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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가학회ㆍSGI 탈회 체험담
▣차례
1▶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義)이니라
현묘 93.06 제 3호
일련정종(日蓮正宗)
자가혜조사 지부(滋賀慧照寺 支部) 기다까와고오(川北孝)
2▶ ◈묘법광포(妙法廣布)의 대도(大道)에 생애(生涯)를 걸고
묘화 94년 10월 부인부(婦人部) 최명순
3▶ ◈올바른 신심(信心)의 환희(歡喜)
묘화 95.02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부인부(婦人部) 고 숙현(高淑賢)
4▶ ◈인간승리(人間勝利)의 개가(凱歌)
(※대어본존(大御本尊)님의 가호로
삼풍백화점 봉괴의 대형참사에도 살아났음)
한국 일련정종(韓國 日蓮正宗) 구법신도회(求法信徒會)
묘화(妙華) 95년 8월 여자부(女子部) 김문자(金文子)
(※삼풍사고 이전에 창가학회·SGI에서 탈회 했음)
5▶ ◈ 체험담[2] 一念隨喜(일념수희)의 信心(신심)
묘화 96.03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묘화신도회 부인부 손 약 순
6▶ ■특집- 제2회 해외신도총등산
정선 1998년 9월
ㅡ난병의 몸으로 얻은 자식
◈주직아래 삼세에 걸친 신행결의
호죠지지부(寶淨寺支部) 쓰가다 구미코(久美子)
7▶ ◈특집 -제2회 해외신도 총등산
어본존님의 일념으로 극복한 고난의 길
정선 98.09월 일련정종(日蓮正宗)
중도산본흥원북서본부 도원지부 양 려 운
(中道山本興院北西本部 挑園支部 楊 麗 雲)
8▶ ■ 특집 - 한국신도회 (2진) 등산 ◈ 체 험 담 (2)
정선 98.11월 일련정종
호에쓰잉 지부 시모지 다카시(法悅院 支部 下地 隆)
9▶ ◈ 체 험 담
정선99.01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구법신도회 김순정(金淳貞)
10▶ ◈ 바른 신심(信心)으로 목표달성을
정선 99.03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동개신도회 신 충 현
11▶ ◈ 삼보를 지키며 공양드리는 공덕은 무량하다.
정선 99.04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한양신도회 나 경 만
12▶ ◈소생의 길을 찾아서
정선 99.05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구법신도회 김 정 희
13▶ 한일 청년부 교류 연수회 - 2. ◈체 험 담(體驗談)
정선 2000.08월 일련정종(日蓮正宗)
엔쇼지지부(円照寺支部) 후쿠다카쯔유키(福田勝之)
▣본문
1▶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義)이니라
현묘 93.06 제 3호
일련정종(日蓮正宗)
자가혜조사 지부(滋賀慧照寺 支部)
기다까와고오(川北孝)
창가학회에서
탈회(脫會)해서 꼭 1년이 지났으므로 법화강에 입강(入講)한 후부터의 체험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991년 9월 30일에 창가학회에서 탈회하고
10월의 어강(御講)에 참예시켜 주시고 또 11월 15일에 장남의 7. 5. 3(아이들 성정의 축하행사)에도 참석하게 해주셔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 장남인 히로시(宙)의 일입니다만
이전보다 걷는 모습이 이상해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있었으나 특별히 이상이 없다고 하여, 마음에 걸리고는 있었지만 성장하면 좋아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탈회하여 신심의 재출발을 하는 것을 기회로 소아과 전문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던바 가벼운 뇌성소아마비라는 진단이 내린 것입니다.
「가볍다 」라고 말한다 해도 뇌세포의 일부가 죽어 있는 셈이므로 병원 의사에게 들을 때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무엇때문에 내 자식이 」라는 기분과 장래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절망과 불안으로 대단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급히 존사님에게 병완쾌의 기념을 부탁드리고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 때 존사님은 어서를 인용하시고,
「형제초」의
「이 법문을 말한다면 반드시 마(魔)가 출래(出來)할 것임.
마가 다투어 일어나지 않으면 정법(正法)이라고 알지 말지어다 」
(어서 1087페이지)
의 어문(御文)과 묘진니(妙心尼)전답서의
「이 병은 부처의 계책인가
그 까닭은 정명경(淨名經)열반경에는
병이 있는 사람은 부처가 된다는 뜻이 설해져 있도다
병에 의해서 도심(道心)은 일어나느니라 」
(어서 1480페이지)
의 어문을 인용하셔서 우리들 부부에게 신심의 자세나 자식의 병에 대한 마음가짐등
여러 가지의 지도와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우선 신심의 제일 목표로 아직까지 창가학회에 남아있는 양친(兩親)을 탈회시킬것을 결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틈이 생기면 양친을 파절하였지만 양친은
「절대로 이께다(池田)선생이 그와같을리는 없다 」
라고 주장하는 것 뿐입니다.
그럴 때마다 존사님 강두님으로부터 인법일개(人法一箇)의 본존님을 안치해 받드는 불단(佛壇)의 의의를 가르쳐 주시고 해서,
너무 조잡해서는 죄송하다고 생각이 되어 새로운 불단을 구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구입하려고 결정한 것뿐인데도 오랜 세월동안 내가 아버지에게 품어왔던 무엇인가 알 수는 없었으나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무겁고 괴로운 심경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요컨데 부자(父子)의 사이가 나빴던 것입니다.
2월 8일 무사히 입불식을 봉수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불단을 보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에 오시는 도중에 아무것도 아닌 곳에 발이 걸려 넘어져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발목이 삔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병원에서 사진을 찍어보니 골절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는 죄송했지만
「이 때 」라고 생각하고
며칠후 존사님에게 연락을 드려서 다망하신 중인데도 무리하게 말씀드려 오시게 하여 양친과 만나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양친도 긴장하고 있었으나 존사님의 말씀하시는 것이나 태도에 접하고 있는 동안 점점 양친의 얼굴이 화색을 띄기 시작하고
이께다 다이사꾸(池田大作)씨의 세뇌가 말끔히 탈바꿈을 해서
그 자리에서 창가학회(SGI)탈회를 결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났으면 즐겁다 즐겁다로써 끝나버렸겠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았습니다.
5월 14일의 저녁무렵 아이가
보육원에서 돌아와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의식을 잃어 버렸습니다.
눈은 한점을 바라보고 있었고 호흡도 멈추는 것과 같이 약하고 몸은 경직되어 차가운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119번으로 연락하여 병원에 실려갔으나 처음의 병원에서는 설비가 없다해서 응급처치를 하고는 병원의사와 간호사도 함께 구급차에 타고 다른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아내와 어머니를 구급차로 가시게 하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본존님에게 결사적으로 제목을 불렀습니다.
제목을 마치고 병원에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을때, 갑자기 생각이 떠올라 존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존사님은 강중(講中)의 어느 분의 침경(枕經)에 가신다는 것이었지만 아직은 조금 시간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나는 존사님에게 급히 달려갔습니다.
존사님에게 병의 상태를 말씀드렸더니
「그렇다면 함께 기원합시다 」
라고 말씀하시고 급하므로 방편품 자아게로서 우리들과 함께 근행하고 기념해 주셨습니다.
병원에 달려갔더니 아직 자식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고 아내는 오직 울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사에게 상태를 물었더니
「5시간 동안에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니 체념할 각오를 해 주십시오.」
라고 선언을 받고 우리들 가족은 아연해 버렸습니다.
「식물인간이 되어도 좋으니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
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때는 집안이 다함께 무아몽중(無我夢中)의 상태에서 본존님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벽을 향해 합장하였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하는 동안 갑자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저 소리는 히로시가 아닌가 」
하고 내가 말했더니 그대까지 자식의 절망적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내는
「그런일은 있을 수가 없다,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다 」고 말은 하였으나 나는 확실히 히로시의 소리라고 생각하고 집중치료실에 달려갔습니다.
바라보았더니 내 자식이 손발을 움직이면서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아! 살았다 」
고 생각하고 여하튼 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데 대해 기뻐하고 일단은 안심하였습니다.
의사께서도
「오늘 저녁만 잘 넘겨 주면 확실하다 」
라는 말씀이 있어서 마음이 든든했습니다.
하부에 주신 어비부(御秘符)에 대해 의사에게 말하였던바 의사는 쾌히 복용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후일 CT뇌파혈맥검사도 하였으나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고 또 걱정하고 있던 후유증도 없고 해서 5일 후에 무사히 퇴원할 수가 있었습니다.
병원에 실려갔을 때의 자식을 보고 있었던 의사나 간호사는 회복이 빠른 것에 대단히 놀란 표정이었습니다.
여담이지만
가까운 곳에 있는 창가학회원이 갑자기 쓰러져 얼마가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119번에 연락해도 좀처럼 구급차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경우는 이쪽에서 자동차를 이용해서 가겠다고 말했지만
119번에서 곧 바로 구급차를 보내겠다고 말했고 병원을 옮길 때는 의사와 간호원이 동승까지 해 주었습니다.
참으로 본존님께서 수호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창가학회에 주저앉아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일까 생각하니 두려움이 앞서는 기분입니다.
자식의 목숨의 소생이라는 귀중한 체험에 의해 우리들은 과거원원겁(過去遠遠劫)의 방법(謗法)의 중죄를 이 신심에 의해서 반드시 소멸하고 전중경수(轉重輕受)해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아내가 말하기를 두번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귀중한 체험을 했다고 후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병원에서 무의식중으로 제목을 부르고 있을 때
눈앞에 빤짝하며 눈이 부시드니 몸이 넘어질 것 같았다는 것인데
그것도 그 때 눈깜짝할 일순이지만
계단의 대어본존님의 난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7문자가 보였다고 합니다.
그 순간 히로시의 목숨이 소생하였다 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사명(使命)이 있는 자식인 것이다 하고 그 때 확신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인간의 목숨입니다.
우리들 부부의 입장에서는 우리들의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의 목숨을 본존님의 힘으로써 소생시켜 주신 것이므로 한 평생 이 은혜를 보답해 나갈 결의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어법주 닛켄(日顯)상인을 근본의 스승으로 숭앙하고 우리들 혜조사(慧照寺)의 존사님을 직접스승으로 받들고 미력하나마 절복홍교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또 강중에는 기다구찌 강두님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즐거운 강중(講中)만들기에 정진하고 광선유포를 지향할 각오로 있으니 아무쪼록 잘 부탁합니다.
2▶
◈묘법광포(妙法廣布)의 대도(大道)에 생애(生涯)를 걸고
묘화 94년 10월
부인부(婦人部) 최명순
불법에 귀의한지 24년이 되었습니다.
입신 당시 저희집은 지독한 병마와 연일 끊이지 않은 불화의 연속이 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 친구분의 권유로 온가족이 입신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본 저희 친척들은 엄마의 잘못된 신앙으로
어린 저희까지 사종교에 물들여 놓았다며 원망하였고
제 친구들도 저를 이상한 사람들만 믿는 이상한 종교를 믿는다며 비옷었습니다.
그러나 제목을 부르면서 느끼는 갖가지 체험과 공덕이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던 저는
분동하지 않고 오로지 행복해진 모습을 보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바쁜 직장생활에서도 신심 활동에 면려해 갔습니다.
그러던중 1979년 10월 어본존님께 기원한 대로
성실한 남편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고
결혼후 1년도 채 안된 남편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적은 자본으로 기계공장을 차리게 되었습니다.
경험도 없고 자본금의 부족으로 사업은 시작부터 어려워 여러번 위기가 닥쳤으나
그 어려움은 불가사의한 제천의 가호로 오히려 한층 발전하는 발판이 되었고
그때마다 저는 시간을 쪼개 제목에 도전해 나갔습니다.
남편에게 거래처 사람이나 친구들 모두가 제천선신이 되게해 주십시요라고
항상 기념하며 보이지 않는 복운으로 남편을 내조할수 있게 해 달라고 기념하고 제목을 근본으로 한 부인부 활동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연년생인 두 아이를 데리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회원이 사는 곳은 어디라도 찾아가서 같이 발심할 것을 결의 하며
각자의 숙명전환에 도전해가니 회원님과 저는 같이 울고 웃는 따뜻한 동지로 성장해 갔습니다.
84년 저는 본산 등산을 해서 대어본존님을 뵙고 싶다는 일념으로
원단근행부터 기념한 결과 그해 12월 14일 드디어 본산에 갈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해서 비용도 많이 들고 일정도 긴 여행이었습니다.
대망의 85년 남편의 사업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면서
제가 돈을 빌리러 다니지 않게 되었고 85년 한해동안 빚도 모두 갚고 집도 사고 시골에 조그만 산과 논 ,밭도 사게되는 공덕을 받았습니다.
남편의 회사는
주문이 밀려 월세1,000만원에 150만원 정도의 30평 규모가 일감을 감당할 수가 없어 70평 정도되는 공장을 구하게 되었는데
가지고 있던 돈이 적어서 공장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87년 11월 생각지도 못한 520평이나 되는 저희집 근처의 공장을
땅값의 1/3만 내고 나머지는 융자를, 모자라는 돈은 앞으로 벌어서 갚는 조건으로 사게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총회를 대성공시킨 바로 다음 날 이었습니다.
이제 공장을 넓은 곳으로 이사하니 종업원도 늘고 공장의 반은 세를 주어 월세도 받고 생활은 날로 윤택해져 갔습니다.
그런던 91년 언제부터인지 조직에서는
생명의 고향이라던 본산을 비방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예하님의 퇴좌운동도 벌리며 원질에 원질을 가득 담은 간행물을 수없이 찍어 내며 정ㆍ사를 구분할수 없이 혼탁해져 갔습니다.
이미 옛날의 순수하고 아름답던 조직은 사라지고 상상하기도 힘든 악구들로 회합은 메어져 갔습니다.
제 가슴은 터질 듯이 아프고 머리는 항상 지끈거렸습니다.
멀쩡하던 회사는 잦은 사고로 종업원이 한꺼번에 3명씩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92년 11월 저는
드디어 불교회(창가학회)를 탈회하여 종문(일련정종) 신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번민과 나날로 쇠약해진 몸과 마음을 제목으로 정립하며 본산의 등산을 기념하기 시작하여 93년 2월에 두 동생을 데리고 본산에 등산을 하였습니다.
93년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좋아하는 딸아이가 6학년이 되었는데 예술 중학교에 지원하기로 하고 또 어본존님께 매달려 갔습니다.
13살 나이에 훌륭히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제목과 공부에 매진하고
저는 신심23년만에 처음으로 남편과 가족에게 지은 수 많은 죄장소멸을 제목으로 참회하며 딸애의 학교진학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제 숙업에 도전하였습니다.
드디어 200명중 90명만 합격하는 영광속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임을 잘 알기에 끝까지 방심하지 않고
부모의 숙업으로 자식의 앞날을 가로막는 어리석은 불도 수행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만심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점검하고 남편을 진심으로 존경해 갔습니다.
이제 남편의 사업은 더 한층 발전하여 매출도 많이 늘어나서 모범 중소기업인상도 여러번 받았습니다.
앞으로 저는 항상 어본존님 근본으로 자식들을 훌륭한 불제자로 성장시켜 가겠으며 바르고 인간성 풍부한 아이들로 키우겠습니다.
3▶
올바른 신심(信心)의 환희(歡喜)
묘화 95.02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부인부(婦人部)
고 숙현(高淑賢)
저는 1973년 결혼하면서 시댁어른의 권유로 입신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끌려가는 신심을 하였으나 신심연륜(年輪)이 쌓이면서 지구담, 지부부인부장의 사명을 받고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세법(世法)에서는 느끼지 못하던 도리와 이치에 맞는 교학과 생명에 와닿는 지도를 받으면서 佛法의 위대함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90년경부터 창가학회는
종문(宗門)과 어법주상인예하(御法主上人猊下)께 중상모략(中傷謀略)하고 목적을 위해서는 세법(世法)에도 있을 수 없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비열(卑劣)한 행동을 저지르는 모습을 보고 여동죄(與同罪)를 범(犯)할 수 없어 창가학회․SGI를 탈회(脫會)했습니다.
지난날 간부들의 순수하고 부처님 금언(金言)대로 수행하는 모습에 존경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공덕(功德)을 받기도 하였는데,
어느사이 불법(佛法)의 도리를 벗어나
예하님을 비방하고 이케다를 우상화(偶像化)하는 지도로 바뀌었습니다.
대다수의 회원들이 숙명전환은커녕 오히려 혼란과 고통의 수렁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외형적으로 태연한 척하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속으로는 못마땅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어쩔 수 없이 그 흐름대로 회원들에게 전달하고온 생명이었기에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삼수(三修)하는 큰아들과
고교3학년인 둘째 아들이 있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한 큰아들은 부모와 주위사람들을 기피하며 시험일이 가까울수록 불안해 하고 자신감을 잃고 매사에 짜증을 내고 원망과 불평투성이로 변해
아들을 원질하며 육박전을 벌여가며 지옥같은 괴로운 생활이었습니다.
2년전에 집을 팔아 상가를 샀는데 건축주는 건물을 이중삼중으로 팔아먹고 도망쳤습니다. 피해자들의 피해액은 백억대가 넘는 계획적 사기(詐欺)여서 아무도 보상받을 수 없는 상태로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저는 부처님 심부름을 하며 창제로써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밤늦게까지 매일 열심히 뛰었으나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짜증이나는 수라만이 들끓는 지옥같은 생활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올바른 불도수행(佛道修行)도 올바른 신심(信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과 자식의 모습 그대로가 과거 나의 죄장(罪障)의 모습이라고 알고 참회하였으나 관념적인 참회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큰먼지도 안보이나 밝은 곳에서는 자그만 먼지도 잘 보이듯,
창가학회를 탈회하고서 생명 깊은 곳까지 비쳐보는듯 저의 생명상태는 바뀌었습니다.
유능하고 착한 남편을 경시(輕視)하며 전국수석(全國首席)도 할 수 있는 지능(知能)을 가진 자식의 머리를 흐리게 만든 원인을 깨달았습니다.
원질은 몽고군보다 무섭고, 강도보다도 무서운 지옥(地獄)의 사자(使者)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오저(奧低)에서 나온 참회와 더불어
창가학회에서 탈회(脫會)한 저의 모습을 지켜보는 창가학회사람들에게 반드시 참된 신심의 모습을 보여주자고 본존님께 기념드렸습니다.
이윽고 큰아들과 둘째 아들이
94년 대학입시에서 국립대학의 최고 인기 첨단학과에 합격하였습니다.
남편 역시 실력을 인정받아 주위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모으며 부서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도 많은 일을 한다 해도 빛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자그만 일을 해도 크게 성과를 보게 된다 」
고 남편은 말합니다.
모두가 저의 제목의 힘이요 본존님의 공덕이라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들들도 주위의 총애를 받으며 즐겁게 학업에 열중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또 사기분양의 상가대금(代金)도 기묘하게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올바른 신심을 찾아 저의 죄장을 깊이 깨달으니 이렇게 변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인(女人)은 흙이고 남편은 뿌리이며 열매는 자식 」이라 했습니다.
흙이 흙의 역할(役割)을 다 못하면 뿌리는 영양부족이 되어 열매는 맺지 못한다는 지도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광선유포의 인재로서 또 세계화의 제 1인자가 되도록 기념하고 하종원년의 신춘을 맞아 올바른 삼보수호의 신심수행에 정진하여 광선유포의 위대한 실증으로써 보은사덕할 것을 서원하며 굳게 결의하는 바입니다.
4▶
◈인간승리(人間勝利)의 개가(凱歌)
(※대어본존(大御本尊)님의 가호로 삼풍백화점 봉괴의 대형참사에도
살아났음)
한국 일련정종(韓國 日蓮正宗)
구법신도회(求法信徒會)
묘화(妙華) 95년 8월
여자부(女子部) 김문자(金文子)
(※삼풍사고 이전에 창가학회·SGI에서 탈회 했음)
오늘도 장마비가 내리는 속에 필사적인 인명구조작업(人命求助作業)이 열하루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망자(死亡者) 4백 50여 명 부상자 9백여명 실종자 2백여명 이라는 삼풍백화점(三豊百貨店) 붕괴(崩壞)의 대형(大型) 참사소식(慘死消息)으로 세상이 소란합니다.
실낫같은 희망(希望)을 가지고 시체(屍體)라도 구출(救出)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실종가족행렬(失綜家族行列)의 울부짖는 소리.
내가슴에도 죽음을 파묻는 장례장면(葬禮場面)들을 지켜보고 있는 저는 원혼(怨魂)의 피맺힌 눈물인 양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망연자실(妄然自失) 허망(虛妄)한 심정(心情)을 억누를 길 없습니다.
엿가락 늘리듯 고도성장(高度成長)만을 향(向)하여 앞만 보고 조급히 질주(疾走)하던 위정자(爲政者)들,
남이야 죽건 말건 불벌레처럼 자기만의 이익(利益)을 추구(追求)하기에 혈안(血眼)이 되어온 무리들의 업보(業報)로 처참(悽慘)한 인간지옥상(人間地獄相)이 연출(演出)된 것입니다.
저는
순식간에 붕괴(崩壞)된 삼풍백화점(三豊百貨店) 한복판 4층에서 근무하던 여직원(女職員) 김문자(金文子)(26세(歲))입니다.
냉방(冷房)마저 꺼져버린 운명(運命)의 그 시각(時刻),
一九九五年 六月 二十九日 오후 5시반경,
휴식시간에 지하2층에서 냉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정전이 되면서 건물이 흔들리고 천지개벽의 폭음속에 실신(失神)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고 숨이 막혔습니다.
아비규환 비명소리에 정신이 들었으나 콘크리트속 피먼지가 앞을 가리고 짓눌린 한쪽 다리가 꼼짝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김문자 내가 이렇게 죽는구나」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내 입가에서는 어느덧 난묘호렌게쿄 난묘호렌게쿄 제목소리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피투성이의 억눌린 다리를 빼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깜깜한 먼지속 비좁은 틈으로 환한 구멍이 보였습니다.
저는 나무토막같이 내몸에 매달린 다리를 끌어가며 사력(死力)을 다하여 콘크리트 조각 철근사이를 헤집고 탈출한 것입니다.
밖에 나와보니 조금전까지 일하던 거대한 건물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습니다.
혹시 잘못 보았나 하고 제눈을 의심했습니다.
함께 근무하던 친구와 4층 매장의 정든 모든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그 아비지옥의 소용돌이에서 저는 살아남아
병원의 간단한 치료를 받고 이튿날 새벽 귀가하여 가족들 품에 안길 수 있었다니
이 어찌된 숙명의 대전환이란 말입니까.
一九六九年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성장(成長)한 저는
一九八一年 수계를 받고 일련정종(日蓮正宗)에 입신(入信)했습니다.
저의 집은
(부(父): 김횡산(金橫山) 72세(歲)) 一九七一年부터, 조모, 부모가
일련정종(日蓮正宗)에 입신하여 일가화락(一家和樂)의 신앙(信仰)을 독실히 하여왔고 무수한 공덕(功德)을 누려왔습니다.
특히 一九九一年 대방법단체(大謗法團體)로 전락한 창가학회(SGI)로부터
전가족이 탈회하여 올바른 일련정종(日蓮正宗)의 삼보신심(三寶信心)을 지켜왔고
작년(一九九四) 제 1회 해외신도총등산 때,
온가족이 참예(參詣)하여 생애(生涯)의 감격(感激)속에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大御本尊)님을 배알(拜謁)하고 참된 한국광포를 서원드렸습니다.
이러한 명기현응(冥祈顯應)의 공덕(功德)으로 저는 갱사수명(更賜壽命)의 대공덕(大功德)을 받았음을 확신(確信)하며 어본존(御本尊)님께 무한한 감사(感謝)를 올릴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근년(近年)에 육해공지하(陸海空地下)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대형(大型) 재난사고(災難事故)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一九九三年 2백92명의 생명(生命)을 앗아간 서해(西海)페리호 사고를 비롯하여
구포(龜浦)철도 전복사고,
무안KAL기 추락사고,
성수대교(聖水大橋) 붕괴사고,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대구지하철공사 붕괴사고,
그리고 제가 매몰(埋沒)되었던 끔찍한 삼풍백화점(三豊百貨店)붕괴사건 등,
대형재난(大型災難)이 잇달아 선량한 많은 사람들이 무참(無慘)히 희생되고
온 국민은 불안(不安)한 생(生)을 유지하며 위협(威脅)받고 있습니다.
재난(災難)이 났을 때마다 위정자(爲政者)는
다시는 이런 재난이 발생(發生)하지 않도록 대비하겠다며 법석을 떨었으나,
이를 비웃듯 소름끼치는 대형재난이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병이 일어나는 원인을 모르는 자가 병을 고치려 하면 더욱 고통만이 더해갈 뿐입니다.
말법의 유일한 정법인 일련정종(日蓮正宗)에서는
이러한 재난의 흥기(興起)이유를 이미 7백년 전에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一二六O年 말법의 본불(本佛)이신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님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설시(說示)하시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두 정(正)을 배반한 사람이 모두 악에 귀하였도다.
그러므로 선신(善神)은 나라를 버리고 다 떠나버리고 말았도다.」
(신편어서 二三四)
사람들이 말법의 정법(正法)을 믿고 난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소리가 하늘과 땅에 가득찰 때
그 중생(衆生)을 수호하는 제천선신도 그 국토를 지키어 사람들은 환희찬 삶을 향유할 수 있고 그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도 하루빨리 의정불이(依正不二)의 정법(正法)을 세워 온국민을 구제하고 재난을 방지해야 한다고 살아남은 자(者), 김문자(金文子)는 호소하며 기념 드립니다.
앞으로 더욱 근행창제(勤行唱題)에 힘써 사은(四恩)에 보은사덕(報恩謝德)할 것을 굳게 결의(決意)합니다.
5▶ ◈ 체험담[2]
一念隨喜(일념수희)의 信心(신심)
묘화 96.03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묘화신도회 부인부 손 약 순
저는 1982년 2월 16일 입신했습니다.
입신 당시 서울 구로동에서 남편이 경영하던 수출하청업은
세계적인 불황으로 파산의 위기였으며,
결혼 패물은 공장운영을 돕기 위해 전당포로 가야 했고, 거기에다 엄청난 사채까지 끌어쓰는 형편이었습니다.
남편의 사업은 재기불능이었고,
그로 인한 생활고의 연속과 세 번에 걸친 자연유산,
아름답게만 생각했던 신혼의 단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생활방식의 차이로 부부싸움이 잦아지면서 고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저는 삶을 포기할 궁리만 하였습니다.
세상 살아갈 희망이라곤 도저히 찾을 길이 없는 막막한 상태였을 때 저희 공장 종업원의 권유로 입신을 했습니다.
처음 좌담회에 참석해서 숙명에 관한 얘기를 듣고 매력을 느꼈습니다.
대성인님의 불법을 열심히하면 어떠한 숙업도 전환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한번 해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1주일만에 독경을 다 외우는 등,
각종회합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배우고 가르침대로 실천하니 웬지 희망이 솟구치고 살아야 한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그럴때마다 남편에게도 권유를 했지만
모든 것은 사람이 지어낸 짓이고 꾸며 낸 것이라며 비웃기만 하면서 부부간에도 종교에는 자유가 있다면 반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입신을 한지 만 10개월 만인 82년 11월에
자궁이 약해서 장기간 치료하지 않으면 도저히 임신이 불가능하다고 하던 전문의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저는 달덩이 같은 아들을 순산했고,
남편은 그 골치덩어리인 사업을 정리하고 대구로 이사를 하는 공덕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 즐겁고 환희찬 생활에 남편도 현증을 보고 쉽게 입신을 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열심히 불법을 구도해 갔습니다.
남편은 교학을 배우고 제목도 열심히 하여,
84년 3월에 어본존님을 모시고 하루 3시간이상 창제와 하종절복에 매진하며 환희차게 신심을 배워가면서도,
남편은 이런저런 사업에 도전해봐도 실패만 할 뿐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네 식구 생계를 위해 막노동 일을 해야 했고,
막노동에서 오는 피로를 핑계로 근행창제를 소홀히 하는 남편을 저는 미워하기 시작했고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실패만 하는 남편, 생활고조차도 해결못하는 무능한 남편이 미웠고,
모든것을 남편의 잘못과 책임으로만 미루어 원망과 미움을 선배님에게 하소연했습니다.
선배님의
『모두가 당신의 숙명이니 열심히 제목을 불러가라.
어떤 경우에라도 바라지만 말고 나 자신부터 바꾸어 가라 』
는 지도 말씀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며 숙명전환을 목표로 제목을 부르고 또 불러 나갔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여인이라 함은, 사물에 따르면서 사물을 따르게 하는 몸이니라 』
는 어서를 심간에 깊이 새기면서 열심히 신.행.학에 면려했습니다.
단칸 셋방이지만 지역광포를 위해 좌담회를 개설하고 이웃사람을 절복시켜 나갔고 본존님께 법화경의 행자가 생활고로 찌들려서는 안되오니 남편이 안정된 직업을 갖게 해주십사고 열심히 기원한 결과,
그해 10월에 지금하고 있는 사업장이 연결되어 무일품의 저희가 다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천선신의 가호로 모든것이 하나 둘씩 원하는 대로 이루워졌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업은 날로 번창해서 의, 식, 주 모두가 안정권에 들었습니다.
90년 1월엔 그렇게도 갈망했던 대석사 대어본존님을 배알하는 공덕도 받았습니다.
벅찬 가슴으로 본존님을 만나게 된 것을 다시 한번 깊이 감사드리고 저의 과거 원원겁의 죄장소멸을 기념하고 귀국했습니다.
사업은 더욱 번창해 갔으며 환희찬 나날들이었습니다.
각종 회합을 위해 우리집을 즐겁게 제공했고
시어머님, 시누이, 친정어머니, 동생 모두가 절복되고,
사업에 눈코뜰새없이 바쁜 남편은 지부장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밤 12시 전엔 귀가하는 일이 없었고 저는 지구담의 사명을 위해 뛰면서 모두가 신나고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종문비방이 시작됐고,
심지어는 예하님 퇴좌서명을 받아오라는 강제성을 띤 전문이 내려오자
남편은 회원을 꼭두각시처럼 맹종시키는 조직에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감히 신도가 법주 예하님을 퇴좌시키려는 썩은 방법의 단체,
창가학회를 탈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갖은 비난과 악구비방이 그칠 줄 몰랐지만
혈맥부법의 총본산의 지도를 받고 신심을 하는 지금은 생활상의 크고 작은 괴로움은 내 생명의 인이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
절대로 누구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래 겁이 많은 저는 세상살이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고, 확신에 찬 인생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사업은
확장을 거듭하고 아이들도 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으며, 누구하나 속썩이는 사람없이 주위가 모두 제천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난 시절 숙명에 울고 좌절과 실의에 빠진 제 모습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여름엔 특별어본존님까지 하부받아 정말로 새로 태어난 기쁨으로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인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불법을 만나게 해준 분, 희노애락을 같이한 선배, 동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이 위대한 불법을 이웃의 불행한 분들과 백사람의 벗과 친지들에게 하종하기 위하여 정진해 갈 것을 굳게 결의합니다.
6▶
■특집- 제2회 해외신도총등산
정선 1998년 9월
ㅡ난병의 몸으로 얻은 자식
◈주직아래 삼세에 걸친 신행결의
호죠지지부(寶淨寺支部) 쓰가다 구미코(久美子)
여러분 안년하세요.
제2회 해외신도총회를 참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황송하게도 체험발표를 하게 되어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어본존님을 안치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저는 어릴때부터 활발하였습니다만
10살 때 받은 건강진단과 관련하여
다시 대학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은결과
「아이센메쟈 증후군 및 심방중핵결손증」이라고 진단되어
당시는 아무런 치료법도 없고 현재도 폐와 심장을 동시에 이식하는 외에는 치료법이 없다는 난병이었습니다.
병 때문에 학교를 자주 결석하게 된 저는 늘 놀림받는 대상이 었습니다.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으나 그 때마다 신심을 하고 있는자가 법을 낮추어서는 안 된다고 창제에 힘을 썼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후는 스스로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 3시간 창제를 하며 어서를 통하여 학교친구에게 하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9세 때에 「앞으로 반년에서 1년 남은 목숨입니다.」
라는 죽음의 선고를 받아 이제는 신심이외의 길은 없다고 결심하여
창가대학에 진학하여 여자부 국제부의 인도네시아어 리더로서
창가학회본부에서 또 여자회관으로 바쁜 회합을 해왔습니다.
당연히 이케다다이사쿠와 만나는 기회도 많았습니다만
성교신문 상에서의 지도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인간성에 의문을 품었고,
더욱이 여자부 간부로부터 『인간혁명』의 책을 갖고 다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근본부터 신심이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학회로부터 떠났습니다.
마침 그 무렵 직장 동료인 법화강의 분이
매달 【대백법】을 주셔서 역시 종문은 바르다고 판단하여 가족들을 설득하여
1992년에 한집안이 다함께 탈회하여 가마쿠라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입강하였을 때, 주직 존사님으로부터
「구도심입니다. 법화강은 구도심이 중요합니다.」
라는 따뜻한 지도를 받아 어보은어강,법요,어등산에 시간이 있는 한 참가하며 법화강의 신심을 배워 절복에 활용하였습니다.
그러한 신심에 충실하고 있을때에 정본당에서 만난 사람이 호죠지지부의 청년이었습니다.
어개비를 마치고 나오면서 신심에 대해서 대화를 했습니다만
제 자신을 결혼생활도 출산도 무리라고 알고 있었으므로 그 청년에 대해서도 신심의 동지 이상의 감정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로부터 청혼을 받았을 때는 당황하고 고민했습니다.
주직님과 상의드렸던 바
「하여간에 건강하게 되시라.아무것도 생각지 말고 먼저 몸이 낫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지도를 받아 그 날부터 매일 절에 다니며 조석근행과 3시간씩 창제를 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오는 날도 건강히 출입하던 제가 100일 째가 지난 어느 날
그날 아침 따라 몸이 좋지 않아 일어나기가 괴로웠습니다.
어머님의 부촉을 받으며 사원의 주차장에 차를 대는 순간 구토를 하여 부축을 받으면서 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근행을 시작하여 얼마 안돼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차게 혈액이 몸속으로 흘러 마치 큰 불덩어리를 안은 듯이 전신이 뜨거워지면서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심장이 가벼워지고 호흡도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옆자리의 어머니의 눈을 보니 어머니도 같이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습니다.말로서는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체험을 얻어 창제의 굉장함을 실감하였습니다.
이 체험으로 자신을 가진 저는 1996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임신을 알았을 때도 일체 불안은 없었습니다.만
난병으로 출산을 책임져 줄 병원이 없고
국립병원에서도 첫마디가
「죽습니다.쓰가다씨,
이 세상에는 아이를 낳아도 좋은 사람과 안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당신은 낳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라고 마치 임신한 것이 죄처럼 부정당하였으나
「선생님,
저는 일련정종의 법화강입니다.
이 묘법의 힘으로 저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더구나 뱃속의 아이는 부처님에게서 맡은 중요한 불자이므로 반드시 모자가 함께 무사히 출산할수 있으므로 부탁합니다.」
라고 그 날부터
「병원은 절복의 보고다」
라고 결의하여 남편과 둘이서 만나는 분들 모두를 하종을 하였습니다.
소개된 일적의료센터에서 출산을 맡아주게 되었으나 역시
「목숨과 바꾸어도 아이는 갖고 싶습니까」
라는 말을 듣고
「아니 저는 그렇게 무책임한 어머니가 아닙니다.
니치렌대성인님은
【병이 있으면 죽는다는 것은 부정이니라.
또한 이 병은 부처님의 계책이신가】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겠으니 보고 계십시오.」라고
검진 때에 남편과 함께 절복을 계속하여 창제와 절복의 덕분으로
「쓰가다씨는 정말로 아이센메쟈입니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안색도 좋고 원기가 넘침니다.
본래라면 산소 없이는 살수 없는 것이지만
부처님의 가호가 있을지 모르겠으니 자 함께 힘씁시다.」
라고 말하고
【대백법】도 읽어 주시고 선생님도 조금씩 달라져갔습니다.
1997년 4월에 들어가서 하루라도 빨리 입원을 서두르는 중에
「중요한 등산이 있으므로 끝날 때까지는 입원할수 없습니다.」
라고 연기하여 6월 3일에 겨우 입원했습니다만 임신 8개월째가 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생각대로 절복을 할수 있다고 벼르고 있었으나 침대에 몪여 절대 안정의 상태로 절복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회도 놓쳐서는 안되겠기에 만나는 사람들을 빠짐없이 하종을 계속하였습니다.
절복이 진행됨에 창제도 다섯 시간, 여섯 시간으로 리듬을 타고 어서의 낭독도 즐거워 빼지 않았습니다.
입원 10일째의 아침, 돌연히 소량의 출혈이 있고 또 전날부터 급격히 불러진 배의 압박으로 심장단식이 심해져서 급히 제왕절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통상적으로 부분마취로 하는 수술입니다만 저의 경우는 심장의 급변에 대비하여 전신마취가 되어 수술실 앞에서 선생과
「쓰가다씨,제목을 열심히 불러 주십시오」
「예, 선생님도 부탁합니다.」
라는 말을 주고 받으며 수술에 임했습니다.
그 무렵, 주직 존사님의 지도로 강중의 분들께서도 저의 무사 출산을 기념하여 따뜻하고 강력한 창제를 보내 주시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많은 수의 창제가 귀에 울리는 속에 잠에 빠져 땅올림과 같이 솟아 나오는 창제로 눈을 떴습니다.
절대로 오체 만족한 아이는 바랄수 없고
더욱이 초미숙아로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만
33주만에 태어난 아기의 체중은 2.3kg으로 선생도 놀랄 만큼 자라 있었고 물론
오체만족한 사내아이 였습니다.
만약을 위해 집중치료실에 들어온 저에게는 몸 속에 관이 다섯 개나 꽂히고 그 위에다가 산소마스크를 한 꼼짝 못하는 몸이 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묘법은 정말로 헤아릴수 없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라고
열심히 절복을 계속하였고 남편도 두시간,세 시간으로 창제를 더해 나가 자식을 위해 사원 참예를 계속해 주었습니다.
산후 7일째에 비로소 보육기 속의 자식을 대면했을 때는
정말로 이 어본존님의 위대성에 눈물이 끊이지 않고 어린자식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오로지 제목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한편 저의 심장은 임신 기간보다도 악화되어 산소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퇴원 시에는 의사 선생이 집에서도 산소를 쓸 것을 권유하였고
다시
「쓰가다씨는
강한 신앙심을 가졌으므로 굳이 몇 개월 남지 않은 목숨이라고 말할수 없습니다만
좋은 상태라고는 할수 없는 것을 이해하시고 계십시요.」
라고 들었습니다만
「선생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자택에서 생활하게 해주십시오.
저는 어본존님 앞에서 근행창제 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산소가 필요할때는 선생님께 상의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신심으로 반드시 실증을 나타내 보이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하고 7월 10일 퇴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집 이층도 올라갈수 없고
바로 눈앞의 화장실에 가는 것만으로도 귀가 들리지 않고 눈이 보이지 않고
어머님의 도움없이는 육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자식의 어수계를 바라고
또 가고시마 에서 도우러 와계신 시어머니의 절복도 계속 기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월 10일 시어머니와 저의 양친과 남편도 함께호죠지에 참예하였습니다만
저는 본당의 계단도 양쪽에서 부축받아 겨우 자식의 어수계에 참석하였습니다.
육아도 뜻대로 할수 없는 저는
정말로 수개월 밖에 안 남은 목숨인지 모른다는 약한 마음이 된 적도 있습니다만
주직 존사님의 지도와 강중의 분들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과 시댁의 도움이 있어
그 때마다 발심하여 창제와 절복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망의 총본산 객전신축경축기념대법요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가슴에 안고 등산 할 수가 있어서
대어본존님에게 처음으로 아이를 보시게 하였을 때에는
감사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고 진심으로 훌륭한 대법요의 기회를 주신 어법주상인예하님에게 어보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 그 뒤의 하기강습회에도 사람을 낯가리게 된 아이를 달래면서 기쁜 등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아이의 검진 때마다 절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제 자신의 입원중, 혈액 중의 산소가 50%에서 60%로 살아 있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였습니다만
전일의 검진으로 92%의 건강체로 너무나도 믿기지 않는 결과로 선생도 무언가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입원 중에 백 명에게 하종 할수 있었던 귀중한 체험을 살려
더욱더 어법주상인예하님의 어지남을 받들어
주직 존사님의
「성불이란 미래영겁에 이 어본존님의 아래에 태어나 항상 배할수 있는 경계를 성불이라 말합니다.」
라는 지도를 가슴에, 강두님을 중심으로
부모자식 셋시 2002년 30만 총등산을 목표로 더욱 더한 정진을 거듭해 나가겠습니다.
오늘 참으로 감사합니다.(이상)
7▶
◈특집 -제2회 해외신도 총등산
어본존님의 일념으로 극복한 고난의 길
정선 98.09월 일련정종(日蓮正宗) 중도산본흥원북서본부 도원지부 양 려 운 中道山本興院北西本部 挑園支部 楊 麗 雲
저는 1963년 17세 때 어머니를 따라 입신하였습니다.
지금의 대만은 주권재민으로 자유가 보장된 훌륭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일련정종의 신앙은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창가학회가
순수한 종교활동을 벗어나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것도 문화혁명 당시의 중국의 공산주의 정권을 옹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활동은
정부의 눈을 피해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항상 경찰의 감시 아래 어머니와 숨어서 신심을 하였습니다.
어본존님이 발각되면 그것은 즉시 압수 당했습니다.
더욱이 계엄령이 아직 실시 중이어서 사람이 모이는 것도 안되었습니다.
함께 격려하는 것도 숨어서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즉 당시 일련정종의 신앙에 들어가는 것은 가시밭 길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주저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대만의 일련정종 신도가 계단의 대어본존을 갈앙 연모하는 마음은 당시도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어본존님의 훌륭하심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중에 어머니는 우연히 입수한 일본의 신심의 출판물을 일본어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저는 그에 의해 일련정종의 신심을 조금 알게 되고 제 나름대로 신심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언제인지 전부터 앓고 있던 콧병이 나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 이 신심의 대단함을 깊이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65년 저는 혼자서 다이세키지에 등산을 했습니다.
그 때에 어수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바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집에 불구를 준비하여 어본존님이 계시지 않는 빈불단을 향하여 조석의 근행에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선배인 아주머님의 저의 내득신앙의 모습을 보고
「어본존을 받으면 어떻겠는가 」
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도 어본존하부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그 분에게 하부신청을 부탁하여 어본존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겨우 저는 집에 어본존님을 안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로부터는 이상하게도 남편의 일이 결실을 보게 되어
때로는 가계의 어려움도 있었으나 모두 어본존님의 은덕으로 고난을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강한 신심으로 불퇴전의 신심을 기를 수가 있었습니다.
1990년 우리들은 형편상 태북현의 삼협이라는 곳에 이사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경제적인 고난을 만나 대단히 자신을 잃고 절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숙명전환의 길이다.
이 고난의 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
라는 생각으로 하루 일곱시간의 창제행을 결심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남편이 일의 부족에서 오는 초조한 기분으로 성격도 일변으로 흉폭하게 되고 저의 결심에
「그것은 신심의 마의 포로이다 」
라고 저의 신심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로서는
「어떻든 남편을 도와 곤란을 극복하고 싶다 」
라는 일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제목의 힘을 설명하는 능력도 없었고 그 방법도 전혀 몰랐습니다.
오로지 일념으로 하루라도 빨리 제목의 공덕이 현익으로 나타나기를,
그것을 남편이 납득할 수 있기를,
매일 식사준비 이외의 일을 할 기분도 되지 않아 오로지 창제행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오래 계속된 계엄령도 해제되어 신심에의 탄압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의 신심과정에서의 공포심인지 어본존님에게 불경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어본존님을 말아 숨겨 밤중에 숨어서 창제했습니다.
그 무렵 동생으로부터 창가학회가 종문으로부터 파문된 것을 알고
종문에 귀의하는 수속을 하였습니다.
그러할 때 마침,
어느 신도 분으로부터 저의 근황에 대하여 걱정하는 따뜻한 전화가 걸려와 저에게 판교시에서의 창제회에 참석하시기 바란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몹시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그 따뜻하고 강한 신심의 말은 참으로 하늘의 도움과 같이 저의 불안한 마음을 일소해주었습니다.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바로 남편의 차에 편승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장소도 알지 못하고 더구나 큰비 속에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빙빙 돌아 두 시간이나 걸려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창제회에 와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미혹의 마음까지 생겼습니다.
돌아가려고 생각하면서
마음 속으로 어본존님에게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념했던 바 겨우 골목의 안쪽에 있는 왕씨의 댁에 당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뒤에 생각하니 도중에 돌아가려고 한 것은 삼장사마의 소위였겠지요,
왜냐하면 그 날의 창제회는 저의 신심의 가장 중요한 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씨는 저의 신심상태에 대하여 들은 뒤에 가정방문을 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심정을 고려하여 모처럼의 친절을 무시해야 되는가 라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왕씨 부부의 자신에 찬 모습에 저는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남편은
의외에도 왕씨의 그 진심 어린 부드러운 모습에 감동하여
또 얕은 곳으로부터 깊게 강한 일념이 담긴 불법의 이야기에 태도를 바꾸어 착실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이틀 뒤에 신심의 확신을 얻은 남편의 양해하에 현 부강두 이신 허씨의 협력으로
지금까지 말아둔 어본존님을 정확히 불단에 안치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기분 좋게 창가학회를 떠나
남편의 신심에 대한 반대도 없이 정확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을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삼협이라는 땅의 집을 팔고 용담이라는 곳에 이상적인 집을 사고 경제적으로 서서히 여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쓰키다유도" 어존사의 지도 아래
보은사덕을 위하여 왕부인, 허부인과 두 번째의 등산을 했습니다.
첫 등산일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저는 감개무량으로 이 뜻있는 등산을 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또 고난의 길을 극복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 속에 3년 전부터 저는
생리불순, 원인불명의 분비물과 단속적인 출혈을 자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사결과 「자궁암 」이라고 진단, 의사선생은 수술치료를 권하였습니다만
저는 남편의 충격을 걱정하여 「양성의 종양 」이라고 가볍게 말했습니다.
그 반면 저는 마음속으로 창제로 도전하여 암을 이겨내어
그 현증으로 남편을 입신시키리라고 결심하였습니다.
또다시 고난의 길을 만나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병은 금년(1997년) 원단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더욱 격통과 대량출혈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이 출혈로 업을 소멸한다 」라는 일념으로 창제시간을 더하여갔습니다.
때로는 아파서 불단 앞에서 혼절하여 깨어나서 창제를 계속하는 등 더욱 더 제목을 불러 병마를 극복하는 마음가짐을 지속했습니다.
2월 초순 허부인과 전화로 즐겁게 통화하고 있을 때 갑자기 격통이 일어나 음성이 변하니 허부인께서 저의 이상함을 느껴 저에게 사정을 물어왔습니다.
저는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암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전후 사정을 말하였습니다.
허부인은 저의 고통을 이해하시면서 주직 존사님께 개인지도를 받을 것을 권하셨습니다.
저는 주저와 불안이 있었습니다만
허부인의 지시와 격려로
부끄러움과 모순 속에서 "구로자와"어존사님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존사님은
엄숙하면서도 대단히 부드럽게 저의 병세와 신심에 대하여 병은 신심의 힘, 사람의 힘, 그리고 의료의 힘 세개가 갖추어져 낫는 것이고
결코 나를 통해서는 안 된다고 지도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그 길로 병원에 가서 세밀하게 전신검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8개월 전의 검사결과와 대조했을 때
암세포는 작아져 있고 자궁벽에 극히 작은 응어리가 남아있는 상태였습니다.
의사선생은 아주 이상히 여겨 드문 병례이며 가벼운 수술로 응어리의 주변을 제거한 후 정기적으로 치료하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곧 수술 준비를 마쳐 국부마취하여 수술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수술 중에 마취가 풀렸습니다.
심장의 부담도 생각하여 마취를 더하지 않고 그대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 바늘씩 세면서 생명의 숙업이 한 바늘 한 바늘씩 빠져나가기를 일심으로 빌었습니다.
수술 후 체력의 회복도 순조롭고 안색도 좋아 암으로 앓아 수술을 받은 사람 같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병마를 이겨낸 기쁨은 "구로자와" 존사님의 정확한 지도의 은덕이라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수술 후, 원래 병이 잦은 남편도 건강하게 되고 금년은 함께 등산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함께 창제합시다 」라고
호소하고 나서부터 남편이 발심하기까지는 만 26년이 걸렸습니다.
장녀도 사위도 전후하여 수계를 받았고 단지 한 사람의 신심으로 지금은 가족전원이 이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입신한 이래 가장 기쁜 일의 하나입니다.
저의 걸어온 신심의 도정은 참으로 고난의 길 그대로였습니다만
모든 것을 어본존님을 생명의 중심, 일가의 주인으로 받들어 왔습니다.
저는
늘 조용히 불단 앞에 앉아서 어본존님에게 생활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드리며 마음은 항상 풍족합니다.
어본존님의 인도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많은 신심의 동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곡절이 있는 도정에서 늘 저를 떠받쳐주며 격려하여 주며 생명을 풍부하게 저의 시야를 넓게 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저 외에도 어본존님의 가호로 위대한 공덕을 얻은 체험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서투른 글입니다만
저의 체험발표로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신심에 보탬이 되고 또 새로운 체험을 쌓아 가실 것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단히 감사합니다.
8▶
■ 특집 - 한국신도회 (2진) 등산
체 험 담 (2)
정선 98년 11월
일련정종
호에쓰잉 지부 시모지 다카시(法悅院 支部 下地 隆)
오늘의 교류좌담회를 축하합니다.
저는 법화강 호에쓰잉지부의 시모지다카시(法悅院 支部 下地 隆)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현재 지부에서 간사(幹事),부장년부장의 사명을 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총본산에서
한국신도 여러분 앞에서 체험담을 할 수 있는 것은 몸에 넘친 복운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1979년 오키나와에서 전근에 따라 가족과 함께 상경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오키나와에서
창가학회의 청년부의 현간부(懸幹部)로 있었고
상경 후는 어느 구 (區)의 본부간부의 역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이 중앙관청이므로 국회대응 등으로 바빠서
직장 내에서 종교색을 낼 수 없는 사정도 있어 적극적인 활동은 삼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90년 전근으로 동경을 떠났습니다만
그 무렵부터 창가학회와 종문의 문제가 재연(再燃)하여
그 지방의 회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池田 大作)의
종문과 승려를 비판하는 위성방송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보통의 일이 아니다라고
의형제(義兄弟)인 우라가미주직(浦上主職)님께 문의하여
종문관계의 자료를 우송이나 FAX로 받아 보아 학회의 주장과 비교했습니다.
쌍방을 정직하게 비교해 보니
학회는 종문의 주장을 회원에게 왜곡하여 전하는 것과
학회의 방침, 지도가 불법에 위배하고 있는 것이 명확해지며
창가학회의 악랄함과 음험함에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이케다 다이사쿠(池田 大作)ㆍ창가학회를 절대라고 믿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크고 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창가학회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기에 좀처럼 마음먹고 탈회하지는 못했습니다만 1991년 창가학회가 종문으로부터 파문권고를 받은 것을 계기로
고민하던 결과 가족 모두 탈회했습니다.
창가학회를 탈회하여
비로소 밖에서 냉정히 창가학회를 보았을 때 그 이상함을 실감했습니다.
또 일과 학회활동 외에는 차분히 생각하는 여유가 없었던 저도
겨우 자기의 생활로 안심하여 눈을 돌리게 되고 마음의 여유를 되돌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전근에 의해 1993년 8월,
3년 4개월만에 동경으로 돌아와 호에쓰잉(法悅院)의 법화강원이 되었습니다.
「후련한 기분으로 당당히 절에 참예할 수 있다.
이러한 즐거운 일은 없다 」
라고 법화강으로서 신심을 재출발한 것을 기뻐했습니다만
처음에는 아직 학회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잘 의논을 하였습니다.
또 법화강에 들어가면
조직활동은 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의 형편이나 자기 나름의 신심을 할 수 있다는
선입감이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입강해보니 활동은 그 나름대로 바쁘고
그 사이에 지부의 역원과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학회시대의 활동과 일의 관계로 고민한 것도 있었고 실제로 일도 바쁘기 때문에 완강히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주직님으로부터
「법화강의 조직이 있음으로써 또 신행학의 실천이 되지 않겠는지요 」
라는 지도를 받고 또
「『불법은 체와 같고 세간은 그림자와 같도다.
체가 구부러지면 그림자도 비뚤어지느니라.』 (신편 1469)
의 금언과 같이 신심과 일을 양립하여
양쪽이 톱니바퀴와 같이 맞물림으로써 어떠한 고난도 극복하여 크게 전진된다」
라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저는
「법화강원으로서 재출발한 이상, 신심을 관철하려 정한 이상,
조금이라도 좋으니 강중을 위해 지부를 위해
또 자기의 허물을 타파하기 위해서도 봉사하자 」
라는 결의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본존님께 지금까지의 자기 멋대로의 신심을 사죄하고
이제부터는 착실하게 생명을 닦고
마음의 재물을 쌓는 신심을 서약하고 등산이나 절의 행사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적극적으로 참가하기로 마음먹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1994년의
「지용육만결집의 총등산 」에 참가할 수 있었고
예하님의 모습을 배하였고 지남을 들었을 때
「더욱더 진짜 신심을 할 때가 왔다 」라고 생명에 느꼈습니다.
다음으로 가정상황에 대하여 소개하겠습니다.
현재 저희들은 도내(都內)에 살고 있으며
호에쓰잉(法悅院)까지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만
매월의 어강을 비롯하여 절의각종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습니다.
처는
지부의 부부인부장이며
세 딸은 각각 대학생으로,
큰딸은 지부의 여자부장이고,
둘째는
부소년부장과 고적대의 책임자이고,
셋째는
중고등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또 세 딸은
모두 정리반 및 서포트로서 본산임무도 맡고 있으며
지난 8월의 「제2회 해외신도총등산 」에도
셋이 함께 해외서포트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때 한국담당을 하여 많은 한국멤버와의 교류를 깊게 하여 신심의 유대를 맺고 또 한복도 입어 봤다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딸들이
명랑하게 밝게 성장하고 법화강의 청년부로서 건강히 신심 수행을 해갈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어본존님의 수호의 결과라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딸들에게는
일의 전근에 의해 몇 번 전학을 경험시켜 쓰라린 추억도 안겼으나
셋이 다 각지에 많은 친구와 추억을 만들었고,
아버지의 입으로 말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참으로 밝고 남에게 상냥하고 충실한 인간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는
지금까지 딸들에 대해서는 이른바 방임주의로 자유로이 키웠습니다만
기본적인 예의범절로서는
무슨 일이든 어본존님 중심으로 생활에 있어서도 모두가 신심이 기본임을 가르치며 키워왔습니다.
「부모의 신심의 자세는 자식에게 나타나는 것.
자식의 자세를 보면 부모의 신심의 자세를 알 수 있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이
부모의 신심은 자식에게 큰 영향을 주지만
자기가 신심하여 참으로 잘했다고 생각하면 생각한 만큼 자식에게 확신을 갖고 호소하여 엄하게 신심의 자세를 가르쳐 온 셈입니다.
최근에는
「자식들이 열심히 하고 있으므로 자식들에게 지지 않는 신심을 하지 않으면 」
하고 자극을 받고 있는 것이 현상입니다.
금후에도 광선유포와 영법구주에 보탬이 되는 인재로 성장하여 법통상속을 해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의 양친은
오티나와현의 미야코시마(官古島)에 살고 계십니다.
섬 안에서는 신심력이 오래되고 이웃과 친구들이 거의 창가학회원이기에
저희들의 설득에 의해 학회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이해하시어
성교신문의 구독을 그만두고 학회의 회합에도 참가하시지 않았지만 좀처럼 탈회는 하지 못했습니다
작년 탈회하지 않으면
신도자격이 소멸된다는 종문의 통달이 있을 때
저는 양친에 대하여 학회에 소속하고 있는 것으로도 방법이고
성불의 길이 막힌다고 말씀드려 재절복을 했습니다.
그결과 탈회를 결의하여
작년 9월 21일 호에쓰잉(法悅院)에서 권계식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탈회를 강하게 바라고 있던 딸들도
간신히 삼대가 나란히 함께 올바른 신심을 하게 된 것을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저 자신이 그것이 부모에 대한 최고의 효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법화강으로서의
자신과 긍지를 갖고 그 지방의 절에 참예하거나 창가학회원이 찾아와도 당당하게 창가학회를 파절하고 있습니다
또 같은 시기에
처의 형제들도 탈회하여 형제 전원이 호에쓰잉(法悅院)의 법화강원으로 되었습니다.
더욱이 금년 6월에 빙부가 돌아가셨습니다.
빙부는 생전에 탈회한 것으로
이웃의 많은 창가학회원으로부터 비난중상을 입으면서도
법화강원으로서 절에의 참예나 등산회에 착실하게 참가하는 등
열심히 신심을 다하여
금년 3월말에 「신객전낙경등산회 」에도 참가했습니다.
빙부는 그 때 이미 간장암에 걸려 있었으나 본인은 특히 암의 증상을 느끼지 못하고 당연히 가족들도 모르는 상태였으므로
결과적으로 가족전원으로 신객전낙경등산회에도 참가할 수 있었고 개인으로서는 염원을 이루었고 필시 만족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빙부는
신축한 자택의 어보전에서 친족전원이 창제하는 가운데 편안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얼굴은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며 정말로 성불의 상 그대로였습니다.
또 돌아가시기 전에
자식과 손자들 전원의 얼굴을 한 사람씩 보시며
그 눈은 「모두 신심을 착실하게 열심히 하기 바란다」
고 호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더욱이 빙부는 황송하게도
어법주상인예하님으로부터
「정덕원용진니치기거사(淨德院勇進日義居士)의 계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빙부의 신심의 선물이라고 하고 싶은 기분이며 빙부의 의지를 이어서
가족전원이 정직한 신심으로 일관하여 해가기를 결의했습니다.
이야기는 다릅니다만
작년 11월에 일 관계로 한국에 출장 갔다 왔습니다.
그것은 교육행정시찰단으로서
일한양정부관계자가 서로 양국의 교육사정을 시찰하는 것으로
일본에서 저를 포함하여 5명이 참가했습니다.
방문한 장소는 서울, 경주, 부산 등의 학교관계교육시설이 중심이였습니다만
이동 중에 창밖을 보니 십자가가 세워진 교회건물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연이 있어 저희들의 우리가미주직님이
한국신도회를 담당하시고 계시는 것도 있어 한국의 신도 여러분의 일을 들을 기회가 많았습니다만
특히 한국에 있어서는 가족전원이 신심할 수 있는 분이 적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신심에 면려하시고 있다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작년의 어대회 때에
고려신도회의 여러분이 호에쓰잉(法悅院)에 들렸습니다만
그 때 저는 동경에서부터 달려가 한국의 여러분의 구도심의 모습을 직접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대단히 어려운 가운데 이렇게 등산하신 여러분의 신심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여러분의 정진과 활약을 기원드립니다.
저희들도 여러분에게 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생각하면은 나자신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나의 인생은 법화강원으로서 신심에 눈을 뜸으로써
충실한 반응이 있는 인생에로 크게 방향전환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부모형제친족이 다함께 올바른 신심을 할 수 있는 것도 큰 복운으로 느낍니다.
이제부터 나태없이 어법주상인예하님의 지남을 근본으로
주직님의 지도 아래 강두를 중심으로 한 이체동심으로
2002년 종지건립 750년의 30만총등산
또 호에쓰잉(法悅院)의 사호공칭(寺號公稱)에 향하여 절복을 완수하고
미력하나마 봉사 할 수 있기를 맹세하며 체험발표로 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9▶
◈ 체 험 담
정선99.01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구법신도회 김순정(金淳貞)
저는 13살 때 부모님과 함께 입신하였습니다.
입신동기는
부친이 척추관절과 하반신마비로 1년 동안 누워 계시다가
이웃아주머니의 권유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부르게 되어
1주일만에 걸을 수 있는 공덕을 받고 어본존님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1972년도 여자부활동을 하면서 많은 추억을 남기고
1980년도에 현재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3년 후 둘째 아들을 낳았으나
한쪽 눈꺼풀이 쳐져 눈을 뜨지못했습니다.
그후 그 아이와 함께 제목을 올리던 중
4살이 되던 해에 볼이 부어 올라 눈까지 부었는데도 아무런 통증이 없다고 하기에 병원에 가지 않고 제목을 올리며 기원하였습니다.
15일 후
아이가 눈이 가렵다고 하면서 눈을 비비고 나니
속눈썹이 몇 가닥 빠지면서 눈꺼풀에서 피고름이 나왔습니다.
그후 눈꺼풀이 움직이면서 두 눈을 똑같이 뜰 수 있는 공덕도 받았습니다
1990년 대석사 등산을 하려고 준비했으나
창가학회의 저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후 학회신심을 하던 중
95년도 11월 달에 예하님께서 서사하신 어본존님을 내리고
창가학회에서 복사한 본존으로 교체하자
96년도 1월 26일에 큰아들이
새벽 2시경 전신마비로 구급차로 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었으나
진단결과 병명이 없었습니다.
몇 시간 후 깨어나서 온몸에 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또다시 마비증세가 나타나서 진찰결과 적혈구 공급이 순환되지 않아 치료를 받으면서 어본존님께 기원했습니다.
800만번 창제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
항상 친구가
가짜본존이라고 말한 것이 잊혀지지 않아서
본존교체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의심을 품게 되어
먼저 이웃에 있는
창가학회를 탈회한 친구집에 찾아가
종문의 어본존님 앞에서 창제하면서
'「올바른 불도수행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라고 기원하면서 아들기념도 했습니다.
큰아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고 소생한다는 확신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친구집에 제목을 하며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일기장을 보니
본존님 교체일자와 큰아들의 병의 증세가 이상하게도 한달 사이에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집에 있는 본존을 내리고 종문직결의 신심을 결심하였습니다.
때마침 올해 어회식에 참석하여 어본존님 하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준비가 악조건이었습니다.
오로지 제목만을 올려 어본존님 뜻대로 해결하려고 창제에 도전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기내에서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프더니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회원님들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무사히 대석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일정에 따라 보고 느낀 것이 많았습니다.
창가학회에서
종문비방, 어법주예하님이 비방설과는 달리
예하님의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었고
니치렌대성인님의 불법의 진리를 바르게 배울수가 있었습니다.
이케다다이사쿠에
속은 것에 대한 분노와
제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면서
올바른 불도수행을 할 수 있게끔해준 친구와 주변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남편한테는
지방에 있는 친구집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총본산에 계시는 본존님을 배알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어본존님하부를 받고 집에 돌아와서는
모든 사실을 남편과 자식 앞에서
종문의 올바름과 창가학회의 그릇됨을 알려주었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총본산에 정직히 연결하는 신심을 시작하기로 가족이 단결하게 되었습니다.
1998년 11월23일 입불식을 하였습니다.
며칠 후 남편과 아이들도 스스로 본존님 앞에 무릎 끓고 제목을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일가화락의 신심이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졸업을 앞두고 취업이 되었고 경제적으로 금전문제가 얽혀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은행에서 신용대출이 되어 해결되었습니다.
종문으로 연결하는 올바른 신심을 확신하며
대석사 첫등산에 힘이 되어주신 구법신도회 서울회원님께 감사드리며
먼저 창가학회ㆍSGI에서
탈회한 부산회원님과 함께 열심히 절복하며 광선유포에 신명을 다바치겠습니다.
10▶
바른 신심(信心)으로 목표달성을
정선 99년 3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동개신도회 신충현
저는 입신동기도 없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제목 소리를 들으며 태어나
자연스럽게 생활의 일부분이라 믿고 말을 배워 가는 동시에 제목을 불렀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원어독경을 시작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근행을 빼지 않았으며
어머니 손을 잡고 좌담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심히 신심을 하였습니다.
그런 결과 친구들 사이에서는 항상 인기가 많았고
초등학교 졸업을 할 때는 전교 2등을 하였으며
중학교 2학년인 지금은 반에서 부실장을 하고 있고
선행상도 타는 등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항상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아마 1995년 봄으로 기억됩니다.
그 당시 어머니는 파주지역 부인부장이셨고
저의 집에서는 좌담회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창가학회 불교회에서는
"「닛켄박멸 초전박살」"
이란 표어를 회원들에게 돌리는 등
좌담회 때나 교학 때는
대성인님의 불법정신보다 이케다회장을 신격화하였고
닛켄은 방법자라고 하며
닛켄방법기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숙명전환이 빨리 된다고
지도 아닌 지도를 하였습니다.
새로 입신한 사람은
대성인님을 몰라도 이케다회장은 알 정도로
지도는 허무맹랑하게 되어 갈 무렵,
어머니는 아주 우연하게 개인적인 일상생활에서
일본SGI 대간부들이
거짓 아닌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불단위에 올려 놓고 기념하던
"닛켄박멸 초전박살"
이란 표어를 찢어버리고
저와 누나를 불러놓고
그 동안 우리가 도리에 맞지 않는 기원을 했다고 하시며
닛켄예하님을 잘못 기원했었음을 참회해 가자고 하시면서
우선 내득신앙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보은을 모르는 배은망덕한 행동이었고 신앙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릇된 자세였습니다.
어머니는 점차 마음의 갈등을 느끼는 부분이 많아졌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바쁘셨지만
창가학회 불교회 지도의 허점과
SGI 이케다회장 지도에
불교회는 꼭두각시가 되어감을 확실하게 깨닫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96년 봄에 스스로 불교회 역직을 사임하셨는데
그해 가을에 저의 집에서 제공하던 좌담회를
사전통보도 없이 다른 장소로 옮겨갔습니다.
정말 환희에 찬 좌담회였고
우리들은 한 달에 한 번이면 대청소를 하는 등 큰 행사처럼 여기는 좌담회를 그렇게 가져갔을 땐
우리 가족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와 누나에게 근행요전을 가져 오라시더니
관념문에 대한 교학을 상세하게 해주시며
특히 3좌 관념문 중
【나무법수사병(南無法水瀉甁). 유아여아(唯我與我). 본문홍통(本門弘通)의 대도사(大道師). 제2조바쿠렌아자리닛코상인(第二祖白蓮闍梨日興 上人), 어위광배증어이익광대어보은사덕(御威光倍增御利益廣大御報恩謝德)을 위하여】
에 대해서
현 67세(世) 닛켄상인예하님까지의 법통상속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께서는 혹여 누나와 제가 신심을 하는데 마음의 갈등을 느낄까봐 염려하셨던 것같습니다.
그러나 저와 누나는
창가학회 불교회 신심이 잘못됐다고 확신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어느 일요일 새벽에 불교회 간부들이
저희 집에 와서 회원 몇 사람을 창가학회에서 탈회시켰다고
어머니에게 행패를 부리며 욕을 하고
종문 즉 법화강 신심을 하면
몇 개월 안가서 자식들을 다 잡아 먹게 된다는 말에
어머니는 화를 내시며 신심은 도리이고 인과이법인데
그 구업은
당신들의 몫이 된다고 하시며 대화할 가치도 없으니 가라고 했지만
가지도 않고 행패는 계속되어
저는 참다못해 전화통을 끌어당기며 경찰을 부른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욕설을 퍼부으며 돌아가는 것을 보고
창가학회ㆍ SGI불교회 신심이
잘못되어 감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도를 할 때는 상대방이 잘못하고 또 잘못해도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기념하라면서
그것도 새벽에 부인부들이 싸우러 다니는 것을 보고
불교회 지도가
대성인님의 신심의 맥에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바른 조직을 찾으려고 밤을 새워가며 제목도 많이 올리셨고
그 두꺼운 어서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읽으신 공덕으로 종문신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항상 원단근행 때는
첫번째 기원목표가 대석사 등산이었는데
창가학회의 엄청난 방법으로
등산할 수 없었던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시다는 어머니 말씀과 함께
종문의 바른 신심을 하게 해달라는 기념을 올린 결과
창가학회에서 탈회하게 되어 공덕 중에 가장 큰 공덕을 받았습니다.
지난 '98년 8월 제 2회 해외신도총등산 때는
원래 어머니와 누나가 등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누나의 중요한 시험 때문에
제가 대신 대석사 등산을 하는 대공덕의 그 기쁨은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전세계 중에서 115개국이 제목을 부르고 있는 최고의 종교라고 교학을 받으면서도 정말 그럴까하는 의아심도 없지 않았으나
이번 대석사 등산으로 생각이 180도로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닛켄예하님을 모시고
어개비에 참석하여 제목을 올리고 축인근행을 올리면서
생명으로 벅차 오르는 감격에 광포에 훌륭한 인재가 되어야겠다고 결의도 하고
신심을 하는 불제자로서 세계의 무대에서 기반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어학공부도 시작하여야겠다고 다짐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왜 그리도 신심즉생활을 강요하셨는지도 알 것 같았으며
바르게 신심을 할 수 있게 키워주신 어머니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더욱 훌륭한 아들이 되어야겠다고 대어본존님 앞에서 기념도 올렸습니다.
32개국 회원들과 한 자리에서 근행을 올리는 모습이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경지가 아닌가 싶었고 전혀 격의 없는 모습에서 원초의 동지라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었습니다.
저는 닛켄예하님의 뒷편에서 제목을 올리면서
예하님의 건강도 진심으로 기원했고
어머니께 교학을 들었던
나무법수사병(南無法水瀉甁)에 대한 보은사덕에 대해서도 더욱더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납골당도 돌아보며 감회가 새로웠는가 하면
대석사 정본당을 무너뜨리는 광경에 창가학회의 신심의 무지함도 느꼈습니다.
그 엄청난 부지에 우뚝 솟은 대석사!
바로 생명의 고향을 다녀온 저는
이제서야 신심에 눈을 뜨게 된 것 같습니다.
그토록 인자하시고 근엄하신 예하님께
오늘도 방법을 그칠줄 모르고 방자하게 날뛰는 창가학회 맴버들이 너무 너무 불쌍합니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지금 창가학회 불교회 간부들은
대석사 가는 게 뭐 벌거냐고 한다는데
신심이 잘못되지 않고서는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성인의 혼이 살아 계신다고 확신하지 않고서는 그런 망언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1998년 8월은
저의인생에 있어서 첫마디가 될 수 있는 가장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올 원단근행도 알찬 목표를 세워 어본존님께 착실히 기원했고
2002년 종지건립 750년 경축총등산 때는
저의 힘으로 지금부터 조금씩 저축하여 새로운 다짐으로 대석사 등산을 할 계획에 있으며 일본어도 틈틈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만큼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고 매일 매일 결의하고 실천해 나가고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봉사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자세로 성장해 나가겠습니다.
11▶
◈ 삼보를 지키며 공양드리는 공덕은 무량하다.
정선 99.04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한양신도회 나 경 만
신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양신도회 전북 정읍의 나경만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신도님들의 기원과 배려 속에 환희에 찬 어대회 등산을 다녀왔습니다.
체험담을 준비하면서
과거의 창가학회ㆍSGI의 방법(謗法)이 무엇이며
그 동안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979년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하여
1985년 만기 귀국하여 국내 생활에 적응하려 했으나 그동안 번 돈도 부족했고 가난과 질병은 그 칠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조그만 사업을 하던 중
창가학회의 권여자부장이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 절복되어 신심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십대 초반의 여성답지 않게
불법(佛法)의 삼세론과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면
모든 숙명을 타파할 수 있고 팔자를 바꿀수 있다는 말에 이끌려
1986년 입신하여
정읍회관에서 신심을 시작하였습니다.
신행학을 배워가며 실천하고 본격적인 남자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제목과 함께 대성인님의 어서를 읽어 나갔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하종절복을 하다보니
신심이 없는 사람은 저를 미쳤다고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명에는 환희와 희망이 용솟음치며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초신의 공덕으로 이어져갔습니다.
1988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도 하고
결혼 2주년이 되던 해에는 대석사 등산도 할 수 있었으며
집도 사고 땅도 생기고 많은 공덕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1990년 말이었습니다.
서울 구로동 창가학회ㆍSGI본부회관이 건립되면서
저는 불교회본부 교학연구회원으로 되었고,
종문과의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면서
이케다 선생이 십자훈장을 받았는데
종문에서 생트집이라고 하더니
다음에는 예하님이 선종의 선사에 묘를 쓰고 있다는 등으로
「지금 종문은 선천마가 되어 있다.
혈맥은 창가학회에 있으며 승보는 닛코상인 일인(一人)이다.」
이러한 말들로
SGI회원들을 분동시켜 등산금지 및 예하 퇴좌운동을 실천하고 있던 중
1991년 말부터
제게는 평생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서서히 불법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장사가 잘 안 되어 집을 세놓고 작업을 바꾸어 가구점을 시작하였으나
2년만에 부도가 나서 무역회사와 가구점은 경매처분되고
저는 경찰서에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유치장 안에서 조석근행을 빠뜨리지 않고 실천하면서
대석사 대어본존을 향해 참회의 제목을 올려 가던 중
석 달만에 40만원 벌금으로 풀려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창가학회간부가
집에 찾아와서 저의 아내가 모시던 닛켄예하님이 서사하신 본존을 바꾸어가고
26세(世) 니치칸상인의 가짜복사본존
(※일련정종 니치칸 상인님이 도현하신 본존을
창가학회가 겉모습만 복사 하여 만든 가짜 본존을 말함)
을 불단에 안치하면서 모든 학관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창가학회 물방울무늬의 모양이 된 것을 부착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방법이었습니다.
지시했던 장년부 지역장은
6개월 후 시름시름 앓다가 간암 판명이 되어 얼마 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지 두 달 후 다시 지부 부인부장의 간암,
지구담의 간암,
지역지도장의 뇌경색,
권부인부장 남편의 안면마비 등
표현할 수 없는 나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현증이 불법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학회에서는
이케다다이사쿠의 학위 수여식과 훈장받는 일로 감추어가면서
종문과 예하님을 상대로 비방과 방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진미래재의 말법만년의 광선유포를
불과 50년 동안 한 학회는
세계 광선유포를 학회가 다했다는 등 교만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 힘을 내어
창가학회 회관에서 보름간 제목을 해보았으나 역시 아무런 희망도 없고
1997년 11월 27일에는
대학 3학년이던 남동생이 갑자기 대둔산에 갔다가 행방불병이 되고
며칠 후 추락사망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노모에게는 호주로 유학 보냈다는 거짓말까지 해야 하는 일로 더욱 괴롭게 되었습니다.
1998년 IMF가 되면서
또다시 1억 가까이 빚쟁이가 되면서 집과 가계마저도 사람 눈을 피해 가는 생활이 되어 매일 술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저에게 사명이 남아 있었던지
1990년에 하종한 셋째 남동생이
종문신심을 하고 있으면서 지금 괴로움에 시달리는 형님을
꼭 창가학회에서 탈회시켜서 하종 해주신 은혜를 갚으려 한다고 하면서
지금 고생하시는 이유는 승보(僧寶)를 비방한 현증입니다.'
라며 서울에 있는 집으로 올라오라고 하였습니다.
당장 서울로 가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던 저는
동생이 입금시켜 준 돈으로 차표를 사서 동생 집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동생집에 들어서자 불단이 보였고
근엄한 모습으로 창제하는 동생의 모습이 대견스러웠습니다.
예전 초신 때의 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독경책을 펴보니
관념문도 모두 틀리게 고쳐서 회원에게 나누어 주는 이러한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는 다음날 한양신도회 회관에서 창기학회탈회를 결의하였습니다.
「총본산 대석사에 등산해 보십시오.
형님께서 눈으로 보시면 진실을 곧 알게 되십니다.」
동생이 연금을 해약하여 마련해 준 경비로 11월 등산(어대회)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석사에 도착한 다음날 흑문 완공식이 있었습니다.
지금 암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 축인근행도 못하고 계신다던 예하님이
여러 존사님들과 함께 건강하신 모습으로 등장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너무 몰랐습니다.
창가학회가 발행하는 호외의 말들은 모두 거짓임을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삼삼구도식과 축인근행 어개비 모든 행사때마다
삼보를 비방한 죄를 눈물로 깊이 참회하였습니다.
대어본존님을 뵙고 나니 마음이 초신 때 처럼 후련하고 대성인께서 명의 조람하시며 축복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본존을 잠시라도 믿고 난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면
이치로서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기원으로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고
복으로 오지 않음이 없도다 」
라는 말씀과 같이
저는 새로운 마음으로 이시바시존사님으로부터 수계도 받고 어본존님 하부도 받았습니다.
어개비 때에는 대도사이신 예하님의 인제목을 가슴에 새기며 미래광선유포를 결의하였습니다.
니치렌대성인의 묘소도 배알하고
또 광선유포도중 운명을 달리하신 여러분께도 깊이 회향을 해 드릴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오중탑을 보고 태양의 불법을 생각하면서 가슴 속에는 새로운 환희와 희망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이시바시존사님께서 독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 주시고
이런 모든 것이 학회와 너무 달라서 감사하기만 하였습니다.
지호지(慈法寺)에 들려
큰 환영을 받고 탑파공양을 한 후 등산 일정을 모두 마치고 김포에 도착하였습니다.
정읍집을 6일만에 내려가니
창가학회원인 아내는 물론 정읍권 회관이 벌집을 건드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전북방면 책임자, 하루는 권장, 또 하루는 학회원들이
술을 먹고 단체로 몰려와 가만두지 않겠다는 등
폭언을 하고 삼 년 안에 벌이 나온다는 등 노모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속아서 승보를 비방한 단체인 창가학회는
혈맥상승의 승보이신 예하님을 훼욕(毁辱)하지 말고
종문을 비방하는 대방법을 하지 마십시오」'
라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종문에서 가져온 모든 자료 등을 보여주었습니다.
학회원들이 돌아간 후
대석사를 향해 순수한 초심으로 근행을 올리고 나니 그동안의 벌과 공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대석사를 다녀 온 후
3,500만원의 중매인 채무를 한 달에 50만원씩으로 해결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거래처 모두가 제천선신으로 되어
장사 매출은 상상 이상으로 높았고 좌담회 방을 기원한 결과
집세를 내지 않고 몇 년이든 살라는 집이 생겼습니다.
모든 생활을 본존님께 기원하여 실천하다 보니 하는 일마다 순조롭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의 아내도 대석사 등산을 시켜서
그 동안의 학회의 일들을 참회케 하고
예하님과 종문을 거치면서 조석으로 게으름 없이 수행해서
반좌담회의 발전은 물론 SGI 창가학회원들을 방법의 수렁 속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해나가도록 실천하겠습니다.
끝으로
저를 고통 속에서 파절하여 등산까지 시켜준 동생과 한양신도회 회장님을 비롯하여 신도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삼보를 지키며 공양드리는 공덕은 무량하다는 말씀으로 이상 마치겠습니다.
12▶
◈소생의 길을 찾아서
정선 99.05월 한국일련정종(韓國日蓮正宗) 구법신도회 김 정 희
저는 1999년 1월 창가학회.SGI를 탈회한
구법신도회(경남 창년 거주)의 김정희입니다.
1966년 8월 8일 여고 시절에
어머니의 끈질긴 강요로 대구에서 입신했습니다.
그 당시는 환자와 가난한 사람이 많았고 교재도 없이 어서를 배웠습니다.
여고를 졸업하고는 여자부장을 맡으면서
한편 직장을 다니면서 대구에서 지방인 경산, 월배 등을
저녁도 거르면서 소위 이케다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열심히 불도수행을 해왔습니다.
특히 이케다선생님의 「젊은 날의 일기 」를 좋아했습니다.
1973년 연이 있어서
지금의 남편과 중매결혼을 하여 경기도 평택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저의 신심을 인정해 주었으나
결혼한 후에 남편의 반대로 퇴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첫아이를 낳으면서 난산으로 하혈을 많이 하여 심각해져서 친정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퇴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친정에서 다시 제목을 올리게 되어 신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아이를 갖고는
처음으로 100만 번의 제목을 올려서 편히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남편도 1978년 제목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부산으로 마산으로 옮겨다녔으나 어디로 가나 신심을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 동안 지부부인부장 및 권부부인부장으로 활동하였습니다.
1981년 2월 1일에 가족이 모두 수계를 받고 어본존을 하부 받았습니다.
그 후 1885년 창원으로 옮기게 되고
집도 구입하게 되어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이 나날이 즐겁고
아이들도 공부 잘하고 남편도 계장으로 과장으로 승진하고
온 가족이 이체동심으로 제목을 올리고 활동하느라고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에 등산도 서울 형부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마의 1992년이 닥쳐왔습니다.
당시 고2, 중3의 두 아이는 수험생으로,
제목의 해로 정하고 100만 번 도전에 들어갔습니다.
전 해 1991년 초부터 종문과 학회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었으나
무엇이 무언지 모르게 제목투쟁에 돌입했던 것입니다.
1992년 4월 창가학회를 탈회하고 종문으로 간 서울 형부로부터
탈회 권유를 받게 되었습니다.
형부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남편에게 창가학회 탈회할 것을 권했더니
한마디로 거절하고 앞으로는 형부와는 만나는 것은 물론 전화도 못하게 했습니다.
종문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정을 파탄할 수도 없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본문계단의 대어본존을 향해 제목을 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은 학회, 마음은 종문을 독경도 바꾸지 않고 예하님도 비난하지 않고
만나는 회원에게도 그것을 알려주면서
창가학회활동도 그만두고 오로지 제목에만 열중하고 하루 속히 승속화합의 날이 오기를 기념했습니다.
그러면서 1992년에는 1년 동안에 700만번 (하루 10시간)의 제목을 올렸습니다.
그런 동안에 당시 창녕에 147평 짜리 집을 사서
창원 집을 세를 놓고 창녕으로 들어와서 오로지 제목을 올리면서
제나름대로 창가학회지도에 따르지 않고
마음은 대어본존에게 통하고 있으니 방법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올 것이 왔습니다.
1998년 6월 17일 남편이 드디어 가짜본존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로부터 두 아이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크게 싸우고
공부를 잘하던 큰 아이가 갑자기 공부도 하지 않고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
남편이 1998년 9월에 퇴임을 한 후12월에 가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에
당황한 저는 하루 10시간의 제목을 올리기 시작하였더니
문득 가짜본존에 대한 일이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사과제목을 올리면서 남편이 돌아올 것을 기원했더니
그 기원대로 돌아왔습니다.
또 큰아이도 낙제를 당하게 되었는데 불력으로 낙제도 면하게 되고 지금은 교수 연구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현증으로 확신이 생겨서 탈회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 1월 21일 서울 형부를 찾아가서 구법신도회에 입회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아직 남편도 아이들도 탈회에는 반대였고
가짜본존을 반환하는 것은 더욱 반대하였습니다.
우선 가짜본존을 반환하고 총본산에 가서 권계식을 받고 진짜 어본존을 하부 받아 와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서울 형부를 찾아가 있는 사이에
또다시 남편이 탈회하는 것을 반대하며 가출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에는 죽음을 각오하고
창가학회에서 탈회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서울 형부와 구법신도회 간부님과 함께 대구 형부를 찾아가서 함게 탈회할 것을 설득하고 다시 오빠를 찾아가서 설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큰언니를 설득하여 네집이 함께 탈회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언니와 오빠는 전부터 종문을 따르지 않는 SGI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탈회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문 전의 이케다다이사쿠는
본문의 대어본존과 예하님을 받들어 모실 것을 지도하였으나
종문을 떠난 후로는
대어본존을 떠나고 예하님을 비난하고 근행요전의 관념문을 바꾸고
자비로웠던 그가 악마로 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도 언젠가 승속화합할 날만을 바라고 기원해왔으나
가짜본존까지 나오면서 생활상에 현증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제목을 많이 올렸던 공덕인지
잘못을 깨닫게 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제 숙업이 나왔다고 믿고 계속 그 방법단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는 남편이 돌아오면 설득을 하여
함께 가짜본존을 내릴 생각이었으나 방법물임을 알고 나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결국 혼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곧 남편이 돌아와서 난리가 나고 한때는 수라장이 되어 이혼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으나
제목을 올려 설득한 결과 두 아이까지 도와줘서
남편도 고집을 꺾게 되어 남편과 저 그리고 올케와 대구 형부 네 사람이 함께
가짜본존은 반환하고 진짜 어본존을 하부 받으러 다이세키지(대석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다이세키지로 떠나기 위해
전 날 서울 형부 집으로 갔더니
창가학회ㆍSGI청년부 9.10명이 서울까지 찾아와서 못 가게 방해하는데는
실로 그때가지는 말로만 들었던
"'탈회자는 죽을 때까지 괴롭혀라"
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실로 창가학회ㆍ SGI는 무서운 단체입니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나
하여튼 1999년 3월 6일
무사히 등산을 하여 권계식을 받고 어본존님을 재하부 받고
본문계단의 대어본존님을 봉안전에서 어개비를 받고
객전에서 축인근행에 참석하고
7일 아침 어영당에서 행해진 닛코상인의 보은어강에 참석하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창가학회ㆍSGI에서는
예하님이 정본당을 허는 벌로 중병을 앓아서 입원중이라고 악선전을 하고 있는데
3박 4일 동안에
축인근행 3번, 어개비 2번, 어강 1번의 행사 때마다
우리들보다 더 건승하신 예하님의 모습을 그들은 무어라고 변명을 할 것인가?
아니 돌아와서 그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것은 예하가 아니라 예하를 닮은 가짜"
라고 말하는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본존을 재하부 받아오니
3월 10일경부터
SGI청년부가 상부의 지시를 받고 우리 집을 감시하고
SGI회원을 못 만나게 방해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들의 거짓말이
저를 만남으로 밝혀질 것을 염려해서였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저와 친했던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집집마다 순회를 하면서 가짜본존의 유무를 조사하였고 저를 못 만나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 지부부인부장 부부를 탈회시켜서
가짜본존을 반환하고
4월 10일에 함께 등산하여 권계식을 받게 하고 어본존님을 재하부 받아서 모셔오게 하였습니다.
그후로는 SGI청년부가 더 심하게 밤마다 나타나서 괴롭히지만
저는 절대 굴하지 않고 다시 3세대를 파절시켰고 등산할 예정입니다.
앞으로는 SGI의 감시와 방해는 계속되겠으나
저도 절대로 굴하지 않고 남편과 또 구법신도회 동지의 협조로써
속죄의 각오로 이 목숨 다하도록
아직도 속고 있는 창가학회ㆍSGI에 남아 있는
옛 동지를 한 사람씩 구해갈 것을 어본존님께 굳게 맹세하면서 제 체험담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3▶
◈ 한일 청년부 교류 연수회 - 2.
체 험 담(體驗談)
정선 2000.08월 일련정종(日蓮正宗) 엔쇼지지부(円照寺支部) 후쿠다카쯔유키(福田勝之)
1996년 형기만료로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출감한 저는
조직의 동지들의 마중을 받아 구레노마치(吳の町)로 돌아왔습니다.
출감한 날은 비, 과거의 죄를 씻어낸다는 전설대로 폭우 속에
사회에 복귀한 저는
조직을 떠나기 위해서 손가락을 잘라 발을 씻었습니다.
8년이라는 때의 흐름을 음미하면서
엔쇼지(円照寺)에 가서 돌아가신 부모의 탑파공양을 하고
1981년 하부받은 어본존님을 8년만에 안치하게된 것도 이 해였습니다.
그러나 깡패기질이 빠지지 않은 저는
출감 1년째에는 사건, 사고를 계속 일으켜
1997년 6월에 엔쇼지로 가서 주직님에게 푸념을 하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소용없다.
허리를 펴서 묘자(妙字)를 보고.....」
라고 주의를 주시고 함께 제목을 불러주시며
「슬픔을 남에게 말하여 소멸 할 수 있는 슬픔은
진짜 슬픔이 아니니 제목이 있는 것이다 」
라고 지도하여 주신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해의 8월 13일, 창가학회에서 탈회하고 법화강에 입강하였습니다.
창가학회에서는
그다지 신심을 하지 않았던 저였지만
입강 전부터 주직님을 만나면 무언지 모르게 절대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맙게도 11월에 지부총등산에 참가하여
「겨우 돌아왔습니다.」
하고 울먹이며 어개비를 보았습니다.
1998년의 첫 등산 후
가슴의 아픔을 알고 병원에 갔더니 오른쪽 가슴에 콩알만한 혹이 생겨 진찰결과
「암 같다 」
는 것이었습니다.
문신을 새기면서 무리를 했기 때문에 호르몬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
조직에 있을 때의 빚으로 입원할 돈은 전혀 없었습니다.
「좋아, 주직님의 지도를 받자 」
하고 마음을 정하니
「더욱더 신심을 열심히 할 때다 」
라고 지도를 해주시고 불성을 열어 주시며 함께 제목을 올려주셨습니다.
나날의 사원참예, 매월의 등산, 지부의 절복활동 멤버에 참가하여
청년부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는데도 돈이 없는 나였습니다.
등산비를 염출(捻出)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여 이발비를 아끼고
자취를 하면서 가계를 절약하고, 술, 담배를 끊는 등 하여
1년에 13번, 현재 16번등산을 했습니다.
활동을 하니 창가학회 남자부로부터 협박을 받아
「이봐, 후쿠다! 너를 이 구레(吳)에서 못 살게 해주겠다 」
「너는 손가락이 없어 모두들 무서워 하니 손가락 없는 것을 숨겨라 」
하는 등의 욕, 중상(中傷)으로
연일 4~5명의 창가학회원이 집에 왔습니다.
저는 결심하고
「나를 활동 못하게 하려면 나를 죽여라,
활동은 그만두지 않는다.
집단으로 나를 구레(吳)에서 못살게 하다니
창가학회야말로 깡패조직이 아닌가 」
「공적인 장소에서 정정당당하게 대화하자 」
라고 하니
마지막에는 도망가는 창가학회남자부 간부에게 혐오를 느끼게 되어 먼저 어려운 집안의 절복부터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집안 사람들과는 모두 떨어져 있었습니다.
객전낙경법요 등산 전에
공사(工事)의 타협을 하시는 어법주닛켄상인예하님으로부터
「힘내시오」
라는 격려의 말씀을 받아서 더욱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4월 2일 돌아가신 어머니 명일에 본산에 갔었습니다.
어개비 때
「헤어진 누이들과 함께 제목을 부르게 해주세요, 절복을 하게 해주세요 」
라고 이것만을 기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고 돌아오는 중에 도중하차하고 싶어서
회사의 사람에게 여기서 내리겠다라고 하며
항상 내리는 장소가 아닌 장소에서 내렸습니다.
무언가 불가사의한 힘에 이끌리듯 골목에 들어서니
매제부부가 탄 차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저는 손을 흔들었습니다.
매제도 저를 봤으나 말을 걸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카들이 「삼촌」하고 말을 걸어서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한번 놀러가고 싶다」
는 말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여러 가지로 망설이는 중
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주직님과 함께 부르는 제목의 기쁨이었습니다.
「후쿠다군! 무슨 일이 있어도 제목이다」
라는 지도를 받았습니다.
1998년 9월 20일
청년부 대회를 향해서 부원 댁을 방문하여 돌아오는 길에
동생을 만나겠다는 기분으로 가슴이 벅차 동생집에 가니
모두가 반가이 맞이하여 주었습니다.
먼저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는 동시에
「제목은 절대적이다.
함께 엔쇼지(円照寺)에 가서 어본존님, 주직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
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지도 받은 것을 술술 이야기하고
상대방 이야기도 잘 듣고 절복파절의 명분으로 화내지 않고 미소를 띄운 얼굴로 대화하고 있었다고 뒤에 누이로부터 들었습니다.
신심이 없는 사람이니까 함부로 말을 해도 끝까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를 보고 누이들은
「오빠가 딴 사람이다」
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8월 한가위에 저의 집에 주직님이 오시게 되어서
동생부부 가족 5명을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3년째의 명일(命日) 13회기(回忌)도 이날이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3남매가 나란히 제목을 부를 수가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복귀한 저는
입강한지 1년만에 아파트를 빌리고 이불과 작업복밖에 없었던 방에는
우선 어본존님을 안치하고 가구도 장만하고 만나고 싶었던 누이도 옆에 있었습니다. 「남묘호렌게쿄는 절대적이다」
이 한마디의 되풀이였습니다.
8월에 누이 둘, 조카 둘 4명이 어수계를 받고
청년부대회는 예년의 배의 결집,
10월에는 일련종(日蓮宗)의 제부 절복 한세대,
어본존 하부를 받고 누이들과 11월에 지부총등산에 참예하였습니다.
출진의 해 1월 1일에 누이의 후배에게
「행복해질 방법은 남묘호렌게쿄 라고 부르는 것이다 」
라고 새해인사와 동시에 전하고
누이와 절복하여 2월에 내득신앙이지만 입신했습니다.
주직님은
「2월을 12월이라고 생각하여 활동하시라 」
고 지도하셔서
「예 」하고 대답한 저는 힘이 솟아
2월말에 또 다른 염불종의 매제를 절복하여 어본존하부를 받고
3월에는 청년부를 방문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분세대절복(分世帶折伏)을 성취하고
5월에는 염불의 매제의 동생 부부를 절복하여 어본존하부,
7월에는 처음으로 본산임무를 맡게 되어
그 전에 절복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회사의 동료를 절복, 내득신앙이지만 착산하는 당일까지 그 동료와 사원참예하여 함께 가정방문하며 지냈습니다.
초임무(初任務)를 마치고 동료와 하종을 결정하고
동료 친구에게 사원참예를 권하여 친구와 함께 제목을 불렀습니다.
'이 사람을 반드시 절복하게 해 주십시오.'
약 1년의 활동으로 어본존하부 4세대, 내득신앙 2세대, 남자부 4명, 여자부1명, 영미세스 4명, 소년부 2명 모두 11명이 입강했습니다.
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어법주닛켄상인예하님의 격려의 말씀과 제목의 기쁨에 있습니다.
신체의 중심에 똑바로 관통하는 이상한 감각,
몸이 차분히 가라 않고 묘(妙)의 문자에서 행복이 가득한 우아한 빛에
전신이 쌓여서 녹아 가는 아늑한 기분, 기쁨 즉 경지명합의 제목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나 누이들의 목숨을 구해주신 대어본존님,
어법주닛켄상인예하님, 주직님 아래서
종지건립 750년 30만 총등산을 향해서 정성껏 광포를 위해 싸워가고자 합니다.
한국의 여러분,
오늘 수계를 받으신 것은 니치렌대성인께서도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배(拜)합니다.
이체동심으로 어법주닛켄상인예하님께 보답해 나갑시다.
경청하여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