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1929~1993)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은 '영국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벨기에' 에서 태어났습니다.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2차 세계대전'이 발생, 독일의 '나치사상(思想)'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 '벨기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안소니' 역시 '나치' 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가출했습니다.
'헵번'의 나이 10세. 1940년 벨기에가 '나치' 에 함락당하자,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헵번'을 데리고, 당시 중립국이었던 고향 '네덜란드'로 이주
합니다.
'네덜란드'마저 '나치'에 함락당하고, 그때부터 어린 시절의 고생은 시작
됩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아이들과 여성이라는 것"처럼
배고픔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당시 '헵번'은 유대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가해자(加害者)'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이 네덜란드에 진격하면서 도피 생활은 끝이 났지만, 귀족 가문
이었던 외가(外家)는 몰락했고, 재산(財産)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녀는 발레를 시작하여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네덜란드 에서 영국으로 이주합니다. 물론 아버지는 전쟁 중에 헤어졌기에
이미 고인(故人)이 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도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발레' 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트 클럽의 댄서, 사진 모델, 단역 배우도 마다치 않고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연기가 하고 싶어 한 게 아니라, 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열심히 살면서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오는 법, 그래서
우리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UN에 가입한 나라 중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모나코'의
수도 '몬테카를로' 호텔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유명
여류 작가인 '코렛'이 그 호텔에 묵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헵번'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지지(Gigi)"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 올려지게 되었는데, 여주인공을 캐스팅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행운의 여신(女神)은 그렇게 찾아오는지, 생계를 걱정하던 단역(端役)
배우가,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보기 원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주연
배우' 로 캐스팅된 것입니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고, 얼굴의 기미는 눈물
자국을 따라 생긴다지만, 행운은 파도처럼 밀려와 승승장구(乘勝長驅)
합니다.
당시 우리에게 영화 "벤허"로 잘 알려진 프랑스 출신 영화감독 '윌리엄 와일러
(William Wyler. 1902~1981)'는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영화를 각본
까지 다 준비하고, 출연 배우까지 캐스팅하였으나, 촬영 전에 무산(霧散)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캐스팅한 여배우는 "젊은이의 양지"로 당시 유명세를 누리던
'엘리자베스 테일러' 였고, 남배우는 유명한 '캐리 그란트'였으나, 그녀는
당시에도 콧대가 세서 자신의 캐릭터와 맞지 않는다고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도 '힐튼 호텔'의 아들 '닉 힐튼' 과 결혼하여 1년도
안 돼 이혼하는 바람에, 청순하고 고결한 '공주 이미지'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
이었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린 '와일러' 감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러
갔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오드리 헵번' 이 주연인 "Gigi" 였습니다.
'와일러 감독' 은 '헵번' 에게 첫 눈에 반하여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합니다.
그 영화가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 1953)"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별이 탄생하는 것을 보면서, 위에서 '행운'이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였지만, 고생한 과정을 겪은 본인은 공적인 자리에서 아니고는 결코
'행운'이라고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지만, 결코 우연과 인연은 사전(事前)에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 여류 작가 '코렛'이 모나코에 가지 않았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브로드웨이'에 가지 않았다면, '오드리 헵번' 이라는
별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연이나 인연이기 전에 '오드리 헵번' 이 피나는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고 행동하였기에 그들을 만났고, 그 결과 행운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결국, 우연이나 인연은 우리의 준비된 행동의 결과가 만들어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가는 이유는 남은 그들이
계속해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女神)은 영원(永遠)할 수 없는 법~~~
'오드리 헵번' 은 1958년 어느 날 집에서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그녀의 어머니 '엘란'은 '헵번'의 부친이 '나치당원' 이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배우로서 딸의 운명(運命)이 끝날 것을 우려하여 딸에게 숨겼던 것입니다.
이즈음 '오드리 헵번' 은 '조지 스티븐스' 감독으로부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소녀의 일기인 "안네의 일기"(1959)에 출연
제의를 받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興行)이 보장되어 있어, 모든 할리우드
배우들이 캐스팅 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캐스팅된 '오드리 헵번' 은 깊은 고민 끝에 캐스팅을 거절
합니다. 아버지가 지은 죄(罪)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2년 후 1960년, '햅번' 은 유명 배우로서 자신의 인기(人氣)에 치명타를 입을
것을 각오하고,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처럼 하늘이
맺어준 천륜(天倫)을 찾아 아일랜드로 향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2차대전 후 영국에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마친 다음,
아일랜드에서 '오드리 헵번' 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숨기고 이름까지 바꾼 후,
철저히 숨어 지냈던 것입니다.
요양원에 누워, 꺼져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녀는 다짐합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속죄(贖罪)하며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고..............
그 후 그녀는 "티파니에서 아침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1989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혼은 그대 곁에"를 마지막으로 영화계를 떠납니다.
그녀는 '유니세프(UNICEF) 홍보대사'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50여개국을
돌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남은 인생을 바쳤습니다. 1993.1.20일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 날, 대장암(大腸癌)으로 64세의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의 잘못을 자신의 몫으로 생각하고, 속죄(贖罪)의 인생을 살다간 이 시대의
양심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