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29
아픈 사람을 치유해 주는 추곡약수
<즐비하던 산장, 여인숙, 찻집, 전집, 식당>
춘천 고을에는 유명한 약수가 있다. 북산면 추곡리에 있는 추곡약수이다. 가래나무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 추곡이다. 가래 추(楸)자에 골 곡(谷)자를 쓴다. 옛 지명은 나무 이름을 따서 많이 지었다. 배나무골, 대나무골, 오동나무골 등등이 나무 이름으로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골짜기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추곡리도 그렇게 가래나무가 많았다.
이렇게 생긴 추곡리에 가면 길재의 시조 <회고가>가 떠오른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유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는 망한 고려왕조를 돌아보고 옛날 화려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어쩌면 현재 추곡리의 상황과 이 시조가 그렇게 잘 맞을까.
추곡터널이 뚫리기 전까지는 추곡약수를 따라 산장, 여인숙, 찻집, 전집, 식당이 그야말로 즐비하였다. 사람이 줄을 이어서 한참을 기다려야 약수를 뜰 수 있었고, 약수통도 제한을 둘 정도였다. 추곡리 사람들은 산나물이며 곡식을 가져와 팔아 자식들 학비를 대었다. 답답할 때 산책 삼아 들려도 좋았다. 춘천에서 추곡약수까지는 오봉산 배후령과 죽엽산 자락을 넘어야 했으니 시간도 꽤 걸렸다. 비포장으로 이뤄진 도로는 험하기까지 했다. 도로가 험해도 사람들은 재를 넘어 추곡약수를 마시러 갔다. 그런 추곡약수터는 이제 적막이 감돈다.
<추곡약수 발견 경위>
옛날 홍천에 한약방을 하는 김 씨 집에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 아들은 어느 날 병이 들었고, 백약을 써도 병은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병든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아, 오늘부터 집을 나가서 객지 물을 백 일만 먹고 오너라.”
김 씨는 뾰족한 대책이 없어, 마지막으로 요행을 바라는 처방을 내린 것이었다. 김 씨 아들은 집을 나가 밥과 소금으로 버티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녔다. 그러다가 현 추곡약수터를 지나다가 그만 기진맥진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그때 사명산 산신령이 나타나서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병을 고칠 약을 앞에 두고 잠만 자느냐.”
김 씨 아들은 깜짝 놀라 눈을 뜨니 꿈이었다. 앞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자기도 모르게 낙엽을 두 손으로 긁어냈다. 그곳에는 물이 솟았고, 주변에는 붉은색이 있었다. 김 씨 아들은 허겁지겁 그 물을 마셨다. 갑자기 트림이 나면서 아프던 속이 편안해졌다. 김 씨 아들은 홍천 아버지에게 가서 사실을 말했다.
“얘야, 그 물을 100일만 더 먹고 오너라.”
그렇게 해서 김 씨 아들은 병을 다 고쳤고, 그 소문이 퍼져서 추곡약수는 유명해졌다.
<산신님 우리 산신님>
추곡약수터에서는 매년 음력 3월 19일이 되면 산신제를 지낸다. 사명산 산신께서 약수를 주셔서 고마움을 표하는 제의이다. 제사 비용은 사람들이 약수를 마시고 성심함에 넣은 돈으로 한다. 제물은 명신식당에서 준비하는데, 아주 정성껏 차린다. 돼지머리, 떡, 과일, 포 등이 상 가득 차려진다. 추곡사 스님이 와서 산왕경을 읊으며 진행한다. 이날은 마을사람과 추곡약수를 마시러 온 손님이 모두 참여한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다. 약수를 내려 준 고마움에 대한 제의로, 수천 년 내려온 우리 문화의 속성이 그대로 배어있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에게도 자연에도 고마움을 표하며 살았다. 그 고마움이 제사라는 형태로 치러졌다. 제사가 끝나면 준비한 제물을 나누어 먹으면서 화기롭게 담소를 나누고, 내년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