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청산리전투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에서 10월 26일 사이에 우리 무장독립군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일어난 백운평전투, 완루구전투, 천수동전투, 어랑촌전투, 맹가구전투, 맹가구서골전투, 만기구전투, 고동하곡전투 등 대소 십여 회의 전투를 통 털어 일컫는 것으로 북로군정서 백운평 매복전을 시작으로 하여 홍범도연합부대의 고동하곡전투로 끝이 났다.
1) 백운평전투
백운평전투는 청산리전역에서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이다. 좀 자세하게 설명하면 10월 21일 아침에 북로군정서군의 연성대장인 이범석이 지휘하는 선두부대 (제1대대, 교성대, 여행단)가 야마다연대의 야스가와소좌 부대와 격전 끝에 30분 만에 90여 명을 전멸시킨 전투로 일본의 정예군과 겨룬 최초의 전투이며 최초의 승전이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교성대, 선견부대, 여행대)는 10월 12일, 13일에 화룡현 삼도구 일대에 도착하였다. 북로군정서 본대는 10월 16일에 화룡현 삼도구 부근 대금창에 머물렀다가 송림평으로 이동하였다. 10월 19일 홍범도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 대표가 모인 묘령회의에서 피전책이 결정되고 난 후 10월 20일 새벽 야마다부대가 청산리골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북로군정서는 꽤 넓은 평지인 송림평을 떠나 청산리 깊숙한 협곡 백운평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수뇌부는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재무부장 계화,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부관에 나중소, 부관에 박영희(박두희), 연성대장에 이범석, 종군장교에 이민화, 김훈, 백종렬, 한근원(한건원), 보병대대장 김규식이었다.²⁴
10월 20일, 이범석이 거느린 선두부대 (제2대대, 교성대, 연성대, 여행대)는 송림평을 떠나 백운평에서 3, 4리 더 들어가 있는 직소택 부근에서 행군을 멈추었다. 이범석과 연성대 지도자들은 좌우 양편 험한 산기슭에 숲 속에 매복하여 폭이 아주 좁은 골짜기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하였다.
본부대인 후속부대는 20일 저녁 무렵에 백운평에 이르러 직소택 건너편 사방정자(베개봉) 산기슭에 매복하였다. 선두부대의 이민화의 1개 중대는 우측에. 한근원의 1개 중대는 좌측에, 김훈의 우중대와 이교성의 좌중대는 직소택의 정면에 매복하였고 이범석은 정면에서 전반 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들은 그 날 밤 백운평주민들에게 식사를 부탁하였고 주민들은 식사를 마련하여 직소에 있는 선두부대에 전하였다. 20일 밤 부대원들은 심산에서 서리를 맞으며 꼬박 밤을 새웠다.
북로군정서 선두부대가 직소택에서 매복진을 벌려 놓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야마다연대의 야스가와소좌가 지휘하는 선발부대 1개 중대 90여 명이 백운평 서쪽 2km 지점에서 북로군정서군의 야영자리와 화톳불 흔적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승기를 잡고자 경계를 강화하면서 성급하게 단서를 쫓아서 일렬로 직소택 쪽으로 올라와 매복권내에 들어섰다.
이범석의 총소리를 신호로 하여 사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돌발적인 습격에 대응사격을 하였지만 독립군들의 매복지점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헛총질을 하였다. 약 30분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일본군 90여 명이 거의 사살되었다.
백운평 직소택전투에서 승리한 북로군정서군은 직소택에서 2km 지점에 있는 봉밀구로 이동하였다. 김좌진이 본대를 거느리고 먼저 이동하면서 선두부대에게 본대 철수를 엄호할 것, 22일 새벽 2시 전에 봉밀구 갑산촌으로 집결을 명하였다. 선두부대는 본부대의 철수를 엄호한 후에 한근원중대를 후위로 갑산촌으로 철수하였다.²⁵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및 실종자가 22명이고 일본군의 손실은 1920년 11월 20일자❰독립신문❱에 의하면 200명이였다.
백운평전투는 청산리전투의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전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2) 완류구전투
완류구전투는 10월 22일 청산리전역에서 홍범도연합부대가 전략과 전술로 아즈마지대 일본군과 싸운 최초의 전투이며 아즈마 주력부대에 최대의 타격을 입힌 최고의 전투이다.
완류구는 왈리구, 와록구, 마록구 등으로도 불리며 현재의 어랑촌에서 서북방향으로 뻗은 골짜기이다. 어랑촌에서 7.5km 들어가면 남완류구가 있고 거기서 서쪽으로 좀 올라가면 영마루가 있는데 이 영마루가 남완류구와 북완류구의 영마루이며 완류구전투 지점이다.
봉오동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하는 19사단의 아즈마소장은 예비대를 이끌고 홍범도연합부대를 찾아 10월 21일 와룡에서 숙영을 하였다. 22일 아침에 홍범도연합부대의 종적을 찾아서 계곡을 따라서 5km 정도에서 골짜기 끝에 도착하였다. 이 때 남양촌에서 숙영하였던 이이노부대도 아침 일찍 강을 건너 북완류구로 올라왔다.
홍범도는 정찰병으로 부터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북완류구와 남완류구의 중간지대인 등마루에 부대를 배치하였다. 홍범도연합부대는 천리봉 기슭 양 영마루에서 남완류구와 북완류구에서 올라오는 일본군에게 반격을 가한 후에 산 고지대로 후퇴하는 것처럼 작전을 써서 아즈마예비대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아즈마예비대는 홍범도의 주력부대가 산의 고지대에서 공격하는 줄 알고 고지대를 점령하였다. 고지대에 오른 예비대는 북완류구에서 올라오는 이이노부대의 사격을 받았다. 이이노부대는 예비대를 홍범도연합부대로 착각하였다. 이이노부대의 공격을 받은 예비대도 이이노부대를 홍범도의 부대인줄로 알고 맹렬히 반격을 가하였다. 홍범도연합부대도 예비대를 향하여 맹렬히 사격을 하였다. 그리하여 아즈마의 예비대는 홍범도 연합부대와 이이노부대의 협공으로 거의 전멸되었다.
홍범도연합부대는 일본군들이 서로 살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서 봉밀구로 철수를 하였다.
완류구전투에서 홍범도연합부대는 7명 이상의 손실을 보았으며 일본군 전사자는 400여명에 이르렀다.
아즈마소장은 홍범도연합부대를 일거에 전멸시키려 하였지만 그는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홍범도연합부대와의 첫 전투에서 완패를 당하였다. 완류구전투의 전사자 대부분이 아즈마지대의 주력부대였으므로 아즈마는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회령에서 급파되어 온 고데다대좌가 거느린 임시산포대(포 4문, 말 82필, 인원 약 150명)을 10월 23일자에 바로 이도구로 공수하여 아즈마지대를 돕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파괴되었던 것이다.²⁷
홍범도연합부대의 전술은 청산리전투 사상 최고의 전투였다. 인원이나 무기로서는 이기기 어려운 전투였다. 그러나 지형지물을 이용한 부대배치와 치고 빠지는 이동, 적군을 혼란에 빠트려 같은 일본군끼리의 전투를 유도하고 적군에게 타격을 가하는 전술로 홍범도연합부대는 재야 독립군부대의 저력을 보여주었으며 아즈마지대의 예봉을 꺽었다.²⁸
❰독립신문❱은 완류구 전투의 일본군 전사자를 400명, 당시 상해에서 출판된 간행물인❰진단❱은 1,200명으로 보도하였다. 이는 완류구전투의 전과가 다른 전투에 비해 크다는 강조이며 완류구전투가 청산리전투에서 최고의 전투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천수동전투
천수동전투 (천수평전투)는 북로군정서군이 천수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기병 1개 소대 40 여명을 습격하여 달아난 4명을 제하고 전멸시킨 전투이다.
백운평전투에서 승전한 북로군정서군은 10월 22일 새벽 2시 30분에 봉밀구의 갑산촌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이른 아침밥을 지어 먹고 그 곳 주민들로부터 천수동에 적군 기병 1개 소대 40여명이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로군정서군은 그들을 치기로 하고 이범석이 지휘하는 여행단 (제1대대, 선두부대, 연성대) 80여 명을 파견하였다. 그들은 새벽 5시경에 천수동 앞 남산에 도착하여 잠자고 있는 일본군을 기습하였으나 누군가의 오발로 그들이 깨여났다. 일본군들 중 4명이 달아났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은 2명이 전사하였고 17명이 가벼운 부상을 당하였다.²⁹
북로군정서군은 노획한 일본군의 문서에서 아즈마지대의 본부가 어랑촌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로군정서군 지휘부는 천수동은 어랑촌 서남쪽 약 7.5km 되는 곳에 위치해 있고 갑산촌은 어랑촌 서남쪽으로 10km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아즈마의 일본군 주력부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좌진은 대부대의 공격을 예상하면서 일부 부대를 서남쪽 3리 남짓이 되는 산고지에 파견하여 일본군의 진로를 막고 주력 부대를 거느리고 천수평 입구에 있는 야계골 양측의 고지를 선점하였다. 한편 천수동에 독립군이 나타났다는 급보를 접한 아즈마지대는 가노기병연대를 파견하여 천수평 입구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어랑촌전투가 시작되었다.³⁰
4) 어랑촌전투
5부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