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 정명훈(51)을 좋아하는 한국 팬이 많다. 2004년 신년음악회가 열린 예술의전당 콘
서트홀엔 단 한 곳도 빈 자리가 없었다.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가 끝나자 박수 갈채가 2∼3분
동안 홀을 메웠다.
정명훈은 스승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특기였던 브람스 교향곡 1번을 10년 넘게 연구하며 자
신의 브람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브람스가 21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1번은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정명훈도 2004년을 맞은 조국의 동포들에게 희망을 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명훈은 서울에 오면 북한산 자락에 있는 구기동 빌라에 머문다. 같은 층에 누나 정명화(첼
리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씨와 처형이 산다. 원래 신년음악회 다음날 빌라에서 인터뷰
를 하기로 약속했으나 정명훈의 가족 행사 때문에 장소가 바뀌었다. 인테리어에 조예가 깊은
부인이 꾸며놓은 집 구경을 하고 인터뷰가 끝난 뒤 이른바 ‘정명훈 요리’를 감상할 기회가 오
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으나 어그러져 아쉬웠다.
유럽에서 주로 활동하는 정명훈은 프랑스 프로방스에도 그림처럼 아름다운 집을 갖고 있다.
집 앞으로는 올리브 농장이 펼쳐지고 뜰에는 요리 재료를 재배하는 텃밭이 있다.
인터뷰는 구기동 집 근처 가나아트센터에서 진행됐다. 같은 장소에서 한 시간 앞서 YTN 백지
연씨가 정명훈을 인터뷰했다. 중복되는 질문을 피해 보려는 생각에서 “방청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백씨는 “방송국 스태프 외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긴장한다”며 완곡하게 사절했다.
정씨가 인터뷰를 하는 동안 바로 옆 레스토랑에서는 부인 구순열씨가 재즈 기타리스트인 둘
째아들 선(21), 이모인 박용길 장로(고 문익환 목사 부인) 등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
시간 가량 기다리자 정명훈이 백지연 인터뷰를 끝내고 우리 자리로 왔다.
“세계 수준 되려면 20년 걸린다”
-어제 예술의전당에서 신년음악회 지휘하는 걸 봤는데요. 감동적이었습니다. 브람스 교향곡 1
번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클래식 음악은 기막히게 좋은 곡이 너무 많아 고르기 힘들어요. 한국의 오케스트라를 발전시
키는 데 도움이 되는 곡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작년에도 지휘를 해봤습니다. 브람스의 곡을 리허설하면서 단원들과 깊이있는 음악적 소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틀간 리허설 했는데 기대한 것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연습기간이 짧고 자
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가 아닌데도 연주가 아주 잘됐습니다.”
-한국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세계 수준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세계 수준과는 아직 비교할 수 없지요. 한국에는 개인적 재능이 탁월한 음악가가 많지만 오
케스트라는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해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옆자리에 있던 형 명근씨가 “너 그 이야기 할 때는 조심해야 돼”라고 영어
로 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명근씨는 서울에서 음악공연 비즈니스를 하는데 명훈의 한국·일
본 지역 매니지먼트를 겸하고 있다.
“오케스트라 하나를 제대로 키운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지휘자도 탁월해야 하고
서포트하는 매니지먼트도 중요합니다. 정부나 대기업에서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키우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매년 올 때마다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어요.”
-세계 수준에 비해 한참 미달이라는 말입니까.
“그렇죠.”
-한국 오케스트라 발전을 위해 일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책임지는 자리는 힘듭니다. 88올림픽을
2년 앞둔 1986년에 정부에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줄 수 있겠냐고 묻더군요. 절대 불
가능하다고 답했죠.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더라도 세계 수준의 오케스트라를 만들려
면 20년이 걸린다고 말했죠. 일본 수준까지 가려면 10년이 걸리고요. 지금 다시 그 질문을 받
더라도 똑같이 말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