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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소식을 전합니다. 스크랩 양구를 아시나요.
최병옥 추천 0 조회 70 12.07.08 23:3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양구를 아시나요.

 -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 2012년 춘계 문학기행으로 양구에 가다.

 

 

 

* 양구를 찾아서

 

임진년(壬辰年) 6월 9일 아침하늘은 맑았다.

엊저녁에 스쳐갔던, 그런 소나기구름은 하늘에 남아있지 않았다.

동서간 27.0km로 칠십 리, 남북간 35.5km로 팔십 리, 면적이 700km2임에 비하여 1개 읍 4개 면의 인구가 불과

22,285(2011.12.31일 기준)인 강원도 북방 소도시 양구(楊口)일원으로 문학기행을 가기 위하여 집결지인

구로구청 후문으로 향했다. 도착순위가 두 번째로 체면은 지켜냈다. 이미 연배인  제4대 회장을 역임한 함동진

시인이 먼저 와 있었다. 먼 곳의 사람이 더  일찍 온다고 했던가. 수원에서 온 발걸음이다.

 

 

예정출발시간이 일곱 시 반인데 늦어진다.

속설에 따르면 지각대장은 언제나 지각을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천성이어서 어쩔 수 없다고 부아를

삭이며 체념을 한다. 단체로 움직일 때 반드시 고쳐야할 버릇이다. 아니나다르랴. 일생을 꼬장꼬장하게 교단을

지켜왔던 이준섭 감사는 그만 출발해 버립시다. 그리 야박스레 독촉한다. 과연 감사답다.

단체로 허비하는 시간에 대한 경제성을 따져본다. 대기하는 사람 수에 기다리는 시간을 곱한다.

좋이 1시간 반을 떡 사먹었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가쁜숨을 고르든말든 출발이다.

구로문인협회 회원과 이웃 글벗들을 합하여 42명으로 성원이었고, 작금의 여성파워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듯

여성회원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전인수격으로 계산해서 이쯤되면 분위기가 괜찮을 것같다. 특히 역대

구로문인협회 회장들이 모두가 참여하여, 창립 이후 오랜만에 그 상징성과 의미를 따져보아도 구로문학사에

오래도록 새겨야할 문학기행으로 기록하게 될 성싶다. 오랫동안 명치끝에 걸려있던 쳇기가 송곳으로 내리

뚫은 듯 시원하도록 뻥 뚫리는 느낌이다.

 

이것도 오비이락(烏飛李落)의 한 괘인가. 공교롭게도 6월은 보훈의 달, 과거 전쟁터였던 양구로 가고 있는

것이다. 가득이나 종북(從北)에 대한 사상논쟁 때문에 사회가 들썩이고 있는 때, 6.25전쟁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아직도 삼팔선 비무장지대에 맞물려있는 양구를 문학기행지의 대상으로 선정했다는데, 만감이

교체하여 유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국토의 '배꼽'에 위치한 양구는, 고구려 때는 '요은홀차(要隱忽次)'로 이름 하였고, 신라 제35대 경덕왕

16(757)에는 '양록군(楊麓郡)', 고려 때는 '양구현(楊溝縣)'로 불러 춘주(春州 :지금 춘천)에 예속되었다가

26대 고종32(1895)에 다시 '양구(楊口)로 개칭한, 그 양구를 찾아가는 것이다.

이번 문학기행은 제5대 회장인 정유준 시인의 빈틈없는 기획으로 이루어져 정말 백성으로서 군관(軍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민등록증을 알뜰히 챙겨온 열의가 무색할 정도로. 해서 회원들을 대표하여 감사함을

전한다.

 

또 양구의 호칭에 대하여 어떤 호사가(好事家)들은 조선 선조 25(1592), 새로 부임한 감사가 금강산에 이르는

첫 고을인 이곳을 지나다가 함춘(含春) 땅의 아름드리 수양수림(垂楊樹林)을 보고, 이 고을을 '양구(楊口)'

명명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리 불렀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암튼 출발하기 전 한 장 박았다. 자격은 인격(? 아랫배가) 이 웬만큼 나와있어야 했다.  함동진 시인 제공>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떠난다는 건, 남녀노소 모두가 신이 나서 즐거워하는 일이다.

문학기행이란 더욱 그렇다. 옆자리의 동행자가 조금 생소한 글벗이라도 좋다. 미지의 세계로 여행하면서

낮선 풍물을 눈으로 익히듯 서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 상대와 소통하기도 하며, 또 자신이 끝내

감당해야할 문학의 영역을 넓히고, 낮선 곳의 경물(景物)의 깊이를 이해하는 게 문학기행의 참 뜻이

아니겠는가.

 

 

 

 

양구군청 문화관광 해설사 이병득 씨

 

 

양구군청 문화관광해설사 이병득 씨. 만나는 순간부터 오늘 첫 손님을 잘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격하게 얘기해서 가이드가 필요한 여행지에서의 관광의 질(質)은 어떤 유능한 해설자를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로 판가름난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작은 키를 커버할 만큼

돌처럼 야무져보이고 재담의 능력까지 갖춘 그를 만나서 우리들은 하루 종일 모두즐거워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막힘없이 시원시원한 언사에다 유모어 감각까지 익힌 양반이어서 흡사 마을의 상노인네를

만난 기분이다.

 

 

 

 

* 도서 전달식

 

 

 

  양구명품관 앞에서 회원들이 모은 도서를 전달했다.

 

구로문인협회 발행 구로문학 제14호, 제15호 각 20권, 각 회원들이 모은 저작물과 일반 도서 등

100여권을 양구군수를 대리한 경제관광과 전창진 과장에게 전달했다. 때마침 양구군에서 관할

읍면에다 도서실을 마련하고 도서들을 수집하는 시기였다.

향후에도 도서를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쉬웠던 것은 미리 도서목록을 작성하였다가 건네

주지 못한 일이다. 다음부터 누가 회장자격으로 도서를 전달하든 필히 챙겨야할 사항이다.

 

한편 양구군에서 우리들의 문화탐방을 보도자료를 냈는데, 이를 신아일보, 뉴시스, 화천인터넷

뉴스, 등에서 보도로 다뤘다. 기사는 다음과 같다.

 

- 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회장 김익하) 회원 50여 명은 9일 강원 양구군 일원으로 문화탐방을 

  실시했다. 이날 회원들은 박수근미술관, 선사박물관, 향토사료관, 두타연 등을 견학하고, 

  문화해설사의 자세한 안내와 설명을 듣는 등 뜻있는 시간을 보냈다. 

  문화탐방을 마친 회원들은 보답의 의미로 십시일반 회비를 모아 마련한 도서 100여 권을 기증

  했다. 김익하 회장은 "앞으로도 회원간 결속과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기 위해 도서기증을 꾸준히

  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우리들은 돌아오는 길에 다시 양구특산물을 구입하려고 양구명품관에 들렸다. 주로 말린 취나물,

곰취나물, 산마늘(명이나물) 장아찌, 민들레 차 등속이다.

 

 

 

 

* 박수근 미술관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강원도 출신의 화가들 가운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양구 출신의 이수근 화백과

이웃 춘천 출신의 이상원 화백이다.  둘의 화풍은 판연히 다르지만, 공통점은 두 분 모두 가난 때문에

그림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타고난 천재적인 재주로 나름의 화풍을 이뤘다는

점이다.

그 입지적인 공통점에 나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제자의 논문까지 도용해서 명예를 얻으려는

이 탁한 지식인 사회에서 말이다.

 

 

이상원 화백의 '바라나시 사람들'

 

이수근 화백보다 21년 뒤에 태어난 이상원 화백은 인도 갠지스강 바라나시(Barbnasi) 사람들의 핏빛

서린 강렬한 눈빛을 극사실기법(極瀉實技法)으로 그려내 인간의 영혼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은

화가인데,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간판을 그린 간판장이 출신이다.

 

 

 박수근 미술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다. 모두 선남선녀들이 분명하다.   <민문자 시인 제공>

이런 나들이가 일 년에 서너 번은 , 돈과 시간이 웬수다.

 

 

 

 

미술관 외양의 모양새가 박수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무수히 덧칠하여 마치 화강암표면을 연상시키는

그의 화풍을 상징하듯 했다. 그의 덧칠 기법은 가난 때문에 자료를 아끼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가장 비싼 작품을 남긴 박수근 화백, 그는 미술관 안뜰에 (예전의 살았던 집뜰쯤 되는 자리)에  두 팔로 무릎을

껴안고 눈부신 유월의 햇볕을 쬐면서 우리들을 맞고 있었다. 금시 일어나 성큼 다가들면 손을 내밀 것만 같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 화백은 1914년 2월 21일 양구읍 정림리에서 태어나 1965년 5월 6일 새벽 1시에 간경화와 응혈증 심화로

51세 일기를 마감하고 이승에서 하직했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라 전해진다.  

 

 

 

 

 

박수근 미술박물관 큐레이터(Curator)인  임경미 씨다.

그날 그녀는 바쁜 하루였을 게다. 우리 일행들 보다 먼저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박수근의 생애와

미술품에 대하여 설명을 끝내기 무섭게 대기해 있던 우리들이 들이닥쳤으니, 바쁠 수밖에. 

그러나 우리 일행 반만이 그녀의 설명에 귀를 귀울였을 뿐 많은 회원들이 오직 사진찍기에 넋을 놓았으니,

그런 광경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내가 무안하기만 했다. 문인들이 이럴진대, 시골 계모임으로 온

사람들은 오죽하랴. 대그러나 큐레이터에게는 모두 똑같은 관람자일 뿐이다.

 

 

큐레이터에게 신명나는 일은 관람객들의 끊임없는 질문이고, 그런 질문들을 기다린 듯 준비해둔 지식

으로 원없이 풀어내야 직업에 보람을 느낄 텐데, 그런 액션이 없어 얼마나 서운했을까.

 

 

 

 

'비둘기'란 작품인데, 마치 색맹(色盲)을 첵크할 때 사용하던 '색신표'의 한 페이지를 연상시키듯 보인다.

비둘기 두 마리의 선들이 덧칠한 물감 때문에 더욱 내면으로 숨겨져 있다. 표면은 그 특유의 화강암의 표면을

연상시키듯 거칠게 보이기까지 했다. 자 비둘기가 놀라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비둘기의 윤곽선을

찾아봅시다.

 

 

박수근 화백의 판화인 호랑이인데, 면상이 호랑이답지 않고 유순한 고양이

가 쥐를 놓친 표정이다.

 

 

전시된 소의 그림 넉 장 중 그 하나다. 역시 판화다. 흑백으로 이뤄낸 밸런스가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국미술품경매 사상, 최고가인 45억 2,000만원을 기록한 '빨래터 여인들'

고가(高價)인만큼 끊임없이 위작(僞作)의 진위시비에 휘말리고 있는 작품인데, 1950년에

그려진 것이다.

 

 

 '굴비(屈非 : 굴하지 않겠다)'  하드보드에 유채. 크기는 15.5 x 29. 

갤러리현대 박명자 회장의 기증으로 진품이 전시되어 있다. 요즘 회삿일로 자주 가는 추자도의

본바닥 식당에서 먹었던 굴비구이 맛이 새삼 혀끝에서 혓바늘처럼 돋아난다.

 

 

 

 

그의 화풍을 전수한 박용철 화백은 양구의 화천에서 연마된 돌멩이를 수집하여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이채롭게 우리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문화해설사 이병득 씨는 우리들에게 돌멩일 주면 시를 적어놓지

않겠느냐고,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를 던졌다. 역시 그는 재담가(才談家)의 기질을 타고 났다.

하기야 인간은 옛부터 돌에다 그림을 그려 벽화(壁畵)란 걸 남겼으니 현대에 와서 돌멩이에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리 새삼스러운 것도 아닐 게다.

 

 

 

 

이것 역시 재미있는 그림인데, 타고온 자전거에서 내려 그것을 끌고 징검다리를 건너가려다가

물에 빠지자, 화구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장면을 그렸다. 차근히 들어다보노라면 누가 옆구리를

찌르지 않더라도 웃음이 솟구치는 위트가 배어나는 그림이다. 화가의 천진난만한 시선이 그림

속에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어서 흥미롭다. 

 

 

 

손아귀에 들어찰 만큼 작은 돌멩이인데, 여러 돌멩이들 가운데 가장 무거워 보였던 돌멩이다.

어머니 등에 업힌 아이에게 끊임없이 풀어내야할 모성애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성장할수록 영글어갈 꿈의 무게도 그 무거움에 또 얹혀져 돌멩이의 무게를 불리지 않겠는가. 

 

 

* 파로호(破虜湖)를 지나며

 

 

 

 

파로호(破虜湖)의 수면이 버스에 앉은 나의 눈높이로 다가든다.

1938년, 일본군이 화천수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전쟁물자의 수송이 용이하도록 야심차게 만든

38.9km2 댐을 고장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는 화천호(華川湖)라 명명했다.

 

그런 화천호가 19516,25전쟁 때, 학도의용군,한국군 6사단, 해병1연대가 중공군과 인민군을

상대로 승리한 기념으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이름을 바꾼 호수다, 파로(破虜),

인민군을 격파한 곳이라는 뜻이다. 문화해설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라 하지만, 내가 판단할

그건 과문이 아닐까라는 물음이 잇달았다.

우리나라는 이미 삼한시대에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守山提), 제천 의림지(義林池)

농업용 저수댐으로 축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선사박물관에서

 

 

 

 

1997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워진 선사박물관이다.

양구지역에서 발굴된 신·구석기, 청동시대 유물 650점이 전시되어 있다. 춘천으로 중심하여 이곳은 맥국(貊國)의

천년의 옛 서울 주변이었으리라. 우리들은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맥국의 손길과 지금 조우하고

있는 셈이다.

 

 

 

 

 

흔히 선사유물 박물관에서 눈에 쉽게 뜨이는 선돌(위)와 고인돌(아래)이다. 선돌에다 사람의 얼굴을 파놓아

의인화(擬人化)했다. 예로부터 선돌은 흔히 마을어귀에다 세워두는 마을의 수호신이었고, 고인돌은 들짐승들

로부터 시신의 훼손을 막기 위해 고안된 무덤이다. 고인돌은 받침석을 흙을 덮어 작은 흙동산을 만든 다음

지붕돌을 밀어올린 뒤 받침석 주변의 흙을 파내어 지붕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는 게 정설이다.

 

 

 

 

 

 

 

장식대 안에 정렬되어 있기에 그것들이 돌도끼고, 돌칼이며, 돌확으로서 유물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

다른 시선으로 살펴보면 영락없이 개천바닥에 아무렇게나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에 불과해 보이는 게,

나만의 시선일까. 또한 너무 많아서 '흔하다'는 느낌 때문일까. 아니면 옛것에 대한 소양부족일까.

아무리 살펴보아도 내 눈에는 한낱 돌멩일 뿐이다.

신·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쟁기를 구하려 성남모란시장과 같은 5일장으로 가는 게 아니라 홍수로

물길이 뒤척여 놓은 강변으로 득달같이 달려갔을 게다. 더 뽀족하고 더 날카로운 쟁기를 획득하기

위해서 옆집 사내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 한 발 더 먼저.

 

 

 

 

 

아랫위의 토기들의 모양새를 보면 그것들을 빚어낸 예술감각은 보통이 아니다. 항아리 겉으로 흐르는 선이

너무 고혹적이어서 오래도록 시선을 주었다. 발굴된 토기로 세련된 모양새를 보아 집단이 거주했던 곳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겠다.

 

 

 

 

 

* 산채비빔밥집에서

 

 

                                                                                                       <조한순 수필가 제공>

흔히 심산 절간 마당귀에 으례 피어나던 불도화. 그렇게 꽃잎이 쏟아내릴 듯 흐드러지게 핀 불도화나무 아래서 

회원들과 글벗들이 포즈를 취했다. 맛있게 먹은 산채비빔밥 탓인지 모두 웃음 띈 얼굴들이다.

 

 

예닐곱 가지 산채에다 참기름을 듬뿍 넣고 비벼먹는 산채비빔밥이 혀끝 미각을 넉넉히 적시는 산막의 식당.

문화해설사는 한 그릇의 단가가 6,000원이라 했지만, 벽의 메뉴판에는 8,000원으로 적혀있었다. 식사 제공은 

양구구청에서 했으나, 작은 농촌도시 어려운 재정을 축냈다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했다. 공장도 없는 농촌도시,

농지세마저 면제되어 세수가 보잘껏 없다고 문화해설사가 귀띔을 했기에 더욱 무안했다.

본인의 옆, 사무국장 뒤에 서 계시는 분이 양구군청 경제관광과장 전창진 씨다. 그의 배려로 45명이 맛있는

산채비빔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변변한 인사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그곳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식당 앞 채마밭에 심어놓은 취나물들이 가뭄에 잎들이 늘어져 있다. 천심이 무심하다.

 

  

양구라 버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통제로를 따라 가노라면 많이 눈에 띄는 것이 고

로쇠나무, 느릅나무, 함박꽃, 산사나무, 벚꽃나무들이다. 그러나 가뭄은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평지

그늘 속에서 꽃을 피워내던 함박꽃나무도, 금낭화도, 산채비빔밥을 먹었던 식당의 채마밭에 심어진

취나물도 활기를 잃은 채 몸을 틀거나 고개를 숙였다.

숲 속 길도 흙바닥에는 마른 흙먼지가 풀풀 일만큼 가뭄이 길었다. 우거진 임야(林野) 73.9%인 이곳도

이렇게 가뭄의 그늘이 깊으니 맞닿아있는 북쪽, 더우기 산야가 헐벗은 북녘 땅의 가뭄은 눈으로 바로보지

않아도, 그 참담함을 예견할 수 있겠다.

가뭄 때 흔히 그러 듯 오늘도 내일도 소나기 온다는 일기예보만 무성할 뿐이다. 정작 일기예보

기상케스터가 원망을 들을 정도로 가뭄도 도를 넘고 있다.

 

 

 

* 두타연(頭陀淵) 계곡에서

                                     

 

 

조형의 의미는 물결 위로 뛰어오르는 열목어를 상징한 듯. 관광객 부부가 가는 방향이 두타연의 입구다.

 

 

 

                                                                                                       <이병득 수필가 촬영>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이라 했던가. 주름져 흉칙하게 보이기전에 열심히 크게 찍어 자손대대로 물려주자!!

아버지, 어머니, 더나아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5.60대의 폼들을.

그런데 어떤 모임에든 잘 생겼으면서 사진찍기를 마다하는 부류가 있기 마련인데, 찍힌 사람을 아무리

세도 머릿수가 맞질 않는다. 그래도 이 사진은 경치 탓인지 많이 찍혔다. 그런데 한 사람만 빠지고 다

찍혔다. 촬영한 사람만 빠졌나? 누구지.

 

 

 

투구를 쓴 로마병정을 연상시킨다. 두타연 입구 맞은 편 산봉우리에 얼굴을 드러낸 바위다. 장군바위라

했던가. 도도한 품새다. 칼과 방패를 들고 금방 하산할 듯 기백이 넘친다.

 

 

 

 

 

2004년에서야 일반인에게 처음 얼굴을 드러냈던 두타연(頭陀淵) 폭포는 가뭄으로 인한 빈약한 수량으로

간신히 이름값을 했는데, 스무 길 깊이의 소()는 푸르고 맑은 하늘빛을 담아내려 깊은 속내에다 옥빛을

담고 있었다. 풍덩 빠지면 아마도 가슴이 멍 대신 물빛으로 퍼렇게 물들겠지.

 

 

이름하여 두타연폭포다. 강원도 심산유곡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나의 눈에는 그저 좁은 바위 사이의 낮고 빈약한

물흐름일 따름이다. 두타(頭陀)란 불어(佛語)가 무색하리만치, 물이라도 시주할 만큼  빈약한 모습이다.

 

 

계곡의 상류다. 물길을 따라오르면 금강산 골짜기에 닿는다고 했다.

 

 

탐방로를 따라나서면 출렁 마음을 흔드는 다리가 있는가하면, 은근히 탁족(濯足)하고파 무심(無心)을 훔치는

징검다리도 있다.

물길이 감돌아 내리는 돌다리에 허리를 내려 물길에 손을 집어넣으면 손샅으로 새어 달아나는 물이 예견했던

차가움은 온간 곳 없고 프로판가스 부족으로 끓다만 주전자 물처럼 미적지근하다. 금강산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치곤 청랭함이 없어 마음속으로 들어찼던 기대감이 재처럼 사그러든다.

그래 그리 멀리서 군사분계선을 타넘어 가뭄의 계곡으로 내려쬐는 오뉴월의 볕을 안고 내렸으니 미지근만

하겠는가.

허공으로 휘발(揮發)하지 않고, 바위 밑으로 잦아들지 않고 예까지 온 생명의 그 끈기가 일흔을 이마에 둔

채 2시간 거리를 숨가삐 달려온 나그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두타연 상류에서 바라본 두타연 정자

 

 

계곡의 하류다. 이 물이 흘러 흘러 한강을 타고 서해까지 간댔지.

 

 

징검다리 부근, 제법 물소리를 내며 타내리는 물길이 세속에 절어진 고막의 때를 씻어내린다.

 

 

유월 숲의 푸름에 취한 과객의 마음은 벌써 수심보다 더 깊이 바닥으로 내려앉아 물길을 재고 있다.

빨리 아래로 흘러가려는 물이 있는가하면, 소에 머물러 깊이를 더하려는 물도 있어 인간사의 머묾과

떠남을 일러듣기 듯하다.

 

 

물빛과 초목빛, 어느 것이 더 푸름이 깊은가.

 

물속에서 움직이는 갈색 것이 열목어(熱目魚)라 했다. 그 붉은 눈빛은 눈병 때문만도 아닐 텐데, 오직

충혈 된 눈빛으로 이름을 얻었으니 1급수 청정지역의 사는 생명의 품격치곤 그저 이름이 가혹할 따름이다.

 

 

* 전몰장병 위령비 앞에서

 

 

 

유만상 2대 회장과 위령탑 앞에서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인다.

내 나이 일곱 살 때,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간 용사들. 혼은 아직 구천에 떠돌지 몰라도 그 죽음은 말이 없었다.

간간히 불어가는 바람이 그들의 숨결인양 건너 산의 갈잎을 뒤척이는데, 탑은 침묵 속에 흔적만 안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의 기억 속에서 그저 퇴락해 갈 것이다. 한 겹 한 겹 산화하여 부

서지는 녹 쓴 철모나 탄피(彈皮)처럼.

 

양구는 6.25전쟁 당시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진행 중인데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하여 피비린내가

진동하도록 전투를 하였던 격전지다. 양구 북쪽에 위치한 대암산, 대우산, 백석산, 김일성고지, 스탈린고지,

가칠봉 등지에서 2,280명의 사상자를 낸 피의 능선전투(Bloody Ridge Line)', 23.197명의 전사자를 낸

'단장(斷腸)의 능선전투(Heart Break Ridge), 백석산지구 전투, 도솔산지구, 가칠봉전투 등 모두 한국전사

(韓國戰史)이름을 남긴 전투였다.

 

특히 피아간 2,451명이 죽고 아군 647명이 부상당한 도솔산 전투, 그리고 무적해병(無敵海兵)’ 칭호를 얻은

그 전투의 전적문화제(戰勣文化祭)는 매년 양구군에서 개최되는데, 15회를 맞아 금년 616일에서 17일까지

열린다.

 

 

전쟁이 남긴 것들

 

 

 

 

 

 

 

 

 

6.25전쟁 시, 포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도록 쏟아낸 포탄과 전투기에서 쏟아부은 폭탄으로 산 정상은

돌부리가 드러날 만큼 벌거벗겨졌다. 그 전쟁이 끝나 60년동안 흐른 세월은 그 상채기를 아물리려는 듯

식물의 씨앗을 심고 그것을 길렀다. 그렇게 길러진 초목들이 이제 상처난 겉모습을 감출 만큼  숲은

도륙(屠戮)을 해도 모를 정도로 우거져 무섭도록 울창해졌다.

그러나 숲속을 들어다보면 그 속살에 박혀진 것들은 세월을 건너 뛰어 이렇게 드러나 아품을 되새겨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목줄기에 걸려 음식을 삼킬 때마다 뜨끔거리는 생선가시처럼 계례의 가슴에

박혀있는 가시인 것이다. 

 

 

 

 

 

 

* 비목(碑木) 공원에서

 

 

 

                                                                                 참전용사 기념탑

 

 

 

 

 

현지 공원의 경물(景物)들 보다 노랫말로 세상에 더 알려진 비목공원이다. 평화의 댐 광장에서 내려가는

계단길이 가파르기만 하다. 지금은 세계 젊은이들이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산화한

비목탑의 배경으로 1995년에 조성되었다.

 

본디는 1960년대 중반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12km 떨어진 해발 1,179m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명희란 청년장교가 잡초 우거진 곳에서 6.25 전쟁 때 전사한 무명용사의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하고 

지은 노랫말이었다. 그 후 장일남이 곡을 붙여 '비목'이라는 가곡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 평화의 댐에서

 

                                                                                      <이병둑 씨 촬영>

 

이 평화의 댐은 다른 댐과 두 가지가 다르다. 첫번째로 전력산업이나, 농수와 홍수조절 기능을 갖춘

다목적댐이 아니라 오직 북한 금강산댐의 수공(水攻)의 대응으로 축조한 댐이란 것이고, 대부분

댐의 이름이 강의 이름을 갖거나 해당도시 이름을 갖는데 비하여 일반 명사인 평화댐이라는 이름이

붙인 게 두번째로 다르다.

 

오직 안보만을 염두에 두고 쌓은 평화의 댐, 지금은 물길이 흘러들어오는 북쪽이든, 물길을 흘러

보낼 남쪽이든 가뭄으로 강바닥이 말라 댐은 염치도 없이 물속에 감추어 두어야할 아랫도리를

육중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높이만큼 이름값을 못하는 댐이 그저 민망하기만 하다.

 

소재지는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산 321번지다.

 

 

 

 

댐하류쪽에서 바라본 평화의 댐이다. 댐의 1차 공사는 중간까지로 80M이고, 북쪽 금강산댐 공사의 부실함이

드러나자 2차로 45M를 더 쌓아올려 높이 125M, 길이 601M로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댐이 되었다.  

최대저수량은 26억 3,000만톤으로 소양강댐, 충주댐에 이어 3번째 크기다. ]

 

역사는 아이러니 연속이다.

이 댐의 1단계 공사는 전두환 군사정권 때 시작했는데, 그때 당시 야당이었던 김대중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코흘리개의 돈까지 끌어모아 과장공사를 한다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문민정부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기인 2002년에 금강산댐(임남댐)의 공사 부실의 이유로 2차로 45m가 더 쌓아졌다는 것이다.

정치 속성상 여야(與野)의 시선은 언제나 정시(正視)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정쟁(政爭)에 골몰하여 진전되어야할 역사의 흐름을 멈추게 한다. 

 

 

물박물관 주변의 조형물이다. 튀는 물방울 상징물이 이채롭다.

 

 

 

 

 

 

 

 

세계사를 더듬어보면 어느 시대, 어디에서든 분쟁은 늘 상존해 왔다.

그런데 이곳의 종은 '세계평화의 종'이라 이름하였다. 한 발짝  더 내디뎌서 '종을 주조할 때, 1만관 중

한 관만을 남겨두었다가 남북통일이 되는 날, 남겨진 한 관을 추가하여 세계의 평화의 종으로 거듭 나게

하겠다고 해설을 달았다. 과연 남북이 통일되면 세계의 여러 곳에 상존하는 분쟁은 끝나겠는가.  

과연 인간사회에서 전쟁이 없는 평화가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요원한 이상으로 치부하면서 난제 중의

난제로 여겨왔으니깐.

 

88올림픽을 1년 앞둔 1987년, 북한이 금강산댐의 수공(水攻)으로 수도 서울의 1/3 이 침수되고, 금강댐의

최대저수량인 200억톤의 물이 방류될 때 한강하류의 수위가 50m 이상 높아져 수도권이 황폐화될 것이라는

시뮬레이션을 공중파방송으로 했는데,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그게 선명하게 내 눈앞에 나타난다.

 

 

임진각에 가면 역사애 기록된 전쟁터 120 곳의 돌멩이들을 모아 전시했는데, 이 종의 자료로는 30여 곳의

분쟁지역에서 모은 탄피들로 주조하였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북측의 금강산댐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물길이고, 아래 사진은 댐의 하류로 한강으로 흘러가야할

물길이다. 남북의 대화가 막혀 있듯 역사를 쌓으면서 유유히 흘러가야할 강은 두 토막이 난 채, 가뭄에 갈라진 

갯펄처럼 단절되어 있다. 막힌 물길은 언제인가 트인다는 속설도 평화의 댐위에 서서 양측을 바라보면 그저

요원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귀경길은 수월했다.

일부는 신도림역에서 하차를 했지만 구로구청 앞에서 내린 몇몇은 저녁을 같이 하고 헤여졌다.

정말 좋은 곳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마음으로 돌아왔다. 정말 무탈하게 마무리까지

잘된 문학기행이었다. 행사를 주관한 입장에서는 그 행사의 마무리 단계에서 또 다음 행사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 마련인데, 일행과 헤어져 귀가를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내처했다.

 

집으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서 본다. '청춘 양구에 오시면 10년이 젊어집니다.' 양구 입구 프래카드에서 그런

글을 읽은 터, 행여하는 심정으로 아내에게 물어본다. ‘내 얼굴이 어때?’ 10년 젊어졌네요. 그렇게 돌아와야할

마땅한 대답이 오뉴월 볕에 조금 탔네요.’ .

넨장맞을, 양구에서 더 있다가 올 걸 그랬나. 중국 진한(秦漢)의 삼천갑자(三千甲子) 동방삭(東方朔)처럼 

아예 과욕을 부려 유아가 될 때까지 양구에 살다가 올 걸 그랬나.

 

양구 문학기행에 동행한 회원들과 이웃 글벗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함을 전한다.<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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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8.07 18:05

    첫댓글 문학기행 잘 읽었습니다. 문인들이라 글을 잘 쓰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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