데 그 대판관이 하느님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용으로 불리기는 판관으로 불리는데 실제로는 장군들 같은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따라서 대판관은 과연 판관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런 전기적인 서사가 끝나고 나서 그들은 분명히 지파에서 판관의 역할도 수행했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주석학자들은 추측합니다.
판관기의 구조
• 1,1-2,5 가나안 정복(?)
• 2,6-3,6 판관시대(신명기 설화)
• 3,7- 12,15 대판관과 소판관
• 13-16장 단의 삼손
• 17-18장 단 지파의 이주
• 19-21장 벤야민 지파의 경계
1,1-2,5절은 여호수아기와는 달리 매우 부정적인 가나안 정복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왜? 여호수아기의 해피엔딩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았겠는가? 하는 갈등의 여지를 담고 있지만, 그 여호수아기의 해피엔딩을 그대로 받았다면 판관들이 등장할 원인이 없어집니다.
영웅은 난세에 등장하고 난세는 정복과 분배의 과정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니까요.
가나안 정복의 부정적인 서술은 판관들의 등장을 준비한 것인데, 여호수아기와 판관기 1-2장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차이는,
판관기 1-2장에서는 그리하여 이스라엘에서는 이 지역을 정복했는데 그 정복한 지역의 사람을 전부 다 쫓아내지는 않았다. 그들이 그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내용들이 판관기에서 많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아, 이것들이 나중에는 문제가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2,6-3,6은 판관시대, 신명기 설화
3,7-12,15은 대판관과 소판관의 이야기
13-16장은 워낙 분량이 많아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삼손과 데릴라"
얼마나 특별했던지 영화로까지 만들어졌습니다.
17-18장은 단 지파가 처음에는 정착을 했다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땅을 뺏기고 북쪽으로 가서 정착하는 이야기
19-21장은 조금은 흉측한 일을 저지른 벤야민 지파에 대한 징계에 관해서 이야기
대판관과 소판관을 보자면,
대판관 소판관
• 3,7- 9,57 대판관
- 오트니엘(유다)- 아람, 에훗(벤야민) - 모압, 삼가르- 필리스티아,
드보라+바락(즈불룬과 납탈리) -가나안, 기드온(므나쎄/ 오프라)- 미디안
- 아비멜렉과 요탐
• 10,1-5 소판관
톨라(이사카르), 야이르(길앗)
• 10,6-12,6 대판관
-입타 -암몬
• 12,7-15 소판관
입타(길앗), 입찬(베들레헴), 엘론(즈불룬), 압돈(피르아톤)
대판관과 소판관이 번갈아가면서 등장하는데 이 이야기들의 패턴이 있습니다. 특히 대판관의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그곳에서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들은 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까요?
야훼의 호칭 중에 하나인 "야훼 쪄바옽"에서 "쪄바옽"은 만군, 군대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쪄바옽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만군으로 표현하고 야훼 쪄바옽을 만군의 주님(군대들의 주님)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야훼의 특기는 군대를 소집하고 운영하는 것으로 하늘의 군대를 소집할 때도 아직은 다신적인 신관 안에서 야훼가 하늘의 군대를 소집하는 신이고, 이스라엘에 군대를 소집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에게는 군대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농사를 잘 짓게 해주는 신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알이었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그 바알이라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또 축제에도 참석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님께서 사제 생활을 하시면서 교우들을 통해 경험하신 일화를 들려주셨어요. 우리도 그처럼 본인은 천주교 신자이고 형제분은 개신교 신자이고 친척 중에 한 분은 절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다 가족 중에 누군가가 돌아가셨는데 천주교에서 장례 미사하고 개신교에도 불교에서도 정성을 드리는 경우가 있으세요. 그리고선 "어디 한 군데는 걸리겠죠?" 하는 마음으로....
다종교의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 볼 것인가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가끔 등산을 하면서 사찰을 발견할 때가 있는데, 인사를 해야 한다! 하면 안 된다! 각자 여러 생각으로 행동하실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 종교의 신자들처럼 불상들을 우상이라고 부수고 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적어도 신명기 신학의 관점에서 바알을 섬기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가나안의 신을 섬기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자 이스라엘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거나, 이스라엘이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야훼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판관을 내세워 이스라엘 각 지파가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일정한 패턴으로 매번 그들은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그래서 하느님을 모르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에게 이런 불행이 닥쳤고, 그들이 하느님께 부르짖었다. 하느님께서 어떤 판관을 보내셔서 판관이 그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판관기 후반부에 가면서 "그때에는 아직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제멋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런 일이 생겼다."말씀이 서너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것을 통해 판관기의 저자는 "임금이 있으면 괜찮을 거야. 임금을 두면 백성들이 제멋대로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문제가 해결될 거야."라는 생각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판관기 후반에서는 어떤 신학이라고 발견할 수 있느냐면,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의 미래상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제도적으로 왕정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로서 임금이 있으면 백성들이 다른 신을 함부로 섬기지 못하게 되고, 그리하여 충실한 야훼 하느님의 백성으로 가나안 땅에 자리 잡으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좋은 날만 있을 겁니다!
판관기 저자, 그리고 신명기학파의 생각을 전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왕정 제도가 이스라엘에 들어온 후 그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가?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고 그리하여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어떤 시련을 맞이하였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강복해 주셨어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