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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을 꿈꾸었던 아버지] 40계단에서 내려오다 보면 만나는 전찻길의 모서리 지점, 옛 민주중보사 옆에 그의 집이 있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으로 귀환 동포와 피난민이 끝없이 밀려들던 시절. 주택난, 식수난, 구직난에 유엔탕,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했던 그 시절이지만 야시장, 아이스케키[아이스케이크] 가게[삼각당] 등 중앙동에 관한 즐거운 추억도 많다. 그러나 1953년 이른바 ‘부산역전 대화재’로 그리운 추억의 장소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의 중구 메리놀병원 근처 판자촌에서 시작된 화재가 당시 중앙동에 있던 부산역까지 번졌을 정도이니 중구 일대가 온통 불바다였던 셈이다. 화재 후 아버지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토성동 한국전력 중부산지점 맞은편에 있는 ‘김해정미소’를 매입하였다. 철부지의 투정이지만, 토성동 시절은 중앙동에 비해 모든 것이 초라하였다. “우리는 중앙동 큰 집에서 살다가, 그 집이 부끄러워서 못 들어가는 거야. 공설 운동장에서 출발한 전차가 대학병원 앞에서 돌아오고, 서면에서 출발한 거는 충무동으로 돌아 들어온다고. 그러면 나는 그게[전차] 지나가고 난 뒤에야 [집에] 쫓아 들어간다고.” 토성동에서의 불편하고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2년 후 하단으로의 이주는 어린 백광덕에게 그저 탈출의 홀가분함으로만 기억될 뿐, 에덴 공원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의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의 묘를 쓴 것 외에도 농사를 짓고픈 바램도 있어, 1955년 에덴 공원 밑 본가를 매입하여 아버지가 먼저 와 계시다가, 1956년 에덴 공원 일대의 땅을 모두 매입하고 가족이 모두 이주하였다. 당시 아버지가 법원에 에덴원을 등록할 때 그 설립 목적으로 “첫째 유원지 조성 사업, 둘째 유휴지 개척 사업, 셋째 각종 초목 및 원예 사업, 넷째 가금·가축 사업, 다섯째 경로·육영 사업” 등을 내세웠던 것을 백광덕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목적에 맞게 아버지는 땔감용 벌목을 감시하고, 식목과 화초를 재배하였으며, 낙동강으로부터 수로를 연결하여 못을 만드는 등 정성껏 ‘에덴동산’을 가꾸셨다. 이렇듯 기독교 정신을 몸소 실천한 백 장로는 세 살 때 아버지[백광덕의 할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성장하여 자식 사랑이 극진하였다. 그는 자식이 하고자 하는 것을 막거나 나무라시는 분이 아니었다. 따라서 아들 백광덕이 아버지의 ‘에덴동산’에서 벌이게 되는 ‘문화 사업’에 대해서도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레코드를 던지고 놀았던 어린 시절] 백광덕이 기억하는 또 한 번의 계기는 4·5학년 때의 동광국민학교 은사님에 관한 것이다. “내가 볼 때는 그 선생님은 한이 맺혔던 것 같애. 안 그러면 해방이 갓 되었는데, [우리말] 동요를 그렇게 [많이] 알 수가 없다고. 「따오기」니 「동무 생각」이니 이런 노래들을 전부 그 선생님께 다 배운 거라고. 우리에게 동요를 얼마나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지금도 나는 그 선생님 존함을 안 잊어 버렸다고. 배상욱 선생님이시라고, 그분을 한 번 뵈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뵐 수가 없네.” 지금도 성함을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던 당시 음악 선생님은 특별히 민족의식을 강조하지는 않으셨지만, 어쩌면 되찾은 우리의 정서를 노래를 통해 어린 제자들에게 심어 주고자 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이때부터 백광덕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학예회에서 독창을 곧잘 하였다. 중학교 재학 시절에는 6·25 전쟁 탓에 음악을 접할 여유가 없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음악과 함께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레코드를 접하기 시작한 시기는 대학 진학 후였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탓에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진학하였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전공인 신학 공부보다는 종교 음악에 심취하여 연세대학교 합창단 활동에 열중하였고, 고향에서 부쳐준 하숙비로 레코드를 사는 등의 탈선[?]으로 음악에 대한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