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김홍전 {신앙의 도리} (서울: 성약출판사, 4판 4쇄본 2006)’ 43쪽~45쪽에서 옮깁니다. 이 책은 “읍니다.”체를 “습니다.”체로 바꾼 개정판입니다. 초판으로는 ‘金弘全 {信仰의 道理} (서울: 백합출판사, 1980)’ 33쪽~36쪽입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말씀과 더불어
지난 시간에는 주로 ‘말씀’에 관해 상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계시하신 것이 하나님의 종들에 의해 명령대로 기록돼 성경이 있게 됐지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실히 그 권위를 나타내게 되려면 반드시 조건이 붙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무엇인가 하면, 성신께서 친히 말씀과 함께 하사 사람 마음에 참뜻을 조명해 깨닫게 하셔야만 하나님 말씀으로서 참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신께서 말씀을 붙들어 쓰지 아니하시면 성경 말씀은 경전의 말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씀 그 자체 안에 신통력이 있어서 말씀만 들어가면 덮어놓고 무슨 신령한 변화가 생긴다든지 어떤 현저한 결과가 생긴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개혁 교회가 아닌 루터교 가운데서, 또 여타의 사람들이 다소 그러한 경향의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주장하고 있는, 장로교라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개혁 신앙이라고 하고 또 장로교가 가지고 있는 신학을 개혁 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 신학이나 개혁 신앙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지침으로서 하나님 말씀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는 터이지만, 말씀을 우상화하는 것은 늘 경계합니다. 말씀 자체가 신과 같이 신통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은 가르쳐 온 터입니다. 그런고로 말씀이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그 자체가 함유하고 있는 어떤 신통력으로 신성한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하나의 문헌이나 경전으로서도 대단히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뛰어난 예술 작품으로, 도덕을 가르치며 그 표준을 보이는 책으로, 또 사상서로나 혹은 역사의 재료를 풍부히 담고 있는 역사서류로서도 굉장하고 위대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서 그 실질을 다 발휘합니다. 그러나 그런 발휘를 가리켜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아님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말씀이 가지고 있는 참된 능력의 발휘라는 것은 오직 성신님이 그 말씀을 쓰셔서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심으로 됩니다. 주의할 것은 ‘말씀을 통해 성신님께서 역사하옵소서.’ 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말씀 자체 속에 고정적으로 어떤 신통력이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용어인 까닭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성신님께서 역사하신다.’ 할 것이지, ‘말씀을 통해(per verbum) 성신님께서 역사하신다.’ 할 것이 아닙니다.
성신님께서는 하나님이신 까닭에 말씀의 저자(著者)도 되실뿐더러 그 말씀을 누구에게 가르칠 것이며 어떻게 보일 것을 다 아시고 주장하십니다. 말씀만이 단독으로 역사하는 것이라 할 것도 아닙니다. 그 사람 자신이 말씀에 의해서, 그 언어의 전달에 의해서 인식된 내용에 그의 심리적인 전 영혼 기능의 반응이라는 것이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영혼의 기능만을 가지고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 외에 우리가 스스로 조작할 수 없고 스스로 반응을 일으킬 수 없는 어떠한 외부의 중요한 여러 가지 사실들과 함께 성신님께서 그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권위 있게 증명하는 은혜 가운데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신님께서 말씀을 쓰시면 말씀으로 깨닫게도 하시고 또 사람이 그 말씀만으로 다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사실들, 즉 환경이나 생활의 진전 가운데서도 또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알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인도하사 어떤 생활의 경지에 도달케 하십니다. 말씀에는 이렇게 성신님의 능력 있는 역사가 함께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 신조에는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요 정확 무오한 것으로서 신앙과 본분에서 유일한 최고 지침이니라.”고 돼 있는 줄 아는데, 이 신조를 믿는다고 할 때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쓰이는가, 또 어떻게 역사하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바로 깨닫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이 무슨 신성한 힘을 스스로 포함해서 늘 발휘하는 것같이 생각해서 성경을 존숭尊崇하고 높이면서도 사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에서 아무런 신비한 능력도 받지 못하는 모순 상태에 빠지지 아니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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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권수경, 이상원 역 (경기: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8)’ 872쪽~873쪽입니다. 배경색은 제가 칠합니다.
B. 말씀과 성령의 관계
···(전략)···
3. 이와 같은 두 견해에 반대하면서 종교 개혁자들은 말씀만으로는 믿음과 회심을 산출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성령도 통상적으로 말씀과 분리해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에 구속 사역에서 말씀은 성령과 함께 역사한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에 별다른 차이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루터파는 처음부터 성령께서 방편으로서 말씀을 통해(per verbum) 역사하신다고 주장한 반면, 개혁파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하신다고 말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이후에 루터파 신학자들은, 하나님 말씀은 성령의 회개하게 하시는 능력을 신적 기탁물(divine deposit)로 가지고 있는데, 이 능력은 결코 말씀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여서, 심지어 말씀이 사용되지 않을 때나 합법적으로 작용하지 않을 때도 말씀 안에 임재한다는 루터파 자체 교리를 발전케 했다. 그러나 말씀의 전파가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를 산출한다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그들은 비록 온건한 형태이긴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으니, 곧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생명의 향기요, 다른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사망의 냄새로 간주했다. 그러나 개혁파는 다만 성령께서 죄인들 마음속에 작용하실 때에만 말씀은 회심으로 이끄는 효력을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즉,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효력을 말씀 안에 내재해 있는 비인격적인 능력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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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1107/YlDw/39
다음은 위 링크 글 댓글란에 옮기는 댓글들입니다. 문단 구분이 없는 이지끼을 님 댓글은 제가 다듬어 올립니다.
…(댓글 전략)…
이지끼을 (2026.03.27.07:48)
(11)
《다시 묻습니다. 이지끼을 님 구원의 서정에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자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까?》 하셨습니다.
이것도 전적부패 교리와 이신칭의 교리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대답은 “가질 수 있다.”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온 천하에 미치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을 죄의 저주에서 해방하신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곧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다는 의미인데, 복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3절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며 거듭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계 님은 거듭남(중생)이 성령께서 말씀의 씨앗을 품에 안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것도 믿음을 갖기 전에…. 그러니까 성경 구절을 제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는지, 자신의 생각을 주입해서 설명 가능한 말씀을 제시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 알 수 있는 말씀을 제시하십시오.
…(댓글 중략)…
四季 朴埰同 <이지끼을 님 답변 (11)번은 답변합니다.> (2026.03.28. 02:2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이지끼을 님은 위 말씀을 “곧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다는 의미인데.”로 해석하셨습니다. 이는 ‘세례 마술론’을 이은 ‘복음 마술론’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수단, 은혜의 방편이지, 구원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해석을 보면, ‘도대체 미국 어느 신대원을 졸업하셨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로마교 ‘세례 마술론’ 누룩을 제거하지 못한 루터교 신대원입니까?
인간 완전 무능력을 뜻하는 구절, 성령이 없이는 영적인 일,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게 바울 사도 증거(고전 2:14)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로마서 1장 16절이 “복음에 하나님 능력이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까?
‘세례 마술론=복음 마술론’인데, 복음 자체에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으면, 세례 자체에도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을 수 있겠지요. 세례 자체에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으면, 믿음 없이도 세례받는 모든 사람이 살아나겠지요.
그러면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기에 죄와 허물로 죽은 자에게 복음을 아무리 들려줘 봐야 살아나지 않습니다. 즉,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으면, 죽은 자들이 복음을 들으면 모두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살아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입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복음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아무리 들어도 결국에는 무덤에 묻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지끼을 님?
그러면 어떨 때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까? 복음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셔야만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은혜의 방편으로서 복음은 효력을 발생합니다. 물론, 이때 역시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씨”(요일 3:9)인 “믿음의 씨(Semen Fidei)”라고 했는데, 왜 “말씀의 씨”로 왜곡, 호도하셨는지요?
지금은 이 정도로 하고, 나머지 답변은 틈나는 대로 다음에 하겠습니다.
…(댓글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