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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수 목사
2장에서 계속된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의 이중창이 갑자기 내용이 바뀝니다. 그동안은 사랑에 감격해서 노래를 불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랑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지중에 신랑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등한히 여기다가 잃어 버린 신랑을 다시 찾는 내용입니다. 무슨 일에나 해이한 상태는 일대 차질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므로 절대 조심하셔야 합니다.
한국사회를 봐도 공기업의 공적 자금으로 수십조를 투입해도 해결 되지 않는 것은 돈 보다 공기업 관리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되었습니다.
Moral hazard 가 문제입니다.
한국교회의 영적인 해이 현상은 더 심각한 문제 입니다. 엇그제 신문에 이만열 교수가 지적한대로 요즘 한국기독교의 모습은 고려말기의 타락한 불교나 이조 말기에 나라를 망하게 한 유교의 모습과 같다고 하는 지적을 무조건 부인 할 수는 없습니다.
교단 정치를 봐도 초등학교 학급회의 보다 못한 수준이라고 비난 하기도 합니다.
종교계의 영향력은 10위로 밀려나 종교에 거는 기대 심리마져 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술람미 여인이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줄 알지만 부지 중에 신랑을 잃어 버린 것처럼 우리들도 내가 주님과 동행 하고 있는 줄 알지만 부지중에 예수님을 잊어 버리고 살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잃어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떠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쪽에서는 우리 쪽에서는 잊어 버리는 것이고, 우리가 잊어 버릴 때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가 잃어 버린 바 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 가운데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모와 함께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 가는 길에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다.
동행 중에 있겠거니 하고 등한히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사흘만에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은 내용이 눅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 2:41-52)
성경은 언제나 너희가 참 믿음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십니다.
눅 9:25에 보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옛날에 어떤 어떤 집이 이사가는데 이삿짐을 다 싣고 떠났으나 부인을 잊어 버리고 떠났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맹자에게 고하니 맹자 가라사대, 세상에는 부인을 잃어 버리는 사람보다 자기를 잃어 버리는 사람이 더 많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 한마리를 잃어 버리면 온 동네 방네 돌아 다니며 열심히 찾지만 자기를 잃어 버리고도 찾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탄 하였습니다.
눅 9:2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술람미 여인은 신랑을 잃어 버리고 밤에 침상에서 찾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잃어 버리면 밤이 됩니다. 마음도 밤이 되고, 가정도 밤이 되고, 사업도 밤이 됩니다. 그런데 침상에서 찾았다는 것은 안일과 나태함으로 찾는 생활을 말합니다.
아모스의 탄식을 들어 보십시오.
암 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이렇게 안일한 사람과 일락을 좋아 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안일한 부녀들에게는 반드시 당황하는 날이 온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하셨고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 하셨습니다.
사 32:9 “너희 안일한 부녀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0 너희 염려 없는 여자들아 일 년 남짓이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여 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기한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니라”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을 찾을 때에는 전심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믿음이 약해졌을 때에는 육체의 안일과 평안을 떠나서 금식하면서 라도 매달려야 합니다. 침상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 입니다.
2절에 보시면 성중에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분주한 거리에서 찾기 보다는 은밀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 질 때 롯은 욕심이 많아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였고 그 결과는 적군에게 포로로 잡혀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또 유황불에 자기의 모든 재물이 불타고 사위들이 사라졌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양보하고 믿음으로 가나안 땅 산골짜기에 갔을 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 26:20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숨을지어다”
죄악의 도시에서 나와 그의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하십니다.(계 18:4)
“너는 기도 할 대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셨습니다.
2절에 보시면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고백 합니다.
큰 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 입니다. 성경은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 하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 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이가 적다 하셨습니다.
어떻게 신랑을 찾습니까? 3절에 보시면 성중에 행순자들을 만나 묻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는 것 입니다. 행순자들은 야간에 순찰하는 방범대원들 같은 사람을 말 합니다.
이 말은 잠들어 있는 시대에 깨어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가르킵니다.
어느 시대에나 깨어 있는 종이 있습니다. 중세 종교가 부패했던 시절레 마틴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은 깨어 있었습니다. 일제 36년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로 흑암을 만났을 때 주기철, 한상동, 최봉석, 손량원 이기선, 박관준 장로님 같은 분들은 깨어 있는 순행하는 종들이었습니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히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세속화 되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을 잃어 버리고 방황 하다가 지쳐있습니다. 이럴 때 이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순행자들 입니다. 깨어 있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어두운 시대에 깨어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깨어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행하는 자를 만난 후 즉시로 신랑을 만났습니다.
아 3:4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이제 천신 만고 끝에 다시 찾은 신랑을 놓치 않았다고 합니다. 한번 찾은 주님을 꽉 붙잡고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도 주께 붙어 있으라 명하십니다. 붙잡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가요?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것 입니다.
히 2:3절에 보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나 구원 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자이십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잠 8:35-36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마태 4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이 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소중했던 직업도 버리고, 부친도 버려두고, 배도 버려두고, 그물도 버려두고 주님을 좆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잃어 버려도 주님을 붙잡으면 사는 것 이고, 주님 한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4절에 나오는 어미나 잉태한 자의 방은 교회를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정으로 만난 영혼은 교회에서 은혜 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이제 다른 것은 놓쳐도 주님만은 끝까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놓치지 않는 방법을 야곱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씨름 할 때 야곱은 환도뼈를 치여서 절뚝 거리면서도 하나님의 복을 구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고 매달리고 은혜를 구했기에 주의 복을 받은 12지파의 조상이 된 것 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영적으로 침체 되어서 자기 곁에 계신 분이 주님이신것도 모르고 있다가 예수님을 안 후에는 주님을 강권하여 모셨습니다.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강청합니다.
주님의 천국 비유에서 보화와 값진 진주를 만난 사람이 그것을 놓치지 않고 자기 것을 만들려고 전 재산을 몽땅 팔아 그것을 구하듯이 희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이렇게 붙잡으라는 것 입니다.
5절에 보시면 다시 예루살렘 여자를 조심하라는 교훈이 나옵니다.
한번 은혜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은혜 생활이 보장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 하십니다. 마라톤 경주는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인내 하면서 늘 깨어 있어서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권면 합니다.
히 12:15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합니까? 쓴뿌리를 만들지 말아야 하고, 음행과 세속화를 경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6절 이하에 보시면 솔로몬의 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솔로몬 왕이 보낸 연은 옛날에 임금이 타고 다니던 꽃가마를 말 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교회를 가르칩니다. 광야 생활을 할 때 모세를 통해 주신 성막이 발전해서 솔로몬 때는 솔로몬 성전이 되었고 성전은 예수님이 오신 후 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솔로몬의 연은 연기기둥과도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말합니다. 이것은 백성들으 보호 하는 역할을 했고, 백성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고, 백성들의 방패 역할도 했습니다.
솔로몬의 연은 향품을 갖추었으므로 향기가 났습니다.
몰약과 유향의 역할은 썩는 것을 막아 주고 악취를 제거하고 좋은 냄새를 풍깁니다. 왕후로 준비 되는 여자들에게 6달은 몰약 기름을 바르고, 6개월은 향물로 단장을 시켰습니다. (에 2:12)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썩어져가고 악취가 나는 사회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아름다운 향기의 미덕을 나타내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십니다.(고후 2:14-16) 우리는 빛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러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솔로몬의 연은 거친들을 통해서 얼라 왔습니다.
교회는 거친들과 같은 세상을 통과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광야 교회를 40년간 연단 하시면서 낮추셨습니다. 거친 들에서 사람들은 낮아지고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 같이 위대한 지도자에게도 교만 하지 않도록 사탄의 가시를 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교만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 입니다. 더구나 신앙의 교만은 더 큰 죄악이므로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가시를 주십니다. 가시도 은혜입니다.
솔로몬의 연은 60명의 특수 훈련을 받은 용사가 호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게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교회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게서는 엘리사를 불말과 불병거로 지켜 주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은 어린아이 하나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수호천사를 보내신다 하셨습니다. (마 18:10)
죄에서 떠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게 지켜 주신다 하셨습니다. (요일 5:18) 주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지켜주십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고 잠 자는 동안도 지켜 주십니다.
역사에 교회처럼 많은 환난과 핍박을 받은 기관도 없으나 교회를 핍박하던 세력들은 간데없이 다 망했고 하나님의 교회는 전세계에 뻗쳐 있습니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 그의 영광 한 없다
허락하신 말씀대로 주가 친히 세웠다
반석위에 세운 교회 흔들자가 누구랴
모든 원수 에워싸도 아무 근심없도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솔로몬 왕이 친히 연을 만든 것 처럼 교회는 그리스도게서 친히 세우신 것이며, 그리스도게서는 그 안에 함께 거주 하십니다.
솔로몬의 연은 레바논 나무로 만든 것 입니다. 이것은 백향목으로써 성전을 지은 나무를 말 하는 것 입니다. 백향목은 나무 중에 가장 좋은 나무로 향기가 나고 썩지 않고 견고하고 벌레도 잘 먹지 않는 나무 입니다. 성전의 법궤도 이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둥을 은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깨끗하게 자기를 만들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은이란 흰색이고 순결을 나타냅니다. 은은 일곱번 연단해서 순수한 은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받는 그 많은 연단도 결국은 우리들을 순수하고 깨끗한 인격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요셉은 재물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보디발의 모든 재산을 다 맡아 진실하고 정직하게 관리했습니다. 요셉은 이성에 대해서 깨끗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준비 된 것입니다.
바닥은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진실한 믿음을 말 합니다. 진실과 믿음은 갈라 놓을 수 없습니다. 금이란 언제나 변치 않는 정신을 상징합니다.
이런 믿음의 시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하는 믿음을 가진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담은 방석을 가르키고 자색은 승리를 상징하는 것 입니다. 자색옷은 승리자에게 입혀 주는 옷의 색갈 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지막 날에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상급이 주어지는 것 입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솔몬의 연의 안은 사랑으로 입혔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신자들을 뜻하고 그 사랑은 교회 안에서의 몸과 마음을 다하여 봉사하는 헌신과 헌물과 희생을 말 하는 것 입니다.
연이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유는 면류관을 쓴 왕이 계시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왕이 없는 가마는 의미가 없습니다. 왕이 타셨기에 존귀한 것입니다.
교회에는 성령님이 계시기에 교회가 존귀한 것 입니다. 주님이 떠나 가시면 교회도 가련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 입니다.
예수께서 초림 하실 때는 모든 존귀와 영광과 권세를 다 내어 놓고 초라하게 말구유에 나셨지만 재림 하시는 예수님은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오십니다.
주게서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과 천사장의 소리로 영광 중에 구름타고 오십니다.
주님 오실 때 죽었던 성도들은 부활하여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되고 살아있던 성도들은 다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공중으로 올라가 신랑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 입니다.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까지 이 소망을 가지고 모든 환난을 잘 참고 점점 신령한 성전을 지어 나가는 자가 복이 있는 것 입니다.
영적인 해이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 생활에 힘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