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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오기 위한 먼 여행
- 오현정 시집 몽상가의 턱
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1. 여행, 살아있다는 증거
떠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어딘가 떠나가기 위해 울부짖는다”(「우포늪」)는 말에 붙들려, 무작정 같이 울게 되었던 어느 날, 내가 왜 우는지 몰라. 울고 있는 이 마음이 어디로 떠나갈지 몰라. 모든 곁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내 우는 얼굴이 어떤 표정으로 일그러지고 있는지. 그 모르는 얼굴을 만져보고, 뜨거운 볼에 맴도는 감촉도 쓸어내려 보고, 마냥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나는 분명 살아있는데, 살아 있다는 것이 전부인 어느 하루에 서표를 접어 다시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떠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나를 몰아넣는다는 것. 여기가 아닌 저곳으로 움직인다는 것. 소위 우리가 ‘여행’이라고 불러보는 것. 그러나 그 여행이라는 말이 어디 쉬운가. 어느 시인에게는 ‘살아있다는 것’과 ‘울음’을 담보로 해야만 가능해지기도 했던 여행.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래, 근간 오현정 시집에 관한 이야기다. 곱씹어 물음에 물음을 달다며 묻고 또 묻다가, 다시 시집을 펼친다. ‘여행’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왜 비단 여행이어야만 했는가.
오현정의 이번 시집 몽상가의 턱은 외형상 대다수 시편들이 여행시의 형식을 띤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개 여행을 소재로 하는 시편들의 특징이 그러하듯, 오현정의 시 또한 일상에서 촉발되기 어려운 낯선 공간의 기류들과 함께 그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상들과 시적 화자의 조우를 통해 정념이 촉발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바람집시」, 「승냥이가 만든 명작」, 「내 것도 싱싱」, 「하얀 구두의 집」, 「초원의 밤하늘」, 「환인의 달빛」 등 이 시집에 수록된 수많은 시편들은 이국의 자연 공간이나 이국에서 만난 사람, 인공의 건축물이나 역사 등이 기입된 유물들을 통해 정서가 촉발된다. 그곳에 시공간의 병치가 일어나면서 시의 입체성이 보전되는 형식인 것이다. 이는 이미 해설 「사랑과 지혜로 지은 집」에서 철학적 사유와 결합을 통해 ‘미학과 철학의 적절한 조화’로 언급되기도 했거니와, 이러한 형식적 의장을 통해서 오현정의 시집을 읽어가다 보면 대체로 수긍이 되면서도, 무언가 조금 덜 가닿는 듯한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어, 왜 여행이어야만 하는 것인지 도통 모르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현정의 ‘여행시’이란 ‘지성’(철학/미학)을 딛고 일어서는 그 무엇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다른 정서가 유입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이라는 행위는 어떤 것인가. 여행(旅行)의 어원은 동양에서는 군사의 무리, 즉 깃발 밑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형상을 뜻하는 ‘여(旅)’에서 비롯되어 인간 무리들이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는 설과 ‘方’과 ‘刻’의 형상이 의미 결합하여 사람이 여러 방위로 움직인다는 뜻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전자든 후자든 그것들은 모두 ‘움직인다’는 의미역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서양에서는 어떠할까. ‘travel’의 어원은 프랑스어 ‘travail’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고통’을 의미한다. ‘트라베일(travail)’ 어원은 라틴어 ‘트라팔리움(tripalium)’으로 로마군의 고문 기구를 칭했던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서양에서의 여행이란 ‘고생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여행에 관해 동서양의 입장 차를 논해보면 꽤나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동양에서는 주체가 움직이는 행위 그 자체에 의미의 방점을 찍고 있는 반면, 서양은 주체가 머물고 있는 집이라는 공간 즉 여행이라는 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를 토대로 상정해놓고, 여행의 행위가 고통을 수반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여행이란 ‘여행을 하지 않음’의 의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사실 동양의 경우라도 유사할 수 있다. 군사들이 깃발을 향해 모이는 목적에 관해서 생각해보자면 단순히 움직임만 뜻하고 있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목적을 가진 움직임’이란 목적이 달성되고 나면, 즉 전쟁이 끝나고 나면 다시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온다는 상황까지를 종합적으로 내포하기도 한다. 그러니 동양이든 서양이든 여행이란 가히 죽음을 담보로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을 점유하고 나서 다시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오는 총체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자신의 집을 더 낱낱이 들여다보는 행위임에 틀림이 없다.
2. 여행 토대의 의미
오현정의 시편들에서 여행이라는 행위 토대는, 시적 자아를 죽음에 가까운 낯선 정감으로 밀어 넣는 행위임과 동시에, 여행을 통해서 일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을 더욱더 공고히 하기 위한 촉발 행위이다. 즉 여행에서 느낀 철학이나 미학적 사유는 이상이 투영된 ‘지성의 매트릭스’가 아닌 현실을 되돌아보기 위한 ‘자아 세우기의 매트릭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현정의 ‘여행 모티프’는 “막무가내 저 아낙을 포근하게 안아주는/ 찡한 모성애”(「자화상 그리기」)와 같은 젖은 감성들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이고, 시집의 여는 시 「오늘」에서처럼 “지금이 가장 좋은 때”, “오늘이 내가 가장 좋은 때”와 가는 현재 지향적 시간성을 끝끝내 가청화하는 자기 회귀적 시작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현정이 형상화해내는 물상들은 과거를 논하고 있으되 현재를 복권하기 위한 과거이며, 이국을 묘사하고 있으되 현실의 통점을 더 낱낱이 드러내기 위한 방법론이 때가 많다. 가령, 오현정이 형상화해내는 ‘꽃’의 의미를 소환해보자.
겨울에서 봄을 기다리는
암고양이 혈의 심줄에서 붉은 동백이 울었다
안나 막달레나는 미뉴에트를 들으며 바흐의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셔터처럼 이구동성으로 처지는 새신부의 꽃들
붉은 잎에 덮여 땅은 뜨거워지고
꽃들의 이마에서 신열이 떠나지 않았다
새신부의 가슴에 꽃씨를 심어놓고
봄에서 여름 사나운 파도와 싸우는 사나이들
여름에서 가을을 일구는 천둥의 거친 발자국들
들녘에 혼자 저무는 저녁은 모두 꽃이 되고 싶은 거다
금빛 바라화
억만 겁을 돌아 돌멩이 하나 꽃피워 미소 짓고 싶은 거다
- 「꽃 한 송이」 전문
인용한 「꽃 한 송이」은 문장 수준에서만 살펴보더라도 여러 시공간들이 한 곳에 병치되어, 하나의 집합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연에서부터도 그렇다. “겨울에서 봄을 기다리는/ 암고양이”와 “암고양이 혈의 심줄에서” 피었다는 “붉은 동백”은 기다리게 되는 봄의 정감을 품은 의미역과 울고 있는 암고양이의 긴장한 핏줄이라는 두 의미역으로 꽃의 의미를 양분화한다. ‘기다리게 되는 시간’과 ‘울음을 품은 사연’, 혹은 ‘몸의 긴장 상태’가 꽃이라는 형상으로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한데 그 다음 연으로 이어지는 “안나 막달레나는 미뉴에트를 들으며 바흐의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라는 구절에서, 자칫 꽃의 의미는 묘연해진다.
주지하듯 안나는 바흐의 두 번째 부인으로 바흐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러일으킨 예술적 동지이자 당대 걸출한 성가대 소프라노였던 여성이다. 지병으로 죽은 첫 번째 아내와 달리, 안나는 바흐와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고, 바흐는 그 아내를 위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한 소곡집」(Clavier-Bchlein vor Anna Magdalena Bach)’을 작곡했을 정도로 그들의 금슬은 남달랐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꽃 한 송이」에서 봄과 울음, 그리고 꽃이 가진 상징들과 안나와의 관계는 과연 어떤 점에서 조우되고 있는 것일까. 바흐에게 뮤즈를 자청하다 못해 바흐의 곡을 일부 수정해줬던 안나의 생명력 넘치는 창작력이 꽃의 생명성과 접촉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늘 임신 중이었다던 안나의 몸과 겨울에서 봄으로 이행되는 계절의 정서감이 대칭되면서 꽃의 상징을 더더욱 증폭하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미뉴에트’가 가지고 있는 짧은 보폭의 박자감과 그 스텝들이 가진 텐션이 3연, 4연에서 기술되고 있는 계절 주기와 맞부딪히며, “새신부”의 일생을 형상화해내려는 시도였을까. 혹은 “봄에서 여름 사나운 파도와 싸우는 사나이들”이라거나 “여름에서 가을을 일구는 천둥의 거친 발자국들”과 같은 구절로 대표되듯 이행된 세계에 대한 미감과 그 저항성을 상징하려는 시도였을까? 물론 “안나”나 “붉은 동백”, “새신부”에게 촉발되고 있는 정감을 상상해보는 일은 앞서 기술한 것보다 더 많은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은 물음들은 답이 없기도 하거니와 그 의미가 무엇이라도 괜찮을 듯하다. 분명한 것은 이 단출한 시편에서 여러 다발의 질문들이 입체적으로 촉발되고 있으며, 독자에게 그 몫이 온전히 수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데 오현정의 시는 여기서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다. 시 말미에서 등장하는 “금빛 바라화” 또한 비범한 시어가 아니겠는가. ‘바라화 고사’ 혹은 ‘염화미소(拈華微笑) 고사’라 칭하는 불가의 설화까지 상기해보아야만 오현정이 그려내는 꽃에 가닿을 수 있으니, 그 행간의 보폭이 얼마나 넓게 이루어진 것이 가히 짐작해 볼만하다. ‘석가염화시중(釋迦拈華示衆)/ 가섭견화미소(迦葉見華微笑)’라 하는 불가의 물음은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제자 가섭만이 그 꽃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뜻으로 통하기도 하지만, 왜 석가는 수많은 꽃들 중 연꽃을 들었으며, 과연 가섭이 웃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불교 선종(禪宗)의 대표적 화두로 남아 있다. 다만 그 꽃이 연꽃이었다는 것에서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의 존재를 대중들에게 말하기 위함이 아닌가, 하는 뜻이 모아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쯤 되면 꽃을 통해 경유한 앞선 모든 정감들이 낱낱이 조각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동일화나 알레고리가 되는 것보다 의미의 복층이 넓어지면서 그 외연이 불연속적으로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 한 송이」 말미에 “억만 겁을 돌아 돌멩이 하나 꽃피워 미소 짓고 싶은 거다”라고 하는 시적 진술을 여러 번 곱씹어 보면 오현정이 하고 싶었던 참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알 것도 같다.
시인은 “꽃들의 이마에서 신열이 떠나지 않았다”라고 했다. 즉 꽃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고통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새신부” 가슴에 심어져 있던 꽃이 “파도와 싸운 사나이들”이나 “천둥의 거친 발자국”들로 훼손당하면서도 여전히 피어나고 있는 형국도 그러하고, 바흐만 이름이 남고 안나은 기억되지 않거나 보조적인 인물상으로 남아있게 되는 역사도 그렇다. 미뉴에트처럼 조심스러운 보폭으로 살아가는 주체의 삶이란 삶 그 자체가 ‘긴장’이고 ‘절실함’일 것이다. 그것은 “봄을 기다리는/ 암고양이 혈의 중심에서”부터 자극되는 ‘몸의 신경질적 사태들’이자 끝끝내 “들녘에 혼자 저무는 저녁”과도 같이, 혼자서 아무리 소리쳐본들, 달라질 것이 없는 일상의 고단함들이다. 그러니 “억만 겁을 돌아”와 피어난 꽃이란 얼마나 비범한 꽃이겠는가. 그것은 ‘꽃’이되 ‘돌’이며 ‘돌’이되 다시 ‘꽃’인, 존재이자 허상인 존재다. 다시 말해, 무위의 세계를 향하는 그 입구에 시적 화자가 놓여있다는 것. 꽃을 통해 촉발되었으나 시인의 ‘지금 여기’는 시간도 없어지고 공간도 없어진, 다만 혼자인 세계로의 입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인용한 「꽃 한 송이」가 종래의 여행시편들과 달리, 여행지의 이국 정감이 덜한 시편이지만, 여행시 포함한 다른 시편들도 이와 같은 미감을 같이 공유하고 있다. 대개 동원된 지성적 모티프들은 동서양의 텍스트들을 가로질러 횡단하고 있으며, 과거 사건이나 정보들을 재구성하면서 현실의 공간성을 무화시킨다. 게다가 과거 지형적 정보들뿐만이 아니라 미래적 지향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가령 「페파와 함께 춤을」이나 「호미곶에 떠다니는 만화가」, 「예지의 옷을 입고」, 「두고 온 채송아」 등은 각각 감정로봇, 웹툰, 스마트폰 상의 점괘, 3D 인간 출력 등을 소재로 삼으며, 과거, 현재, 미래를 잇는 시간의 복층화 전략까지 수행된다. “내일이란 약속을 믿는 자보다 고통 속에서 애쓰며 간구하는 사람에게 명중되기 쉽다”(「활과 화살」)는 진술처럼 시인의 ‘시간관’과 ‘공간관’은 고통에서 도약되어 내일의 진보를 내다보려는 힘찬 의식적 움직임으로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현정의 시는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감성과 지성이 현실 공간에서 모두 함께 교차되며, 은폐된 자기 현실을 조금씩 들춰내며 다시금 봉인하는, 그런 방법론적 미감을 보이고 있다.
3. 벼랑이라 부르는 사랑
그렇다면 여기서 자기 현실의 결이란 어떤 심사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마도 그 심연의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한데 시인이 그려내는 사랑 또한 비범하기가 그지없다. 다음 구절들을 상기해보자. “한 사람을 가슴에 들이기 위해 온몸에 종소리를 흔드는/ 여자의 하얀 구두는 젖빛으로 물든 긴 편지를 읽는다.”(「하얀 구두의 집」)라거나, “사랑은 가장 초라한 것, 가장 더러운 것, 가장 비참한 것도 물살에 섞으며 간다”(「마지막 연애」), “딴청 피우던 그대의 일기장이 흠뻑 깊어지지요”(「명약을 보냅니다」),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내 안에 사는 또 다른 날개” (「당신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떠나는 것은 모두 까닭이 있네/ 너무 춥거나 뜨겁거나 마음 닿지 못해서네” (「꽃시계, 그녀」), “벼랑 끝에서도 한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용기”(「사랑은 지혜를 부른다」) 등과 같은 진술들을 소리 내서 읽어보자면, 오현정이 체화하고 있는 사랑의 정념이란 뜻밖에도 혼돈과 애증으로 가득 차 있는 형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즉 화해의 시선이 아니라 파토스의 세계인 것이다.
그때 만나자던 그 여자
얼음 녹고 봄바람 아지랑이 놀 때
그때 보자 미루던 그 남자
그를 만나도 도무지 불꽃이 튀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모바일 메신저 프로필에
연애금지구역이라고 선언한다
당분간 연애 안 해, 사랑도 안 해
누군가를 안다는 건 글을 잘 쓸 수 있는 비결
절필보다 절실한 자존이 무너지지 않으려
이 남자는 어떨까 저 여자는 다를까
눈 맞춰 봐도 무의미한 시간낭비
불감증에 걸린 사랑의 깊이
치유를 위해 당분간 에리히 프롬만 데이트 허용
못하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안해
잘생기고 돈 많고 성격 좋은 남자, 예쁘고 상냥한 부자 상속녀
나타나지 않으면 인공지능 애인 봇이 생길 때까지
당분간 연애 안 해, 당당하게 셔터내리고
폼 나게 못 살면 사는 게 아니라는 그들의 푸른 날개
혼자 밥 먹고 혼자 커피 마시고 혼자 하늘 길 간다
피곤하게 족쇄 채우는 너만 아니면 다 좋다는 그 남자
혼자 술 마시고 혼자 게임하고 혼자 죽부인 껴안고 잠잔다
한 울타리 안에서 샘이 솟는 둥지
그녀나 그도 그곳에서 쉬고 싶을 거야
사랑도 일도 쉼표에서 말줄임표로 가고 싶을 거야
지금은 혼의 안테나를 첨탑에 세우는 중
둘이는 싫어 셋은 더 더욱 사절, 혼자가 좋아
혼, 혼, 혼의 시절이다
- 「혼, 혼, 혼의 시대」 전문
인용한 시에서 누차 반복되고 있는 ‘당분간 연애를 안 한다’는 선언은 정말 사랑을 이제 안 하겠다는 선언으로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유행가 가사와 같이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힐빙 친구」)라고 다른 시편에서 발화하기도 했거니와, 시집 안의 시편 전체에 포진되어 있는 사랑의 정념들 또한 오현정의 시가 사랑에서부터 도약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에 대해 불타오는 ‘정열적인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한정한다면, 오현정의 시에서 나타나는 사랑은 그것만을 한정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변별점을 띤다. 시인에게 사랑의 사태란 이별이나 고난, 질투, 부질없음, 신뢰, 자기애 등등 여러 면면들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열렬했던 삶의 다른 이름이다.
인용시의 시적 정황은 우선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었던 남녀가 소위 밀어내기를 하면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에 맞춰져 있다. 여자는 자신의 메신저 프로필에 “연애금지구역”이라는 공개적 메시지를 띄우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염탐밖에 할 수 없는 미진한 소통을 하고 있는 중이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체로 은폐되어 있으나, 일방적으로 혹은 대대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밀어내고 있는 상황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남자에 대한 거부권을 말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 남자만 읽으라고 쓴 프로필이라 할 수 있다. 즉 외연 상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으나 어떤 특정한 남자만을 위해 쓴 메시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사람만을 준비한 메시지’와 같은 밀어내는 감정이란 사랑의 영역 속에 포섭된 또 다른 사랑의 감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별하는 것조차 사랑의 한 부분이듯이, 한 쪽에서 미련이 남고 또 한 쪽에서는 마음을 다잡고, 서로 그 감정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어떤 방식으로 각각이 이해하든 오해하든 모두 상관없이, 이런 거리두기의 행위야말로 다시 또 사랑이라고 부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시적 화자에게 애절하게도 맺혀 있는 이런 감정의 기미마저도 화자는 인지하기 싫다는 듯 “인공지능 애인 봇”과 같은 신세계의 감정에 대해 애착을 갖거나, “혼자가 좋아” 혼자가 좋다고, “혼, 혼, 혼” 말놀이를 하며 처량한 자기애의 과정을 풍자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관계를 배척하고 혼자서 울타리를 치겠다는 ‘혼’의 넋두리는 묘연하게도 혼자를 뜻하는 것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섞이는 혼(混)이었다가, 혼인하는 혼(婚)이 될 것도 같고, 혼탁하고 몽롱한 정신의 혼(倱)이 될 성싶다가도, 자기 존재와 영혼(魂)을 들여다보며, 빛을 획득하는 빛나는 혼(焜)이 될 것도 같다. 때문에 오현정의 선언하는 “혼의 시대”는 외로움이 아니라 외침이며, 홀로 은폐된 정서 속으로 침잠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달관하며 풍자적으로 무수히 튀어 오르는 심사를 누차 내뱉고 있는 운동성, 즉 자기 개방을 실현하는 건전함으로 작용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운동성을 교집합으로 ‘사랑’과 ‘여행’의 모티프가 맞물리기까지도 한다. 사랑 또한 여행처럼 몸과 정념이 움직이는 행위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오현정의 시편들이 정서의 한 방향만을 고수하며 쏠리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 ‘사랑의 결’이라는 것도 다양한 입체성을 획득하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시편에서 “완성할 수 없는 내면의 경經” (「연분홍빛 성당, 비에 젖다」)을 들여다본다거나 “어리석었지만 지혜를 찾아다닌 詩人”(「오늘」)으로 “오래 살기 전에 잘 죽는 법을 배워야 하는 책무”(「성모마리아와 참새」)와 같은 반성하는 모습이 드러난 결의들만 보아도 그렇다. 오현정에게 사랑의 촉발과 그 안에서 진자 운동하는 시의 촉수란, “죽은 돌멩이가 다시 숨 쉴 때까지 노래를 부르”(「마지막 연애」)는 생명의 발화점이며 그 발화 행위는 낭만주의 시인 프레세롄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 한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바꿀 수도 있는 위대한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사랑을 지혜라고 믿기도 하는 것이다. 때문에 프레세롄과 자신을 동일화하기도 하면서, 오현정 또한 처절한 사랑을 밑거름으로 삼아, 프레세롄처럼 서정과 민족성과 풍자를 오가는 그런 시를 창작하고자 열망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의 사랑을 그저 세속적 ‘사랑’이라고 고정되게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사랑이되, 일종의 죽음 직전의 모든 것처럼 벼랑이었던 사랑! 삶의 역동성이다. 그리고 다시 그 작은 깨달음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4. 아무런 준비도 없었는데
바람에 맡긴 몸이 시간 밖에서 물결진다. 이슬 맺힌 보리수는 돌아서기 아쉬운 저녁 눈동자에 잎눈을 넣고 나란히 걷는다. 구름 속 마지막 붉은 너울이 바위에 걸려 있다. 애끓는 내력을 보듬고 저물녘 연기는 고단한 발을 세심정에 풀어놓고 등짐 무거운 마을 넘는다.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할 소나무 한 쌍, 회오리바람을 감아 안는다. 팔베개로 눈 뜨는 내생의 아침을 위해 짙어지는 이파리에 애잔한 달무늬를 띄운다. 속리의 심장이 해를 품고 억만 광년을 통과 중이다.
- 「속리의 아침」 전문
나는 이제 시집을 덮고 눈을 감고 바람을 맞는다. “먼 후 일 얘깃거리가 안개 속 터널을 빠져나”(「옥수역을 지나가는 독백」)오는 상상. 바람은 “수억 년 전에는 바다였을 지금 여기에서/ 바닷새 모양의 소금비누 하나 내 손안에 넣어”(「소금호수 가는 길」)보는 느낌처럼. 과연 무엇을 보았고 나는 어디로 갔는가. 아주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 위한 긴 여행을 한 것 같다. 속리(俗離). 속세를 떠난다는 그런 말처럼. 오현정이 보여준 ‘여행’과 ‘사랑’은 먼 길을 되돌아 와 다시 ‘지금 여기’에 주어진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누가 내 몸에 화인을 찍었”(「가시연꽃」)을까? 그래,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할”(「속리의 아침」) 내일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