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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생이 유자(儒者)인지라 깊이 불도(佛道)를 신봉하거나 심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부를 위하여 한자, 한문 학습을 위한 방편으로 유가의 경전들을 베껴 쓰고[寫經] 읽고 풀이하면서,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불경들 또한 접할 수 있었으므로 그 일이 취향처럼 되어 이런 유형의 소론을 쓸 기회가 더러 있었을 뿐이다.』
佛說四十二章經 第十二章 『擧難勸修. 佛言人有二十難』 略解
불교 경전의 하나로 『佛說四十二章經』이 있다. 동한(東漢·後漢, 25-220) 이전에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어, 후한의 가섭마등(迦葉摩騰), 축법란(竺法蘭)이 A.D. 67년에 공동으로 한역(漢譯)하였는데, 후대 명(明) 나라 수수(守遂, 1072~1147)가 주해(註解)하였다. 주되는 내용은 석가세존(釋迦世尊) 성도(成道) 후 대선정(大禪定)에 들어 마도(魔道)를 모두 항복시키고 녹야원(鹿野苑)에서 사제법륜(四諦法輪)을 설파하여 도교진여(度憍陳如, 阿若多憍陳如) 등 다섯 사람이 도과(道果)를 성취토록 한 기록이다. 나아가 비구 여럿이 풀고자 원하는 의혹들을 하나하나 세존께서 가르쳐 모두 깨달음을 얻게 한 내용을 또한 담았다.
이 경전에 『불유교경(佛遺敎經)』과 『위산경책(潙山警策)』이 합철된 바를 일명 『불입열반약설교계경(佛入涅槃略說敎誡經)』이라 한다. 『불유교경』은 진(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하고 명(明) 나라 수수가 주해한 것이며, 『위산경책』은 당(唐) 나라 영우(靈佑, 771~853)가 찬(撰)하고 수수가 주해한 것이다. 3책 모두 수수가 주해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경전은 4권 1책으로 고려 말 1361년(恭愍王 10)에 간행된 후 1384년(禑王 10) 및 조선 초에 중간되어 우리 불교 교학사상 가치가 높다. 2011년 2월 1일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21호로 지정되고, 이후 보물 제1224호로 되었다.
이 경전의 원문 전부 또는 영인본의 부분을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다양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접할 수 있고, 1986년에는 서울 선문사(宣文社) 간행의 역해본(譯解本)이 나왔다 하나 현재 서점들에는 보이지 아니한다.
그 경서 가운데에서 소생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다양한 사회교육에서 교재로 활용한 부분은 제12장 『擧難勸修. 佛言人有二十難』이었는데, 그 전문 및 소생의 풀이는 다음과 같으며, 여러 차례 인터넷 공간 등에 올린 바 있었다.
'第十二章'
擧難勸修, -수양을 권하기 어려운 일들을 들어 보겠다.
佛言人有二十難, -부처님 말씀하신 인간사 어려운 일이 20 가지인데,
貧窮布施難, (1)-가난한 이 보시하기 어렵고,
豪貴學道難, (2)-부유하고 벼슬 높은 이 불도를 닦기 어려우며,
棄命必死難, (3)-목숨을 다 바쳐 죽음을 맞기 어려우며,
得睹佛經難, (4)-부처님 가르침의 경전을 직접 보기 어려우며,
生值佛世難, (5)-살아생전에 부처님 세상 만나기 어려우며,
忍色忍欲難, (6)-색욕, 물욕을 참기 어려우며,
見好不求難, (7)-좋아하는 것 보면서 탐내지 않기 어려우며,
被辱不瞋難, (8)-모욕을 당하고 성내지 않기 어려우며,
有勢不臨難, (9)-권세를 가진 사람이 남을 누르지 않기 어려우며,
觸事無心難, (10)-일을 당하여 무심하여지기 어려우며,
廣學博究難, (11)-널리 배우며 깊이 탐구하기 어려우며,
除滅我慢難, (12)-스스로 교만을 없이 하기(滅諦) 어려우며,
不輕未學難, (13)-배우지 못한 사람을 경멸 않기 어려우며,
心行平等難, (14)-마음먹은 일과 행위를 일치하도록 하기 어려우며,
不說是非難, (15)-옳고 그른 일을 말하지 않기 어려우며,
會善知識難, (16)-훌륭한 스승을 만나기 어려우며,
見性學道難, (17)-깨달음을 얻어 불도를 행하기 어려우며,
隨化度人難, (18)-깨달은 사람을 뒤따라 바뀌기 어려우며,
睹境不動難, (19)-순경, 역경에 흔들림 없기 어려우며,
善解方便難. (20)-부처님의 수행 길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니라.
근래 필자는 중국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 『Yahoo奇摩』를 섭렵하던 중 우연히 雪廬老人 講, 徐醒民 筆錄의 『佛說四十二章經表注講義』라 한 방대한 글을 보았는데, 그 가운데 위 ‘佛言人有二十難’을 풀어 다음 도식처럼 불도 구도를 6 단계로 나누고, 그 난능(難能)의 원인을 10 가지로 해설한 것이 있었다.
구도의 차례에서 첫째로 받드는 것이 자비(慈悲)이다.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면 즐겁고, 슬픔을 주면 고통을 당하나니, 이 모두가 이타(利他)이다. 그러므로 불도 닦기를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보시를 행하여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 보시의 유별에 ‘財施, 法施, 無畏施’의 셋이 있는데, 재물로 하는 보시가 더욱 보편적이다. 그러나 보시는 단지 외공(外功)일 뿐 내법(內法)이 없으므로 아직 구도라 말하기 부족하다. 사리에 밝지 못하면 그 희구가 법도에 맞지 않아 맹목적인 수행이 될 뿐이다. 사리는 경전 속에 풍부하며, 경전은 삼보의 법보(法寶)이라 옛적에는 그 만나기 어려움이 지극하였으나 지금에는 술흥(術興)으로 폄하되어 쉽게 유통되는데, 그러나 사람을 만나 설파하지 않거나 만나도 만나지 아니함만 같으며, 비록 사람을 만나 설파하더라도 이치와 기회에 닿지 아니하면 또한 공허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구도의 다음 제일보가 곧 우법(遇法-佛法을 만남)이다. 불법이 8만 4천 가지이지만 ‘지관(止觀-마음을 고요히 하여 진리의 실상을 관찰하는 불교수행법)’의 두 가지 법에 지나지 아니한다. ‘지(止)’는 사념을 그침(止其念)이니 외연을 붙좆지 아니함이며, ‘관(觀)’은 그 지경을 봄(觀其境)이라 법접하여 소요치 못하게 함이다. 이것을 습정(習定)이라 하며 곧 구도의 제3단계이다. 제4단계가 사수(思修)인데, ‘사(思)’는 ‘사유’이다. 공자 또한 “배우기만 하고 사유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 하였으니, 깊이 생각을 기울인 다음에 수양하면 그 닦음이 반드시 돈독하리라. 다섯째의 단계가 단혹(斷惑)이다. 중생은 다 불성을 갖추었으므로 모두 성불할 수 있다. 요사이 고뇌하는 범부들은 다 무명(無明)에 가리어(蔽) 있거니와 무명은 곧 미혹이라 의혹을 끊어야만 불성이 나타난다. 혹 어떤 미혹은 끊어버리는 즉시 사수(思修)와 습정(習定)의 공(功)조차 끊어지도록 한다. 여섯째 단계는 견도(見道)이다. 선종(禪宗)은 견도가 필수인데 그 시발점을 일컬어 수도라 하거니와 이는 칼 갈기와 같은바 응당 칼의 소재를 알아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칼이 보이지 아니하여 헛되이 시간을 허비할 뿐이니, 이를 어찌 아무 쓸모 없는 일을 따지고 논의하는 희론(戱論)이 아니리요. 그러나 정토종(淨土宗)은 견도 여부를 불문하고 모두가 수행이 가능하다 하였으나 그것이 불가사의한 법문(法門)이 되면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궁극을 탐구할 수 있다. 견도를 어떻게 할까? 지관법(止觀法)으로 징험할 경우 사념을 일으킨 이는 견도하지 못한다. 사념을 일으키지 아니한 이는 망념(妄念)을 그칠 뿐이라 역시 견도하지 못한다. 진실로 능히 견도한 이는 곧 불가사의한 경지를 나타내 보이므로 만약에 사람이 물을 마셔도 그 차고 더움[冷緩]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으리라.
불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 경문 중 위 제12장은 불학(佛學)의 대지(大旨)가 ‘장애의 파제(破除) 및 앎을 바꾸어(轉識) 지혜를 이룸(成智)’ 두 가지임을 설파하였다. 이 두 가지는 오래도록 간난신고를 겪지 않고서는 성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간난, 고난을 두려워하여 용약 앞으로 나아가지 아니하면 결코 끝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석가모니께서는 성불하였는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단적으로 이는 간난이 두려워 부정함 때문이다. 중생들은 어찌하여 간난을 두려워하는가? 불가에서 말하는 인과관계의 인(因)에 사연(四緣), 십인(十因)이란 것이 있는데, 그 중 주요한 것이 무력과 나태였다. 이 십인이란 것이 간난을 두려워하는 병인지라 이를 다스리면 비로서 능히 민난(萬難)을 극복하여 불도를 이루게 되리라.
불언(佛言)이 일컬은 ‘人’은 당연히 일반인 곧 상인(常人)과 수도자를 포괄한다.
사람 모두 인생사에서 어려움 겪는 일 20가지 중 첫째의
‘貧窮布施難’은 재물 없이 남을 돕는 일이 너무나 어려우며, 지혜 없이 남을 돕는 일 역시 어려운 일임을 말한다.
‘豪貴學道難’의 ‘豪’는 부자를 말하고 ‘貴’는 벼슬 높음이다. 중생이 부귀를 누리면 생사에 미혹하여져 도심을 발양하기 어렵거니와 그러므로 부귀는 인간의 팔난(八難) 중 한 가지가 된다.
‘棄命必死難’은 선업(善業)을 이루고자 함인데 세법의 충신 효자 역시 모름지기 목숨을 버림으로써 이뤄진다. 때로 세법을 벗어나 큰 이룸을 얻고자 하면 혹간은 불구덩이(火坑)나 지옥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이치는 쉽지만 그 실행은 지난한 것이다. 만약 그리 행하지 아니하면 그 이치조차 밝지 못한 것이 된다.
‘得覩佛經難’은 범부의 경우 생사에 부처를 믿지 않고서도 오직 복 누리기를 구하겠지만 꼭 열성껏 불경을 읽고 탐구하여야 지혜를 얻고 깨우칠 수 있을 터인데, 그러한 불경을 목도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다.
‘生值佛世難’에서 살아서 부처님 세상을 만나거나 불법을 들을 수 있다면 생사의 대행(大幸)일 터인데 그런 일 이루기가 지극히 어렵다. 부처님 적멸 후 불자들에 의하여 불법이 일전(一傳) 재전(再傳)하는 사이에 혹은 전하여지거나 망실함이 있어 현세가 곧 말법(末法)의 세상으로 되어 그 경법(經法)의 본의를 잃어버렸다. 그러므로 불경의 강설은 모름지기 전부를 조사(祖師)의 주석에 의지하여 감히 사심(師心)을 자용(自用)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지금 말법의 세상을 만났더라도 오히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고, 부처님의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만약 멸법(滅法)의 시기를 기다린다면 사람과 하늘에 장야토록 업해(業海)가 망망하더라도 중생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더는 없게 되리라.
불도를 닦음에서 생각이 미혹함을 끊어야 하거니와 그 사혹(思惑)을 끊어버리기가 지극히 어렵다. 사혹을 탐하는 일 가운데 색욕이 가장 강하거니와 진에(瞋恚, 노여움)가 곧 인욕(忍辱)을 어렵게 하고, 치우(癡愚)가 이치를 어둡게 하며, 오만이 스스로를 건방지게 하고, 의심이 신덕(信德)을 없이 한다. 불경에서 이른바 ‘忍色忍欲難’ 아래의 다섯 구절 곧 ‘見好不求難, 被辱不瞋難, 有勢不臨難, 觸事無心難’까지는 다 사혹(思惑)을 장차 끊어내기가 크게 어려운 일임을 말하였다.
‘廣學博究難’은 학불(學佛)이 모름지기 사굉서원(四宏誓願-煩惱無邊, 法門無量, 衆生無邊, 佛道無上 등 誓願)으로 이뤄지는데, 그 중 하나가 법문(法門) 이 무량하기 서원이었다. 세간에 출세 방법이 모름지기 호학이었거니와 공문(孔門) 대현(大賢)의 으뜸으로 추앙 받는 안자(顔子)는 공자로부터 호학한다고 일컬어졌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스승께 “언제 어느 때에 학문을 이룰 수 있습니까? 물었는데, 공자는 대답하지 아니하고 다음날 제자들 함께 교외를 거닐면서 한 묘지에 이르러 무덤을 가리키며 묘중 인물 중 학문을 말릴 사람을 일어나게 하도록 지시하셨다. 곧 사람은 죽는 날까지도 배워야 함을 깨우치신 것이다. 출세법의 공부는 사혹(思惑-분별, 판단이 바르지 못함)의 나타남을 남김없이 끊고, 더욱 자잘한 미혹들을 모조리 끊어야 하나니, 배우지 않고서 어찌 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한 ‘廣學博究’는 널리 배우되 모름지기 다양한 탐구를 아울러야 함인데, 이것이 곧 관세음보살이 문(聞)ㆍ사(思)ㆍ수(修)를 실천하여 삼마지(三摩地) 곧 선정(禪定)에 도달함이다.
‘除滅我慢’과 ‘不輕未學’은 다 오만을 물리침이다. 비록 어렵더라도 반드시 힘써 행하여야 한다. 불도를 배우는 이는 자신의 학문을 믿어 오만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며, 당연히 배우지 못한 후생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연부역강 하면서 배우지 않고 버려두지 말아야 하며, 기왕에 배운다면 속히 이루어야 하거니와 그러므로 가벼이 여길 수 없는 것이다.
‘心行平等難’은 아집을 가지면 평등심을 갖출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집을 깨뜨리지 않고는 비록 삼장(三藏-經律論)을 숙독했더라도 이 또한 쓸모가 없는 것이 된다.
‘不說是非難’은 불도를 배우는 이면 반드시 모든 사념에 도리를 생각해야 한다. 어느 겨를에도 사람의 시비를 가리고자 할 때에 만약 선의로서 사람을 규제코자 한다면 오직 스승이 생도를 가르치듯 하고, 아비가 자식을 가르침과 같이 해야 할 따름이니라.
‘會善知識難’에서 제악사를 아는 이를 악지식(惡知識)이라 하고, 제선사를 아는 이를 선지식(善知識)이라 한다. 주칠(朱漆)을 가까이 하는 이가 붉은 물을 들이고, 먹(墨)을 가까이 하는 이가 검정 물을 들이는 법이다. 수행인이라면 반드시 악지식을 멀리 하고 선지식과 친근하여야 한다. 그러나 선지식을 만나기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 다행스럽게 만나게 된다면 삼가하여 떠나지 않아야 하리라.
‘見性學道難’ 중의 견성(見性)은 곧 견도(見道)의 뜻이다. 수행자 모두가 어려움을 알거니와 이는 모름지기 망념(妄念)을 물리침으로부터 비롯한다.
‘隨化度人難’은 세상 법도에서 비밀스럽게 배우는 이를 불법(佛法)에서 불허하나니 반드시 홍법(弘法)으로 사람을 제도해야 한다. 그러나 혼미할 적에 중생을 제도하기 쉽지 아니하나니, 모름지기 지혜로써 그 심리를 관조하여 분수를 따라 중생을 제도한다면 꺼려하지 못하리라.
‘覩境不動難’의 ‘경(境)’은 순경과 역경이다. 수행은 정진을 뛰어나게 하고, 뛰어난 변역은 요괴와 마주치게 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에게 인도 받기를 바라는데, 그러지 않고서 어찌 능히 순경, 역경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석가세존께서 성도의 순간을 시현해 보이고자 하셨을 때, 오히려 욕계(欲界) 제육천(第六天) 마왕(魔王) 파순(波旬)의 소요를 당하셨는데, 범부가 선지식을 떠나서 어찌 수행할 수 있겠는가?
‘善解方便難’에서 ‘방편’이란 곧 부처와 보살이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지혜인 권지(權智)를 가리킨다. 하급의 권위보살(權位菩薩)이 그 지혜를 처음으로 구현하였으나 무척 어려운 것이지만 비록 어렵더라도 두려움과 막힘에 순응하지 않아야 하나니, 모름지기 불법에 의탁하여 힘써 행할지어다.[2021.05.17.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