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후 지백호 신도비명
경주정씨(鄭氏) 시조(始祖)의 휘자는 지백호요 자는 인세(仁世)로 처음에 진한의 자산 진지촌에 강림(降臨) 하시니 오늘의 경주시 동남쪽이 된다,
公의 영특한 재목과 큰 德이 여러사람의 사모함을 받아 자산 진지촌의 촌장이 되시니 알천 양산 돌산 고허 무산 대수 금산 가리 명활산 고야 등의 모든 촌장들과 같은 때에 섰고 서로 닿은 이웃이 되시어 살으니 이분들이 세상에서 말 하는 신라의 육촌장으로 경주의 사적을 적은 동경지에 기재되어 있는 육부 대인이 하늘로 부터 내려 왔다는 말을 혹자는 사실이 아님을 의심하나 왕검의 단하에 내려옴과 삼을라의 지중에서 솟아 나옴은 예부터 그러한 말이 전하고 또 하물며 대인이 태어남이 어찌 보통사람 보다 특히한 점이 없겠는가 ?
소순(蘇洵)은 강원(姜嫄)이 대인의 거적을 보고 후직(后稷)을 잉태하여 낳았다는 고사에 대해 [신인(神人)의 태어남은 보통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있다}고 말 하였으나 육부대인의 태어남 같은 천지자연의 이치를 되살려 생각함이 옳을 것이다,
한선재 지절(地節.선재의 年號) 원년 임자 三월에 公이 다섯명의 촌장과 더불어 혁거세의 태어남이 신의 하고 모였다가 숲 사이에 백마(白馬)가 꾸부려 절하는 모양을 발견하고
公이 가까이 가보니 백마는 보이지 않고 다만 알이 박같이 생긴 것이 있는지라, 그 알을
쪼개어 보니 어린아이가 있어 거두어 기르니 그 아이가 바로 혁거세 이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갑자 4월에 公이 다섯 촌장과 더불어 혁거세의 태어남이 신의하고 자라남에 인품이 우뚝함을 기이하게 여겨 혁거세를 세워 임금을 삼고 나라를 창건함과 동시에 기설(夔설.순임금 때의 현신) 처럼 도와 희호(熙호.성왕의 정치)의 정치를 이룩하니 혁거세는 드디어 조토(조토.공신께 주는 토지)를 주어 좌명 개국공신을 삼아 낙랑후를 봉하니 세인들이 소하(蕭何.한조의 개국공신)의 찬후(찬후.암양현명)에 봉함과 같다고 하였다,
그뒤 유리왕 九年 임진(서기32년)에 육촌을 육부로 높여 고치고 성을 줄때에 진지촌은 본피부로 변경되고 姓을 鄭氏로 하사 받으니 이때는 公의 현손인 동충(東충)의 때 였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鄭氏의 시초이다,
혹자는 모든 정씨가 다 여기에서 시작 되었는데 근원이 멀어 지면서 파(派)가 나뉘어 관향을 달리 하였고 그런 중에서도 경주정씨가 서열로 장파(長派)이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444년 뒤인 병신(서기516)년 에 법흥왕이 말 하기를 [공의 공훈으로 보나 관작으로 보나 마땅히 역명(易名.시호를 말함)이 있어야 된다]하여 드디어 문화(文和)로 시호를 하사 하였고 또 그로부터 138년 뒤인 병진(서기656)년에 태종 무열왕이 말 하기를,
[공의 후호가 공이 세운 공에 못 미친다]하여 봉호를 올려 감문왕을 추증 하였다,
대개 위에서 말한 문화의 시호와 감문왕의 봉호를 혹자는 이점이 사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들어 말 하는 이가 있으나, 이점은 육촌장 후손들의 가적(家籍)에 모두 기록이 있고 또
오늘에 와서 鄭氏들이 이미 묘비에 입각 하였으니, 내가 公의 신도비명을 지으면서 어찌 사기(史記)에 나타나지 않는 점을 들어 범공의 맥주처럼 빼 놓을 수 있으랴 !
또 그로부터 1315년 뒤인 신해(서기1971)10월에 이고장 사람들이 육촌장에 대해 아직까지도 [구덕을 생각해 잊지 못한다]는 여론이 있어 사림(士林)들이 마음을 합하고 정부에서
재력을 담당하여 나정 옆에 터를 정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祭祀 음력8월17일 신라 대제일)를 올리니 그 이름이 입덕묘(立德廟,신라건국의공을 기리는 육촌장 사당)에 公은 제3위에 모셔 졌다,
이것이 대개 [성덕은 민몰되지 않아 사전(祀典,제사예전)으로 갚는다 는 것으로 저 세인들의 어제 아침에 죽고 오늘 저녁에 사적이 없어져 아무 사전의 보답도 없는것에 비교해 볼때 어찌 고려와 조선을 지나고,천연(天淵,하늘과 땅의 연못)의 높고 얕은 차이 뿐이 겠는가 ? 또 더군다나 오늘에 이르기 까지 2천여년이 지났으나,사람들이 신라국을 말 하면 나이에 노소 차이 없이 모두 육촌장의 건국임을 알고 낙랑후를 말 하면 지식의 우열 차이가
없이 낙랑후 지백호라 함은 무두 鄭氏의 시조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때 공이 촌장으로 있을때에 베푼 덕정(德政)과 건국에 참여하여 세운 훈업(勳業)은 당당하고 요요하여 가히 기록 할만하고 가히 후세에 전할만 한 것이 많았을 것인데, 신라는 우리 동방에 있어서 세대가 멀고도 아득하여 문화의 고요함이 모두 당우 이전의 상고하기 어려움을 면치 못하니 사기에 입전이 없는것이 너무도 당연함과 동시에 문헌이 부족한 기 나라와 송나라의 탄식이 간절할 뿐이다,
공의 산소가 옛부터 경주 남쪽 30리 쯤에 백운대에 있다고 전해오니 이곳은 오늘에 월성군 내남면 노곡동 이다,
백운대 위의 고분이 좌우로 널려 있어 어느 산소가 공의 산소임을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 때문에 자손들이 단비만을 세우고 시제를 올린지가 수 백년이 되었지만 종인들의 의논이 끝내 만족치 못한점이 있어 지난 봄에 모든 후손들이 협의 하여 드디어 여려 산소 중에
위치로 볼때 가장 위에 있고 시기로 볼때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치에 근사한 산소를 공의 산소로 정하여 수축하고 정리하여 산소 주위를 화하고 또 묘비를 세워 공의 아름다운 사적 중에 만분의 일분을 세기니 이것이 진실로 전봉의 일우에 지나지 않으나 자손으로서 급급히 조상을 추모하는 도리로 볼 때에는 또한 부득이한 지정(至情.가까운 정분)에서 나온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돌아 보건데, 재앙과 화난이 하늘에 닿고 예의가 땅에 떨어져 세상에서 말 하는 명가와 우족들도 교목에서 내려와 그윽한 깊은 산골로 들어가 요모복추(요毛覆墜.쉽게 망하는 따위) 하는 일이 많은데,
鄭氏의 많은 분들이 선조를 추모함이 돈독하여 이 같은 성대한 일이 있으니,여경(餘慶.선조께서 착한일을 많이 한 보람을 자손들이 누리게 되는 경사)이 빛나고 후손을 번창하게 하지 않으랴...
公의 후손이 국중에 가득할 정도로 물의 근원이 멀수록 흐름이 길고 나무의 뿌리가 튼튼 할 수록 가지가 무성함과 같으니 여기에서도 공의 잠덕유광(潛德幽光.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덕자의 숨은 빛)이 백세가 지나도 불멸하는 점이 있을것을 알 수 있고 또 공의 유택여음(遺澤餘蔭.후세까지 남아있는 은혜와 선조가 끼친 공적을 자손이 받는 복)이 후손에게 전해져 명공과 석보(碩輔.어질고 착한 보좌의 신하)들이 앞뒤로 계속되어 덕학이 훌륭한 분,문장이 훌륭한 분, 공렬이 훌륭한 분, 절의가 훌륭한 분,의행이 훌륭한 분,등등의 빛나는 묘모(廟謨:조정의 계획)와 위대한 사적이 국사와 야승에 계속해 나오고,또는 간간이 들어나 글의 수식과 내용이 서로 알맞게 갖추어져 있는 문헌이 성대하게 동방의 거대한 氏族이 되었으니 누가 영지(靈芝:고목에서 나는 버섯의 하나)가 뿌리가 없고 예천(醴泉:맛이 좋은 물이 솟는샘) 이 근원이 없다, 고 말하랴 !
어느날 후손 성균(性均) 봉균(捧均)등이 더위를 무릎쓰고 나에게 서울로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경주정씨 문헌공파의 보사가 멀지 않아 끝나는데 육만여명의 단자에 약간의 재정이 남게되어 派內의 老小 宗人들이 모두 말하기를,[묘비가 이미 세워 졌으니 당연히 신도비를 갖추어 산소 앞을 빛내야 된다, 함으로 감히 당신의 일언을 빌고져 왔으니 사양치 말라]하니 내 스스로 돌아보건대 묘말(묘末:자기의 겸양)의 후생으로 학문이 짧고 지식이 얕아 금석의 글에 탁명하기 어려워 굳게 사양 하였으나 그들의 請이 더욱 더 간절하였다, 또 내가 옛날에 우리 선조 지산옹(志山翁:성균관 대사성 휘.김복한[金福漢])이 봉균의 선조 옥계공의 신도비명을 지은 일을 생각함에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감히 묘비문에 의하여 약간의 은괄(은括:바로 잡고 올바르게 하는 일.즉/修潤),을 가해 서를 위와 같이 하고 또 명사(銘辭:새기는 말)를 지어 이르기를....
훌륭한 대인은 자산에 처음으로 강림 하시어 임금을 세우고 나라를 창건한 당당한 공신이 되시었다,德은 크고 業은 넓어 후손들에게 福을 전하니 번창한 자손의 수는 만이요,천이로다, 鄭氏의 시조 이시니 누가 그 근원을 잊으랴.
삼가 백운대에 나아가 정성껏 봉축하여 우뚝한 묘비는 묘역을 빛내니 삼한(三韓)의 구족은 그 명이 새롭도다. 내 그 위적을 간추려 후인 들에게 보이노니 빛나는 비의 새김은 길이 후세에 전하리...,
영가 김철현 贊 하다,
출처:경주정씨 족보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