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찜
박복자
계란을 깨뜨려 볼에 담아 젓가락으로 젓는다. 거품기로 한 방향으로 휘휘 저어 주자 흰자위와 노른자위가 곱게 섞인다. 살이 고운 채에 걸러낸 후, 파, 당근, 양파를 다져 넣고 계란찜기에 옮겨 담는다.
어머니는 살림이 그리 넉넉지 않은 선비 집에서 오 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담하고 예쁘장하게 생겨서 혼기가 차자 그럴듯한 곳에서 중매가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좋은 자리는 혼수가 부담스러워 재 너머 농촌으로 시집을 왔다. 아버지는 셋째였지만 맏이와 다름없었다. 큰아버지는 일본에, 또 한 분은 중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를 모시고 어머니는 사촌 두 남매를 함께 키웠다. 고모는 결혼해서 친정집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간 고모까지 챙겨야 했다. 제사가 일 년에 열두 번이라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다가왔다. 길쌈을 하며 누에치기와 담배 농사일을 했지만 생활은 늘 궁핍했다. 이른 봄부터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에 거름을 내었고, 여름이면 무성하게 자란 풀을 뽑고, 가을이 되면 가을걷이에 눈코 뜰 새 없었다. 이 집에서 우리 형제 4남매가 태어났다.
할머니는 혼수 없이 시집왔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 구박을 많이 했다. 하루는 열심히 다듬질해 놓은 옷감을 보더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심하게 나무라셨다. 친정집에 가서 다시 배워 오라며 사립문 밖으로 내쫓았다. 사촌 오빠가 병에 걸려 고생할 때 어머니는 한약을 정성껏 달여 먹이고 등에 업고 병원에 치료받으러 가기도 했다. 당신은 있는 힘을 다했지만 사촌 오빠는 세상을 떠났다. 섭섭함도 가슴 시린 아픔도 행주치마로 덮으며 눈물을 삼켰다.
사촌 언니는 울산 병영에 언니의 외할머니가 혼자 계시는 곳으로 갔다. 어머니는 수시로 사촌 언니가 사는 집에 쌀을 이고 반찬을 만들어 들여다보았다. 사촌 언니가 혼기가 찼을 때는 혼수를 갖추어 우리 집 마당에서 전통 혼례를 올리고 시집보냈다.
우리 4남매는 자라서 초등학교에 차례대로 입학했다. 맏딸인 나는 항상 어머니를 도왔다. 밥을 할 때면 밥솥에 불을 때고 부지깽이로 부엌 바닥에 글자를 쓰며 한글을 익히고 숫자와 구구단도 배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울산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새벽밥을 지어주시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담배 농사와 누에치기를 그만두고 소득이 나은 양계장을 했다. 일요일은 넓쩍 삽으로 닭똥을 끌어내고 알을 낳고 잠자는 자리를 보살펴주었다. 상추와 쑥갓 풋보리를 뜯어서 넣어주기도 하고 닭 사료를 챙겼다. 친척들과 친구들이 오면 달걀을 삶아 대접했다. 밥상에는 어머니가 만든 푸짐한 계란찜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계란찜은 다른 어떤 반찬보다 맛이 있어서 숟가락 여러 개가 찜 그릇을 들락거렸다.
농사를 지어서 기차 통학비와 육성회비를 마련하기가 힘들었다. 이때부터 어머니는 동네 양계하는 집에 가서 계란을 모아 우리 집 계란과 함께 부산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큰 대야에 보자기를 깔고, 계란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손끝을 오그려 가슴을 조이며 조심조심 옮겨 담고 묶었다. 옹골지게 담긴 달걀을 머리에 이고 울퉁불퉁 돌부리가 박힌 길을 10리, 20리 오금이 저리도록 걸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동네 계란 걷으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머리에 이고 오다가 둑길에서 발을 헛디뎌 달걀을 다 깨뜨렸다. 어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생계를 유지하는 계란을 깨어버렸으니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학교 가면서 나도 머리에 이고 손에는 책가방을 들고 기차에 옮겨 실었다. 통학생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럽고 난감했다. 어머니는 부산으로 달걀을 팔러 갔고 나는 울산역에 내려서 학교에 갔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가면 어머니가 먼저 집에 온 날은 계란찜이 밥 상위에 올라와 있었다. 계란이 잘 안 팔린 날은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서야 집에 도착하는 날도 많았다.
달걀 속에는 하나의 생명체를 탄생시킬 수 있을 정도로의 좋은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어 완전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시집살이며 아버지의 내조와 자식들을 키우느라 자신을 돌볼 겨를 없이 혼신을 다했다. 어머니의 희생은 달걀에 버금가는 완전한 사랑으로 채워졌다.
우리 동네와 한국비료공장과 자매결연을 한 후론 마을에 양계를 하는 집이 많아 구내식당의 부식으로 납품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울산 역전시장에 계란 도매상을 열었다. 생활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나 새벽시장이어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첫 버스를 타고 시장으로 가야만 했다. 힘든 일을 감내하며 노력한 보람으로 살림살이도 넉넉해지고 자식 4남매도 잘 자라서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드디어 계란찜이 완성되었다. 순한 맛이 혀끝을 감싸고돈다. 그 옛날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맛이다. 둥근 숟가락 너머로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오른다.
첫댓글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작품 쓰시면 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