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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_최규화 |
10년 넘게 얌전히, 그것도 ‘노동정책’을 연구하던 석사·박사급 연구원들이 머리띠 두르고 3보 1배하고 85일이나 파업을 하게 된 것도 다 그 분이 너무 예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해 하며 십 년 만의 폭설이 내린 1월 4일, 공공연구원노동조합 한국노동연구원지부의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여름에 덥다고 원장실에는 8백만 원 들여 에어컨 설치하고, 연구원들은 3만 원짜리 선풍기로 버텼어요. 연구원 내 테니스 동호회에 가입하고선 자기 집 근처로 테니스장을 월 55만원에 임대해서 혼자 쓰고요” (이상호 지부장)
공공기관의 대표로 나랏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데 위와 같은 어이없는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노조와의 단체협약을 해지했고, 임금삭감 및 고용형태 변경 등 노동조합과 협의 없이 진행하려 했다고 한다.
석·박사급 고학력자 연구원들로 이루어진 한국노동연구원 노동조합은 만들어진지 무려 18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노조가 만들어진지 처음으로 파업을 했다고 하는데, 더욱이 노동문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는 사람들이라면 전문‘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법하다. 아니면 최소한 학생 때 운동이라도 했거나, 또는 정말 지고한 ‘뜻’이 있어서 노동계에 투신한 사람들이 아닐까하는 의심 말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한다. 이 날 만난 이상호, 이지은, OOO씨 말고도 거의 대부분이 모두 사회복지 등 대학에서 관련 분야를 전공하고 고용이나 임금 등 정책만 연구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사관계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연구위원은 ‘우리가 뭐 노동자냐, 우리는 연구자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즉 노동자가 아니라 연구원 종사자이기 때문에 노동문제의 당사자는 아니라는 뜻이었다는 말이다. 이지은씨, OOO씨 역시 이번 사태를 겪기 전에는 스스로도 ‘노동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OOO씨는 지부장이랑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 하루는 지부장이 단체협약 해지되는 날 혼자 울고 있길래 위로하려고 같이 술 한잔 걸치고 가방 챙기러 사무실 들어가다 박기성 원장과 마주쳤다. 박기성 원장이 “이 모사꾼들, 어디서 술 먹고 와서 작당모의한 거냐”라고 했다. OOO씨는 당장은 억울했다며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지부장에게 “같이 합시다”는 말은 못했다고 한다. 노동법 공부하고 노사관계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그게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면서.
투쟁은 사실 사소한 요구에서부터 시작한다. 87년에 노동자들이 두발자유화를 요구한 것처럼, 노동연구원 노조 역시 고귀한 이념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시 여겨졌던 자신들의 권리들이 박기성 원장 취임 후 침해받는 것을 보면서 문제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파업과 단체행동을 한다는 게 두렵지는 않았을까?
“두려웠죠(웃음). 이렇게 100일씩 오래할 줄 몰랐어요. 한 달 정도 생각했지. 그 전에는 사실 사무실에서 피켓만 며칠 들면 다 해결됐었거든요” (이지은 씨)
“원래는 파업 한 달하고 그만 둔다고 했는데 더 해야할 지 결정해야했어요. 지금은 통통배 타고 있다면 이제는 원양어선 타고 나가는 거죠.(웃음) 장기간 투쟁했던 다른 사업장에 계신 분 말이 ‘이 문제가 풀리기까지 동굴 속의 어둠이 조금씩 비추면서 가다보면 끝날거다하는 얘기는 거짓말이다. 그냥 캄캄하다 끝까지. 그러다 갑자기 빛이 탁 터진다’고 하는데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갑갑한 거에요. (웃음)” (OOO 씨)
처음에는 피켓팅으로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안되니까 난생 처음 건물 밖으로 나가서 집회를 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니까 경제인문사회연구회라는 노동연구원 관할기관에서도 하고, 시한부 파업, 부분파업, 전면파업, 국회 1인 시위, 삼보일배 등으로 점점 커졌다고 한다. 어라, 노동 연구원들이면 뭔가 색다르게 투쟁할 것 같은데 크게 다르지 않다. 왠지 합법적인 절차에 맞추어 회사와 서류상으로만 싸울 것 같은 편견 아닌 편견이 내 머릿속에 들었다. 하지만 그이들 역시 여느 노동자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단결이에요. 정부처럼 자본이나 권력, 언론을 가진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할 수 있는 건 굉장히 단순한 행위 밖에 없다는 걸 알았죠” (이상호 지부장)
한 조합원은 분임토론 중에 이런 이야기를 하더란다. “여태껏 TV에서 비정규직이 농성하는 화면을 보면서 한 번도 가슴이 울컥한 적이 없었는데 그 날은 저 사람도 나랑 똑같은 노동자였구나, 저 사람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데 얘기를 할 수 없구나, 그래서 저런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OOO씨는 지난 여름에 생수로 손을 씻다가 한 조합원에게 핀잔을 들었다. 쌍용자동차 때문에 밖에서 집회를 하고 오는 길에 너무 더워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그러자 한 조합원이 “생수로 손 닦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 때 OOO씨는 너무 찔렸다고 한다. 지금 쌍용차는 생수가 없어서 마시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철도노조가 8일 동안 파업을 했을 때도 예전 같으면 전철 운행을 안 하니까 불평했겠지만 그이들도 투쟁을 겪으면서 엄청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다 철도노조가 금방 파업을 중단한다고 하니까 조합원들이 굉장히 기분 나빠(?)했다며 웃어 보인다.
2009년 9월 21일 그렇게 시작한 전면 파업은 85일 만에 끝났다. 12월 14일 박기성 원장이 노사문제와 반노동이라는 비난 여론을 못 이기고 사임했기 때문이다.
“파업 철회를 결정하기 위해 총회만 일주일 했어요. 지부장만 51명이라고 생각해보세요(웃음)” (이상호 지부장)
노동연구원 노동조합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을 하기 위해서는 며칠이 걸려도 전 조합원들과 토론을 통해서 결정했다. 힘들기는 하지만 철저히 민주적으로 평등하게 운영된 것이다. 그래서 복귀할 때 가장 분열이 심하다고 하지만 노동연구원 노조는 안 그랬다. 노동자들이 업무에 복귀하겠다고 하는데도 회사는 직장폐쇄를 풀지 않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파업을 종료하고, O월 O일부로 업무에 복귀한다는 파업종료확인각서를 쓰면 직장폐쇄를 풀겠다는 회사의 요구가 있었다. 약간 스타일 구기는 것이었지만, 조합원들은 이 역시 며칠의 토론을 거쳐서 쓰기로 결정했다. ‘에이, 뭐 그래’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계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낮춰줄 수도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모두의 결정이었다. 어쨌든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박기성 원장을 내몰았는데 이 정도는 대범하게 불쌍한 척하고 가도 된다고 말이다.
파업기간 중에도 어느 집회를 가건, 어떤 투쟁을 하건 간에 전체 조합원이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윷놀이, 볼링, 몸짓도 모두가 함께하며 즐겁게 투쟁했다고 한다.
“51명의 조합원 중 36명에 대해 노동연구원이 경찰에 고소고발을 했어요. 고발된 조합원 이름을 불러주는데 수능 합격한 것처럼 기뻐하더라고요. 이름 안 불린 사람은 미안해하고...”
업무에는 복귀했지만 다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연구원장 자리가 비어있기 때문이다. 단체협약을 다시 회복시키고, 고소고발 등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하지만 새 노동연구원장으로 누가 오더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드는 것은 왜일까. 고학력 연구원들이 아닌 노동자로 투쟁한 그이들을 보며 ‘잘 싸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책 정인열
201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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