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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숭현문(崇賢門)
정의
경희궁 동궁의 정당인 경현당의 정문.
개설
‘숭현(崇賢)’이란 어진 것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궁궐문의 이름에 ‘현(賢)’ 자가 들어있는 경우는 대개 동궁의 영역 안에 있는 문일 때가 많다. 왕재의 교육을 받는 세자에게 어짊과 현명함은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경희궁 동궁의 정당인 경현당의 정문을 숭현문(崇賢門)이라 한 것은 이처럼 당연한 상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현당은 경희궁 안의 모든 전각 가운데 숭정전 다음으로 넓고 환한 건물이라 할 만큼 중요하게 여겨진 공간이었으며, 이 전각의 정문인 숭현문에서는 국가의 수많은 의례가 이루어졌다.
위치 및 용도
숭현문은 경희궁의 동남쪽에 있었다. 궁궐 정문인 흥화문을 지나면, 세 번 이상 꺾여 궁궐 안을 감돌아 흐르는 금천을 가로지르며 금천교가 놓여있고, 다리를 건너 어도를 따라 건명문 안으로 들어가면 궁궐의 전각들이 펼쳐지는데, 가장 먼저 만나는 오른쪽의 문, 즉 어도의 북쪽에 놓인 문이 경현당의 정문인 숭현문이었다. 경현당의 영역은 남쪽을 바라보며 행각으로 둘러싸였는데 행각의 동쪽에 둘, 서쪽에 둘, 남쪽 행각과 북쪽 행각에 각각 하나씩 문을 내었다. 동행각에는 협화문과 만상문이, 서행각에는 청화문과 통현문이 있었고 북쪽에는 담장 사이에 숭덕문이 있었다.
인조와 영조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경희궁을 시어소로 사용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숭현문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영조 때의 것이다. 인조가 경희궁에 머물렀지만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훗날 효종이 된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이 모두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기 때문에 동궁의 존재가 미미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영조 때의 기록에는 각종 국가의 의례를 위한 향과 축문을 전달하고 지영하는 장소[『영조실록』 37년 1월 5일], 시험에 입격한 자들에게 시상하는 장소[『영조실록』 36년 10월 7일],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위로하는 장소로 쓰였다. 또한 각 도의 굶주린 백성을 불러 국수를 먹이고 저고리를 나누어 주기도 했으며[『영조실록』 38년 11월 11일], 70세 이상의 백성과 부녀자들에게 왕이 친히 숭현문에 나가 쌀을 하사하기도 했고, 과거에 급제한 자들에게 거꾸로 사은을 받는 장소로도 쓰였다[『영조실록』 39년 1월 9일]. 그 밖에 각종 시험과 심지어 마주 보고 앉아 시험을 치는 면시(面試)를 행하는 장소로도 쓰였다[『영조실록』 39년 12월 21일].
고종대에 중건된 경복궁의 편전을 출입하는 문의 이름도 숭현문이었다. 두 문을 비교하자면 경희궁의 숭현문에 비해 경복궁의 숭현문은 비교적 낮은 위계의 문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및 현황
숭현문은 광해군 연간에 경희궁이 창건되던 때에 함께 조성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복원되지 않았다.
형태
숭현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문으로 행각의 사이에 솟을문으로 조성되었다. 2짝의 판장문을 달았고 맞배지붕이다. 지붕의 용마루 끝에는 취두를 장식하여 격조가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일성록』 1761년(영조 37) 1월 4일의 기록이다. 영조와 훗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이 경희궁을 나가 정성왕후의 혼전이 마련된 창경궁의 휘령전에 들렀다가 환궁하는 때였다. 왕과 왕세손이 함께 하는 행렬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규모가 큰, 꽤나 볼만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경희궁으로 환궁하는 모습을 백성들이 보고 있음을 의식한 영조는 흥화문을 통과하고 금천교를 건너 건명문 밖에서 연을 멈추었다. 연과 여, 그리고 교자를 갈아타는 일은 위계에 관계되어 중요한 의절이었다. 왕이 신하에게, 왕세손이 자신의 행차를 뒤따라오다가 정문 흥화문에서 내려 흥화문의 협문에 놓인 교를 갈아탈 것인데, 백성들에게 세손이 함께 수가하여 휘령전에 다녀온 것을 알게 하려 하니 세손이 교를 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을 전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왕세손은 왕의 명을 따르지 않고 할아버지인 영조가 완전히 궁궐로 들어가신 다음에나 교를 타겠다고 전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왕세손의 예의와 범절을 지키는 모습에 무척 기뻐하며 이 일을 신하들이 그렇게 하도록 왕세손에게 조언하였던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때 홍봉한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아무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니 왕이 더욱 기뻐하며 숭현문 밖에서 왕세손을 불러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가르치며 왕세손의 대답을 기뻐하였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궁궐지(宮闕志)』
『한경지략(漢京識略)』
『홍재전서(弘齋全書)』
최종규, 「경희궁 복원을 위한 전각배치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숭현문(崇賢門)
정의
경복궁 사정전 서쪽 행각의 남쪽에 있는 문.
개설
‘숭현(崇賢)’이란, 어진 것을 숭상한다는 의미이다. 궁궐문의 이름에 ‘현(賢)’ 자가 들어 있을 경우는 대개 동궁의 영역에 있는 문일 때가 많다. 그러나 경복궁의 숭현문(崇賢門)은 왕이 일상의 업무를 수행하던 편전의 영역에 있는 문이다.
위치 및 용도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권역은 서쪽 행각에 문이 둘, 동쪽 행각에 문이 둘씩 있었다. 숭현문은 그중 서쪽 행각의 남쪽에 있는 문이다. 경복궁이 완성되었을 때 영건도감(營建都監)이 아직 이름을 정하지 못한 궁궐 내의 각 전각과 문들의 이름을 지어 별단으로 왕에게 올렸고, 사정전의 정문은 사정문(思政門)으로, 동쪽 행각문은 득영문(得英門)으로 서쪽 행각문은 숭현문으로 정했다[『고종실록』 4년 11월 8일].
경희궁의 동궁 정당인 경현당(景賢堂) 정문 이름도 숭현문이다. 두 문을 비교하자면 경희궁의 숭현문에 비해 경복궁의 숭현문은 비교적 낮은 위계의 문으로 조성되었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의 숭현문은 고종 때 궁궐을 중건할 때 함께 조성하였다. 『고종실록』에 동쪽의 문을 득영문이라고 정한 것과 달리 지금의 사정전 권역에는 동쪽 행각의 북측문을 연태문(延泰門), 남측문을 사현문(思賢門)이라는 액호로 하여 편액이 걸려 있다. 언제 어떤 과정에서 변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북궐도형(北闕圖形)」과 고종 연간에 간행된 『궁궐지(宮闕誌)』에는 사정전 행각의 각 문들에 관해 현재 있는 문들과 기록이 일치한다.
현재 숭현문에는 편액이 달려 있지 않지만, 서행각의 남쪽 끝에 있는 행각 안의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면 숭현문이 있다. 사정전 마당에서 이 문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 문간과 ‘ㄱ’ 자로 꺾여 창고들이 늘어서 있는데, 행각의 기둥에 ‘천자고(千字庫)’라는 명패가 붙어 있어 마치 문의 이름을 달아 놓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
형태
경복궁의 숭현문은 행각에 있는 문으로 주칠을 한 2짝 판장문을 달았으며, 문의 상부에는 장식 없이 긋기단청으로 마무리된 벽으로 구성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경지략(漢京識略)』
『홍재전서(弘齋全書)』「북궐도형(北闕圖形)」
승휘전(承輝殿)
정의
경희궁에서 동궁의 정침에 해당하는 건물.
개설
승휘전(承輝殿)은 광해군에 의해 경덕궁이 지어질 당시 세자의 정침으로 건립되었다. 광해군은 1616년(광해군 8)에 경덕궁을 영건하기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 12)에 마쳤다. 승휘전은 이 시기에 조성되었다. 경덕궁이 완공되고 동궁의 첫 주인은 소현세자(昭顯世子)였다. 1655년(효종 6)에 승휘전을 헐어 창덕궁 수리공사의 자재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승휘전이 세자의 정침이라는 이유로 실행되지 않았다.
위치 및 용도
승휘전은 경덕궁, 즉 경희궁에서 동궁이 사용하는 정침이었다. 경희궁에서 세자의 생활공간은 승휘전이며, 양덕당(養德堂)은 내당이라 하여 서연을 하고 신하들을 만나는 공간이었다. 현재 승휘전은 소실되어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궁궐지(宮闕志)』에는 승휘전이 융복전(隆福殿) 동남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다. 1698년(숙종 24)에 중궁전 앞쪽에 있는 중궁전 소속 주방에서 화재가 일어나 승휘전으로 옮겨 붙어 소실되었던 것으로 보아 융복전에 매우 근접할 정도로 가까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화재로 소실된 이후 다시 재건하지 않았다. 승휘전이 소실된 이후 동궁의 생활공간은 집희당(緝熙堂)과 경선당(慶善堂)으로 바뀌었다.
변천 및 현황
승휘전은 경희궁 건립 당시에 동궁의 정침으로 건립되었으나, 1698년 11월 23일에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되지 않았다. 순조대에 경희궁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서궐도안(西闕圖案)」에는 빈터만 남아 있으며, 승휘전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93년(숙종 19) 3월에 승휘전을 수리하고 담장을 헐어 터를 넓히는 공사가 있었다. 이때 승휘전 북쪽 담장 아래에서 사람이 뼈가 발견되었다. 오랜 옛날에 사람이 매장되었던 곳에 궁궐을 지었던 것이다. 이에 숙종이 제문을 내리고 약간의 제물(祭物)을 내려 죽은 이를 위로해 주었다[『숙종실록』 19년 3월 23일]. 이날의 일로 승휘전 수리를 멈출 것을 요청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수리공사를 마무리하였다. 1693년에 승휘전 담장에 대한 수리공사 내역은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에 기록되었다. 승휘전 삼면에 판장(板障)을 설치하고 단청을 한 기록이 있으며, 이때 현판에 금을 입혀 내건 기록도 있다.
참고문헌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궁궐지(宮闕志)』
시민당(時敏堂)
정의
창경궁 동궁의 외당으로 세자가 공식적인 의례를 행할 때 사용한 건물.
개설
시민당(時敏堂)은 창경궁의 동궁으로 대표되는 건물이다. 창덕궁에 동궁을 건립한 시기는 1485년(성종 16)이었다. 이때에 왕이 건양문(建陽門) 밖에 나가 동궁의 터를 살펴보았다[『성종실록』 16년 2월 4일].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건양문은 창덕궁의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그 동쪽으로 시민당의 기단과 초석이 그려졌다. 건양문에서부터 시민당의 정문인 집영문(集英門)까지 창경궁의 동궁 건물이 위치한 곳이었다.
『궁궐지(宮闕志)』에 수록된 숙종이 지은 「시민당명병소서(時敏堂銘幷小序)」에는 ‘시민당’의 당호가 갖는 의미를 기록하였다. 시민은 『서경(書經)』의 「설명(說命)」에서 때에 민첩하기를 힘쓴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세자가 배움에 있어 부지런하고 민첩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시민당은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이루는 곳이며 두 궁궐의 남쪽 하단에 있다. 동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뒷마당이 펼쳐지는데, 커다란 사각형 연못이 있다. 정문은 집영문이다. 집영문 밖에는 춘방(春坊)과 규방(閨房)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시민당은 동궁의 외당으로 왕세자의 책봉례와 관례, 동뢰연 등의 행례가 이루어졌다. 1736년(영조 12)에 이루어진 왕세자 책봉 의례에서는, 왕이 선정전(宣政殿)에 머물다가 인정전(仁政殿)에 들어 왕세자 책봉에 대한 교명과 책함을 내려 세자 책봉을 선포하면, 정사와 부사가 교명과 책함을 받들고 시민당에 이르러 왕세자에게 전해 주었다[『영조실록』 12년 3월 15일]. 현종과 숙종, 경종이 시민당에서 왕세자로 책봉되고 하례를 받았다.
왕세자가 사부와 빈객을 만나 회강례를 행하는 곳이기도 하였으며, 세자가 백관과의 상견례를 행하거나 동궁의 관원들에게 연회를 베푸는 곳이기도 하였다.
1717년(숙종 43)에 왕은 동궁의 대리청정을 명하였는데, 이때 시민당을 청정과 조참의 장소로 정하였다. 세종대에 동궁의 대리청정을 위하여 경복궁의 계조당(繼照堂)을 조당(朝堂)으로 건립하였는데, 시민당을 이와 같이 활용한 것이다[『숙종실록』 43년 7월 25일].
왕세자의 자리가 비어 동궁으로 활용되지 않을 때에는 신주를 봉안하거나, 종묘에 부묘되기 전까지 혼전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에 숙종의 국상이 있었을 때에 숙종의 혼전을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하기 위하여, 이미 문정전에 자리하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혼전인 경녕전(敬寧殿)을 시민당에 옮겨 모시고, 문정전에 숙종의 혼전인 효녕전(孝寧殿)을 모셨다.
변천 및 현황
창덕궁의 동궁은 1485년에 시민당, 낙선당(樂善堂), 저승전(儲承殿)으로 건립되었다. 저승전은 정침의 형태를 갖추었고, 낙선당은 내당, 시민당은 외당으로서 격식을 갖추었다.
그러나 1756년(영조 32)에 낙선당이 소실되고, 1764년(영조 40)에 저승전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1780년(정조 4) 7월에 시민당까지 화재로 사라졌다. 이후 시민당을 건립하지 않고, 1780년(정조 6)에 희정당(熙政堂) 동남쪽에 중희당(重熙堂)을 건립하여 새로운 동궁으로 이용하였다.
형태
순조 연간에 그려진 「동궐도」에는 시민당의 초석과 기단만 있다. 그 형태를 알 수 없으나, 동향으로 배치되었다는 것과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
1663년(현종 4)에 그려진 「시민당야대지도(詩敏堂夜對之圖)」에 묘사된 시민당은 정면 3칸에 팔작지붕을 갖춘 건물이다. 또 3칸 건물에서 동쪽 1칸에 야대(夜對)하는 모습이 그려진 것으로 보아 동쪽에 온돌방이 있는 비대칭 평면인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1670년(현종 11)에 그려진 「시민당도(詩敏堂圖)」에서도 정면 3칸에 팔작지붕을 갖추었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시민당도(詩敏堂圖)」「시민당야대지도(詩敏堂夜對之圖)」
신지혜, 「17~18세기 경희궁 동궁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신무문(神武門)
정의
조선시대 경복궁 북쪽의 궁성문.
개설
경복궁이 창건된 지 3년이 지나 1398년(태조 7)에 궁성을 쌓았는데, 1399년(정종 1)에 완성되었다[『태조실록』7년 7월 27일][『정종실록』 1년 1월 19일]. 처음에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서·남의 삼면에만 궁성문을 세웠고 북쪽 궁성은 목책으로 되어 있었다. 후에 이를 막아 궁성을 쌓았다가 1433년(세종 15) 제왕의 궁성에는 4개의 대문이 있어야 한다는 상소를 받아들여 북문을 새로 지었다. 북문의 이름은 1475년(성종 6)에 서거정(徐居正)에게 짓게 하여 ‘신무문’이라 하였다[『성종실록』6년 8월 23일].
위치 및 용도
신무문은 경복궁 북쪽 궁장에 있는데 북쪽의 한가운데가 아닌 서쪽으로 3분의 1 지점에 치우쳐 있다. 조선후기에 북쪽의 육상궁이나 후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왕이 자주 사용한 문이었다.
고종대 중건한 경복궁의 동쪽에는 건춘문(建春門)에서 건청궁(乾淸宮)까지, 서쪽에는 영추문(迎秋門)에서 신무문까지 궁성 안쪽으로 내궁장이 있고 그 사이가 궁궐을 지키는 순라길이었다. 신무문 안쪽은 서쪽 순라길이 끝나는 곳으로 여기에 창회문(彰會門)이 있다. 신무문 안쪽은 마치 복도와 같이 담장이 있어서 남북으로 긴 통로를 만들고 그 남쪽에 유형문(維亨門)을 세웠다. 이 문은 사정전(思政殿)과 수정전(修政殿) 영역에서 신무문으로 나갈 때 이용하는 문이다.
변천 및 현황
신무문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고종대에 중건되었다[『고종실록』 2년 9월 17일].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고종대 중건한 것이며, 경복궁의 궁장 중에서 북쪽 궁장과 궁장에 있는 월문, 수문과 함께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구간이다.
형태
신무문에는 고종대 중건한 건물이 현존하고 있으며 문루의 크기는 건춘문, 영추문과 같으나 육축의 높이와 폭을 1자 반씩 작게 지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고종대 이전에는 신무문 밖에 회맹단(會盟壇)이 있어서 왕이 신하들과 회맹제(會盟祭)를 할 때 신무문을 이용했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신무문 밖에 후원과 경무대(景武臺)를 조성하였는데 이곳에서 군대의 사열, 대규모의 행사, 문무 과거시험 등이 거행되어 그때마다 신무문은 왕의 출입문이 되었다. 영조대 이후 경복궁 북서쪽에 있는 육상궁에 참배하러 나갈 때에도 신무문을 이용했다[『영조실록』 4년 7월 17일].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 1 경복궁』, 수류산방, 2007.
실록각(實錄閣)
정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
개설
실록각은 조선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건물로서 사고(史庫)를 구성하는 여러 건물 중 하나이다. 조선전기의 사고는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전주사고(全州史庫) 및 이와 유사했던 것으로 보이는 성주사고(星州史庫)는 누각식 단일 건물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사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실록각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는 선원각(璿源閣)으로 이루어진다. 선원각은 선원보각(璿源寶閣) 또는 선원록각(璿源錄閣)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현재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강화사고(江華史庫)에서 살펴볼 수 있다.
1439년(세종 21)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신설하여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내사고인 춘추관(春秋館)과 외사고인 충주·성주·전주사고 4곳이 있었다[『세종실록』 21년 7월 3일]. 그런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사고가 불에 타 버렸다. 이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1593년(선조 26) 내장산, 해주 등을 거쳐 평안도로 옮겨 임진왜란 중 사라지지 않은 유일한 사고본으로 남게 되었다. 그 후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하여 정본 3부와 초본인 교정본 1부를 인쇄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실록』은 모두 5부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피할 수 있도록 깊은 산중이나 섬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였다. 지방에는 정족산(鼎足山), 적상산(赤裳山), 태백산(太白山), 오대산(五臺山)에 사고를 두고 부근의 전등사(傳燈寺), 안국사(安國寺), 각화사(覺華寺), 월정사(月精寺)를 수호사찰(守護寺刹)로 지정하여 주지(住持)를 총섭(總攝)에 임명하고 지키게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사고를 두어 역대 왕실의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의궤류(儀軌類)와 경서(經書), 나아가 개인의 문집(文集)과 보첩(譜牒) 등을 보관했다. 가장 중요한 사고는 도성 내 춘추관에 있는 내사고(內史庫)였으며, 소실이나 분실의 우려를 감안해 도성 이외의 지역에 외사고(外史庫)를 동시에 운영했다.
사고는 대개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는 실록각과 『선원록』이 보관되는 선원각 2개의 건물로 구성된다. 조선전기의 사고는 단독 건물로 읍성의 중심 관아와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후기의 사고는 산속 경사면 외진 곳에 숨겨 두었다. 사고의 건물은 방향에 관계없이 실록각과 선원각을 앞뒤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주변에는 부속 건물을 두어 돌담이나 토담을 타원형으로 둘러쌓고 1~2개의 출입문을 두었다.
태백산사고 터의 발굴 조사 결과를 보면 실록각 터, 선원각 터, 책을 볕에 쬐게 하는 포쇄관(曝曬館) 터, 근천관(近天館) 터 등 당시의 사고 건물의 배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오대산사고와 태백산사고의 건물들은 2층 구조에 상층과 하층의 지붕을 따로 설치하였고 내부도 2층 구조이다. 정면 칸수가 4칸으로서 일반적인 관아 건물이 홀수의 칸수를 갖는 것과는 구별된다. 적상산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 역시 2층 구조로 되어 있지만 상층에만 지붕을 설치한 점이 다르다. 건물들은, 1층이 되는 부분에 바닥이나 벽·문을 설치하지 않고 기둥만 세워 두며 2층에 바닥을 설치하는 필로티(pilotis) 구조로 되어 있다. 널빤지로 된 판벽(板壁)이 설치되었고 우물마루가 깔렸으며 칸 사이에 살창을 두었다. 이는 통풍을 원활하게 하고, 동물이나 곤충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한 것이다.
강화사고는 단층 건물로 일반 목조 건축과 외형상 큰 차이는 없다. 다만 벽체의 일부를 화방벽(火防壁)으로 쌓았는데 이는 화재에 대비한 것이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유일한 원본인 전주사고본은 강화의 마리산에 두었다가 정족산사고로 옮겼다. 새로 인쇄한 정본 가운데 1본은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는 태백산사고와 묘향산사고에 보관하였다. 그리고 초본인 교정본은 오대산사고에 보관하였다. 얼마 후 묘향산사고는 북방 후금(後金)의 확장에 대비하여 적상산으로 옮겼다.
적상산사고는 1614년(광해군 6) 실록각을 짓고 『조선왕조실록』을 옮겨온 후, 1641년(인조 19) 선원전이 더해졌다. 여기에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을 봉안함으로써 완전한 사고가 되었다. 적상산사고의 실록각은 현재 소멸되었고 선원각은 현재 안국사 천불전(千佛殿)으로 바뀌었다.
정족산사고는 1653년(효종 4) 마리산사고 화재 후 건립이 추진되었다. 1660년(현종 1) 정족산성이 완성되면서 장사각(藏史閣)과 선원각(璿源閣)이 건립되었다[『현종실록』 1년 11월 8일]. 건물은 1930년경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장사각과 선원각의 현판만이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다.
오대산사고의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불타, 터만 남았다가 1989년 선원각이 복원되었다. 선원각 앞 사고 터에는 영감사(靈鑑寺) 법당이 자리 잡고 있다.
태백산사고는 명종 이후에 편찬 간행된 역대 왕들의 『조선왕조실록』을 계속 보관·관리하였다. 1910년(융희 4)의 국권 침탈 뒤 『조선왕조실록』 등 서적들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宗親府) 건물로 옮겨짐에 따라 그 기능이 정지되어 건물도 폐허화하였다.
참고문헌
김흥섭·박언곤, 「조선시대 사고건물의 건축특성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144, 2000.
박대길, 「조선후기 적상산사고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암문(暗門)
정의
성곽에서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작게 설치한 문.
개설
성곽의 경우 네 방향에 거대한 성문을 만들어 두고 평상시에는 이곳을 통해 출입한다. 각 방향의 성문에는 옹성을 만들기도 하고, 성문 상부에는 중층의 문루를 지어 이곳이 성곽의 대문임을 멀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는 등 유사시에는 대문을 닫아 방어에 치중한다. 이때를 대비해 성곽 외부와 은밀하게 출입할 수 있도록 작은 문들을 성곽 곳곳에 만들어 두는데, 이를 암문(暗門)이라고 한다. 이런 까닭에 암문은 대부분 성벽을 안쪽으로 휘게 해서 가장 깊이 들어온 곳에 설치한다거나 또는 성벽을 외부로 돌출시킨 다음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옆면 마구리에 설치하였다. 당연히 대문과 같이 옹성을 쌓는다거나 문루를 설치하지 않았다.
내용
암문을 통해 유사시에 외부와 연락을 취하며, 병기·식량 등의 물자를 조달하고,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역습을 가하기도 했다. 만약 암문이 적에게 노출된 경우에는 급히 메워 암문을 막을 수 있도록 문 안쪽에 돌과 흙을 쌓아 두었다. 『승정원일기』 1637년(인조 15) 1월 29일자 기록에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서암문에서 적을 기습해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시상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서암문 전투에 대한 내용은 『동춘당집(同春堂集)』 제23권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이시백(李時白)의 시장(諡狀)에 자세히 전한다.
한양이나 지방의 읍성과 같이 도시에 만들어진 성곽에는 암문을 설치한 경우가 드물다. 다만 정조 연간에 조성한 화성 성역에서는 5곳에 암문을 두었다. 고구려 이래로 적과의 전투를 대비해 도시 주변에는 산성을 조성했다. 평상시에는 읍성에서 생활했지만 전투가 발발하면 산성으로 옮겨가 이곳에서 전투에 임했다. 이런 까닭에 읍성에는 따로 암문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성곽에 조성한 암문의 수는 성의 규모와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지형적인 여건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북한산성의 경우는 성문과 성문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중간에 많은 암문을 조성할 수밖에 없었다. 1785년(정조 9)에는 북한산성의 안찰어사(按察御史)인 신기(申耆)가 북한산성의 행세를 보고하는 서계(書啓)를 올렸는데, 북한산성에 매우 많은 암문이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정조실록』 9년 6월 17일].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에 따르면, 북한산성에는 10개의 암문이 있었다. 『승정원일기』 1779년(정조 3) 8월 3일자에는 남한산성에 사대문과 13개의 암문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동춘당집(同春堂集)』
『만기요람(萬機要覽)』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김동욱, 『18세기 건축사상과 실천-수원성』, 발언, 1996.
손영식, 『한국의 성곽』, 주류성, 2009.
##그림1_00017952_화성의 서암문 도설, 『화성성역의궤』.
애련정(愛蓮亭)
정의
조선 숙종대에 창덕궁 후원에 조성한 정자.
개설
애련정(愛蓮亭)은 숙종이 창덕궁 후원에 연꽃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조성한 정자이다. 애련정 일원은 구릉과 계류를 활용하여 그 일부를 정지해 전옥(殿屋)과 정자를 세우고, 계류를 막아 연못을 만들어 원유(苑囿) 공간을 조영해 정자에서의 정적인 관상이나 유락에 그치지 않고 자연의 숲을 즐기는 소요(逍遙)를 위한 공간이다.
위치 및 용도
애련정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해 있다. 헌종대에 쓰인 『궁궐지(宮闕志)』에는 어수당(魚水堂) 동쪽에 있다고 기록되었는데, 어수당은 현존하지 않는다. 숙종의 「어제기(御製記)」에 숙종이 연꽃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자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숙종과 정조는 이곳을 특별히 여겨 시를 짓고 향유했다.
변천 및 현황
숙종이 1692년(숙종 18)에 조성했다. 동쪽에 석문이 있는데 살곶이벌이라 하였다. 정자의 남쪽에는 함벽정(涵碧亭) 터가 있었는데 폐하였고, 석문 밖의 지당을 불로지(不老池)라 일컬었다. 『궁궐지』에는 연못 가운데에 섬을 쌓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섬을 확인하기 어렵다. 「동궐도(東闕圖)」에 보이는 호안의 모습으로 변화된 시기는 지금으로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형태
애련정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각 형태의 정자이다. 네 기둥 가운데 남쪽 정면의 기둥 2개는 연못 속에 박은 장주형 초석 위에 세워졌는데, 이로 인해 연못 속으로 몸체를 드러낸 형태가 되었다. 정자에 오르면 연못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구조이다. 북쪽의 기둥 2개는 장대석의 1벌대 기단에 놓인 초석 위에 세워졌다. 양식은 단층 네모기와지붕인 익공집이며, 마루는 난간을 두른 쪽마루보다 한단 낮게 꾸며져서 난간 쪽마루가 마치 의자와도 같은 구실을 한다.
불로문을 들어서면 넓은 공간을 지나 정면에 연와담이 있다. 불로문 내측은 동·서·남쪽이 담으로 막혀 있고, 북쪽만 애련지에 접해 열린 특이한 공간 구성이다. 이는 애련지와 동일한 목적을 가진 행사 장소인 기오헌, 의두각에서 애련지를 조망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이다. 애련정의 후면은 어수당에서부터 평탄한 단이 계속되는데, 이 단의 북쪽은 자연 구릉이다. 그곳에는 석대에 앉혀진 괴석이 애련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대칭으로 위치하며, 뒤쪽 언덕에는 괴석을 배경으로 소나무가 심겼다.
애련지 못가에 있는 돌에 태액(太液)이라는 금석문이 새겨져 있다. 애련지 서북쪽은 3층의 계단을 이루는데, 중앙층의 맨 좌측 돌에 글씨를 새겼다. 이로 인해 애련지의 다른 이름이 ‘태액지(太液池)’였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다. 태액은 큰물이라는 뜻으로, 원래 중국 한나라의 건장궁(建章宮) 북쪽에 있던 연못 이름이었다. 당나라 때도 대명궁(大明宮) 함량전(含凉殿) 뒤쪽에 같은 이름의 연못이 있었는데, 당대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유명한 「장한가(長恨歌)」에 ‘태액지의 연꽃과 미앙궁의 버들이로다[太液芙蓉未央柳]’라는 구절이 나온다. 청나라 때 북경의 고궁 서화문(西華門) 밖에 같은 이름의 연못이 있었다.
애련정 일원에는 석함(石函)·석문·석누조(石漏槽) 등이 위치하며, 해치나 연판문·용두(龍頭)의 문양이 새겨졌다. 석함의 경우 애련정 좌우에 하나씩 존재하는데, 좌측 석함에 새겨진 서수(瑞獸)의 경우 뿔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치로 사료되며, 우측 석함은 연판문으로 장식되었다.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조영된 석문인 불로문은 큰 돌을 쪼아 만들어 이음새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석누조에는 벽사의 의미인 용두가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
이광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최종덕, 『조선의 참 궁궐 창덕궁』, 눌와, 2006.
한국전통조경학회, 『동양조경문화사』, 대가, 2011.
양덕당(養德堂)
정의
경희궁에서 세자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던 전각.
개설
양덕당은 경희궁의 남동쪽 영역에 위치하여 경현당(景賢堂)과 연계하여 사용되었다. 경현당은 세자가 경서를 강독하고 하례를 받았던 곳이다.
위치 및 용도
양덕당은 경현당의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숭덕문(崇德門)을 두었다. 경희궁에서 승휘전(承暉殿)이 세자의 정침이었을 때 양덕당은 동궁의 내당(內堂)으로 사용되었다. 승휘전은 효종 때 철거하여 창덕궁 만수전(萬壽殿)을 짓는 데 사용하였고[『효종실록』 6년 12월 11일], 숙종 때 중건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재로 소실된 후 중건하지 않았다[『숙종실록』 24년 11월 22일]. 승휘전이 없어진 후 양덕당은 경현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부속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내전(內殿)의 일반적인 생활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慶熙宮志)」에 보면, 양덕당은 1698년(숙종 24) 승휘전이 불타기 전에 쓰던 동궁의 내당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양덕당의 용도는 다양하다. 대표적인 예가 경현당에서 행사가 있을 때 준비 공간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이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이미 승휘전이 소실되어 세자의 생활 공간이 옮겨진 후이다.
1818년(순조 18)에 덕화전(德和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하지만 이후의 기록에서도 양덕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훼철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형태
「서궐도안(西闕圖案)」에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양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함춘헌(咸春軒), 서쪽에는 안희헌(安喜軒)이 배치되어 있다. 널찍한 안마당을 갖춘 팔작집으로 묘사되어서 위계가 높은 건물 중 하나로 보인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64년(영조 40)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가 양덕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사망한 지 2년 뒤의 일이다.
참고문헌
『궁궐지(宮闕志)』「서궐도안(西闕圖案)」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영건의궤연구회, 『영건의궤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건축』, 동녘, 2010.
홍석주, 「조선조 광해군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양심합(養心閤)
정의
창덕궁 대조전 영역을 둘러싼 ‘口’자형 행각 중 남동쪽의 집채.
개설
양심합의 옛 이름은 정종 때 집현전(集賢殿)을 고쳐 부른 ‘보문각(寶文閣)’이다[『정종실록』 2년 1월 10일]. 보문각은 고려 때부터 궁궐의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의 이름이다. 양심합은 창덕궁의 ‘재전(齋殿)’으로 사용되었는데, 경희궁에서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장례 지내고 창덕궁으로 돌아와 재실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종, 원빈홍씨(元嬪洪氏), 순원왕후(純元王后) 등이 이 집에서 승하하였다.
현종 때는 신하들이 드나들며 소대하여 사용 빈도가 매우 높았다. 대조전(大造殿), 즉 내전의 영역에 딸려 있으면서 이렇게 쓰인 것은 위치상 모순되어 보인다[『태종실록』 17년 1월 19일][『세종실록』 11년 4월 27일]. 양심합은 희정당(熙政堂) 후면과 연접한 장순문(莊順門)으로 드나들게 되어 있어, 중궁전보다는 편전인 희정당과 건물의 관계가 더 밀접해 보인다.
위치 및 용도
양심합은 대조전의 남동쪽 행각이며 희정당의 후원과 연접해 있다. 필요에 따라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왕이 신하를 소대하고 경연하는 장소, 책을 보관하는 서고, 왕이 치료를 받는 장소, 대비 승하 후 왕이 삼가하며 지내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망곡례를 행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인 원빈홍씨가 후궁으로 입궁하였는데 입궁한 지 불과 1년여 만에 양심합에서 사망했다. 이곳이 원래 원빈홍씨가 머물던 처소인지, 사망 직전에 옮겨간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후궁의 처소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 또한 순조와 가까이 통행하기 위해 양심합에 머물렀다[『순조실록』부록 행장]. 철종 때는 순원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변천 및 현황
언제부터 대조전의 이곳을 양심합으로 불렀는지 알 수 없지만 건립 시기는 대조전의 영건과 함께 이루어졌던 것 같다. 1833년(순조 33) 10월 내전의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주변 건물이 소실되어 다음 해 9월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11월 다시 대조전에 화재가 있어 내전이 모두 탔고, 3년 뒤 경복궁 내전 건물을 이건하여 창덕궁 내전의 중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옛 제도와는 다른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형태
「동궐도(東闕圖)」와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에서 보이는 양심합은 조금 다른 형태를 보인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전면 기둥열의 초석이 장초석으로 변화된 것과 지붕의 구성이 팔작지붕으로 된 것이다. 집의 규모는 정면 9칸으로 「동궐도형(東闕圖形)」을 포함하여 「동궐도」, 『창덕궁영건도감의궤』 모두 일치한다. 다만 측면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동궐도형」에 의하면 전·후면에 모두 툇마루를 두었고 동쪽 세 번째 칸부터 2칸이 마루로 되어 있으며 양쪽에 방이 놓여 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
『창덕궁영건도감의궤(昌德宮營建都監儀軌)』
『한중록(閑中錄)』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