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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4:1-7(화해의 메신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랍비에게 지혜를 가르쳐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그를 제자로 삼을 만한지 테스트를 했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두 사람이 굴뚝을 청소하고 왔는데 한사람은 얼굴이 시커멓고 다른 한 사람은 깨끗했습니다
그러면 둘 중 누가 먼저 얼굴을 씻으러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얼굴이 더러운 사람이 먼저 씻으러 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탈락이었습니다.
얼굴이 더러운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더럽지 않으므로 자기도 더럽지 않은 줄 알고 씻지 않지만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이 더러운 것을 보고 자기 얼굴이 더러운 줄 알고 가서 씻는다는 것입니다. 그후 그는 공부를 많이해서 다시 랍비에게 test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똑같은 문제를 냈습니다. 그는 자신있게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씻으러 갈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이번에도 제자로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더러운 사람은 열심히 일한 사람이므로 먼저 가서 씻고, 얼굴이 깨끗한 사람은 별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판단의 잣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도 그의 마음에 들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기준에 맞지 않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 잣대를 가지고 모든 사물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별로 충격받지 않는것도 그리스도인은 엄청나게 충격받는 것입니다. 그가 왜 그런짓을 했는지 동기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한다면 그 기준에 합격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판단 기준 때문에 실망하고 스스로 많은 상처를 입고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용납하라 하시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계명이라고 하셨지만 실제로 믿는 사람들 안에서는 이런 용납이나 실수에 대한 관용보다 실망하고 상처입고 결국 쪼개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사이가 좋지않은 두 부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부녀는 믿음도 좋고 대단히 적극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회 구성원들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편 저편으로 나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두 사람이 불화한다고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또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이 동역자라고 말할 수 있는 자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두 부녀를 화해시키고 다른 동역자를 도우라는 특명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은 政治性이 있어서 강력한 둘이 대립하면 그들을 중심으로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중립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그럴 때 중심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게와 순두게가 누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빌립보 교회에서 두 여인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둘의 불화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實名을 사용하며 직접적으로 화해하라고 권면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공개적이면서 징계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의 반목은 오래되었고 그동안 얼마든지 화해해서 하나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자존심이나 고집 때문에 하나되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두 사람이 화해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지속적으로 반목한다면 그들을 치리할 계획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 전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반목하고 패를 갈라 싸우는 두 사람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은 마음이 심하게 상했고 교회에 아름답지 못한 모습 때문에 실족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고래싸움에 세우등 터지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조금도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자신의 신앙을 잘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주안에 서라’는 것은 사람이 하는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고 중심을 잘 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신임하는 한 자매에게 특별히 이 문제를 부탁합니다.
3절에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라고 말하는 신실한 자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자매에게 분명이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었고 함께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화하는 이 두 사람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하나님의 생명 책에 기록될 정도의 두 사람이 이토록 심하게 다투고 오랫동안 불화했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상대방에게 너무많은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같은 신앙을 가진 자를 너무나도 귀하게 생각해서 마치 자신에게 그가 전부인 것처럼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를 자기 스타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좋아했던 것 만큼 실망하고 미워합니다
천사로 생각해 온 사람이 천사가 아니고 화장실가고 밥 먹는 사람으로 밝혀질 경우 얼마나 실망이 큰지 모릅니다. 자기 스타일로 사랑하는 것은 주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罪입니다 내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내 방식으로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좋아했다가 자기 마음대로 미워하는 것은 바른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너무 많이 기대하는 것도 죄입니다. 어떤 분이 가난한 목회자를 너무나도 좋아했습니다. 그 분은 목회자는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순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가난한 목회자가 좀 커져서 교회도 커지고 이름이 알려지면 이렇게 판단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던 목회자 像이 아니라는 겁니다. 교회는 작아야 하는데 자꾸 커지는 것이 목회자가 변질되면서 교회도 변질되는 증거라고 미워하고 실망합니다.
그런 사람은 빨리 실망 시킬수록 좋은 것입니다. 자기 방식으로 자기 편견을 가지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욕심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두 부녀가 다튼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의 영적상태와 관계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확한 상태를 알지 못한채 단지 내 상태에 따라서 좋게보기도 하고 나쁘게 보기도 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평소에는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던 것들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즉 다름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그의 상태가 아니라 내 상태 때문에 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밉고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다면 그 보다는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데 누가 내 마음에 들겠습니까?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미워지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 안에 성령이 고갈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은혜를 회복 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될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놓고 기도해야지 여러분이 진정 변할 것입니다. 내 행복, 내 가정, 내 욕심만을 놓고 새벽기도 365일을 쌓아도 하나도 안 변합니다. 내 상태가 좋지 못한 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헤아리기 시작하면 정말 성령이 소멸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은혜가 떠나면 그는 거의 정신병자처럼 불안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닙니다.
기뻐하지 않으실 일인줄 알면서 계속 붙들고 있으면 우울증걸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중에는 우울증 환자들이 많다고 합니다. 우울증은 정신병의 시초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걸리지 말아야 할 병 중에 이 정신병은 걸리면 안 된다고 믿습니다.
왜 이 병에 걸립니까? 대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을 오랫동안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울증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없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무기력합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에 대해 하나님의 입장에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잘 잘못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심판하듯 결정적으로 말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 판결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각각의 사안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의 기준은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으로 그의 인격 전체를 판단하는 것은 죄입니다.
만일 여러분께서 오늘 이 말씀을 듣고서도 또다시 절대적인 잣대로 상대의 실수을 허물을 판단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영광과 기쁨과 능력을 누리기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형사처럼 파고 조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신분은 아들이지만 그의 상태는 노예인 것입니다.
그의 신앙에는 풍성함이라곤 없습니다. 잠을 못 자기도 합니다.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자기 혼자 잠도 못자고 밤새 남을 미워하며 새벽 기도도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안에서 기뻐하는가 기뻐하지 않는가가 신앙의 영적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이 없을때 그래도 되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말고 적극적으로 원인을 찾아서 기쁨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죄를 지어서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 고백함으로써 기쁨을 되찾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내 안에 기쁨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 때문에 내 기쁨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잘 잘못이 아닙니다. 내 안에 기쁨이 있느냐, 분노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남의 잘못을 밝히기 위해 내 안에 기쁨을 잃는 것은 마치 쥐 한 마리를 잡으려다 장독을 깨는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5절 다같이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서하지 못할까요?
자기 안에 있는 상처가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려면 기꺼이 다른 사람의 발 밑에 들어가 그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처가 있는 사람은 또 상처를 받을까봐 남의 발 밑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상처를 많이 받아서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한계는 바로 그 상처입니다. 그는 결코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넘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입니다.
바울은 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할까요? 주님이 곧 재림하실텐데 그런 사소한 감정문제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 삶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같습니다. 한 두가지 문제가 있다고 연주를 그만둘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나의 연주를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사소한 감정문제 때문에 시간을 다 허비한 사람은 너무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헛 사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에 목숨 걸고 헌신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부탁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정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보다 인간의 심리를 중요하게 다루는 종교나 사상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죄로인해 타락해서 마치 시궁창처럼 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궁창을 작대기로 저어 보십시오 아마 온갖 것들이 위로 떠 오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시궁창을 분석해서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아무리 연구해도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로 타락해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복잡한 이유는 죄 때문에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 복잡한 마음을 지배하고 다스려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우리는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작은 일이라도 닥치면 전적으로 거기 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감당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염려가 생기면 주님께 말슴드리고 맡기라고 하십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며 염려와 근심에 빠집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최악의 경우보다 나으면 그것으로 스스로 자신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최억의 경우를 생가하면 믿음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염려가 들어오면 믿음을 사용할 여지가 없어집니다. 마치 전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불안해집니다.
염려는 마치 거머리 같습니다. 거머리처럼 마음에 눌러 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같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 문제를 자신으로부타 떼어 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떼어 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뭐하라고 합니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아뢰라고합니다
기도는 염려하지 않기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염려할 능력과 자격을 갖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기도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더 문제에 깊이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를 골똘히 엎드려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내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가 되도록 위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7절 다같이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모든지각’은 인간 이상의 모든 가능성과 지혜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가지고 게십니다. 그러니까 미리 염려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물론 너무나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미리 생각해보아도 좋겠지만 하나님의 길은 따로 있습니다. 공연히 고민하는 동안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미래 일을 생각해보아도 그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일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모든 불안한 마음이나 잡 생각을 믿음으로 누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됩니다.
마치 밤에 망원경에 매달려 천체가 만드는 엄청난 우주쇼를 보는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우주쇼를 보게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모든 잡 생각을 믿음으로 누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고 찬양하게 됩니다.
■결 론......
오늘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나도 절대적인 가치를 알고있기에 오히려 남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남의 실수가 보이고 남을 판단하는 것은 내 상태가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지 그것에 집착하면 지위는 아들이지만 생활은 노예처럼 살게될 것입니다
남을 용납하지 않으면 자기가 괴로워 견디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믿음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께 맡기고 내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기뻐하라는 것은 명령입니다.
그런데도 기뻐하지 않으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생각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못한 우주쇼를 보게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