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5장 길고도 처절했던 공산주의와의 투쟁 4. 남미를 지켜낸 카우사운동 남미에서 출발해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카우사(CAUSA)운동이었다. 카우사는 「워싱턴타임스」 창설과 더불어 소련을 붕괴로 이끈 쌍두마차였으며, 1980~1991년 소련 붕괴에 이르기까지 11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풍미하며 세계 도처에서 공산 세력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문선명은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실존을 명확히 증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산주의와의 전쟁은 사실상 'God or no God(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의 전쟁이었다. 문선명과 통일교 신도들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기 때문에 공산주의 퇴치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소련의 전략은 미국을 아프리카와 중동, 아시아에서 몰아내고 드디어는 미국의 목덜미인 남미와 중남미에서 고립시키자는 전략이었다. 소련은 1차적으로 아프리카에서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공산화시켰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이는 설마 했던 미국의 카터행정부를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래전인 1959년에 소련은 쿠바를 공산국가로 만들었고 이를 기화로 공산혁명의 불길은 중남미 대륙에 상륙했다.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에 의한 나카라과의 공산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몬트네로스(Montneros), 우루과이에서는 투파마로스(Tupamaros), 엘살바도르에서는 파라분도 마티(Farabundo Marty)등이 공산화의 깃발을 올렸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멕시코의 적화였다. 멕시코는 약 2,700km의 국경을 미국과 접하고 있다. 만약 멕시코가 적화되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모든 군사력을 동원해도 2,700km의 국경을 지킬 능력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유럽에 주둔한 NATO군, 주한미군, 주일미군을 빼다가 자기 국경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련이 노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문선명은 승공운동의 세계화를 펼쳐나갔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한국과 일본에서 일취월장 성공을 거둔 승공운동은 서구에서는 먹히지 않았다. '반공'이란 단어조차 꺼리는 미국에서 어찌 '승공'이란 말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세운 것이 '하나님주의'였다. 그곳에서는 승공은 말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카우사(CAUSA)라는 말이 탄생했다. 카우사는 Confederation of Associations of Unification of Society of Americas(남북미통일연합)의 약자이다. 그러면서도 스페인어로 '제1원인, 곧 하나님'으로 통용되는 말이었다. 카우사 운동은 곧 하나님주의 운동이 된 것이다.
1980년 1월에 들어서자 미국에 있는 통일교 신도들은 2월에 다가올 문선명의 60회 생일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문선명은 그들을 불러 야단쳤다.
"당장 남미로 가야 합니다. 지금 내 생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세계가 적화의 불길에 휩쓸리는데, 무슨 생일잔치를 하고 있단 말입니까! 중남미대륙에 승공운동의 횃불을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카우사운동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이 날뛰는 곳에서 기자들을 모아 통일사상을 소개하고, 카우사운동의 필요성을 선언했다. 이와 같은 선언은 메마른 땅에 단비와도 같았다. 신문에 기자회견 내용이 대서특필되면서 우루과이, 파라과이 정부들이 카우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사상적 대안은 당시 남미에서는 복음 중의 복음이었다.
4월에 아르헨티나 반공지도자 20여 명을 뉴욕으로 초청해 승공사상 교육을 시키고 문선명의 숙소인 이스트가든으로 초대했다. 이어 카우사를 세계적인 조직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해 통일신학교 졸업생 가운데 승공사상이 투철한 사람들을 사무총장, 카우사연구소 소장, 강사 등에 임명했다. 그들은 미국, 브라질, 페루, 멕시코, 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 출신들이었다. 남미에서 제일 먼저 카우사 현지교육을 신청한 나라는 볼리비아였다. 45명의 영특한 젊은 엘리트들을 모아놓고 카우사 교육을 부탁한 것이다. 1980년 12월 강사진이 남미로 떠나기 전에 문선명은 그들을 불러 지침을 주었다. 이 지침은 카우사의 영원한 강령이 되었다.
"카우사운동은 곧 하나님주의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운동입니다. 죄경된 인사마저 개조하여 승공의 용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카우사운동은 학술운동이 아니라 사상운동입니다. 인간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영혼을 녹여 부어야 합니다. 2시간 강의하기 위해서는 6시간을 기도해야 합니다. 곧 영력으로 인간 개조 역사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카우사 팀은 굳은 결의와 흥분 속에 볼리비아로 떠나 산간벽지 와리사타(Warisata)에서 45명의 젊은이들과 정신적・육체적 씨름을 했다. 그들이 애국청년으로 변하자 볼리비아 정부는 3만 명의 대학생 교육을 카우사에 부탁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카우사는 남미 전역을 순회하며 연달아 세미나를 열었다.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에콰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브라질 등을 순회하며 승공운동을 펼쳤고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남미 대부분의 나라는 가톨릭 국가다. 카우사가 남미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일에 헌신하자 곧 로마교황청이 감동을 받아 격려를 보냈다.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La Plata) 가톨릭대학에서 세미나가 열렸는데 이를 주재한 사람은 안토니오 플라자(Antonio Plaza) 대주교였다. 라플라타대학은 훗날 문선명이 댄버리에 수감되자 크게 분개했고 옥중에 있는 문선명을 응원하기 위해 명예박사학위를 들고 직접 미국으로 왔다.
1983년이 밝아오자 남미에서의 성공을 밑거름으로 카우사를 미국에 상륙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북미대륙 최초의 카우사 세미나를 미국이 아닌 자메이카에서 열고 미국의 저명인사 200명을 초청했다. 이후 승공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자 1983년 7월, 뉴욕 5번가의 티파니빌딩에 카우사 국제본부를 세웠다.
그런 후 1984년 5월부터 15개월 동안 댄버리에서 옥중생활에 들어 갔다. 문선명이 교도소에 갇힌 몸이 되었지만 통일교 관련 조직들은 단 한시도 쉬지 않았다. 특히 카우사 동지들은 이를 악물고 분투했다. 한편으로는 문선명의 부당한 투옥에 항의해 전국에서 집회가 열렸다. 각 도시마다 종교 탄압에 항의하는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문선명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면회를 온 사람들에게 "나는 옥중에 있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있습니다. 나를 진정 사랑하고 위해주려거든 데모하는 대신 카우사 세미나에 가서 내 사상을 배우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7만 명의 미국 목사들이 카우사 사상을 배웠다. 이것이 훗날 미국을 공산적화에서 막아내는 교두보가 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1985년 7월, 댄버리에서 출감한 문선명은 4일 후에 카우사 간부들을 초대해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또 앞으로 할 일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남미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카우사는 이념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대도시에서 카우사 세미나가 열리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정치인들은 카우사의 가치를 발견하고 정치철학과 결부시켰다. 주 의회의원, 시의원, 국회의원들이 카우사 이념을 배우고 미국의 애국운동으로 받아들였다. 카우사에서 파생된 애국단체들이 속속 만들어졌는데 미국헌법위원회(ACC), 미국자유연합(AFC), 중남미통합기구(AULA), 세계평화연합(SCW), 국제소수민족연합(MAI) 등이다. 공산적화를 정책 차원에서 방어하기 위해 국제안보문제연구소(ISCI)도 세워졌다. 그리하여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카우사는 「워싱턴 타임즈」와 쌍벽을 이루며 드디어 공산주의의 몰락을 보고야만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