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錦城大君) 정민(貞愍) 이유(李瑜)
1457년 10월 21일 32살의 금성대군 사사(賜死)
1457년 11월 16일 16살의 단종 사사
단종(端宗) 노산군(魯山君) 이홍위(李弘暐)
일생 1441년 8월 18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16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국왕이다.
금성대군(이유;李瑜)은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 단종의 숙부이자, 조카인 단종을 진심으로 보필하고 1457년 단종복위운동(정축지변; 丁丑之變)을 주도하다 순흥에서 사사된 충신입니다.
1738년 영조가 복권시킴
정축지변(丁丑之變)은1457년 금성대군, 이보흠의 단종 복위 운동 거사가 실패하면서 세조에 의해 순흥부 주민이 학살된 사건을 말한다.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에 끝까지 반대하며 조카의 왕위를 되찾으려 했던, 단종과 가장 가깝고 신뢰가 두터웠던 종친입니다.
본명은 이홍위(李弘暐)로, 특이하게도 이름이 두 글자이다. ‘弘(클 홍)’과 ‘暐(햇빛 위)‘를 썼으며, 조선의 임금들 가운데 이름이 두 글자인 인물은 태종(이방원)과 단종 둘뿐이다. 그 외의 왕들은 원래부터 외자였거나, 즉위 이후 외자로 개명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이단’으로, 정종 이방과는 '이경'으로, 철종 이원범은 '이변'으로, 인종 이억명은 '이호'로, 고종 이명복(족보명 이재황)은 '이형'으로 개명하였다.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피휘(避諱)의 관례 때문에 임금이나 왕자들은 대부분 외자 이름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름 한 글자를 정할 때도 일상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 한자를 선택하였다. 태종은 비교적 흔한 한자인 ‘芳(꽃다울 방)’과 ‘遠(멀 원)’을 이름에 사용했지만, 피휘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영조 이금은 이름이 비교적 흔한 글자인 ‘昑(밝을 금)‘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명을 무려 40년 동안이나 숨겼다고 한다. 어느 날 신하가 글을 낭독하던 중 ‘금(昑)’ 자를 마주쳐 피휘 때문에 더 이상 읽지 못하자, 이를 들은 영조가 그냥 읽으라 하교하였다고 한다.
다만 조선 초기 임금들인 이성계(태조), 이방과(정종), 이방원(태종)은 고려 말기에 태어난 인물로, 이름을 지을 당시 왕이 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외자 이름일 필요가 없었다.
철종 또한 할아버지 은언군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와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서인(평민)으로 강등된 뒤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 대부터는 군호조차 받지 못한 상태로,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이름을 외자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 고종 또한 선대인 철종과 무려 17촌이나 차이가 나는, 왕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즉 태어날 때부터 임금이 될 것을 알면서도 굳이 두 글자 이름을 지은 인물은 단종이 유일하다.
다만 예전에는 태어날 때 짓는 이름과 족보에 올리는 이름이 달랐는데, 단종의 경우 왕이 된 뒤 태어날 때의 이름을 미처 바꾸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추측이다. 아마 정국이 불안정하여 이름을 바꾸기 어려운 상태에서, 숙부 수양대군에게 바로 양위하여 개명에 대한 논의를 꺼내볼 여유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금성대군과 단종의 핵심 관계 및 행보
친밀한 숙부-조카 관계: 금성대군은 세종의 아들 중 단종과 가장 가깝게 지낸 숙부로, 문종 재위 시절 단종이 세손일 때부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수양대군의 대척점: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자, 다른 형제들과 달리 조카인 단종 편에 서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습니다.
단종복위운동 주도: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순흥에 유배된 상황에서도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밀고되어 1457년 사사(賜死)되었습니다.
결정적 역할: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 실패 이후에도 끝까지 조카의 복위를 위해 노력했던 핵심 인물입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금성대군은 단종의 가장 든든한 혈연이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맞서 조카를 지키려 했던 비극적 충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산군(魯山君)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등되어 불리던 호칭입니다. '노둔하기가 산과 같다'는 뜻을 담은 부정적인 명칭으로,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을 빗대어 비하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배경: 1455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잡고 단종을 몰아내면서 왕위에서 내려오게 했습니다.
의미: 연산군(燕山君)과 마찬가지로 유교적 관점에서 왕에게 붙여서는 안 되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로, '노둔하다', '무능하다'는 비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복위: 훗날 숙종 때에 이르러 노산대군으로 진봉되었다가, 다시 단종(端宗)으로 묘호를 되찾으며 복위되었습니다.
노산군은 17세의 나이로 영월에서 사사(賜死)되기까지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를 상징하는 역사적 명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