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전에 옥천향토사 회원이었다가 직장이 세종으로 옮겨져 뜸했지면, 계속해서 가화현대아파트 주민들과 관산산성에 관한 연구는 계속하였습니다. 이에 논문이 만들어져 읽기 편하게 나누어 공개하오니 읽어주시고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고구려의 남진에 따른 관산성 축성.
가. 5세 고구려중심의 국제 관계
나. 보은, 청산 및 옥천의 전략적 가치(교통로)
다. 고구려 남진
(1) 남성골 산성
(2) 대전 월평동 산성 및 월평동 유적
(3) 옥천 고리산
(4) 백제의 반격 사현성, 이산성 그리고 사정성, 보문산성과 우술성(계족산성)
라. 관산성 축성
(1) 관산성의 위치
(2) 관산성의 축성 시기
3. 관산성 전투와 탄현
가. 501년 탄현의 목책
나. 탄현과 관산성 전투와의 관계
다. 관산성 전투의 배경
라. 관산성전투의 시작이 왜 음력 7월인 이유
마. 성왕은 왜 구천에 왔는가
(1) 성왕은 왜 구천에 왔는가
(2) 구천은 어디인가.
(3) 성왕은 어디에서 납치 아니면 죽었을까.
바. 위덕왕의 관산성 재공격
(1) 침현은 어디인가
(2) 황골 전설
(3) 관산성 재공격
아. 탄현
4.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교과서에서 배운 관산성전투를 제외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관산성과 관산성 전투에 대해 알게 되고, 알려고 한지 어연 10여년이 넘었습니다. 만일 관산성과 관산성 전투에 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이 논문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옥천과 대전 주변의 많은 산성과 이 지역의 지명과 전설을 감안할 시, 현재 옥천과 대전등지의 산성에 대한 연구는 미진하고, 관산성 전투은 신라가 일방적인 승리한 것으로 왜곡된 연구로 되어 있고, 그 연구가 기초가 되니 백제사가 왜곡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옛날 물길따라 길이 난다는 말(어렵지 않은 곳으로 다니고, 편한 것이 있으면 편한 것을 택한다)과 처음 산성을 축성하는 사람은 아군은 편하게, 적군에게는 불편(어렵게)하게 축성한다는 것과 산성이 길을 통제하는 경우가 많아 산성이 이정표 역할을 한다는 것, 금강의 물길도 감안하면서, 대전,옥천지역의 산성과 지명, 그리고 전설을 참고하면서 삼국사기와 일본 서기 등 그리고 각종 논문을 기초로 관산성 위치, 축성 시기에 대해 설명하고, 관산성 전투가 백제의 일방적인 패배가 아님과 침현과 탄현의 위치를 규명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고구려의 남진이 관산성 축성의 배경이 되었고, 보은과 옥천은 그 시대 삼국이 필요로 한 전력적 의하여 교통을 하고 산성을 쌓았다는 것과 광개토대왕시절 이미 만들어진 고구려 중심의 국제 질서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구려의 정책이 나제동맹을 강화시켰고, 결국 고구려의 남진으로 대전 지역에서 산성이 축성되었으며, 고구려의 남진을 증명하기 위해 세종시 부강의 남성골 산성과 대전 월평동산성 및 월평동 유적지, 그리고 옥천 고리산의 고리의 의미를 풀어 보고, 490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가 축성한 사현성과 이산성을 대전 사성동(옥천 항곡리) 산성 및 대전 이사동의 소호동산성(비파산성)임을 설명하고, 사현성과 이산성의 후속산성으로 사현성은 우술성(계족산성), 이산성은 사정성과 보문산성의 축성을 언급하겠습니다.
백제는 490년 사현성과 이산성의 축성 전에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고 신라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교통로의 확보을 위한 관산성의 축성이 있었디는 내용과 관산성의 위치 및 축성 시기를 언급하겠습니다.
660년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 쳐들어 왔을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는 삼국사기 내용을 분석하여 탄현과 관산성 전투가 관련성이 있고, 대전,청주 이북으로 고구려의 철수로 백제와 신라는 공동의 적이 없어진 후 보은, 옥천지역에서 백제와 신라의 관계가 애매해지고, 이 지역에서 민심을 확보하지 못한 백제가 탄현의 책을 세우며 물러난 것을 언급하겠습니다.
관산성 전투의 배경으로 500년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전쟁을 지속하지만 신라는 내실있는 국가 기반을 구축했고, 541년 백제와 신라가 다시 나제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에 대항하나 신라는 과거 백제에 부용하였던 관계가 아닌 백제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라의 이익에 입각한 정책을 취하였고, 553년 백제가 왕녀를 신라에 시집을 보내어 신라의 나제 동맹 의지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541년 이후의 모든 일을 배신으로 생각하고 554년 관산성을 비롯한 신라를 공격합니다.
관산성 전투의 시기와 일본서기(왜군이 먼저 가 관산성을 공격하였다는 내용)를 기초로 백제는 육로가 아닌 금강으로 신라를 공격했고, 뱃길로 부여에서 보은이나 상주로 가는 화인진이 옥천(관산성)보다 가까워, 화인진의 점령은 관산성의 고립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백제의 주력군은 화인진에 상륙하여 상주쪽으로 공격해 갔을 것이고, 화인진보다 멀고, 상대적인 후방인 관산성 공격은 백제의 동방군과 왜군이 하였는데 금강에서의 뱃길이 복잡했음을 감안하여 백제의 주력보다 먼저 출발시켰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본서기에서 언급된 구타모라 새에 왜군은 가지 못했고, 구타모라 새의 위치가 성왕과 여창이 사전 작전 계획에 크게 미치지 못하여 성왕이 구천으로 온 것과 구천이 어디이며, 어디에서 성왕이 죽었나를 지명과 지형을 감안 추정하였습니다.
일본서기에서 성왕이 죽은 후 위덕왕이 철수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2명의 위덕왕이 존재하며, 위덕왕을 철수는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탈환 때문이며, 신라군의 관산성 탈환은 옥천의 대골 전설과 관산성에서 주둔하였던 신라군이 백제군의 공격으로 고립되었다가 탈출한 경로를 물길로 추적을 하면 이원 금강과 영동 초강천을 따라 백화산, 상주로 탈출한 것으로 추정이 되며, 이 탈출로를 알게 된 신라는 성왕을 죽인 매복 신라군을 탈출로로 보냈고, 김무력장군의 신라군도 이 탈출로로 와서 옥천 대골에서 정비 후 관산성을 탈환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덕왕이 굳이 철수를 한다면 화인진에서 금강으로 철수하는 것이 안전함에도 관산성쪽으로 철수하는 것은 위덕왕의 관산성 재점령을 위한 작전이 있다는 것과 철수과정에서 용목리, 용이 목욕했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 뒤에 있는 고개, 가르뱅이재를 침현으로 보았고, 황골 전설과 660년 삼국사기 탄현 기록을 분석하여 황골에서 백제가 대승을 하였고, 그 흔적으로 대전의 백골산이라는 지명과 대전 동구 직동의 핏골전설과 소태고개 전설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식장산의 전설과 독수리봉산성에서 옥천 할아비산성까지 능선 사이의 석축등을 볼 때 위덕왕이 침현 쪽에서 철수하여 식장산으로 온 것이 아니라 진짜 위덕왕은 금강으로 철수하여 식장ㅇ산으로 올라 할아비산성까지 와서 가까 위덕왕을 신라군에 대한 황골 공격과 관산성 공격을 동시에 명령을 내리는 등 관산성 재공격 지휘를 했으나, 관산성 재점령에 실패하였고, 다시 관산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의 반경이 넓어지면서 관산성의 배후지라 할 수 있는 영동에 대해 영동의 핏골전설과 어서실 전설 감안 시 영동까지 공격범위가 확대되었고, 신라에서는 고구려에 지원 요청하여 고구려가 음력 10월 공주(웅천)을 공격을 하여 백제군이 분산되면서 위덕왕은 관산성 재점령을 못하고, 관산성 전투가 마무리 되었음을 언급하겠습니다.
또한 탄현은 침현과 같은 곳은 아니나 하나의 전투 작전을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위치하며, 백제와 신라의 국경의 개념으로 파악하였고 삼국시대 기준으로, 약간의 과장을 포함하여 군사 한명이 단창으로 만명을 감당하는 요충지로 옥천 무중골 뒤 숯고개(탄현)를 언급하였습니다.
이 글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없어 도서관등을 찾을 수 없어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 중 이 글이 나오게 결정적인 자료는 ‘자료를 공유합시다’ 언급하며 삼국사기 해석본을 인터넷에 올려 주신 진갑곤님에게 감사드리고, 한국과 관련된 부분이 해석 된 일본서기를 인터넷에 올려주신 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옥천 관련 여러 서적을 주시며 관산성에 대한 관심에 격려를 해주신 이수암선생님, 안후영 전 향토사연구회장님, 옥천의 곳곳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알리려 노력하는 전옥천신문사장 이안재씨, 산성의 도시 대전 대전문화유산울림 대표 안여정씨, 옛날 물길따라 길이 난다는 말을 해준 백남우님, 대전둘레산길 길잡이였던 돌까마귀 이주진님은 옥천과 대전의 산성을 알아가는데 도움을 주시분들입니다.
무엇보다 저와 같이 옥천과 대전근교의 산성을 탐방하며 같이 논의한 관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의 안홍국 회장을 비롯한 박경식, 곽득환, 서병기, 손기연, 김용환 회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