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편하게 살고 싶어 사업 모두 접었는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인생관이 바뀌면서 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 폼만 재벌이다 뭐다 했지 속으론 곯고 있었는데 그래서 결단을 내려 신정만 남기고 하나씩 정리를 했다. 그래도 되던 업소들이었기 때문에 오락실은 사촌 형수한테 물려주고, 커피숍은 친구 누이한테 넘기는 식으로 해서 점포 네 개를 다 정리하는 데만도 2~3년이 걸렸다. 빌린 돈도 다 갚고 나니 홀가분했다.
음식점 하기는 사실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해야겠다 싶어 한 2년 신정 하나만 붙들고 했는데 88년에는 그나마도 손을 털었다. 주위에는 이미 큰 갈비집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고, 우리 가게는 낡은 건물에 있어서 장사가 되기는 돼도 썩 잘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있을 때 팔아버리는 게 낫다’ 싶어서 권리금을 그 때 돈으로 꽤 많이 받고 팔았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홀가분하기도 했다.
“사업을 그렇게 많이, 또 오래 한 사람이 일 안 하면 좀이 쑤셔서 견디겠어?”
주변에선 15년 가까이 부업을 했으니 이젠 좀 쉬라고 하면서도 걱정을 해주었다. 나 역시 뭐라도 하지 않으면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체질이라는 걸 아는지라 일 안 하고 얼마나 오래 버틸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결단을 내린 이상 끝까지 가보자는 심산이었다. ‘방송이나 하면서 쉬어야 되겠다’고 거듭 생각하면서.
한 6개월쯤 쉬었을까, 정말 몸이 근질근질해졌다. 방송 일은 아무리 바빠야 일주일에 3~4일이었다. 나머지 3~4일은 시간이 참으로 더디 갔다. 처음 한동안은 친구들하고도 자주 어울리고 방송국 쫑파티 같은 데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장사하느라 바쁠 땐 그 핑계로 자주 어울리기도 힘들었고 겨우 얼굴만 내밀곤 했었기에 아쉬움이 많았는데, 막상 시간 여유가 너무 많이 생기니까 그런 자리에 나가도 별로 뿌듯하지가 않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까 잔소리도 늘어나는 거 같고 아내는 아내대로,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이것저것 챙기면서 간섭하려 드는 남편이나 아버지보단 자기 친구들하고 어울리는 게 더 편한 듯도 싶었다.
무엇보다도, 일하던 사람이 쉬니까 식당 생각이 아물거리고 현금이 솔솔 들어오던 재미가 쉽게 잊혀지질 않았다. 또 쓰던 규모는 있는데 많이 벌어놓은 건 아니므로 장사 생각에 마음도 근질거렸다. 다시 음식점을 하긴 해야겠는데 뭐 좀 편한 게 없을까, 패스트푸드점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친하게 지내는 탤런트 노주현 씨가 잠실에서 피자 집을 개업한다고 해서 같이 거기 가려고 원효대교를 넘는데, 당시 용산에 지어지고 있던 전자랜드(구관)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건물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상태였다.
“우리 저기 내려서 구경이나 하고 가자.”
우린 전자랜드 안엘 들어가게 되었다. 내부는 거의 완성돼 있고, 2층 식당가는 페인트칠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쪽 관리 사무실에서 “사장님이 어떻게 왔냐?”고 하기에 “지나가는 길에 들렸는데 자리가 괜찮으면 여기서 뭐 하나 해볼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일이 잘 되려고 했는지 그쪽에선 이런 말을 했다.
“2층 식당가 한가운데에서 우리가 다방을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거길 패스트푸드점으로 바꿔서 해볼 의향이 있으십니까? 김사장님 능력이야 우리가 잘 아니까요.”
바라던 바였다.
“좋습니다.”
이것도 기회다 싶어서 흔쾌히 대답했다. 별로 힘들 것도 없을 것 같아서 햄버거 가게를 크게 시작했다. 89년 10월, 내 나이 마흔여섯 살 때였다.
‘위너스’라는 햄버거 가게를 오픈했는데 1년은, 과장 좀 하자면, 파리만 날렸다. 전자상가가 활성화가 안되어서 손님은 없고 상가 주인들만 가득 찬 상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1년을 내리 적자만 보고 버틴 건 아니다.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일본에 가서 먹어본 도시락 집 생각이 나서 점심식사 메뉴를 개발해서 7개월쯤 후부터는 현상유지는 했다.
힘들 때도 노력하면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파리만 날리던 시절에도 연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 내고 노력하니까 되더라 하는. 전자상가가 활성화가 안된 상태여서 처음엔 손님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외부 손님은 없어도 점포 주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들이 점심에 햄버거 먹을 건 아니고 그들을 위해서 개발할 수 있는 메뉴가 뭐 없을까? 아이디어를 떠올린 게 배달 도시락이었다.
도시락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메뉴였다. 어머님이 일식집을 하셨으니까 닭튀김이니 삶은 고기가 들어간 일본식 도시락 ‘벤또’에 대해선 많이 알았었다. 일본 가서 먹어본 것도 있고 해서, 반찬은 우리 입맛에 맞게 하고 보기에도 좋게 담아서 배달까지 해주면 먹혀 들어갈 거 같았다.
일단 도시락 용기부터 골라야 했는데 맘에 딱 드는 용기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 집 찬모가 센스가 참 대단한 여자다. 지금 주신정에서도 반찬을 책임져주고 있는데, 그 여자하고 같이 청개천 도시락 용기 파는 데 가서 어떤 게 있나 찾아보길 여러 번. 찬모 말이 여기에는 뭐 놓고, 회도 한두 점 들어가야 하니까 저 용기로는 안 되겠고, 이 걸로 하면 메인 반찬 넣을 공간이 작고...., 세세한 부분에서 실용적인 안을 내놓았다. “그래도 이게 낫겠다”는 찬모의 말에 내 맘에 딱 들진 않았지만 그 용기를 구하기로 했다.
음식을 해서 도시락에 담아서 광고전단 사진을 찍었다. 비싼 건 대형 나무 도시락 용기에 놓고, 일반 도시락은 작은 용기에 담아서 가격은 3천 원 정도로 싸게 했다. 광고전단이 나가고 나서 배달 주문이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상가내부에서 배달이 많아지면서 차츰 전자상가 외부까지 배달을 나가면서 현상 유지는 하게 된 것이다.
1년 넘게 버티니까 다행히도 햄버거 가게는 차츰 잘 되기 시작했고, 전자랜드 신관까지 짓게 되면서 우리 가게는 센터에서도 중요한 위치가 됐다. 가게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상승가도를 타게 되니까 위너스 옆에다 식당을 하나 또 냈다.
돈이 남아돌아서 투자를 한 건 아니었다. 위너스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려면 아직 멀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식으로 큰돈까지 날려서 잃어버린 돈 만회하려면 밤무대라도 뛰어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겁이 없는 건지, 된다 싶으면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지 않고 또 돈이 부족하면 꿔서라도 밀어붙이는 성격인지라 과감하게 일을 벌였다.
위너스는 전자상가 2층 식당가 가운데에 있는 동그란 점포(총 80평)를 반으로 잘라서 하고 있었는데, 그 나머지 반은 다른 사람이 돈까스 집을 하고 있었다. 위너스를 한 지 1년 반쯤 지나서 그 가게가 나간다는 얘기가 나와서 91년 초에 거길 사서 ‘고향’ 식당을 냈다. 그쪽 가게는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점심에는 일반인이 좋아하는 메뉴 중에서 설렁탕, 냉면 등 서너 품목만 골라서 했다. 다들 우리 집 음식이 맛있다고 했고 장사는 잘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