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적으로는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적으로는 공적인 신앙고백을 하지 않고 여전히 교황주의자들의 편에 서 있는 니고데모파의 행태에 대해서 칼빈만 논박을 한 것은 아니었다. 구분선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칼빈과 동시대의 다른 종교개혁가들도 니고데모파의 행태를 우려하면서 비판하였다. 가독성을 위하여 2회에 걸쳐 게재하며, 각주는 생략하였음을 밝혀 둔다. 칼빈의 니고데모파 논박 자료는 대략 다음의 책에 실려 있다: 칼빈 전집(Calvini Opera), 『기독교 강요』,『미신회피론』(Libr. De vitandis superstitionibus, 1549), 『두 서신』(1537), 『변명』(Excuse, 1544), 『걸림돌에 관하여』(De scandalis, 1550).
프로망 (Froment)은 나바르 왕비와 그 친구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526년경 프랑스와 1세의 누이인 마거리트 왕비는 교묘하고 은밀하게 파렐의 동료들을 스트라스부르(이들은 종교 박해 때문에 이곳에 피난해 있었다)에서 빼내 주었다…그들은 복음을 빙자하여 나바르 왕비가 베푸는 주교직과 수도원장직 그리고 교황의 여타 성직록을 받기를 바라며 프랑스로 되돌아왔다...
여기에 니고데모파의 배반의 암시가 들어 있다. 불충분하긴 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한 인용구다. 프로망은 계속 이렇게 말한다. "사실 왕비는 제라르 루셀이 수도원장을 맡도록 해주었고, 후에는 올르롱 (Oleron)과 셍통즈(Saintonge)의 주교직을 맡게 해주었다. 그리고 한때 은둔했었던 미셀 다랑드(Michel d' Arande)에게는 도피네 (Dauphiné)에서 사도 바울 주교직을 받도록 해주었다."
칼빈은 마거리트 왕비에게 보낸 한 서신에서, 교회의 분리를 거부하는 신비주의자들과 마거리트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개종하고 돌아서서 예수님의 반대자인 저 거대한 철물공(교황)의 슬리퍼에 입맞춤으로 (저 사람들은) 성직의 연금과 영예를 받는 동시에 주교관을 씁니다. 불행한 것은 이 모든 것이 복음을 빙자하여 이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 논쟁이 반복되고 있을 때, 프로망은 루셀과 그 친구들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그들이 "주교직을 수락" (crocheter des eveschés)한 것을 맹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칼빈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에 믿지 못할 사람보다는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나는 설교를 하고 교리를 가르치고 좋은 본을 보이고 선한 일을 하여 박해받는 불쌍한 이들을 구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근심을 덜하거나 더 근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교직을 수락할 것이다.
그들은 현 상황에서 자신들이 "삼가하는 태도"나 "지체함"이 복음의 엄격한 요구 사항과는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자신들이 인정받지도 못하고 사방에서 비난만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이를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들은 주력군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후위군의 역할을 하며, 표면적인 순종으로 비타협적인 사람들을 위한 방패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다음은 기욤 파렐의 입장이다. 그는 한때 르페브르의 제자였지만 종교 개혁에 대한 입장 차이로 마침내 노년의 르페브르를 떠나, 제네바에서 종교 개혁의 사자 역할을 하였다. 파렐은 종교개혁의 옹호자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니고데모파에 대한 호의적 반응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렵다. 그의 편지의 내용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프랑스에서 이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이 죄로 부패해지지 않도록 권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기는커녕 이런 사람들은 진리를 잘못 알고 불경건함을 진정한 예배로 삼기 때문이다.
파렐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신앙심이 깊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건 소수의 사람이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시험을 이기고 이전보다 더욱 신실해졌으며 그들의 보배는 풍부해졌다. 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당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른 채 진흙탕에 빠져 경건함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신앙 속에서 파멸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하고 바람이 부는 대로 끌려간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추문거리다.
파렐은 이런 상황이 프랑스에 만연되었다고 한다: "나는 프랑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복음지향적인 사람들만큼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방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바람,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권력자의 눈 밖에 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추문을 피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칼빈 역시 바로 두 번째 설명에 집중하여 파렐의 글을 입증해 준다. 칼빈은 1544년에 한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압제에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교회가 좋지 않은 상황에 빠진 것을 뻔히 알면서 이 사실을 감추려고 하는 그들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명성이나 재산을 지키는 데 급급한 나머지 부당한 판결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게 되면 불명예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불경건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고 복음에 관한 교리를 야기하는 수많은 추문들을 핑계로 삼는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새로운 복음의 추종자들 때문에 대중의 평화가 위태로워져서 그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복음에 관한 교리에 따라 굳건히 살 수 없다고 외친다.
종교 개혁 최초의 역사가인 베자(Th. Bèze)는 그의 『개혁교회사』(Histoiredes Eglises Réormées)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바르 왕비는 다른 사람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미신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루셀과 다른 동료들이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녀는 분별력을 잃고 켕탱과 포크라는 불쌍한 두 자유사상가를 집에 은닉시켜 주었다. 칼빈의 작품들 속에는 이들의 불경스러운 말과 잘못들이 심한 논박을 받는다.
비레(Viret) 역시 파렐과 동일한 메시지를 주고받았으며, 비레의 경우는 매우 다작적이었다. 이 글들 가운데 De la difference…(1542)가 가장 중요하다. 그 글의 450쪽은 대량의 자료를 담고 있는데, 그것은 『성만찬에 대한 소논문』(Petit Traité de la sainte Cène, 1541)과 유사할 뿐 아니라, 『성유골(聖遺骨)에 관한 논문』(Traité des Reliques)과 칼빈의 다른 반니고데모파 시리즈물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 중심 되는 논증은 칼빈의 것과 일치한다. 즉 하나님은 내면적인 자세뿐만 아니라 외면적인 행위에 의해서도 영광을 받으셔야만 하며, 우상숭배는 죄이며, 미사는 핵심적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비레는 칼빈이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하나의 가설적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만찬과 일치하는 미사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동의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복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식들과 모순된다고 입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배척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사가 바르게 개혁될 때, 그것은 더 이상 미사가 아니며 성만찬일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강경림, 『칼빈과 니모데모주의』(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pp. 165-170.
첫댓글 베자의 이름을 여기서도 보는데, 종교개혁 최초의 역사가이군요. 잘 읽을 좋은 포스팅입니다.
이름이 낯익고 주요한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이 많이 나오고, 이들도 니고데모파를 비판했습니다. 읽고 잘 알아두어야 할 좋은 글입니다.
네, 공감합니다.
위 본문의 마거리트와 별개로... 성 바르돌로뮤 데이 학살 관련 영화, '마고'에 출연한 왕비가 아래 링크의 마거리트 왕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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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의 마르그리트(프랑스어: Marguerite de Valois, 1553년 5월 14일 ~ 1615년 5월 27일)는 프랑스 왕국의 공주로, 프랑스와 나바라 왕국의 왕 앙리 4세(나바라 왕국의 왕으로서는 헨리케 3세)의 첫 왕비이다. 마고 왕비(La Reine Margot)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4년 그녀의 일생을 영화화한 여왕 마고가 제작되었다.
이하 아래 링크 참조
https://ko.wikipedia.org/wiki/%EB%B0%9C%EB%A3%A8%EC%95%84%EC%9D%98_%EB%A7%88%EB%A5%B4%EA%B7%B8%EB%A6%AC%ED%8A%B8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아래 영화이지요.
@노베 프랑스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는 재미도 있는 영화 같습니다.
프랑스와 1세
개요:
발루아가(家)의 앙굴렘 분가 출신의 왕 5명 가운데 최초의 왕이다.
예술과 학문의 르네상스 운동을 후원했고 기사왕으로 이탈리아 원정(1515~16)을 실시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과 여러 차례 전쟁(1521~44)을 치렀다(이탈리아 전쟁).
이하 아래 위키 Daum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3p4339b
국왕의 권한이 강할 때 카톨릭을 벗어났으면 좋은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프랑스는 카톨릭을 국교로 하는 나라로 정착되었습니다.
르페브루
르페브르는 종교적인 연구를 옛날의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다. 1492년과 1506년 동안 학생용 물리학 및 수학 입문서를 썼으며, 윤리학·형이상학·정치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새로이 주석을 달아 번역을 하거나 쉬운 말로 풀어 출판했다. 1505년 어떤 종교적 위기를 겪었던 것으로 보이며, '공동 생활 형제회'(Brethren of the Common Life:학문을 후원한 네덜란드 성직자들의 공동체)의 이상에 영향을 받아 신비주의에 귀의했다.
같은 해에 카탈루냐의 저술가이자 철학자인 라몬 룰이 쓴 명상록을 발간했고, 나중에는 유명한 신비주의자 얀 반 로이스브룩과 쿠사의 니콜라우스가 쓴 글들을 발간했다. 1509년에는 자신이 쓴 〈시편 라틴어판 5권 Psalterium quintuplex〉을 발행했는데, 이 책은 때때로 종교개혁의 기본 교리를 담고 있다고 해석되는 사도 바울로의 서신에 대한 그의 주석서(1512)와 함께, 마르틴 루터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이하 아래 Daum 링크 참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2755a
루터에게 영향을 끼쳤다면 종교개혁의 프리퀄이 아닌가 싶습니다. 훌륭한 분 같습니다.
비레 (Pierre Vire)
1531년 스위스로 망명한 프랑스인 종교개혁가 기욤 파렐의 영향을 받아 보에서 설교하기 시작했다. 뇌샤텔의 목사였을 때(1533) 비레는 베른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이어서 베른 사람들은 보 사람들과 합류하여(1536) 중심지 로잔을 개혁하려 했던 그를 지원했다. 로잔에서 논쟁을 일으켰으며(1536. 10), 그후 보 전역에 개혁교회를 조직했다.
베른 사람들과의 불화 때문에 로잔에서 오랫동안 해오던 목회를 그만두게 되었고, 1559년 강요에 의해 보를 떠났다. 오르테 학술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장차 프랑스의 왕이 될 앙리 4세의 어머니 잔 달브레를 섬기다가 죽었다.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3000a
조금 생소한 인물이지만 개혁교회에서 중요한 분인가 보네요. 좋은 자료 첨부 감사합니다.
앙굴렘의 마르궤리트 또는 나바르의 왕비 소개 글
https://m.cafe.daum.net/1107/YrXT/8?svc=cafeapp
친절한 첨부 자료 감사합니다.
교회사에서 중요한 문제를 다루어준 좋은 포스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