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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어린이날인데 우리 자녀들 가운데 어린이가 있는 분이 안 계시네요. 오늘 아마 시내 곳곳에 원래 어린이날 행사가 예정되어 있을 텐데 비가 많이 와가지고 어린아이들이 좀 슬프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교회적으로는 다음 주에 어린이 주일과 어버이주일로 또 가족 초청 주일로 예배하려고 합니다. 우리 다음 주에 주일 학교들도 같이 이 시간 예배를 드릴 거예요. 그때 여러분들이 몇 명 안 되지만 정말 마음껏 축복해 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또 우리 어버이들에게도 정말 감사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고 특별히 우리 믿지 않는 가족들 이번 기회에 한번 초청해서 또 함께 그 기쁨을 나눌 수 있는 귀한 은혜의 잔치가 되길 원합니다. 제가 주중에 초청장을 한번 만들어서 카톡방에 올려드릴 테니까 한번 여러분들 가족들도 초청해 보시고 찾는 이들도 한번 초청해 보셔서 다음 주가 우리 하늘소망교회의 행복한 잔치가 되어서 그다음 주에 이어지는 또 우리 야외 예배를 계획하고 있잖아요. 이어지는 그런 행사들 가운데 풍성한 교재와 나눔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잠깐 복습해 보자면 여러분들 주보에 보면 항상 이렇게 지난주의 말씀 요약본이 있어요. 보고 계시나요?
지난주 말씀을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망을 결코 잃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붙들고 계신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넉넉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깨어졌다 할지라도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너에게 맡겨진 삶을 살아라 내가 너를 붙들 것이다라고 늘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모든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성되고 또 그리스도의 영광을 회복하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그 분명한 의지 속에서 가능하다.
지난 한 주간은 이 소망의 말씀 우리가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하는 회복의 말씀을 붙들며 살아왔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는데요. 이제 그와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보기를 원합니다. 이 이스라엘이 만약에 하나님이 주신 기회 가운데 회개했더라면 아마 이 은혜를 그들이 누렸을 것입니다. 그들이 약속의 주인공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옛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붙들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도무지 우리 인간이 그 일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후가 언제인지 언제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고 하는 그 후가 언제인지 이게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이 요에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된 과정 속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이후에 성령 강림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에서 베드로가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지금 그 후에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이 말씀을 기록하면서 그때가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원하며 그 후에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전체적인 거를 볼 수 있는 이 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보면 성경 전체의 내용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과 그 과정 속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모호하게 뭔가 흐릿하게 보였던 것이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게 바로 예수님에 대한 메시지였구나라고 하는 걸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만들고요. 그리고 그 신약 성경의 내용이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지금 계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사건은 이례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고요. 그 날이 계속 반복적으로 지속될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이 땅에 초림, 그리고 다시 오실 재림 그 사이에 성령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 따르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난다고 거기에다가 오늘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이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거 제가 넘기게 좀 해주세요. 됐습니다. 여기 오늘 두 구절을 여기 적어놨는데요. 늙은이부터 젊은이까지 또 나이 차별 없이 남정과 여정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도 여전히 차별이라는 게 존재해요. 그렇죠 그래서 차별을 어떻게든지 없애려고 여러 가지 법안으로 여러 가지 시행세칙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늘 가정 안에도 직장에서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차별이라는 건 존재합니다.
근데 지금 성경에 쓰여져 있는 가부장제가 가장 강력한 시대였던 이 성경에 기록된 시대 고대 문화 속에서 남녀 노소를 불구하고 차별하지 않고 이렇게 부어주겠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굉장히 급진적이고 획기적인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여기에 기록된 여종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시프라라고 하는 말을 쓰였는데요. 여종이라는 말이 몇 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가장 미천한 여인 여종을 지칭하는 단어가 여기에 기록됐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말 고화에 상관없이 좌우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이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여기서 두 번을 강조해서 말씀하시는데요. 마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그런 말씀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적절하게 가장 필요한 때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누구든지 장래의 일을 말하고 누구든지 꿈을 꾸게 되고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우리는 성령에 대한 좀 인식들이 조금 잘못 우리에게 주입되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리가 예언한다고 말을 하면 뭔가 예전에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봤던 우리 문화적으로 있었던 샤머니즘 문화의 그 무당들이 하는 그러한 것들처럼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성경에서 말하는 꿈과 예언 그리고 이상은요. 하나님과 하나님이 일하는 그 일하심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더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가득해진다는 것이고요. 또 그를 통해서 세상과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사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이 시대를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한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예언입니다.
여러분 선지자가 하는 일이 바로 예언이었는데요. 그 예언이 미래의 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죠. 그 당시의 상황을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그때 상황을 정리해 주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들이 했던 그 역할이 이제는 누구에게 이루어진다고요? 모두에게 남녀노소 상관없이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임하게 하시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모든 사람에게 지금 우리는 요엘서를 지금 이렇게 계속 강의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있는데요. 코로나19라고 하는 큰 우리에게 이 언덕을 지나오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이걸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그런 취지에서 이 요엘서를 지금 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분명히 또 이러한 재난이 이러한 큰 역경이 우리 개인적으로 우리 사회적으로 분명히 또 다가올 거예요. 그게 어떤 모습일지 모릅니다. 지금 벌써 인생 가운데 여러분들 이번 한 주간에도 여러분들의 인생 속에서 수많은 언덕들을 넘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근데 여러분 그런 상황 속에서 그냥 당황하고 절망하고 그냥 그 시간을 지나가는 시간으로 보내는 사람과 그 시간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들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향한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있는 고통, 나에게 다가오는 여러 가지 재난들, 그런 과정 속에서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는 걸 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령의 은혜 가운데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죠. 그런데 중요한 건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 개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그 깨어진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그 고통의 잔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깨어진 세상 속에서 복잡한 여러 가지 이유가 얽혀 있기 때문에 그걸 단순하게 이건 이래서 일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인류가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고통의 원인은 죄 때문이다.
이건 명확합니다. 지금 이 땅의 깨어짐의 원인은 죄 때문이다. 이건 명확하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또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게 뭐냐면 이런 상황 가운데 이러한 우리가 처하고 있는 상황이 이 죄라고 하는 문제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걸 분명히 인식한다면 그다음도 우리는 예고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요엘서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는 게 뭐예요? 하나님이 이러한 재난을 너희들에게 허락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은 너희가 돌이키길 원하고 그리고 회복하길 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 은혜가 너희들이 하나님이 원래 계획하셨던 그 원래의 계획대로 너희들이 살아가길 원한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인생의 고난 가운데 이 모든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깨어짐의 문제가 죄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는 인식을 갖는다면 이 뒤에 것도 우리는 예고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돌이키면 우리가 주님께 회복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그 불굴의 의지 속에서 우리의 삶의 분명한 회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은요. 우리 믿는 이들이 명확하게 우리의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가야 할 성경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언덕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마치 여리고 성과 같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절벽과 같이 느껴진다 할지라도요. 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는다면 내 힘으로 거기 가서 아무리 성벽을 두드리고 있으면 뭐 하겠어요? 아무리 뭐 망치 가져와서 깨봐야 뭐 하겠냐고요. 절대 내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을 딱 바라봤더니 하나님이 돌라고 하고 하나님이 돌라고 해서 돌았더니 순식간에 무너져버리지 않습니까?
성경의 원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는 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그 구체적인 그 계획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이렇게 집중하면서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이 성령 부어주심이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구약에서의 성령의 임재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약시대의 성령의 임재는 약간 다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때는요 성령이 어떤 특정된 사람들에게 의미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개개인에게 또는 특정 집단에게 잠시 임했지만 임했다가 떠나가 됩니다. 특별한 어떤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이 임재했다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게 하시고 또는 이루시고 그리고 떠납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인격적인 관계라고 하기보다는 약간 기계적인 관계 같아요. 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꼭 필요한 상황 속에 역할을 감당하는 성령.
그런데 요엘서에서 우리가 보듯 예언하고 있는 이 말씀이 이사야와 이사야 44장과 에스겔 36장에서도 새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하는 성경 곳곳에 예언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 성령은 그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하는 또 소망의 말씀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인제사장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우리 모두는 제사장과 같은 인물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예배자로서 하나님 앞에 관계를 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근데 우리 이 요엘서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또 하나의 개념을 우리가 기억하길 원하는데요. 우리 모두는 선지자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볼까요?
우리 모두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 모두에게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 뜻이 분명히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면 그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될까요? 성령으로 인하여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과 동시에 우리 안에 성령님이 내주함으로 말미암아 그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시죠. 하나님의 꿈이 나의 꿈이 되어갑니다. 내가 꿈꾸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통해서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고 또 우리가 그 일들을 감당할 때마다 능력을 부어주시고 그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 속에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 반대의 상황을 한번 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진리로 더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성경은 뭘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에베소 4장 30절에 보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이 근심하다가 소멸돼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도 이 말씀을 하고 있죠.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이 성령은 우리로 말미암아 놀라운 일들을 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그 성령 안에 거하지 않고 성령의 그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 안에 근심하시고 소멸되어 버린다는 거예요.
이 시대 가운데 성령을 물 붓듯 부어주시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별로 이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 기대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저 앞에서 말씀을 인도하는 또는 찬양을 인도하는 또는 앞에서 이끌어가는 리더 정도 수준에 있는 사람들이 꼭 누려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괜찮아 나는 가끔 이렇게 뭔가 집회에 참여하고 또는 예배에 참여했을 때 마음에 뭔가 감동이 있는 그 정도 수준으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또 생각보다 많습니다.
풍성한 성령의 임재를 성경은 약속하셨는데 우리는 별로 기대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분과 별로 동행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한국교회 신앙의 초기에는요. 이 성령의 임재를 방언하면 성령의 임재가 이루어진다 또 예언하거나 뭔가 치유 초자연적인 어떤 능력을 경험했을 때 성령이 임재했다고 인식을 하는 그런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이 성령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에 성령 충만해야 된다 그러면 무조건 방언받아야 된다 막 기도를 큰 목소리로만 해야지 성령 충만한 거다 이런 식으로 우리 머릿속에 이미지화되어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모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 안에 성령은 내주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이 우리를 이끌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이끌어가심을 따라가면 우리는 인격적으로 우리의 삶적으로 작은 변화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비전을 주시고 또 은사도 주시고, 나도 감당할 수 없는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거는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귀 기울이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따라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보조를 맞추어 나아가는 삶 한 발짝 한 발짝 여러분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이 말씀은요. 지금 우리 시대에 새 이스라엘인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셨다면 이미 여러분들 속에 성령님은 내주하고 계십니다. 혹시 이 성령에 대해 너무 무지했거나 관심조차 없었거나 오해해서 내 안에 있는 성령님이 근심하고 있지는 않나요? 점점 소멸되어버리는 그런 상태로 밀어넣어버리는 삶을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지 우리는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3년의 공생애를 보내시고 떠나시면서 그 제자들에게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그 보예사 성령, 그 보예사 성령을 통해서 너희들을 보호하고 이끌어주겠다고 말씀하셨듯, 지금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성령이 우리의 삶의 열쇠와 같은 존재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열쇠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이들과 우리는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나 중심적이고 인간적인 생각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나를 보면 나는 배경도 없고 나는 능력도 없고, 나는 가방끈도 짧고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내 상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그런 절망에 빠지겠죠. 나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나는 이래서 연약하고 나는 여기에 문제가 있고 저기에 문제가 있고 근데 여러분 그런 우리에게 누가 찾아와 계시다고요?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조하실 때 우리는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주간의 삶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이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사셨습니까? 우리 동력자들 가운데는 큐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큐티하는 분들이 여럿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 큐티를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요. 성령을 의지해서 할 수도 있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행위 자체만 가지고 이거를 성령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예배를 드리는 이 자리에 있지만 내가 성령의 임재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만족하고 또는 죄책감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이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건 전혀 다른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이 여정의 궁극적인 목표는요.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고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줄 믿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성령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온전한 회복과 치유가 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육신적으로도 우리 삶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 가운데 치유함이 일어나길 간절히 축복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회복과 치유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게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 지역사회에게 확장되는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작은 불꽃 하나는요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불이 불을 붙이기 시작하면 큰 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늘의 소망 공동체가 아니 나 같은 사람이 여러분 나라고 하는 인간은 별것 아니지만 내 안에 내조하시는 성령님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주님과 보조하며 나아갈 때에 우리 개인, 우리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 땅끝까지 우리의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하신 이 약속의 말씀,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겠다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 이것은 지금 우리를 향하여 다시금 선포되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앞에 있는 저만 아니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이 약속의 말씀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더욱더 깊이 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깊이 따라가며 그 성령의 일하심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