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강해 (13)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 21:1~11
I. 서론
제가 목사이다 보니 아내가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내용을 가끔씩 물어보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과 관련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천국에 가면 가족이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도 계속 보고 싶다는 의미이거나 아니면 천국에 가서는 이제 그만 보자는 의미일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제 아내가 저희 두 딸은 천국에 가서도 보고 싶을 텐데, 저도 보기를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옆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남편이나 아내를 천국에 가서도 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자녀, 손자, 손녀를 천국에서도 만나서 함께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만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보다 보편적인 질문을 하나 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전혀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곳인가?(불연속) 아니면 기존에 있는 이 세상이 새롭게 변화되는 곳인가?(연속) 완전히 새로운 곳이라면,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지만,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라면, 서로 알아볼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이 문제에 대한 그 해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 첫째, 연속과 불연속입니다.
1~2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천국이 새 것임을 세 번에 걸쳐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경우 모두, “새로운”이라는 뜻의 헬라어 “kainos”를 사용했습니다. 5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새롭게 하노라”에서 “새롭게”는 이전 세 번에 걸친 단어와 똑같이 “kainos”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자세히 보면, 기존에 있는 것을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새롭게 하노라”에 사용된 동사는 헬라어로 “poieo”인데 기존에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되게 하리라” (마 4:19)에서 “되게 하리라”에 사용된 동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낚는 새로운 어부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낚는 어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변화시키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이지만, 옛 것이 새로워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레엄 골즈워디 교수님이 이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의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의 집으로 가신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가 최종적으로 이 물질 세계로부터 분리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입으신 채로 하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를 입으신 채로 하늘로 가셨기 때문에 이 물질 세계와 분리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을 입으신 채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그 부활의 몸은 이 세상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영적 존재인 천사는 만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달랐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기도 하셨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모습 그대로 하늘에 올라가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눅 24:13~16,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두 명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어느 기간 동안 - 보통 3년 동안 - 예수님과 함께 생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올 11월이면, 교회가 개척된 지 만 3년이 됩니다. 교회 초창기부터 함께 하신 분은 기간으로만 따지면 저와 3년 정도 만나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시다. 예를 들어, 임장로님과 황집사님 두 분이 길을 걸어가면서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제가 두 분과 합류하여 같이 이야기하며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이 제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얼마나 달라져 있었기에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하지만 그들이 계속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옛 모습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 24:30~31,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 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교수님을 통하여 들은 이야기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려고 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기존에 창조하신 것을 모두 파괴해 버리고,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신다면, 결국 이 싸움은 사탄이 이긴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창조하신 세계와 완전히 별개가 아니라 기존의 창조 세계가 새롭게 변화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천국에서의 우리는 현재의 우리와 연속선 상에 있는 우리일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래야 현재의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천국에서의 우리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우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우리는 얼마나 변화되어 있을까요?
2. 둘째,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새 예루살렘 성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새 예루살렘 성이 성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자신이 바로 새 예루살렘 성이라는 것입니다. 9~10절,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0절에 묘사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2절에 묘사된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 성이 9절에서 어린 양의 아내라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은 예수님을 말하고, 어린 양의 아내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성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새 예루살렘 성의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바로 새 예루살렘성이라고 말씀 드리면, 고개가 갸우뚱 하시는 분이 계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바로 예루살렘성이라는 개념은 요한계시록에서 맨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갈 4:24~26,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성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성은 자유자 곧 우리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바울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을 비유로 한 말입니다.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인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사라의 후손 즉, 이삭과 야곱으로 대표되는 믿음의 조상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새 예루살렘성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모든 성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2) 둘째는 새 예루살렘 성이 천국에서 우리가 살 집을 의미합니다.
요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의 거처을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처는 헬라어로 ‘오이코스’입니다. 이 단어는 “집”을 말합니다.(house) 예수님께서 반석 위에 지은 집, 모래 위에 지은 집 예화를 말씀하실 때, 그 집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하고 계신 일 중에 하나가 우리의 집을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에서 살 집은 잠시 거하는 집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가 살 집입니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집은 영원한 우리 집입니다.
저희 가정이 이번 주간에 이사를 갑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그 내용을 잠시 말씀 드렸습니다. 지난 주간에 차를 타고 이사 갈 집에 아내와 함께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올해가 결혼 14주년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결혼기념일이 7월달인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사를 14번했다.” 그리고 요즘에 머리가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 것 계산하지 마세요. 그런 것을 계산하니까 머리가 아픈 것이에요” 설교를 준비하는데 이런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목수이셨는데, 하늘 나라에 가서도 목수와 관련된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늘 나라의 집은 사람이 손으로 손수 지은 집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손수 집을 지으셨을 것이고, 하늘 나라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직접 집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고 계시는 집은 어떤 집일까요?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한 마디로 표현해서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 같은 집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묘사할 수 있는 표현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쁜 의미일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 부동산을 하시는 분이 계신데, 이제부터 우리가 천국에 가서 살 집을 잠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성의 규모와 모양
계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일단 규모가 엄청 큽니다. 길이가 만 이천 스다디온입니다. (“스다디온”은 로마 시대 거리 측정 단위. 1 스다디온 = 약 200미터 / 이 단어가 stadium으로 발전됨) 12,000 스다디온이란 약 1,500 마일 정도 되는 길이입니다. (약 2,400km) 한국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의 길이가 250마일(400km) 밖에 안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미국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까지가 약 1,000마일 정도 됩니다. 이것은 직선 거리가 아니라, 꼬불꼬불한 도로의 길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훨씬 짧을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규모가 사도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의 크기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2,000 스다디온이라는 것 역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처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12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상징하기 때문에 모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성의 치수가 이렇다는 것은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이 거할 수 있을 만큼 크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은 정육면체입니다. 왜냐하면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새 예루살렘성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데렐라성의 모양이 아닙니다. 왜 새 예루살렘 성의 모양이 정육면체일까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상징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구약 성경을 참고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성경에 정육면체 모양의 집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바로 지성소입니다. 지성소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지성소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는 모두 똑같이 각각 20규빗입니다. (약 9미터) 왕상 6:19~20,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기 위하여 성전 안에 내소를 마련하였는데 그 내소의 안은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이십 규빗이라 정금으로 입혔고 백향목 제단에도 입혔더라” 성전 안의 내소는 지성소를 말합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지성소도 정육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새 예루살렘 성을 지성소와 같이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새 예루살렘성 자체가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 자체가 지성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성 안에 항상 계십니다. 3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3번 반복되어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함께 있으매, 함께 계시리니, 함께 계셔서” 헬라어로는 똑같은 단어 “meta”(with)가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이자,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일 마지막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처음과 마지막이 바로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에게는 세 종류의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죽음까지 가는 친구입니다. 명예나 물질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만 동행하는 친구입니다. 죽은 후에는 그 사람에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덤까지 가는 친구입니다. 부모, 형제, 자녀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덤 바깥까지만 함께 동행하는 친구입니다. 무덤 안까지 따라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천국까지 가는 친구입니다. 우리가 무덤 속에 들어가서도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실 분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사실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3~4절,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천국에는 더 이상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의 근원이 모두 불못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만연한 악과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악과 고통의 원인이라면, 천국에도 이런 것들이 여전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애통하고 곡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아픈 병자들을 고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바로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2) 성의 재료
새 예루살렘 성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을까요? 계 21:18~21,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성은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성의 길도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지성소도 정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새 예루살렘성과 솔로몬이 만든 지성소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지성소는 금을 덧칠하여 입힌 것임에 반하여 새 예루살렘성은 그 성과 길 자체가 순수한 정금이라는 것입니다. 수준이 다릅니다. 그리고 성의 문은 한 개의 큰 진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성의 크기를 말씀 드렸습니다. 이 크기에 합당한 성문의 크기는 얼마나 클까요? 그런데 진주 하나로 그 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은 진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값진 진주 하나를 사기 위해서 진주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만큼 고대 사회에서는 진주가 가장 귀한 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는 만일 사도 요한이 오늘날 문화적 배경으로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면 새 예루살렘성의 문이 다이아몬드로 되어 있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진주가 아닌 다이아몬드가 가장 귀한 보석이기 때문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보석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17세기 말부터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Brilliant Cut 연마 기술이 개발된 이후,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보석을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현대 용어로 말한다면, 새 예루살렘성의 문은 하나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문입니다. 여러 다이아몬드를 붙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다이아몬드로 성문을 만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화려한 새 예루살렘성에 살게 된다는 말은 우리가 이런 성에 걸 맞는 신분과 상태로 변화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 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10~11절,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이것은 새 예루살렘성의 모습이자, 우리가 변화될 모습입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천국에 가면,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가 벽옥과 수정 같이 맑은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모습을 사모하며 이 땅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III. 결론
이제 요한계시록 전체 강해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하여 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도록 하셨는가? 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만 간략하게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1) 첫째, 요한계시록 처음 부분부터 끝 부분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 즉 처음과 마지막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알파란 하나님께서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라는 것이고, 오메가란 하나님께서 역사를 마무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끝내시는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입니다.
2) 둘째,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 또한 알파와 오메가가 되심으로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십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게 똑같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교회의 신랑이십니다. 그래서 신부인 우리에게 이 땅을 사는 동안,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의 최초의 독자입니다. 초대교회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성도들은 로마 황제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경배하도록 강요를 당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들에게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새 예루살렘성이 준비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다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롬 8:16~18,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키십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현재의 고난이 아무리 클지라도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크신 은혜를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