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식 원로장로의 신앙 간증
2024년 5월 19일 교회 창립 96주년을 기념하여 봉평교회 출신 교인 신앙간증 예배가 있었다. 제천제일교회 장대식(張大植) 원로장로가 오랜만에 고향교회를 방문하여 ‘삶의 우선순위’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간증 보따리를 풀었다. 1949년 봉평면 덕거리 452번지 인흥동마을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난 장대식 장로는 첫돌 지나고부터 디모데처럼 외할머니 정경화 권사의 손에 이끌려 봉평교회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덕거국민학교, 봉평중, 강릉농고를 졸업하고 1967년 충북 제천으로 이사했다. 제천지방 황인순 감리사가 시무하는 제천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농고출신 청년 장대식은 양계장 사업을 시작했다. 직장인과는 달리 시간이 자유로워서 때를 가리지 않고 청년부 활동을 했고 나중에 회장직도 맡았다. 그때 현대시멘트주식회사 안에 있는 직장인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 교사 지원요청이 들어와 장대식은 청년들과 함께 열심히 봉사했다. 그의 열심 있는 활동을 눈여겨보고 회사에서는 그에게 공석이 된 교회 담당 업무를 맡아달라고 해서 당시 모두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유니폼만 입어도 신용이 보장되었고 항상 높은 경쟁률의 공채로 들어갈 수 있는 이 회사를 특채처럼 입사했으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분명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후 중장비 부서로 옮겼는데 주일성수가 보장되지 않았다. 고등부 교사가 직장 때문에 주일을 못 지킨다면 학생들에게 본이 안 된다고 생각한 장대식 선생은 이것만 보장된다면 어느 직장이든지 가겠다고 사표를 썼다. 사직 사유를 알게 된 담당자가 6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해서 일단 보류했더니 6개월 뒤 그는 주일성수가 보장되는 관리자로 승진발령을 받았다. 그때 그는 믿음의 사람에게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소름 돋을 정도로 깊이 깨달았다.
장대식 권사는 42살 되던 1991년에 장로가 되었다. 15명의 장로 중에 막내인 그가 맡은 직책은 상조회였다. 장례가 나면 교회 선산에 가서 하관 할 때까지 수시로 장례일정에 동참해야 하는 자리다. 직장에 얽매이고는 감당할 수 없어서 또 사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지인이 철근 납품회사를 창업하자고 제의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는 분야라서 선 듯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기도하며 생각해 보니 자유롭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싶어서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그와 함께 주식회사 태양철강을 창업했다. 자본금이라고는 직장 생활 22년 경력의 퇴직금이 전부였는데 그때부터 누진제가 적용되도록 법이 바뀌어 2배로 늘어나는 바람에 큰 보탬이 되었다. 태양철강은 나중에 동업자의 지분을 모두 지불하고 경영권 일체를 인수하여 명실상부 그의 가업이 되었다. 그런데 하필 그때 국가부도사태(IMF)가 터지고 경제적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어음은 휴지조각이었고 모든 물건은 현금으로만 거래해야 했다. 현금이 없던 태양철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거래처에서 그동안의 신용을 보고 어음을 받고도 물건을 주는 바람에 위기를 잘 극복했다. 또 사업확장을 해야 하는데 자금 통로가 꽉 막혀 있어서 망연자실할 때 뜬금없이 거래 은행 대부계 담당자가 연락하기를 신용보증기금에서 그의 신용을 보고 보증 서겠다고 하니 돈 좀 빌려가라고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600평 회사 부지를 장만했고 이후에 2,200평까지 부지를 마련하는 시발점이 되어 회사가 한 걸음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다.
어느 해는 어음으로 결제하고 철근을 많이 구입하고 났는데 건설시장에 철근파동이 일어났다. 이때는 현금으로만 물건을 살 수 있는데 장대식 장로는 이미 철근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오히려 어음으로 산 철근이 현금으로 팔리면서 장 장로는 이삭처럼 흉년의 때에 백배의 소출을 거두었다. 또한 제천제일교회 백주년 기념성전을 건축할 때 장로로서 얼마나 헌금해야 하는지에 고민이 생겼다. 어느 날 새벽예배 참석하고 기도하는데 문득 하나님은 1956년 봉평교회 첫 번째 성전을 건축할 때 외할머니가 목재 일체를 봉헌한 것에 대해서 황인순 감리사에게 받은 표창장이 머리에 스쳤다. 외할머니가 성전의 뼈대를 세웠으니 그 신앙을 이어서 너도 그렇게 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고 금액에 상관없이 무조건 ‘아멘’하였다. 금액보다 그 의미를 살리고 싶었다. 총 600톤의 철근이 소요되는 거액의 헌금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해 예년처럼 장대식 장로는 6개월 어음으로 철근을 많이 사들였다. 창고 바닥이 주저앉을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매해 연말이면 마무리 짓던 조달청과 건설사와의 자재가격 협정이 그해는 실패하고는 새해를 맞이한 것이다. 가격이 결정되지 않자 철근이 유통되지 못했고 시장에는 철근 품귀현상이 나타났다. 시장의 재고만이 유일하게 유통되었고 현금 거래만 가능했다. 유독 많은 양을 쌓아둔 태양철강의 철근이 고가의 귀한 몸이 되었다. 어음으로 구입한 철근을 현금으로, 그것도 비싼 가격에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그것이 600톤 철근을 온전히 성전건축에 봉헌하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장대식 장로는 자신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면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 우선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은 상상도 못 할 은혜를 부어주시고 2020년 장로로 은퇴하게 하신 것을 감사했다. 이런 신앙의 뿌리가 외할머니 등에 업혀 다니던 봉평교회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가난했던 학생시절 자신을 돌보아주었던 어머니 같은 조경덕 장로의 사랑은 오늘까지 베풀고 나누면서 주님께 쓰임 받은 자신의 신앙에 선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자신의 신앙의 요람이고 성장의 텃밭이 되어준 고향교회에 그가 마음 깊은 감사함을 잊지 않는 이유다. 하나님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는 신앙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장대식 장로의 간증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렇게 산 사람을 결코 잊지 않는 분이심을 깨닫게 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물이 흘러가는 것에 비유했다. 물은 돌에 부딪치고 구부러진 데를 지나고 여물을 만나기도 하지만 여전히 잘 흘러간다. 자신의 인생 여정에도 실패의 늪에 빠져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흘러가게 하시고는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은 실패가 큰 목표를 향해 가는 단계이고 과정일 뿐이다. 오늘도 장대식 장로는 변함없이 뒷사람에게 한 점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살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즉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
죄로부터 김명순 권사(아내), 장대식 장로, 홍성현 목사, 조송암 장로(중학교동창), 김순남 권사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고 간증하는 장대식 장로
그의 외할머니가 목재 일체를 봉헌하여 1956년에 건축한 봉평교회 첫 번째 성전
첫돌 때부터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봉평교회를 다녔다.
1952년 5월 24일 팔석정에서 봉평교회 첫 야외예배를 드린 기념사진, 앞줄 중앙에 외할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장대식 장로다.
봉평교회 제1차 부흥회 기념 (강사 박만선 목사,1957년 12월 6일) 좌측 상단의 아기가 장대식 장로다
봉평중학교 제10회 졸업기념 사진(1964년 2월 15일)
봉평중학교 3학년 시절 장대식 장로
봉평중학교 3학년 시절 조송암 장로
조경덕 장로 취임식 때 기념 사진
장대식 장로의 자녀손들
제63회 제천지방회에서 은퇴하는 장대식 장로의 은퇴 기념(2020년 2월 20일 동산교회)
현대시멘트 중장비 부서의 관리자로 있을 때
태양철강을 창업하고 처음 철근 일체를 투자한 건물, 그러나 이 건설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매우 힘들었다.
창업한 태양철강주식회사
창고에 가득 쌓인 철근
600톤 철근을 봉헌하여 건축된 제천제일교회 백주년 기념 성전
아버지학교 에서 스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장대식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