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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 독립의 기반은 “내 몸 바쳐 남을 위해 일하는 것“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독립투쟁 생애와 신앙-
노 종 해(CM리서치)
1. 머리말
2023년3월26일(일), 대한민국 건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탄신 148주년,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이화장에서 기념식이 열렸고 업적과 역사를 재평가해야 할 때라고 했으며, 전 국회의원 등 4.19 중추세력 원로들은 국립현충원을 찾아 추모하고, ’63년만의 화해, 독재 프레임을 벗겨야 한다”며 묘소를 참배하였다.(참조: 문화일보 등 2023.3.26일, 27.일자)
이승만 박사(1875.3.26.-1965.7.19.)의 독립투쟁과 일생은 개화기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일제하 독립투쟁과 해방, 남북분단과 대한민국 건국과 초대 대통령으로 거국 내각 정부수립, 6.25전쟁과 4.19, 하야와 망명 등 그의 90평생은 한국 근 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정치 사회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생애인 것이다.
여기서는 이승만 박사의 독립투쟁과 신앙생활을 살펴 보려한다. 이 글은 “이승만 박사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이 그 인격형성 뿐 아니라 생활, 그의 모든 활동 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란 물음을 가지고 살펴 보려한다.
2. 기독교와의 첫 만남
이승만 박사는 1875년3월26일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고, 3세 때 서울로 이사하여 서당에서 과거급제를 목표로 통감(桶鑑), 사서(四書) 등 유학에 열중하였다. 1894년 갑오경자(甲午更張)으로 과거가 폐지되었고, 그 해 11월에 서당동료 신긍우(申肯雨, 신흥우의 형)의 권고와 소개로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영문부에 적을 두었다. 그의 첫 영어선생은 노블(W.A. Noble) 선교사였고 영어실력이 향상을 인정받아, 제중원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여의사 죠지아나 화이팅(Georgina Whiting)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가 되었으며, 1895년8월에는 배재학당 영어선생으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첫 기독교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는 노블 선교사가 “학생은 누구나 예배에 참석해야 된다”며 권고하기에 참여한 것이다. 이때 아펜젤러의 설교를 처음 들었다. 설교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내용이었으나 이승만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의 가풍과 유학의 선비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외면케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첫 예배에서 “어떻게 1900여 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나의 영혼을 구한단 말인가?”고 조소하였고, 이러한 어리석은 교리를 믿는 선교사들도 미련하게 보았다. 이러한 교리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나 믿는 것이지 학식을 지닌 선비들에게는 가당치도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월 20불을 받았으며, 이 돈을 어머님께 드리며 배재학당에 입학한 사실을 말할 때, “얘야, 너는 굶어 죽더라도 천주학쟁이는 되지 마라”는 간곡한 당부도 있었다.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를 배우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하였고, “어머니,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믿기에는 너무나 총명합니다. 염려마세요”하며 안심시켜 드리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1896년1월에 귀국한 서재필 박사의 강연에 도전 받았으며 “독립신문”에 참여하였다. 또한 배재학당에 “협성회”(協成會)이란 학생 단체를 조직하고 “협성회보”(協成會報)를 발간하며 주필로 활약하며 토론회, 강연회를 통해 정부의 부패를 공격하고 정치개혁, 외세배제, 민족계몽, 자주의식을 고취하였다. 정치적 간섭으로 협성회가 폐지되면서, 1898년4월9일부터 협성회보를 “매일신문”(每日新聞)으로 개칭 창간하고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제국신문” 창간에도 참여하는 등 언론과 토론, 공개 강연으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은 외세를 배격하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등 민족자주 애국구국운동에 몰두하다가 수구파(守舊派)의 모략으로 독립협회가 해산 되고 지도자들이 체포될 때, 1899년1월9일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정치범 사형수로 서소문 형무소에 목에 칼을 쓰고 캄캄한 흙바닥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승만은 1904년8월7일 사형수에서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6년 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바로 이 감옥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평생 기독교 신앙인으로 살게 되었고 독립의지를 더욱 굳건히 펼쳐 나가게 되었다.
3. 감옥에서의 신앙체험과 독립의 기반 확립
이승만의 옥중에서 모진 고문으로 늘어진 육체에 발이 묶여 있고, 목에는 칼이 씌어 있어서 서지도 눕지도 못하는 고통과 죽음의 위협 수감생활이었다. 칼을 쓰고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였다. 사형수로서 삶과 죽음의 문제가 심각하게 직면해 온 것이다. 여기에서 배재학당 예배시간에 아펜젤러 목사의 설교가 생생하게 기억 속에 떠올라왔다. “네가 너의 죄를 회개하면 지금이라도 용서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이 기억 속에 살아 오르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때 처음으로 기도하였다. 목에 칼을 쓰고 “하나님이시여, 나의 영혼을 구해 주시고 나의 나라를 구해 주시 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중에 그는 십자가 위에 고난 받으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위로와 용기, 힘을 받게 되었다. 이승만은 성경을 보기 원하였고, 선교사를 통해 신약성경이 주어졌으며, 아펜젤러와 벙커 선교사 등의 활동으로 성경책 뿐 아니라 기독교 서적, 교양서적들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새벽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경읽고 기도하며 마음에 평온을 찾았다. 한 사람은 망을 보게 하고 한 사람은 칼 위에 성경을 펼치게 하여 책장을 넘기며 소리 내어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이일을 통해 감옥생활에도 평온을 느끼게 되며 예배와 전도도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나는 감옥에서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을 알게 되어 얼마나 감사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6년 동안 감옥살이에서 얻은 축복에 대해서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고 고백하였다.
이승만은 무기수 종신형을 받고 이감 되어 수갑과 형틀에서 벗어나 잡범들과 함께 옥중생활이 이어졌으며, 아펜젤러와 벙커 선교사 등의 협조와 간수장 김영선 씨와 차장 이충진 씨의 호의로 옥중문고를 설치하여 옥중 독서실을 운영하였고, 어린이반 장년반으로 옥중학교로 감옥을 교육장으로 만들었으며,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드리는 옥중교회도 인도하였다. 옥중에서 미국의 “전망”(Outlook)지와 같은 잡지도 구독하여서 세계동향과 민권사상과 자유사상 등의 지식도 습득할 수 있게 되어 감옥에서 “독립정신”이란 책도 저술하였다. 이승만은 당시의 신앙과 감옥전도활동을 한국감리교회에서 발행된 한국최초 신학잡지인 “신학월보”(광무7년, 1899년3월)에 하나님 은혜 감사하며 고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험한 옥중에서 이 험한 질곡을 격으며 무사히 부지하여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아니면 인력으로 못하였을 바이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은 감화시키시는 힘을 나에게 주시지 아니하였다면 이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으로 세상 죄인들을 감화시키시는 교가 아니면 불소한 재정(財政)으로 서적실을 졸지에 설치할 수 없을지라. 이것이 나의 이른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이니 이 깨달음과 감사함으로 나날이 힘쓰면 오늘 심는 겨자씨에서 가지가 생겨 공중에 나는 새가 깃들이게 될 줄 믿겠나이다.”
이승만의 신앙은 단순한 “머리의 신앙”이 아니요 뜨거운 “가슴의 신앙”이며, “체험적 신앙”인 것이다. 여기서 얻은 신앙과 그 체험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또한 감옥에 오고 가는 많은 죄수들의 삶을 통해 서민, 민중의 삶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아펜젤러의 순직(1902년6월11일) 소식을 듣고 하루 반을 내리 울며 단식하였다.
또한 감옥에서 이상재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지도자들을 더 깊이 사귀게 되었고 이들도 대부분 출옥 후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승만의 옥중생활은 번역과 저술, “제국신문”에 27개월 동안(1901-1903) “논설”을 집필하는 등 왕성한 활동기가 되었고, 기독교 신앙으로 민족자주 독립정신을 돈독케 하고, 생명의 존귀함과 자유의 소중함을 절실히 체험하였으며, 서민위주의 독립운동, 정치형태를 기본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3.1독립선언 보다 15년 앞서, 옥중에서 “독립정신”(1904년)을 탈고하였고, 미국에서 출판하였다.(1910년) 마지막 결론을 보면, 독립정신의 기반은,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들 위하여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일 함에 있다”고 굳은 결단으로 마치고 있다. 즉,
“저 순한 인민이 다 죄가 있어 멸망에 들어감이 어지신 하나님의 슬피 여기심이 않으리오. 이에 구원할 길을 열어 주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천도의 오묘한 이치를 들어내고 평생에 남의 곤욕과 곤란을 받다가 필경은 세상인민의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샤 千萬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고 돌아와서 죄를 자복하고 다시는 악에 빠지지 말아서 용서를 얻고 복을 받게 하셨나니 순전히 사랑함이 아니면 어찌 남을 위하여 몸을 버리시기에 이르리오...,
이 은혜는 다른 것으로 값을 수 없고 다만 예수의 뒤를 따라 세상 사람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일할 뿐이라. 천하에 의롭고 사랑하고 어진 것이 이에 더 지난 것이 어디에 있으리오...,
지금 우리나라의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오고자 할진대 이 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요, 신학문을 힘써도 효력을 얻지 못할 것이요, 외교를 힘써도 깊은 정의를 얻지 못할 것이요, 국가 권을 중히 여겨도 참 동등대 위에 이르지 못할 것이요, 의리를 숭상하여도 한결 같을 수 없을 것이요, 자유 권리를 중히 하여도 평균한 방향을 알지 못할지니라.
우리는 마땅히 이 교로써 萬사에 근원을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자 되어야 나라를 일심으로 받들어 영미 각국과 동등이 되게 하며 이후 천국에 가서 다같이 만납시다.“ 건국 4237년6월29일. 독립정신.(p234-235)-(옛 한글체와 문단 나눔은 필자가 정리한 것임.)
4. 해외망명 독립운동과 그의 신앙
이승만은 1904년8월에 출옥 되었지만 민영익, 한규설의 계획에 의해, 한미수호조약 중 상호방위의 조문을 미국이 지켜 일본의 계책을 막아 주기를 청원하는 고종황제의 서신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밀서를 가지고 1904년11월4일 도미케 되었다. 이때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유학생 신분의 비자를 받았으며, 미국 고관들과 상하의원들 및 유력한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지만 일본의 모략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체험한 이승만은 1905년4월25일 부활주일에 루이스 T, 햄린 목사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죠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프린스톤 대학에서 국제정치 외교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10년) 이때 한국에서 YMCA학감으로 초청을 받아 귀국하여 전국 순회전도 집회로 강연하였으나 한일합방으로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 총독부가 기독교 민족 지도자들을 제거키 위해 음모를 조작하여 “105인 사건”을 날조하고 검거선풍을 일으킬 때임으로, 1912년 세계감리교 총회 대표로 미국으로 다시 출국하여 해외망명 독립투쟁활동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일본의 불법 강압 통치와 잔인한 “105인 사건”의 계책을 폭로하며, “한국교회의 핍박”을 써서 강연하며 1913년 출판하였다. 그는 “핍박 중에 힘이 나는” 기독교 신앙으로 불굴의 한국교회를 상황을 피력하고 있다. 즉
“특별히 예수교회에 일어나는 한량없는 자동력이 스스로 생겨서 청순한 청년들이 서로 인도하며 권장하는 말이 온 세상이 다 우리의 적국이라도 우리가 예수의 친구만 되면 제일 친구가 많은 사람이라 하며, 우리는 군함 대포가 하나도 없을지라도 만능지력을 가지신 하나님만 의탁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하며, 우리의 육신은 죽어도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는 무서울 것이 없다 하며, 우리는 아무 것도 다 할 수 없지마는 하나님의 도를 전하는 것은 세상에 감히 막을 사람이 없다 하여 여러 가지 이런 말이 사람의 간담에 들어가며 스스로 한량 없는 능력이 생기는지라... 모든 사람이 다 합심하여도 나 혼자 굳센 마음이 생기며 슬퍼하는 중에 낙이 생기며 핍박 중에 힘이 나느니라.”(한국교회의 핍박,p52-54)
이승만은 워싱턴 파운드리 감리교회의 등록 교인으로서 교회조직을 통하여 “외교를 통한 한국 독립운동”에 착수하였다. 특히 하와이 한인교포 지도들의 초청 받았고, 초교파 연합으로 호놀룰루에 “한인 기독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봉직하며,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여 교육과 신앙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자주의식을 고취 시키며 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대한동지회”를 결성하여 동지들을 결합하여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착수하였다.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선 “한성임시정부”(4.23)가 조직 되어 이승만을 집정총재(대통령)로 선출하였고, 국외에선 상해임시정부(4.11)도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노령 임시정부(3.17) 등이 조직 되었다.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9월6일에는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를 상해에 두어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집무실을 옮겨 미국정부로 하여금 한미상호 보호조약을 지켜 불법 점령한 일본의 강압 통치에서 한국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투쟁하였다. 이승만은 이미 국제동향을 예견하며, 1940년부터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영문으로 집필하여 1941년 초에 출판하여 곧 매진되었다. 그는 일본침략 전쟁을 방지키 위해 일본을 제재해야 함을 주장하고, 한국독립의 긴요성을 갈파하였으며, 그의 예견대로 일본은 결국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을 침략하였다. 이승만은 일제말기 태평양전쟁에는 한국도 참전하도록 특전용사를 훈련하여 대기하였으며, 일제와 러시아의 음흉한 계략을 지적하였으나, 미국은 원폭을 투하하여 일본을 항복시켰다. 소련을 참전시켜 한국독립을 미루고 배제한 채 남북분단 점령의 길에 들어섰다.
5. 해방 이후 건국, 정부수립과 그의 신앙생활
1945년8월15일 해방 직후 남북은 분단 점령 되어, 북에는 소련이, 남에는 미군정이 점령군으로 3.8선을 경계로 분단하여 통치하였다. 소련은 이미 김일성을 내세워 공상정권을 수립하였으며, 한국은 독립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신탁통치를 주장하였다. 미군정은 임정요인들과 이승만 등의 내한을 미루어 오다가 개인 자격으로 입국케 하였다. 남한 미군정은 치안대를 조직하여 부일협력자들로 활동케 하였고, 소련과 협력하는 정책으로 이승만을 경계하고 배제시키려 하였다.
이승만은 우후죽순으로 일어난 정당 사회단체들의 혼란 속에 공산화를 막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며, 교묘하고 지리한 미소공동회의 정책 대립과 국내 좌우의 격렬한 정쟁의 혼탁한 소용돌 속에 휘말렸다. 미국은 1947년9월23일 한국문제를 유엔(UN) 총회에 상정하여 가결 되었으며, 이로써 한국독립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고, 총회는 11월14일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가결하여으나, 소련의 공산화 정책으로 북한이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남한만의 총선으로 국제연합(유엔)이 승인한 "한국의 유일한 정부"로 "대한민국"을건국케 되었다.
결국 1948년5월10일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 국회의원 198명을 선출 하고, 7월17일 헌법을 제정하여, 헌법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선출 되어, 국제연합(UN)이 승인한 "한국의 유일한 정부"(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로,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켰으며, 초대 국무위원은 거국 내각을 이루고 출범시켰다. 이승만은 3선 개헌과 3.15부정 선거에 대항하는 4.19혁명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기까지 민족독립과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의 생활은 아침기도와 성경읽기로 하루의 일을 시작하였다 한다. 이는 감옥에서 얻어진 체험적 신앙의 습관이었다. 식사기도는 “우리에게 주신 음식을 우리 동포들도 다 먹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였고,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믿고 살았다. 어려운 일, 복잡한 일을 당할 때, 특히 6.25전쟁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 말하며 용기를 주었다 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와 말씀의 삶을 살았다. 교회에는 꼭 참석하였고, 6.25전쟁 중에도 순간순간 기도하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으로 굳게 서 나갔다 한다. 1950년12월25일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난관에 처해 있을 때 이승만 박사 내외는 교회를 찾아 나왔다. 당시 상황을 프란체스카 여사는 다음과 같이 비망록에 쓰고 있다.
“성탄일을 맞아 우리는 예배드리러 상오 11시 정동교회로 갔다. 성탄절을 맞는 예배당 안이 아무런 장식도 없이 너무나 쓸쓸하고 황량하며 난로도 하나 없이 썰렁했다. 손발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질 정도로 추운 이 넓은 예배당 안에는 손으로 꼽아 약 20명의 교인이 모여 있었는데 목회를 인도할 사람이 없어 평신도 중 한 사람이 예배순서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신도의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고 교인들이나 대통령은 함께 예배를 보게 되어 모두 기뻐하였다. 그 신도는 성경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봉독했는데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 대통령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니 아무리 강한적이 쳐들어와도 우리는 기어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했다. 이 예배는 지금껏 우리가 참석해 온 예배 중 가장 감명 깊게 우리 기억에 새겨질 감동적인 예배의 하나였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1.4후퇴 5일 전에도 아무도 없는 텅 빈 교회에 나와 기도하였다 한다.
4.19의 소식을 듣고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못하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라 했고, 총에 맞아 부상당한 학생들을 병원으로 친히 방문하여 “내가 맞아야할 총을 학생들이 맞았다”고 비통해 했고, 3.15부정선거를 취소하고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고, 대통령직의 하야를 결정, 선포한 뒤 이젠 민간인의 신분으로 “관1호차‘를 탈 수 없다 하며 경무대에서 이화장까지 걸어가려는 성품 속에 기독교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65년7월19일 별세한지 58년이 지난 오늘 그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재물을 모으지 않았던 이임을 밝혀졌는데 이 또한 기독교 신앙에서 온 생활 성품이 아니겠는가.
이승만 박사가 가장 가슴에 깊이 새기고 좋아하는 성경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이다. 즐겨 부른 찬송은 494장,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와 387장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와 정처 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또한 335장 “십자가 군병들아”였고, "저 새장에 새가 날 듯 너 벗어나 나오라" 찬송(구 308장) 등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자신의 감옥생활의 고통을 늘 기억하고 감옥전도제도를 만들었고, 종군 전도제(군목제도)를 만들었다. 1948년6월 대한민국 첫 제헌국회 개회 때는 “대한민국 독립 민선 국회 제1차 의회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이다. 먼저 이윤영 씨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드리시기 바란다”고 하여 총 기립하도록 하고 기도로 시작하였다. 이윤영(李允榮) 의원은 조선민주당 당수로 제헌국회의원이며 감리교 목사였다. 기도 후에 “우리가 오날 있게 된 데 대하여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와, 둘째는 우리 애국선혈들의 희생적인 공적과, 셋째는 우방의 원조를 친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개회사가 있었다.
6. 맺는말: 역사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
이원순 선생은 이승만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면서 그의 전기를 마치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정의와 신의 동정(同情)을 깨닫고 기도 가운데서 위대한 힘의 원천을 발견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소리 내어 성서의 구절을 읽고는 부인과 함께 식탁에 앉곤 했다. 그가 가끔 혼자서 올리는 기도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보다도 그의 신앙이 더욱 굳건해지도록 채찍질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떠한 비평이나 비난을 받아도 자기의 정책을 경건한 기도 속에서 생각해 보고 그것이 옳다고 깨달으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나갔다. 1945년 귀국 이래 그가 교회의 예배를 거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승만 박사는 그 시대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특히 해방 이후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국제정세 속에서의 한국 국내 상황과 건국을 결별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아직도 남.북은 분단되어 있고,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이란 과제를 안고 있는 이때에 이승만 박사는 오해와 비난 즉, 친일배를 중용 옹호하고 반공으로 분단을 고착시켰으며, 인민학살과 독재, 역적이란 낙인으로 논쟁의 중심에 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평가는 냉혹하고 음흉한 강대국의 모략과 주변 국제정세, 혼탁한 국내 상황 등 그 시대의 원초적인 사료와 다방면의 심층적 연구, 편향적이지 않은 종합 분석연구가 선행 되어야할 것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러한 과제를 가슴에 간직하고 3.1운동 104주년을 맞으며, 남,북 평화적인 통일과 조국의 자유 평화 민주화를 바라보면서 역사 속에서 그 뜻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단하고, 그 부름에 응답하여 나가야 될 것이다. 이승만 박사의 생애는 우리에게 “신앙과 민족”에 대해 깊이 생각케 해주는 준거가 될 것이다. 신앙인은 오늘의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굳세게 서서 자유를 지켜 나가는 신앙인으로, 민족 평화통일의 과제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 화해와 용서, 자유와 인권이 지켜지고 이루어지도록 참여해 나가는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남 이승만 박사님의 즐겨 부르시던 찬송, "저 새장에 새가 날 듯이 떠오름니다. 곧 벗어나 나오라" 찬송(구 308장)이 마음 속에서 떠오른다.
"저 새장에 새가 날 듯 너 벗어 나오라
저 맑은 물 솟는 물에 네 갈한 목 축여라
네 뒤에는 원수들이 널 다시 잡으려네
주 예수를 찾아 와서 그 품속에 잘 쉬어라
그 품속에 잘 쉬어라"
(노종해:2023.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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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승만: 독립정신(1904)
-이승만: 한국교회의 핍박(1913.)
-Syngman Rhee: Japan Inside Out, NY, Fleming H. Revell Company1941.
*李承晩(朴마리아 譯): 日本內幕記, 自由黨宣傳部,1957.
*李承晩(李種益 譯): 日本軍國主義實像, 나남1987.
*이승만(최병진 역):일본 그 가면의 실체, 대한언론인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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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대통령 이승만 박사 영결식"-하와이에서 서거(7.19), 망명생활 만5년 만에 무언의 귀국(7.24.)하여, 영결식(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