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모순을 제거하는가? : 도정일 선생님에 대한 반론
도정일, 최재천 두 분 선생님의 「대담」(휴머니스트, 2005)을 즐겁게 읽었습니다. 뛰어난 인문학자와 생물학자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는 흥미진진했습니다. 자신의 영역에 너른 영토를 확보한 대가들이라 자신감을 기반으로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는 듯 보여도 그 속에 칼날이 번득였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나운 전투인 듯 하면서도 타인의 전공에 대한 존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사안에 대해서도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가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는지를 양자를 견주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막상막하이지만, 제가 점수를 매긴다면 도정일 선생님의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도선생님의 단 한 장만을 제외하고는 100% 공감입니다. “유대-기독교는 모순-대립물을 ‘악’이라고 불러요. 그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죠. 실체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결여’라고 불러요. 그것을 없앨 수 있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친 게 유대-기독교 사유입니다.”(31쪽) 이 말의 배경은 십분 이해됩니다. 두터운 세계, 곧 세상에 존재하는 복잡다단한 현상을 말끔히 정돈하려는 욕망, 그러다보니 각각이 갖고 있는 고유함이나 서로 다른 것을 모순이나 대립으로 받아들이고 프로크루스의 침대마냥 우격다짐으로 하나의 틀 속에 집어넣으려는 사유를 비판하고자 함입니다.
저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과연 모순과 대립을 악으로 규정하는가? 모순을 제거할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가?” 전자의 물음은 모순을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포하고, 후자, 곧 대립을 악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나름 그럴법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또한 모순일 텐데, 그렇기에 도정일 선생님의 위의 말씀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선 구약성서로만 놓고 볼 때, 폭 넓은 다양성이 공존합니다. 폴 핸슨은 성서에는 두 개의 갈등 구조가 상존한다고 논구한 바 있습니다.(「성서의 갈등구조」) 형식 대 형식의 개혁입니다. 이것이 모세오경으로부터 묵시문학서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양극성이 어떻게 예수를 준비했고, 예수의 눈으로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생동적이고 책임감 있는 실천과 개방성을 열어주기에 그는 말합니다. “형식과 형식의 개혁은 결코 상호배타적 두 대안이 아니다. 이 양자는 긴장으로 가득찬 하나의 양극성을 이루는데, 바로 그러한 긴장은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은혜에 대해 저마다의 응답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삶의 영역을 규정해 준다.”(37)
폴 핸슨이 성서 안에 갈등 구조가 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은 큰 의의이지만, 아쉬움도 있습니다. 우선 형식과 형식의 개혁보다 형식과 비판, 대안이 더 적절할 듯 보입니다. 그리고 그도 다양성을 언급하지만 양극성에 초점을 두다 보니 그 둘로 축소할 수 없는 다양한 전통과 전승을 약소하게 만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는 왕과 예언자를 중심으로 놓고 기술하지만, 구약에는 제사장 전통과 묵시문학 전통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핸슨의 말마따나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닙니다. 서로 세게 충돌하면서도 성서의 계시 신앙 틀 내에 평화롭게 같이 살고 있습니다. 좌우간에 양극성이든, 다양성이든, 바로 그것이 신앙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성서 전체 흐름만이 아니라 성서 개별 본문에서도 모순과 대립을 흔히 봅니다. 필리스 트리블은 구약에서 도저히 설명 불가능한 네 개의 본문을 선별한 다음, ‘테러의 텍스트’라 명명합니다. 아브라함 부부가 하갈을 추방한 이야기, 이복오빠인 암논에게 강간당한 다말 기사, 무명의 한 첩을 윤간하고 살해한 사사기 사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갚기 위해 자기 딸을 희생 제물로 드린 입다 이야기는 그야 말로 ‘모가 난’ 본문입니다. 성서 전체 이야기에서 이질적이고 돌출한 본문들이 나름의 역할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체계화시킬 수 없으며, 성서가 틀에 박힌 공식과 이데올로기가 아님을 웅변합니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적만 해도, 네 개의 서로 다른 복음서들이 같은 사건과 말씀을 다르게 보도하여서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만, 앞서 말한 바대로 성서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개방되어 있으며, 다양성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전체 모습을 그리는데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 바울 서신과 기타서신들, 그리고 요한문서 등이 함께 어울리며 기독교 신앙이 획일적이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제압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근본주의적인 분들은 성서 안의 다양성을 혼란인 양 두려워하고, 기독교 밖의 분들은 기독교가 가볍고 얄팍하다고 하지만, 성서의 세계는 실로 두터운 세계입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물음을 다룰 차례입니다. 성서 안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왜 기독교는 대립을 꺼리는 듯 보이는가요? 실체로 보지 않고 결여로 본다는 도정일 선생님의 말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악(evil)에 대한 설명이 연상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을 선의 결여 혹은 결핍으로 정의한 바 있는데, 아마 도선생님은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인 이 사람에게서 왜 악을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고 들었는지를 본다면, 도선생님의 발언에 대답도 될뿐더러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가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적극적인 실체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모자란 것으로 봅니다. 어둠은 빛과 대립하는 실재가 아닙니다. 어둠은 독립적인 하나의 실재가 아닙니다. 예컨대, 형광등을 켜보면, 빛으로부터 먼 곳이나 형광등 위는 조금 어둡습니다. 그 어둠은 빛과 대립되는 사실이라기보다는 빛이 조금 부족한 것입니다. 선과 악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악은 선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며, 그저 선이 결핍된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충분히 도정일 선생님과 같은 비판이 성립할 여지가 많습니다.
왜 그가 그렇게 말했는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결여로 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적, 혹은 플라톤적 영향입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이데아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그리스 사유에서는 반대되는 것을 소멸시키는 일은 불가능해요. 늘 공존상태죠.”라고 한 것은 그리스적 사유의 한 일면일 뿐, 전체는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기독교가 대립물을 제거해야 할 악으로 단정하고 그 실체를 결여로 격하시킨 것은 성서 안의 양극성 혹은 다양성과 상반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적 사유의 영향입니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적 배경 외에도 마니교적 영향사가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마니교 추종자였습니다. 기독교의 유일신앙은 악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선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분명 존재한다면, 악의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하나님에게서 온다면 그는 선하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온다면 그는 전능하지도 못하고 세상의 창조주가 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처럼 선한 신과 악신의 영원한 대립과 투쟁으로 선과 악을 설명하는 마니교에 흠뻑 젖어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선과 악을 대립으로 파악하고 공존시키려는 마니교를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그 계기 중 하나는 천문학이었습니다. 우주의 별들이 너무 평화롭고 조화롭게 운행한다는 사실에서 그는 마니교로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 못지않게 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악과 함께 선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선이 궁극적 우위 혹은 승리한다는 사실을 숙고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그의 개인사도 관계있습니다. 진리와 학문에 대한 열정 이상으로 여성과 성적 욕망에 들들 끓는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그는 늘 괴로워했습니다. 저는 「고백록」을 읽으면서 웃다가 울은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 성적인 죄로부터 이기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리 마옵소서! 너무 솔직하고 적나라한 이 고백에서 그가 얼마나 죄와 욕망으로부터 괴로워했는지, 그러면서도 그것을 이기지 못해 더 힘들어 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비단 그의 개인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 속의 죄, 그리고 삶의 고통으로부터 고통당하는지요. 선과 악, 행복과 고통 사이의 대립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최종심급에 있어서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할 수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언제까지나 우리 안의 선과 악의 싸움이 사는 날 내내 지속된다면, 그래서 선의 승리를 장담 못하고, 악이라는 실체가 계속해서 패배는커녕 승승장구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대한 묘사 여부를 떠나서 인간 실존이 감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실체로 보지 않고 결여로 보았고, 선과 악의 대립물에서 악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성 아우구티누스의 논리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론은 악은 결여가 아니라 현실이자 실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극명한 상징인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의 결여가 아니라 선의 부재입니다. 인간이 작당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무참히 도륙했습니다. 그것은 선이 조금 모자란 것이 아니라 선에 대한 악의 반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입니다. 그가 악을 가볍게 본 것의 의도는 선의 승리와 희망을 불어넣으려고 한 것임을 익히 알지만, 악의 현실을 약화시킨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 외에도 그의 입장에 비판을 개진할 것이 많습니다만, 그것은 이 글의 범위와 수준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와 다투기보다는 이해할 때입니다. 도정일 선생님의 오해에 맞서서 해명할 때입니다. 요는, 기독교란 양극성과 다양성이 내장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풍성하게 합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어떤 부분에서 모순을 지우고자 한다면, - 특히 선과 악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 그것은 모순을 불안하게 여기는 데서 온 것이기보다는 선의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에서 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모순을 없앨 수 있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친 것이 기독교적 사유방식이 아닙니다. 모순을 다양성으로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 사유이고, 아무리 암담한 현실 속에 있어도 종말론적 희망을 말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노래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