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헤라클레이토스의 입장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변한다고 말했지만 틀렸다. 어떤 것의 변화는 열역학 1법칙을 어긴다. 파르메니데스의 명제가 열역학 1법칙과 맞다. 헤라클레이토스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으며 파르메니데스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화는 변하지 않는다. 변화가 변하면 불변이므로 모순이다.
파르메니데스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명제는 옳지만 해석이 틀렸다. 있는 것은 변화이고 없는 것이 불변이다.
헤라클레이토스 – 모든 것은 변한다는 명제는 옳지만 해석이 틀렸다. 어떤 것이 변하는게 아니라 변화가 관측된 것이 어떤 것이다.
이런 논의는 말장난으로 흐르기 쉽다. 진지해져야 한다. 우리가 찾으려는 로고스는 변화 속의 불변이다. 변화는 방향이 있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방향은 충돌을 피하는 방향이다. 충돌하면 깨지고, 깨지면 작아지고, 작아지면 교착되고, 교착되면 멈추는 것이 열역학 2법칙이다. 변화를 유발하는 차이를 잃게 된다.
열역학 2법칙에 따라 변화는 차이에 의해 일어나며 변화의 결과로 차이를 잃어 변할 수 없게 된다. 에너지는 흩어지지만 나란하면 충돌을 피해서 오래간다. 정상에서 굴린 눈덩이가 최대한 멀리까지 굴러가는 것이다. 변화에는 이기는 변화와 지는 변화가 있다. 우리가 찾으려는 로고스는 충돌을 피하여 이기는 변화다.
1. 모든 것은 변한다.
2. 변화는 자리바꿈이다.
3. 자리는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4. 충돌을 피하는 변화가 이긴다.
5. 나란하면 충돌을 피한다.
모든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리바꿈이다. 자리는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사라지지도 생성되지도 않는다. 진공은 아무 것도 없는게 아니라 반작용하지 않으므로 관측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것은 관측된다. 공간이 팽창하고 시간이 흐르므로 변화는 진행하고, 진행하면 충돌하고, 우리가 찾는 로고스는 충돌을 피하는 변화다.
그것이 결맞음이다. 다른 말로는 밸런스의 복원력이다. 우리가 관측하는 형태는 인력이다. 자연의 덩어리 형태는 강력에 의해 나란해진 것이다. 충돌을 피하여 나란하므로 이기는 변화가 정답이다. 정답은 있다. 그것은 통제가능성이다. 그것은 배의 키와 같아서 일점이 전체를 대표한다. 모든 존재는 반드시 일점이 있다.
1. 있는 것은 없고 없는 것이 있다.
2. 변화는 불변한다는 명제가 로고스다.
3. 파르메니데스의 명제가 변화의 불변을 가리킬 때 유효하다.
4. 변화는 불변하나 결어긋남과 결맞음을 일으켜 만유를 생성한다.
5. 충돌을 피하는 방향의 변화가 우리가 찾아야 할 로고스요, 이데아다.
어떤 존재든 급소가 되고 약한 고리가 되는 일점이 있다. 일점이 강해보이는 경우는 약한 고리가 보강되기 때문이다. 씨앗의 배와 배젖은 단단한 껍질로 보호된다. 심장은 흉곽에 의해 보호되고 뇌는 두개골로 보호된다. 결정의 중심이 뇌라면 행위의 중심은 심장이다. 적의 일점을 타격하고 아군의 일점을 보호하면 이긴다.
파르메니데스의 명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그리스 철학의 탄생을 알린 파르메니데스의 유명한 존재론적 명제다. 형이상학은 이 명제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가 아는 해석은 플라톤의 이데아 해석이다. 있는 것은 이데아요, 없는 것은 그림자다. 우리는 사는 세계는 환상이고 실재하는 세계는 따로 있다고. 매력적인 거짓말이다. 인류는 여전히 이 수준 낮은 거짓말에 갇혀 있다.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들으면 약이 오른다. 뻔한 거짓말인데 쉽게 격파하지 못한다. 파르메니데스가 틀린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목도하는 변화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도 알면서 변화를 앞세우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 딴지를 걸어본 것이다. 누군가가 이 명제를 깨주기 바랬을텐데 플라톤은 오히려 설득되어 거짓말에 살을 보탠다. 우리는 벌거숭이 플라톤을 벌거숭이라고 말해야 한다.
불이 타는가, 타는게 불인가? 바람이 부는가, 부는게 바람인가? 불이 탄다고 믿으면 실체론, 타는게 불이라고 믿으면 체용론이다. 대승불교는 체용일원론이다. 대승기신론은 체와 용을 일심으로 통합시킨다. 체용불이 화쟁일심론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용체론이다. 용이 실재고 체는 그림자다. 용이 이데아다. 타는게 진실이고 불은 인간의 관측 효과다. 불은 인간의 간섭에 의해 오염된 거짓이다.
우주는 용이다. 자연에 불은 실재하지 않는다. 타는 것을 인간이 불이라고 부를 뿐이다. 불의 원소는 없다. 있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금강경의 공 사상과 같다. 파르메니데스는 변화를 부정한다. 있는 것은 물질이고 없는 것은 변화다. 우리가 보는 변화는 환영이다. 물질은 탈레스의 원자론처럼 쪼개지지 않는 불변의 원소다. 틀렸다. 원자는 원래 없다.
자연에 구조가 있을 뿐이다. 존재가 만나서 구조로 엮이는게 아니라 구조가 존재다. 존재는 인간의 관측에 의해 오염된 그림자다. 없는 것은 있고 있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관측되는 것이며, 관측되는 것은 반응하는 것이며,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으면 관측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있는데 볼 수도, 알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면 없는 것과 같다.
없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어기면 무로 간주된다. 석가는 일찌감치 갈파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는 것은 방정식이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는 것은 함수다. 자연의 어떤 객체는 존재가 아니라 무이며 실재는 방정식과 함수다. 방정식은 어떤 둘의 변화하는 관계를 규정하고 함수는 관계의 나란함이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체는 없다. 존재는 인간에 의해 지목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을 배제한 상태에서 어떤 둘의 자체적인 관계이며 우리가 아는 물질은 어떤 둘의 나란함이다. 변화 둘이 나란할 때 외부의 작용에 반작용할 수 있게 된다. 혼자는 내부에 구조가 없어 방향전환을 못하므로 반작용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자인 것은 관측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관측되었다면 반작용한 것이며 내부구조가 있다.
텅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는게 아니라 혼자라서 반응하지 않으므로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진공은 없는게 아니라 반응하지 않는 영역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어떤 이유로 움직일 수 없으며 움직이는 것이 어떤 이유로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움직임의 발생은 에너지를 소비하여 질량보존의 법칙과 어긋난다.
있는 것을 멈춘 것으로 해석하면 틀렸다. 멈춘 것은 죽은 것이며 없는 것이다. 불이 타는게 아니라 타는게 불이다. 움직이는 것이 있는 것이다. 태초에 빅뱅에 의해 큰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눈으로 목격하는 멈춤은 관측자와 나란한 것이다. 움직이는 객체를 움직이는 관측자가 보면 멈춘 것으로 보이는 것이 그림자다. 파르메니데스는 틀렸다. 플라톤도 틀렸다.
형이상학은 틀렸다. 존재론은 틀렸다. 실체론은 틀렸다. 체용론이 진실에 가깝지만 용체론이 옳다. 용은 실재요 체는 그림자다. 체는 인간의 관측이 만든 허상이다. 마명의 대승기신론이 좋은 화두를 던졌지만 금강경과 마찬가지로 얼버무리는 말이다. 원효의 기신론소가 좋은 해석이지만 한계가 명백하다. 석가의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다른 것이다.
있는 것은 체, 일어나는 것은 용이다. 용은 체의 부속품이 아니다. 체가 용의 부속품이다. 방정식이 함수의 부속품이다. 방정식이 관계라면 함수는 갇힌 관계다. 방정식은 깨진 함수다. 썸을 타는 것이 관계라면 부부는 갇힌 관계다. 부부로 결박되면 차원이 상승한다. 점이 결박되면 선이고, 선이 결박되면 면이다. 선은 점이 아니며, 면은 선이 아니며, 부부는 남녀관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이다.
점의 집합과 선은 다르다. 점의 집합은 선이 아니라 다점이다. 선의 집합은 면이 아니라 다선이다. 디지털은 아날로그보다 차원이 높다. 일회용 관계와 반복되는 관계는 다른 존재다. 전봇대로 이빨을 쑤시면 일회용이다. 이쑤시개로 만들어진 제품은 일회용 이쑤시개인 전봇대와 다르다. 어떤 것이 갇혀서 반복되면 차원이 상승한다. 함수는 방정식보다 차원이 높다. 결박되면 차원이 상승한다.
결박하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냥 차와 운행중인 차는 다르다. 그냥 차는어떤 운전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다양한 관계가 성립하지만 운행중인 차는 도로교통법을 따라야 하므로 다양성을 잃는다. 방정식에서 함수로 올라가면 선택지를 잃는다. 2D보다 3D가 오히려 표현의 다양성이 떨어진다. 만화가 영화보다 자유롭다. 차원이 높을수록 제한이 걸린다. 개인보다 집단에 더 제한이 걸린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이 명제는 간단하고 강력하다. 변화를 부정한다. 인간의 관측은 그 자체로 변화다. 존재하는 것은 관측되고, 관측되는 것은 변화이며, 변화가 없다면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를 본다. 있는 것이 변하는게 아니라 변화가 나란하거나 어긋난다. 우주 안에 변화의 결맞음과 결어긋남 뿐이다. 결어긋남이 척력이라면 결맞음이 인력이다.
인류는 석가와 파르메니데스 이후 2500년간 토론해 왔지만 진척된게 없다. 플라톤은 이 명제를 엉뚱하게 해석해서 기독교 철학의 토대를 만들었고 동양은 선종불교에 막혀 선문답에 매몰되었다. 근래 양자역학에 의해 조금씩 규명되고 있다. 양자역학은 강력하게 말한다.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은 오염된 것이다. 우주 안에 결맞음과 결어긋남이 있을 뿐이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적다.
수의 구조
낱개는 점이다.
수는 선 위에 표시된다.
셈은 각이다. 가감승제.
방정식은 입체다.
함수는 밀도다.
수는 계, 체, 각, 선, 점에 따라 함수, 방정식, 셈, 숫자, 낱개가 있다.
낱개는 지목된다. 사과와 복숭아가 있으면 각각 지목되지 셈해지지 않는다.
같은 사과 두 개가 있으면 헤아려진다. 헤아리는 것은 숫자다. 숫자는 기준이 정해져 있다. 기점이 있다.
셈은 곱셈이다. 덧셈은 숫자와 같다. 곱셈은 엮여 있다. 그룹이 있다.
방정식은 그룹이 있다. 어떤 둘이 관계가 있으면 집합을 정의할 수 있다.
함수는 닫힌계가 있다. 두 개의 사건이 엮여 있다.
함수의 함은 디지털을 의미한다. 닫힌계는 디지털이요 열린계는 아날로그다.
열린계는 1회용이가 닫힌계는 반복된다.
우리가 아는 원자 개념은 닫혀 있지만 내부가 없으므로 변화를 담보할 수 없다.
닫혀 있으면서 변화를 담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입력과 출력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함이다.
아날로그는 입력과 출력이 없다.
인간의 관측이 가두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도마는 열려있지만 요리사가 감시하며 가두는 역할을 한다.
회오리바람은 일시적 갇힘이고 태풍은 최대 21일까지 갇혀 있다.
갇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계산할 수 있다.
석가는 말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그것은 방정식이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그것은 함수다.
기능은 톱니다. 톱니는 맞물려 있다. 맞물리는 것은 디지털이다.
변화가 변화를 복제한다. 피드백이 된다. 시계추는 출력이 입력을 조절한다.
시계추가 흔들리는 것이 피드백이다.
작용 반작용에 의해 오른발을 내딪으려면 왼발이 뒤로 가야 한다. 그것이 피드백이다.
갇힌 관계는 함수다.
열린 관계는 방정식이다.
갇힌다는 것은 반복된다는 것이다.
열린다는 것은 일회용으로 계가 깨진다는 것이다.
구조론과 함수
우주 어딘가에 지구와 유사한 행성이 하나 있는데 그 행성의 외계인은 여태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황당하지만 그럴 수 있다. 마야와 잉카는 문명이 발전했지만 수레는 만들지 못했다. 어린이의 장난감 바퀴는 있었는데 그것을 수레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그들이 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표음문자도 개화기의 서구인이 보면 황당하다. 혹시 바보인가?
구조론은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발적 변화를 해명한다. 왜 아무도 자발적 변화에 주목하지 않았을까? 마야에 수레는 없어도 바퀴는 있듯이 구조론과 비슷한 것으로 함수가 있다. 구조론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결정이 있고 함수는 입력과 출력 사이에 기능이 있다. 인류는 왜 입력과 출력 사이의 기능은 알면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결정은 모를까? 시리즈로 황당하다.
함수는 기능이다. 기능은 작업을 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시간을 조절하여 일을 통제할 수 있다. 그냥 변화가 아니라 통제가능한 변화라야 한다. 변화의 조절장치가 있다. 조절장치가 있으면 입자다. 과학자들은 막연히 파동이 아니면 입자라고 우기지만 입자는 조절장치가 있어야 한다. 빛은 위치와 운동량 사이에 함수가 없으므로 과연 입자인지 의심하는게 양자역학이다.
닫힌계 안에서 원인이 변하면 결과가 변하고 입력이 변하면 출력이 변한다. 불변이 1이면 변화는 2, 결과의 변화가 원인의 변화에 연동되므로 4, 원인 측에서 결과 측으로 넘기는 결정을 더하여 모두 5다. 결정은 원인측과 결과측이 공유한다. 원인 측의 변화를 결과 측의 변화로 떠넘기는 것이 함수다. 입자의 내부에는 결정을 판정하는 천칭저울이 들어있다. 조절장치다.
원인 - 원인 측 1, 원인의 변화 2
결과 - 결과 측 3, 결과의 변화 4
결정 - 상부구조 -> 하부구조 5
방정식이 열린계라면 함수는 닫힌계다. 방정식은 함函이 깨져서 닫힌계 내부가 노출된 것이다. 함수가 디지털이라면 방정식은 아날로그다. 방정식을 구성하는 직각 삼각형의 세 변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자발적 변화가 아니다. 당구공이 쓰리쿠션으로 굴러가는 것은 인간이 공을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정해져 있는 것이지 당구공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피아노 건반을 차례대로 치면 그에 따른 소리의 변화는 함수다. 건반이 하나 뿐인 피아노는 방정식이다. 어린이의 키가 커질수록 신발 사이즈도 같이 커지는 것은 함수다. 하나의 변화가 또다른 변화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 각별하다. 방정식은 변화가 끝난 상태에서 결과를 분석한다. 사냥꾼이 짐승을 8마리 잡았는데 다리가 26개라면 비둘기와 토끼는 각각 몇마리냐다.
방정식은 현재를 분석할 뿐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다. 자판기에 천원을 넣으면 사이다가 나오고 2천원을 넣으면 콜라가 나온다. 함수는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요금이 증가한다. 함수는 결과를 예측하고 입력 측 사정에 따라 출력을 조절한다. 돈이 부족하면 콜라를 사이다로 바꾼다. 택시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야 한다.
함수는 조절장치라는 상부구조가 있고 방정식은 조절이 불가능한 1회용 전달장치다. 방정식은 함수의 하부구조다. 함수에서 원인 측을 떼고 결과 측만 보는게 방정식이다. 함수는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설명된다. 대응이라는 표현은 어색하다. 대응은 결과 측 사정이다. 쏘면 맞는다. 쏘는 것은 원인이고 맞는 것은 결과다. 총은 사람을 맞추는 도구라고 설명하면 이상하다.
원인 측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 총은 쏘는 도구다. 맞든 빗나가든 결과는 상관없다. 수학은 함수를 잘못 설명하고 있다. 함수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이 지구에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수학의 방법은 연역적 접근이 아닌 귀납적 접근이다. 일대일 대응은 원인 측과 결과 측이 구조로 엮여서 나란한 것이다. 나란한 것은 저울이다. 작용 반작용의 저울이 나란한 변화가 함수다.
작용과 반작용이 나란한 것은 단위다. 사건의 단위가 입자다. 함수는 함函이며, 함函은 닫혔고, 닫히면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이 나란하므로 입자다. 무질서한 군중은 외부에서 작용해도 반작용하지 않는다. 열려 있으므로 작용과 반작용이 나란하지 않다. 입자는 내부에 자체질서가 있다. 투수의 공과 타자의 배트가 만나서 공의 진행방향을 결정하는 순간 입자를 이룬다.
씨름선수 두 사람이 얽혀서 승부를 내려는 찰나에 입자가 만들어진다. 강호동과 이만기가 합쳐진 제 3의 입자가 승부를 결정한다. 강호동이든 이만기든 그 입자한테 잘 보여야 한다. 두 사람의 행동을 각각 바라보지 말고 둘이 합쳐진 입자 하나를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여당과 야당을 각각 바라보지말고 둘을 통일하는 국민의 전략 하나를 보면 정치의 앞날이 예측된다.
닫힌계 내부의 자발적 변화는 함수를 구성하므로 5다. 시계 내부에 앵커라고 하는 T자 모양의 부품이 있다. 모든 함수에 앵커가 있다. 천칭저울은 한번 계량할때마다 원위치 된다. 앵커는 한번 작동할때마다 원위치 된다. 진자의 등시성에 따라 한번 전진하면 한번 후진하므로 일대일로 대응된다. 외부 작용에 반작용으로 맞서 밸런스를 복원하여 원위치 되는 것이 단위다.
함수라고 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필자와 같은 수학치들 있다. 앵커라고 하면 이해가 쉽다. 앵커는 눈에 보인다. 벽시계의 시계추가 앵커다. 한번 움직일때마다 원위치 되므로 일대일로 대응되는게 앵커다. 총알은 한발을 쏠때마다 노리쇠가 후퇴 전진하여 원위치 되므로 함수다. 사람도 한걸음 걸을때마다 왼발과 오른발이 교대하여 원위치 되므로 함수다.
수학자들이 함수를 어렵게 설명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숫자에 파묻혀 자연에 실재하는 존재의 단위를 모른다. 지속가능한 변화를 모른다. 자연은 결과 측의 피드백을 받아 입력 측을 조절한다. 생명이 자라고, 불이 번지고,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어도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조절장치가 없다면 태풍이나 회오리 바람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만다.
숫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이고 자연은 사실이다. 관념 중심의 수학이 아니라 사실 중심의 수학이라야 한다. 함수는 닫힌계가 있고, 앵커가 있고, 조절장치가 있고, 1회 판정할때마다 원위치 된다. 저울은 계량할 때마다 접시를 비우므로 함수다. 직장인은 출근해봤자 저녁에 퇴근하므로 함수다. 이재명도 원래의 일베에 손가혁으로 퇴행하고 있으므로 자동으로 함수다.
입자 내부의 탈진기가 위치와 운동량을 대응시킨다. 앵커는 대칭 2와 축 1로 합쳐서 3인데 입력과 출력을 더해서 5다. 앵커가 없는 존재는? 내세, 천국, 귀신, 윤회, 해탈, 부활, 부처, 환생, 환빠, 성찰, 진정성은 앵커가 없어 원위치 되지 않는다. 성찰해도 더 성찰해야 한다. 진정성이 있어도 더 있어야 한다. 윤회해도 더 윤회해야 한다. 무한대로 가는건 앵커가 없다.
에너지는 발산 아니면 수렴이다. 발산은 앵커가 없어 조절되지 않으므로 거짓이고 수렴은 앵커가 조절하므로 진실이다. 세상의 모든 거짓말이 공유하는 특징은 무한대다. 다단계가 무한대 사업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무한동력도 무한대 사업이다. 앵커를 추적하여 진짜와 가짜를 1초 안에 판명할 수 있다. 2초가 걸리면 창피하다. 닥치고 앵커를 찾아라. 참 쉽잖아.
우리가 존재로 아는 것은 두 변화의 나란함이다. 부부는 둘인데 마치 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두 사람이 같은 주소를 공유한다. 남녀가 자녀를 공유한다. 둘이 하나를 공유하는 것이 앵커다. 모든 존재는 앵커가 있고 시간차를 통해 공유한다. 화장실 하나를 다른 시간대에 사용하면서 공유한다. 동시에 급똥이 마려우면 곤란해진다. 두 변화가 서로를 공유하는 것이 구조다.
왜 구조는 5가 아니면 안되는가? 활을 조절해도 되고, 화살을 조절해도 되고, 과녁을 조절해도 된다. 명중을 원하면 다섯가지 방법으로 같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일단 궁수가 좋아야 한다. 궁수가 나쁘면 활을 교체한다. 활이 나쁘면 화살을 바꾼다. 화살이 나쁘면 과녁을 가까이 당겨서 세운다. 과녁이 멀면 과녁을 더 크게 그려야 한다. 언제나 우회하는 방법이 있다.
질 - 궁수가 뛰어나다.
입자 - 활이 좋다.
힘 - 화살이 좋다.
운동 - 과녁이 가깝다.
량 - 과녁이 크다.
목표는 하나인데 길은 5가지라서 혼선을 빚으므로 구조론이 정확히 5를 찍어줘야 한다. 인공지능은 효율적인 설계를 해도 되지만 더 많은 컴퓨터 자원을 투입해도 된다. 중국은 가성비를 추구하고 미국은 물량을 추구한다. 독일은 티거 전차의 성능을 중시했고 소련은 T34의 물량을 중시했다.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보통은 어느 하나에 올인해서 망한다.
도로를 잘 만들어도 되고, 차를 잘 만들어도 되고, 운전을 잘해도 된다. 북한은 운전기술 하나에 매몰되어 면허따기가 매우 어렵다. 구조론을 모르면 한가지 방법을 알아낸 사람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다가 반격당한다. 이재명도 한가지 꼼수를 찾아내고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진보의 집단지성 필요없다. 나는 이미 답을 찾았다니깐? 과연 이재명은 답을 찾았을까?
바둑의 답은 나왔고 이젠 기풍에 따른 상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게 80년대다. 오청원의 신포석, 이창호의 끝내기, 알파고의 계산바둑이 나오니 기풍은 의미없다. 우선순위가 있다. 차가 먼저고, 도로가 다음이고, 운전기술이 마지막이다. 보통은 다섯가지 중에 한가지 방법만 고집하다가 안되면 포기하거나 혹은 잘 된다고 자만하다가 다른 길로 온 경쟁자에게 추월당한다.
사냥꾼은 총알을 세어보고 사슴을 몇 마리 잡을지 계획을 세운다. 운전자는 연료 게이지를 보고 목적지를 결정한다. 변화가 다른 변화의 원인이므로 예상과 조절이 가능하다. 단 조건이 있다. 반드시 닫힌계라야 한다. 사냥꾼의 탄창과 운전자의 연료탱크는 닫힌계다. 다른 사람이 잡은 사슴을 훔치면 된다는 식의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사고를 친다. 열린계가 문제다.
우리는 닫힌계 중심의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여당과 야당을 각각 바라보면 열려 있지만 국민을 보면 닫혀 있다. 여야의 지지율은 늘거나 줄지만 국민의 전략은 통제가능성 하나다. 국민은 말 안 듣는 놈을 조진다. 총알도 없는 사냥꾼이 로드킬로 죽은 사슴을 주워서 숫자를 채울 궁리를 한다. 이재명의 외연확장은 닫힌계를 열린계로 착각한 것이다. 못 배우면 이렇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