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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삶을 위한 집이 있습니까? (요 14:1-6)
** 들어가는 말
요한복음 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5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여러분, 좋은 집 가지고 싶지요? 아마도 ‘내 이름으로 등기된 번듯한 집 한 채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별로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가 이런 서민들의 소망을 물거품이 되게 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대한 반감이 많이 있지만 지금 서민들을 가장 자극하는 것이 ‘부동산 정책’이라고 합니다. 서민들에게 ‘안정적으로 주택을 공급하겠다.’고 하던 정부가 부동산정책 실패로 오히려 집값은 폭등했고,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이 그야말로 꿈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여론을 의식했는지 정부와 여당이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반값 아파트’공급 방안을 추진하고 있고, 부동산 특별위원회에서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땀 흘리는 수고의 한 부분에도 ‘내 집 마련의 꿈’이 들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잠깐 동안 살 세상에서의 집에 대한 소망은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강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영원한 삶을 위한 집은 준비하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먼저 세상에서의 평안한 안식처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의 ‘내 집’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하여 “우리가 나온 육신의 고향을 생각했다면 그거야 언제나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겠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 육신의 고향보다 더 나은 고향이 있으니, 곧 하늘나라에 있는 집이라…”(히 11:15-16)고 했습니다.
이제 성탄절을 바로 앞에 둔 대강절 3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대강절을 뜻있게 보내는 세 번째 말씀으로 본문을 중심해서 ‘영원한삶을 위한 집’에 대한 준비를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말기에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인류를 위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제자들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루셔야 할 ‘대속의 죽음’에 대하여 알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야 할 때임을 아시고, 제자들이 알아야 할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실상을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너희들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곧 너희를 떠날 것이고, 준비가 끝나면 너희를 데리어 오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그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가시는 곳을 모르니 가야할 길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하늘을 쳐다보니 파란 하늘과 구름 몇 조각이 떠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뿐이었습니다. 마치 지금의 우리들처럼 아무리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영원한 삶과 영원한 집을 말해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육신의 삶에 젖어 있어서 보이지 않는 영의 일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3절에서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영의 일을 생각할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영원한 삶을 위한 집을 마련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도 우리가 알아야 할 부동산정책이 있는 것일까요?
1. 영원한 삶을 누리는 집은 분명히 있습니다.
본문 2절 하반절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비유가 아닙니다.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육신의 삶에만 매어달리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이 사실을 등한히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를 염려하는 어느 지식인은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정말로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를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직업에서 봉급 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라면, 인간도 오직 육체의 생명뿐인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삶은 있으며, 영원한 삶을 누리는 집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총감독이 되셔서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은 하나님께서 분양하시는데, 주택청약통장도 필요 없고, 우선 분양권도 필요 없습니다. 유일하게 필요한 보증인이 있는데 그 보증인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 사람은 나를 믿는 내 사람입니다.”라는 이 한 마디의 보증입니다. 이 보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땅을 분양받습니다. 이 사실을 본문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시며,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전서 3:11절에서도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분양받은 땅 위에 집을 세우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예수님께서 총감독이 되시고 천사들이 일군이 되어 집을 짓지만, 집을 짓는 재료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집을 지을 재료는 성도 각자가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는 일이 바로 영원한 집을 위한 재료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일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에도 ‘상응하는 대가’가 있는데 그것이 재료가 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9:41절에서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상이 바로 집을 짓는 재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원한 삶을 위한 집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십니까?
2. 영원한 삶을 위한 집은 이렇게 지어집니다.
마태복음 7:24-2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는 분 없지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어지는 영원한 삶을 위한 집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집의 설계도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영원한 집을 위한 설계도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마음과 열정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설계도대로 아름답고 든든한 집을 짓게 하는 재료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3:12절의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는 말씀에서 금, 은, 보석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깨닫기는 했지만 온전하게 순종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나무, 풀, 짚이 재료가 되는 보잘 것 없는 집이 됩니다.
오래 전에 영국의 신문에 이런 글이 실렸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30년간 교회를 성실하게 다니며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는데 기억되는 설교는 없다. 그러니 목사님들은 설교준비 하는데 시간과 힘을 다 쏟을 필요 없이 다른 일에 힘을 쏟으면 좋겠다. 30년간 들어도 기억되는 설교가 없으니 시간만 허비하는 것이요 듣는 것도 헛된 것이다. …”
이는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이 실은 글이었습니다. 이 글이 실린 후 ‘그렇다.’, ‘그렇지 않다.’ 라는 논쟁이 매일 신문에 실렸습니다. 이런 논쟁이 한참이던 어느 날, 자신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힌 한 사람이 실은 글이 있은 후로는 논쟁이 끝이 났습니다. 그 글은 이렇습니다.
“나는 아내랑 결혼해서 30년간 살면서 3만 2천 번의 식사를 했다. 아내가 만들어 주는 식사를 그렇게 많이 했어도 지금 생각하니 무슨 반찬을 먹었는지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지, 그 음식을 먹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수많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말씀이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곧 불신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오셨을 때에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이 비천한 출신임을 아는 터라 능력의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능력도 행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마가복음 6:5절입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여러분이 많이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습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아무런 변화도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실천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고 실천될 때에 비로소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30년이 아니라 평생을 말씀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생활 속에서 실천되지 않았다면 무능한 것이며, 영원한 집을 위한 재료가 되지를 못합니다. 이는 마치 설계도만 가지고 있으면 집이 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삶을 위한 아름다운 집을 원한다면, 말씀을 듣고 깨닫는 대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집은 설계도대로 지어지고 있다고 확신합니까?
3. 영원한 집을 위한 재료를 부지런히 준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29-30절을 봅시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집이나 식구들을 전부 버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관심의 우선권을 영원한 집에 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땀 흘려 수고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일이라고 확신하십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만일 먹고 사는 일에만매달리고 있다면 언제 영원한 집을 준비하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제쳐놓고 자신의 일만을 일삼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학개 1:5,6,9절을 봅시다. “5 그러므로 이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6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 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하나님께서 “너희 소위를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생활만 붙잡고 있으면, 삶에 만족함이 없으며, 행복도 없으며, 구멍 뚫린 단지에 물 붓듯이 남는 것이 없는 삶이 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육신의 삶만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불만족의 생활도 익숙해져 버리게 됩니다. 성도들도 자신의 현재 생활에 묻혀버리면 영원한 집에 대한 생각조차 잊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했지만 어려울 때마다 애굽에서의 노예의 삶을 동경했던 것과 같습니다.
서인도 제도 카리브 해 동쪽 섬인 바베이도스(Barbados)에 양봉을 위하여 벌통을 처음으로 갖다 놓았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에 벌들은 부지런히 새끼를 치고 꿀을 날랐습니다. 그곳은 일년 내내 꽃들이 피어 있기 때문에 꿀을 모으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면서 벌들은 게을러지고 꿀이 점점 적어졌습니다. 벌들이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이 꿀을 모으는 이유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서인데 그곳에는 일년 내내 여름이기 때문에 꿀을 모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이 남아돌자 사람을 쏘는 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영원한 삶을 위하여 아름다운 집을 원한다면 모든 목적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 “그런즉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특별한 일에만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심이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삶을 누릴 하나님나라에서의 집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행복한 성탄의 계절에 집 없는 서러움이 없는 영원한 삶을 위한 집을 깊이 생각하며 준비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