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엄일섭(嚴日燮)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2. 축복의 영광과 시련
1 1960년 9월부터 나는 예배를 인도하며 말씀을 전하였고 식구들 집의 심방과 전도를 했다. 그 해 10월 13일 고시에 응시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청파동 본부교회 안방에서 처음으로 선생님께 경배를 드리게 되었으며 말씀을 듣게 된 것이다.
2 다음날 흑석동 야외 집회에 참석하여 김원필 선생의 간증과 문선명 선생님의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놀라운 기쁨과 확신을 얻게 된 것이다. 동기 계몽에 다시 박승희 씨가 왔기 때문에 나의 집 공부방에서 영어와 한문을 가르치며 전도 활동을 했다.
3 1961년 2월, 나는 군에 입대하게 되어 앞으로 3년간을 어떻게 보내야 의의 있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이 기간에 원리 공부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원리해설을 입대 시부터 제대 시까지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읽었으며, 골자를 작성하고 타자로 책을 만들어서 공부함으로써 나에게 있어 원리 무장하는 좋은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4 그리고 군 생활 중에 두 분의 군목으로 하여금 원리 책을 구입하도록 말씀을 전하였으며, 군 영내 교회에서 밤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증거하는 기회도 자주 갖게 되었던 것이다.
5 1962년, 72가정 축복을 위한 특별수련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었지만 나이도 어리고 군 생활도 아직 멀고 해서 다음 기회에 참석하도록 해달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몇 차례 다짐하시듯 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도 사정 말씀을 드리고 귀대했다.
6 그 후 5월 말에 강원지구장님께서 협회장님이 급히 상경하라고 하신다는 연락을 주셔서 나는 다음날 저녁에 상경하여 유 협회장님을 뵙게 되었는데 방으로 부르시더니 장시간 동안이나 축복에 대한 의의와 섭리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면서 선생님께서 이번 축복에 꼭 참석토록 하라고 지시하셨다는 것이다.
7 그러시면서 충주 처녀와 하는 것이 좋다고 지명해 놓으셨으니 만나 보라고 불러 주는 것이었다.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이 72가정 축복 4일 전이었는데 아래 성전에서는 이불과 예복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서 혼잡해 보였다.
8 너무도 갑작스럽게 전혀 생각도 아니하고 상경한지라 그저 멍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으며 혼돈한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미리 힌트라도 주어서 불렀다면 이렇게 당황하지 않을 것인데 이 막다른 길목에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9 누구에게 의논할 상대도 없이 홀로 안타까워할 때 문이 열렸다. 가슴이 철렁했다. 밤 11시가 넘도록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유 협회장님은 내일 새벽 6시까지 내 방 앞에 가부간(可否間) 쪽지에 써놓고 가라고 하셨다.
10 그날 밤 나는 신앙의 선배로부터 밤새 격려를 받느라고 고역을 치렀고 그러다 보니 동녘이 밝아올 때가 됐다. 머리는 부서질 듯 아팠다. 나는 마지막 떠나면서 결혼할 뜻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일어섰다.
11 나는 부대에 귀대한 후 3일간 뜬 눈으로 밤을 지내고 결혼일 하루 앞날을 맞이했다. 동생 결혼식 참석 차 상경 중에 면회 오신 육신의 부모도 반대했고 부대 내 사정도 떠날 수 없도록 꼬여갔으며, 아무도 내일이 나의 결혼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본인의 결정에 달렸는데 마음은 의지할 곳을 잃고 물거품 모양 힘없이 꺼져 버리는 것이다.
12 결혼 날 아침이 왔다. 머리는 며칠째의 번민 속에 수라장이 됐고 후회와 죄책감이 범벅이 되고 두려움과 공포심까지 엄습해와서 엉망이 됐다. 서울서 시외전화가 빗발쳤다. 사람이 찾아왔다. 지금이라도 상경하라고 재촉했다.
13 그러나 나의 몸과 정신은 이미 탈수된 상태와 같아서 허물만 남은 것이 되어 용기를 잃었다. 석양에 붉은 노을이 짙게 물들면서 그날을 마치는 나의 마음은 다시는 헤어나지 못할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다.
14 그로부터 일 년간 나는 지척에 교회를 두고도 등진 어두운 생활을 갖게 되었다. 주일이 되면 갈 곳을 잃어버린 채 극장 속에서 하루를 보내곤 했다.
1963년, 다시 특별수련이 있으니 상경하라는 연락이 왔다. 또 당황하게 됐다. 이번 기회가 영원을 결정짓는 기회다.
15 나는 모든 부끄럼을 무릅쓰고 상경하여 현관에서 선생님과 마주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생님은 나의 어깨를 툭 치시며 고민 많이 했지 하시며 웃으시며 나가셨다. 말문이 막힌 나는 속으로만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했을 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16 나는 집에는 연락도 하지 않고 무일푼 맨주먹으로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나는 고아다. 누구도 의지할 곳이 없는 몸이다. 부끄럼도 수치도 괴로움도 참아야 한다. 피로연 때도 나는 머리 들 수 없는 죄인같이 이 하루가 빨리 지나기만을 염원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124가정의 일원이 된 것이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