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2017년 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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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ㆍ캡ㆍ겟(GapㆍCapㆍGet)
이영숙
두 명의 엄마와 두 명의 딸이라는 조합이 있다. 최소 3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나‘의 위치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무엇일까? ‘나-딸-손녀’이거나, ‘엄마-나-딸’, 혹은 ‘할머니-엄마-나’가 그것으로, 엎어치든 메어치든 일명 모녀삼대다. “고, 이, 민. 가족인 줄 알았더니 우리, 남이었어?” 부산의 한 호텔. 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캔맥주를 마시며 느긋한 밤 시간을 보내다가 딸이 개념 하나를 더 추가했다. 정말 그러네, 우리는 일단 새로운 발견인 양 깜짝 놀란 다음 크게 웃다가 서로를 돌아보며 ‘그래도 우리, 가족 맞는 거지?’ 여행지에서의 전형적인 과잉제스처로 잠시 혼란스러움을 연기했다. 엄마는 고씨, 나는 이씨, 딸은 민씨. 나는 ‘엄마-나-딸’의 버전으로 엄마가 여든넷 평생 한 번도 밟아보지 않았던 땅 부산에서 딸과 함께 2박3일의 마지막 밤을 즐기는 중이었다. 어느덧 광안대교를 지나는 자동차들도 뜸해졌다. 바다는 원유처럼 검었다. 더블 침대가 있는 방에 추가로 들인 싱글에서 엄마가 먼저 잠이 들고, 한 시간 이상을 두런두런 이야기 나눈 딸도 잠들었다. 의자를 끌어당겨 탁자에 턱을 괴고 앉으니 모계 혈통의 중간 단계에 있는 여자 하나가 호텔가운을 걸친 채 전면유리창에 반사된 어렴풋한 실내를 배경으로 나를 마주보았다.
엄마가 혀를 찼듯이 택시를 많이도 탔다. 엄마를 픽업하여 김포공항으로, 다시 부산공항에서 마린시티에 있는 호텔로, 점심을 먹고 동백섬을 가기 위해 30여 분 걷다가 포기하고 다시 호텔로, 달맞이고개의 찻집으로, 저녁을 먹고 근처 찜질방에서 나와 다시 호텔로 온 코스가 첫날의 궤적이라면 둘째 날도 만만치 않았다. 아침과 점심을 겸해 부산역 부근의 유명하다는 밀면집으로, 국제시장으로, 송도해수욕장으로, 호텔로 와서 휴식을 취한 후, 어제 가지 못한 동백섬으로, 해운대를 거닐다가 저녁 겸 바다장어를 먹기 위해 청사포로, 다시 호텔로 택시를 타고 오갔다. 딸과 나의 여행이었다면 버스로, 도보로 해결될 수 있는 구간도 모두 택시를 이용한 것은 엄마의 허리 때문이다. 여행코스를 정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부분이었지만, 즐거워서 허리 아픈 줄도 모르겠다는 엄마의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아픈 허리를 진통제로 달래면서 이틀을 강행군한 엄마의 숨소리가 깊고 고달팠다. 나는 애달팠다. 국제시장에서 엄마 수영복을 살 생각을 왜 못했던가.
4월의 볕은 따갑고 강렬했다. 부산공항을 나서며 내가 말했다. 엄마도 선글라스 써요. 나 선글라스 없어. 엄마가 말했다. 각막 천공 수술 후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 옅은 갈색을 넣어 만든 엄마의 안경을 나는 내내 선글라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 단 한 번도 엄마에게 선글라스가 있나 없나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수술 후 열댓 번은 족히 맞았을 여름동안 그 볕을 고스란히 견디셨다는 것인가. 그럼 선글라스 없다고 하시지. 나 자신에게 부아가 나서 절로 볼멘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부족해도, 불편해도, 보고파도 참아내는 엄마가 아니던가. 엄마께 다니러가면서 우연히 무엇인가를 사가면 그렇잖아도 이게 필요했는데 어떻게 알고 사왔냐, 반기기는 할망정 먼저 내색한 적 없고, 어제만 해도 동백섬을 걸어가는데 허리가 끊어질 정도가 되어서야 아직도 멀었냐, 참다 참다 앓는 소리를 냈고, 2주에 한 번 정도 엄마와 하룻밤 자고 오는 일을 두어 번 거슬러도 바쁜데 뭐 하러 오려고 해, 늘 그랬다. 찜질방에서 맥반석 계란과 미역국을 먹고 노느라 머리카락이 거반 말라갈 때쯤 체크아웃을 하게 되었다. 딸이 열쇠를 건네면서 한 번 바꿔갔는데도 수건에서 냄새가 났다고 항의하는 동안 나는 브러시로 머리칼을 빗다가 엄마 머리칼을 건성으로 빗겨 드렸다. 노인 특유의 뽀글파마가 약간의 웨이브를 타면서 한결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주 가끔 옷 사 입으라고 돈을 드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엄마의 헤어패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촌스러우니 너무 뽀글거리게 하지 말라거나 검정색으로 염색하지 말라는 잔소리는 일회성이었지, 검증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다. 빗질 같은 것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어디 그뿐이었을까.
여행일이 다가오면서 부푼 마음에 엄마와 더욱 자주 통화를 했었다. 호텔에 실내풀장이 있으니 수영복 준비하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릴 적에 배운 개헤엄을 자유형이나 평영으로 교정받기 거부하면서도 엄마는 한동안 아파트 앞에 있는 문화체육센터 어르신수영반에 나가셨던 것이다. 수영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물속걷기와 체조로 바뀌고, 겨울이 되자 춥고 을씨년스러워져 그만두셨다는 얘기를 끝으로 엄마와 나의 대화에서 수영은 자취를 감추었다. 내 전화에 엄마는 몇 년 전에 다시 나가려고 했을 때 이젠 나이 때문에 아예 등록을 받아주지 않더라고, 그래 수영복을 아예 버렸다고 하신다. 저런! 사람 몇 안 되는 풀장에서 딸과 내가 수영을 하며 오가는 동안 엄마는 가운을 입은 채 풀장 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 왜 엄마 수영복을 살 생각을 못했나, 자신에 대해 울분마저 느꼈던 내가 더 한심해진 것은 그날 국제시장에 가서 엄마가 친구들과 나눠드실 어묵을 사서 택배로 부치고, 챙이 좋은 모자를 사서 씌워드리면서도 수영복 살 생각은 까맣게 잊었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날 아침, 수영을 좋아하는 엄마는 또 벤치마킹을 하시고야 말았다.
엄마는 왜 말씀을 안 하실까.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로 이번 여행에 전 경비를 책임지기로 한 손녀가 펄쩍 뛰는데도 불구하고 경비에 보태라고 위엄 있게 20만원이나 내놓은 엄마는 수영복 살 돈이 없거나, 평소 자식과 손주의 눈치를 보면서 주눅 들어 계신 분이 아니다. 한 번 입고 놔두기가 아까워 차라리 잠시의 즐거움을 접는 몸에 밴 방식에 나는 화가 났다. 풀장도 한가한데 모녀삼대가 수영을 했으면 얼마나 멋졌겠냐고, 얼마나 오래 두고 기억 속에서 새록새록 돋아났겠냐고, 다음 여행 때 또 수영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나 수영복 좀 사야겠다’고 왜 귀띔하지 않았느냐고, 절로 말에 힘이 들어갔다. 내 탓을 엄마 탓으로 돌리면서 책임회피를 하려는 게 아니라 실은 나의 관습화된 무심에 대한 자책이었다. 나는 내 종아리를 힘껏 내리쳤다.
많은 사진을 찍었다. 현관에는 흰색 바탕에 분홍색 줄이 엇갈린 240, 235, 250 사이즈의 운동화가 서열 순으로 놓여 있고, 맥주를 따라 마시던 유리컵 바닥이 엄마와 내게 포커스를 맞추는 가운데 흰 매니큐어를 칠한 딸의 왼쪽 손이 유리컵을 감싸고 있다. 눈과 입만 내놓고 흰 마스크팩을 붙인 화장품 광고 같은 여인들은 실내풀장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호텔가운차림으로 V자를 그리고, 아펙하우스 전망대에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활짝 웃는다. 해운대 모래밭에 156, 160, 176의 그림자를 늘어뜨린 맨발들이 멈춰 서 있고, 하늘과 수평선과 모래밭의 수평 구도를 깨며 그들은 어깨동무로 밀착해 있다 으리으리한 궁궐 같다고 엄마가 묘사한 호텔이 그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지만, 50%의 할인권으로 식사한 스카이라운지에서의 점심메뉴는 알록달록하고 으리으리하다. 일부는 누구에게 부탁한 것이지만, 대부분은 셀카 형식으로 딸이 찍은 것이다. 엄마 자궁에 내가 들앉아 있었고, 내 자궁에 딸이 들앉아 있었지만, 어느 만큼 정신적으로 이제 우리는 딸에게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사진이 누누이 말해주고 있다.
사랑하므로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 말하지 않으므로 사랑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것을 쉽게 말하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리라 여겨졌다. 몇 년 전에 네가 사준 모자가 낡고 안의 고무줄도 늘어났다,고 엄마는 부산공항의 쓰레기통에 그것을 망설임 없이 집어넣었다. 이번 여행에서 꺼내보지도 않은 모자를. 국제시장에서 우발적으로 사드리지 않았으면 1년이고 2년이고 그냥 쓰고 다녔을 모자를. 예전 같으면 집에 가서 나 모르게 버렸을 모자를. 엄마가 아주 조금 편안해진 것 같은 모습을 보다 딸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환해졌다.
첫댓글 저는 엄마도 없고 딸도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