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났다.
환경미화를 하는줄 알고 교실에 갔더니 아이들이 보이질 않는다. 어디간 걸까? 준비물을 사러 간 걸까? 그래 오늘은 과학고등학교 쪽 헌책방을 가보기로 한다. 이미 지난 일요일에 그곳 탐색을 해두었다.
삼선교 전철역 앞에 있는 "삼선서림"을 기웃거려, <인도의 신화와 예술>이라는 단행본을 샀다. 2000원을 주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책이 있지만, 사도 줄 사람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사지 않았다. 누군들 지음이 그립지 않을까? 내 알음알이가 좁아졌다는 말도 되겠다. 정만큼이나 사상도 생각도 공유하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이다.
"아름다운 가게" 쪽으로 나오니 "아름다운 가게"는 셔터를 닫고 있다. 그렇다면 혜화문 앞길을 통해 혜화초등학교 옆 헌책방에 가야겠다. 그래 걷고 있는데, 혜화문 앞에 바로 <광서당>이 보였다. 고색창연한게, 골동품점 같은데, 서적도 한쪽에 쌓여있다. 사람들이 잘 들를 것 같지 않다. 시계를 한번보고 내처 들어갔다. 어머니뻘 되는 할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푸른 녹을 뒤집어쓴 고대 로마 시대로 여겨지는 투구가 보이고, 이것저것 세월의 더께를 두툼히 쓴 골동품들이 있다. 바다 건너 인도에서 온 춤추는 시바 여신상도 있고, 조각된 물소의 뿔도 있었다. 물론 밥그릇이나 놋수저 같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튼 나는 세삼 내 나이듦을 느낀다. 이런 건 자연스럽고 재미나고 즐겁다. 오래된 유물을 읽는다고 할까? 감상이라는 고상한 말보다 나는 그냥 누렇고 갈색으로 변질되고나 반질반질해진 세월을 읽는 것이다. 책도 열화당의 <다다>, 한길사의 <박은식>, 미다스북스의 <샤먼의 코트>, 그리고 건축가 김수근의 수필집 네권을 샀다. 가격은 10000원. 싸다. 그나저나 이렇게 잘 눈에 띄지 않는 곳인데, 장사가 될까? 손님이 정말 없을 것 같다.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다. 이곳은 10년 되었다고 한다. 명암을 좀 달라는 내 요청에 할머니가 찾지만 덜그럭덜그럭 뒤지신다. 번거롭게 해드린 게 미안해 괜찮다 마다하고 나왔다. 한번 다시 들르고 싶은 맛이 나는 곳이다.
벌써 어둑해졌다. 걸음을 재촉해 혜화초등학교 옆 "혜성서림"엘 갔다. 이곳 아저씨는 좀 무뚝뚝하다. 아저씨의 말로는 20년이 되었다고 한다. 20년이면 내 형이 지금의 과학고에 있었던 보성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있었다는 소리다. 물론 내가 동성고를 다닐 때도 있었을 것이다. 반갑다. 하지만 내 시계 좁음이 새삼스럽다. 눈에 들어오는 책은 별로 없었다. 아직 일제시대나 그 어간의 오랜 책을 펼치는 성미가 아니라 다 훑어보지는 못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 간다. 나오자니 뭔가 한권이라도 사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다시 휘둘러보니 그 와중에, 건강서 <운동을 하면 운이 좋아진다>가 보였다. 책을 열어보니, 좋은 자세는 알아두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면 좋을 듯 싶었다. 더불어 명상적 에세이 <자신의 날개로 나는 새는 지나치게 높이 날지 않는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낸 <생명 그 기원은 무엇인가>를 샀다. 비중 있는 책은 아니지만 흔한 책은 아닐듯 싶었다. 모두 6000원.
집을 향해 걸으며 생각했다.
요즘은 책을 살 때 약간 두렵다. 내가 지금 사는 책을 과연 다 읽을까? 그럴 시간이 있을까? 없다. 나는 책을 대단히 느리게 읽는 사람인데, 지금 같으면 1주일에 책한권도 어렵다. 그래도 일단 내게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것은 미래를 생각하며 사둔다. 하지만 미래를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말할 필요도 없다.
화려한 길은 아니지만 오늘 헌책방들은 일종의 헌책 실크로드를 형성하고 있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가게까지 포함해 네곳이 주르르 이어진 속이다. 서점이 넓고 다양한 것은 아니지만 가격도 비교적 싸다. 소위 옛날 헌책방 그 스타일대로다. 인터넷 헌책방과 전문 경영으로 헌책값이 상승한 걸 생각하면 이 지역의 책방은 싸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더 계속될 수 있을까? 헌책방도 사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곳에 아무래도 소비자가 집중되기에 작은 규모는 정말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아무튼 바로 지척에 이런 헌책 실크로드가 있다니 생소하고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