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미르
류성훈
파란시선 0127
2023년 6월 1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24쪽
ISBN 979-11-91897-56-2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천국은 있는 게 좋을까 없는 게 좋을까
[라디오미르]는 류성훈 시인의 두 번째 신작 시집으로, 「왕표연탄」, 「라디오미르」,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등 55편의 시가 실려 있다.
류성훈 시인은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라디오미르], 산문집 [사물들―The Things] [장소들―The Places]를 썼다.
“류성훈은 미궁과도 같은 현실 속에서 미궁의 위상을 미학적 상상력의 중간 지대로 전환하려는 치열한 노력을 수행한다. 모호함과 불확실함은 류성훈의 시 세계에서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이 과정은 번민과 자책과 실망을 경유하고, 그는 솔직하게 그 과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시인이 된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실패와 좌절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찰나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공과는 거리가 먼 실패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가 번뇌하며 시를 쓰는 자로 여기 남게 한다. 이 모든 과정은 파국과 죽음을 무릅쓴 외줄 타기와 같을지도 모른다.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로써 ‘예전’과 ‘지금’이라는 이질적인 두 관점 이외에 세 번째 요소를 말한다. 바로 예전과 지금을 몽타주하는 ‘응시’이다. 응시가 없다면 예전과 지금의 겹침과 충돌, 몽타주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의 말에 다시 한번 기대어, 비유적인 차원에서 류성훈의 시적 화자를 언어의 분해와 재조립을 수행하는 기예를 통해 가능성의 몽타주 혹은 가능성의 중간 지대를 펼치는 줄타기 곡예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시인은 어느덧 이 덧없는 명명조차도 기쁘게 빠져나갈 것이다.” (박상수 시인・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류성훈의 시는 ‘훗날의 내’가 소멸할 시간의 눈으로 바라본, 또는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광막한 우주 공간을 걷는 자의 눈으로 바라본, 다 없어질 것들의 ‘환’이 펼치는 드라마이다. 의식의 파편을 촘촘하게 겹쳐 붙인 모자이크이다. 거기서 꿈같은 현실과 현실 같은 꿈의 파편은 슬픔과 반복의 무늬를 그리며 나타났다간 사라지고 다시 나타난다. 그래서 시를 읽는 동안 시적 화자의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콘덴서가 나가면 콘덴서를 갈고/사람이 나가면 사람을 갈”듯이, 아무리 팔을 잘라도 죽었다는 사실이 바뀔 리 없는 좀비를 위해 가짜 도끼를 만들듯이, 삶의 환, 죽음의 환을 반복하는 일의 고통스러움. 그것은 “자전만 있고 공전은 없는 춤들”과같이 죽음 같은 삶, 삶 같은 죽음을 헛되이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또한 그것은 “가다 가다/가던 이가 가고 가던 이에게 가다/더는 갈 수 없는 그곳”으로 가는 일을 반복하는 일일 뿐이다(「아무것도 되지 말고」). 그래도 신음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비명은 무심하다. 시집을 읽는 동안 왜 살지, 왜 숨 쉬지, 왜 시 쓰지, 계속 묻다가 지치게 된다. 이 지독한 체험 속에 있을 때, 나는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묻는 물음의 호소력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해진다.
―김기택(시인)
•― 시인의 말
진통제만 찾던 심해어들이
저인망에 무더기로 걸린다
•― 저자 소개
류성훈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보이저 1호에게] [라디오미르], 산문집 [사물들―The Things] [장소들―The Places]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리페르셰이의 날 – 11
왕표연탄 – 12
아무것도 되지 말고 – 14
라디오미르 – 16
발등으로 걷기 – 18
도로풍 아래서 – 20
낙민동 – 22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 24
히에로니무스의 올빼미 – 26
고통에 대하여 – 28
8절지 스케치북 – 30
아 좀 더 적극적으로 – 32
마흔 – 34
제2부
도유리 – 37
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처럼 – 38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 40
글루코사민 – 42
쌔리삔 이야기 – 43
당리동(堂里洞) – 44
교룡의 날 – 46
가장 큰 오점처럼 – 48
과도 – 49
삼촌사우루스 – 50
대박이 – 52
수박 세일 – 54
냉암소의 날 – 55
요절 – 56
제3부
땅강아지 – 61
기상특보 – 62
서로의 좁은 등을 긁으며 – 64
축사를 찾다 – 66
그런 적 없는데 – 68
건기 – 70
저서성 – 72
받아라, 바다 – 73
오로라를 보러 가려던 – 74
좌부동자에게 – 76
산 11-6 – 78
능 – 80
문향 – 82
긴 숨은 장마처럼 – 83
제4부
테디베어가 웃는다 – 87
테네리페 – 88
겨울잠 밖에서 – 90
뻐꾸기 – 92
암순응 – 94
시스템 동바리 – 96
카우 – 98
잠수함 – 100
중력 새총 – 101
Hard times come again no more – 102
저녁의 창자들 – 104
남아 있는 볕 – 106
백목련 – 107
침대가 비고도 – 108
해설 박상수 가능성의 중간 지대 – 110
•― 시집 속의 시 세 편
왕표연탄
당신 없이 오던 곳에, 당신과
훗날의 내가 옵니다 별 여유도 없이
떠나온 곳으로 가끔 도망치기도
도망쳐 온 곳으로 가끔 떠나오기도
거기 아직도 멀뚱히 선 절반의 나도
살았던 시간보다 갑절 오래된
지금의 나도 우수처럼 녹아 흘러 나갈 테지만
어려서 오르지도 못하던 고개 위에서
색깔만 아름다워진 옛 피란민촌을 보며
당신은 이렇게 예쁜 마을이 있던가 했고
나는 그들이 새 삶을 꾸렸던 연탄방도
여기 어디쯤이란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다녔던 천주교 유치원이 있고
고개를 넘어가면 태어난 집이 있고
아직도 빨래가 벽화처럼 널려 있었습니다
왕표연탄이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때 담벼락 이름에 그때 소금기, 나는
바람이 사람보다 오래 산다고 읽었지만
대규모 철거에 마을 화장실과 타일이
햇살에 드러나 반짝이는 걸 보곤
내 말에 아무런 확신도 못 가졌습니다
어찌 됐건 지금이 더 나은 삶, 왜
아직도 여기 서 있느냐고 물어도
돌아가신 외할머니 손만 붙드는 아이
이십여 년을 가던 중국집이
최고 흥행 영화의 배경으로 나온 후론
면발이 퉁퉁 불어서 나왔습니다
이젠 떠나지 않아도 된다 믿을 때는
가장 떠나야 할 때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순간은 무슨
지나간 건 모두 찰나지,라고 말하며
나는 아무런 확신도 못 가졌습니다 ■
라디오미르
바늘에 불빛을 바르다 천천히 녹아 버린 몸들이 있었다 어리지도 늙지도 않은 별, 너의 보이지도 않는 베어링 위에서 손과 붓은 같은 이름으로 칠해지는 곳을 향해 크고 텅 빈 가방을 둘러메곤 했다 시침보다 빠르고 분침보다 느린 곳에서 시간은 몰래 바그너의 LP 따위를 걸었을 것이다
연금술을 배울 거야,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황금시대든 황금 알이든 본 적도 없는 책들처럼 우리는 반짝이는 어둠만 그리워하며 모래를 치웠지, 그건 모래가 아니라 죽은 기억의 뼈들이었고 알고 난 후를 환, 그 이전도 환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발음들이 서로에게 침 냄새를 묻혀 갈 때, 밤이 땅의 반대편에서 지울 수 있는 것은 밤뿐이라 여겼다 복족류처럼 끈적한 발을 우주까지 들이밀어 봤다면 우리가 사랑한 것은 반짝이는 것보다 반짝인다는 말을 위한 혀의 원리였을 거야 우리는 구개음화 이전의 해돋이 앞에서 스스로 빛나는 것 하나와 스스로 빛나는 방법 열 가지를 읽었고 너는 고작 한 가지인 나를 열 가지 방법으로 꺼뜨려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결코 조용한 적 없는 저 밤은 너머,라는 이름의 나라를 그리워하도록 우리의 걸음들에 기관처럼 이름을 붙였고 이름과 아름다움은 구별되지 않는 세포였다 우리를 붓질하던 발음은 사실 밤이 아니라 밤의 기억이라는 저주, 서로라는 말은 왕복운동, 각자라는 말은 회전운동이었던 손바닥 위에서 우리는 여행 이전의 심장을 동력학적으로 퍼올린다 네가 애초 맞지 않는 잠옷의 다리를 자르려 했을 때 밤은 혀를 잃었고 나는 맛을 잃었지만 말은 얻었다고 생각했었다 이불 속 같은 바다에 빛을 보러 가기 위해 창틀에 말려 놓은 해를 나는 끝까지 못 본 척했었다
해치를 열기 위해선 우선 닫아야 해, 녹아 버린 몸들이 너설을 걸어오던 선창 안에서, 물에 빠져 죽지는 마,라고 너는 내게 말했다 ■
좀비영화에서 엑스트라의 팔을 자르는 고무 도끼 제작자의 심정으로
자전만 있고 공전은 없는 춤들
달을 따라 수없이 떠돌려 했지만
허리도 무릎도 가진 적 없는 행성들은
그런 춤을 본 적이 없었다
가장 큰 신전에는 상현도 하현도 있었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고
튼튼하게 떠받쳤지만, 재생되지는 않았다
콘덴서가 나가면 콘덴서를 갈고
사람이 나가면 사람을 갈고
죽었던 괴물들이 살아 돌아왔다
누구는 달을, 누구는 괴물을 사랑했고
달은 누가 괴물이건 그들을 사랑했지만
재생되지는 않았다
그렇게도 울고 웃던 영화 제목을 모르겠어
내가 네게서 갑자기 떠날까 두려울 때
용서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
전구를 갈아 줄 사람이 필요해서
전구를 갈았다
괜찮아, 천천히 멀어질 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