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 : 西郊 /서교에서
慣 踏 西 郊 路 (관답서교로) 서쪽 성 밖의 길을 습관대로 걸으니
秋 風 信 馬 行 (추풍신마행) 가을 바람에 말이 가는대로 맡기네
潦 乾 沙 絶 白 (요건사절백) 고인 물이 마르니 모래는 더욱 희고
天 逈 嶽 分 明 (천향악분명) 하늘은 아득하고 산들은 분명하네
落 葉 侵 詩 興 (낙엽침시흥) 낙엽은 나의 시흥을 불러 일으키고
歸 鴻 動 別 情 (귀홍동별정) 돌아가는 기러기 이별의 정 움직여
關 河 從 此 去 (관하종차거) 이곳에서 부터 관하까지 나아가서
遂 欲 事 長 征 (수욕사장정) 멀리 이리 저리로 다녀 보고싶구나
<어 휘>
信 : ~ 하는 대로 내버려 둠
潦 : 큰 비, 길바닥에 고인 물
天 逈 : 하늘이 멀다
關 河 : 중국의 함곡관과 황하를 지칭하나 여기서는 먼 지역이라는 뜻
欲 : ~하고 싶다
<지은 이>
김조순 (金祖淳,1765-1832)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영의정 창집(昌集)의 4대
손이며, 할아버지는 달행(達行)이고, 아버지는 부사 이중(履中)이며, 어머니는 신사적(申思迪)의 딸이다.
순조(純祖) 임금의 장인으로 시호는 忠文(충문)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
황해도·함경도 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兼史) 1명을 두어 그 지방의 민요와 풍속을 채록해 시정기(時政記)
에 수록하자는 의견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1788년 규장각 대교(待敎) 재임 중에, 당시 시·벽파(時僻派) 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檢校)· 직각(直閣)
을 거쳐, 1800년 보덕(輔德)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副提學)·행호군(行護軍)·병조 판서·이조 판서·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
였다. 또한, 선혜청 제조로 있을 때 수효가 적은 친위병을 철폐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토록 하였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대제학이 되고, 1827년에 왕의 관서지방 목욕 행차를 호종하면서, 서하(西下)
지방의 민간 실정을 은밀하게 보고하여,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 인사(人事)·대동미 등의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 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공은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한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時壁)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 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에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
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 楓皐集≫이 있다.
사후에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위에 소개한 공의 시는 여행의 소망을 소박하게 피력하고 있는 오언 율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