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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10.6 백마고지 전투와 1953.7.27 휴전협정
1952년 10월 6일, 중국군은 국군이 점령한 백마고지를 공격한다-----------백마고지 전투발발----약 열흘 동안 무려 12차례의 고지쟁탈전이 벌어진다. 고지의 주인이 일곱번이나 뒤바뀐 한국전쟁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휴전협정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지만 참혹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영화 <고지전> The Front Line 에서--------------
배우!: 네가 전쟁을 알아? 니가 진짜 지옥을 알아? 남성식이, 그놈의 남성식이 어제도 죽고 그제도 죽었어 그렇게 죽어나간 남성식이 지금까지 수십명이야. 왜 이 지옥 같은 전쟁은 안끝나는 거야?
배우2: 온 세상이 우리 보고 싸우라고 하는데~ 안개만이 싸우지 말라고 하는 거 같네
------------휴전협정 고지를 사수하라----------------------
최원정/KBS 아나운서” 역사저널 그날 한국전쟁 70주년기획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 2011년에 개봉했던 영화<고지전>으로 시작을 해봤는데요. 휴전 직전의 마지막 상황을 다룬다는 점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박상영/작가: 맞아요, 새삼 새로운 게 고수, 신하균, 이제훈, 유숭수 지금 모우라고 하면 모우기도힘든 배우들의 젊은 모습이 영화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새롭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시원/배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의 하나가 신하균씨가 고수씨 한테 묵주를 찾아주면서 너 요즘도 기도하냐 고수씨가 계속 하지 내용만 바뀔뿐이지 예전에는 살려주세요 했다면 요즘은 죽여주세요 한다구~-------------------영화속의 대화----------
고수: (묵주를 보면서) 이걸 니가 가지고 있었네
신하균: 왜 요즘은 주님을 안믿냐?
고수: 기도 내용만 좀 바뀌었지 예전에는 살려주세요 했는데 지금은 죽여주세요 한다.
신하균: 누굴?
고수: 누구든~ 어차피 어느 한쪽이 다 죽어야 끝날 테니까
다니엘 린데만/방송인: 저는 특히 박사님이랑 작년 초에 백마고지 직접 방문한 적이 있었거든요.
김지윤/정치학 박사: 기억 못하잖아요?
다니엘: 그때는 별로 감이 없었어요. 자세한 걸 몰랐으니까. 멀리서 보면 그냥 하나의 언덕 같애요. 언덕 같은데 거기서 몇시간 안에 만명 이상 죽었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는데 이번에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을 볼 수 있어서 비극이었던 것 같애요.
최원정: 백마고지는 실제 영화의 모티브였는데~
이시원: 여기서는 애록 고지로 나왔잖아요?
다니엘: 애록 AEROK을 거꾸로 하면 KOREA 이잖아요, 영문으로?
최원정: KOREA를 뒤집은 것 AEROK(애록) 이군요.
다니엘: 사실 승패가 뒤집히고 또 뒤집히고 그랬잖아요. 이름을 거꾸로 읽으면 그런 상징적인 것이고 어쨌거나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였잖아요. 두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은 것 같습니다.
최원정: (다니엘은) 백마고지 전문가세요~ 한번 갔다 오더니 지식이 막 생겨~ 멋있다.
김지윤: 백마고지는 대표적인 전투다 라고 얘기할 수 있는게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정말 많은 포가 떨어졌고 그래서 나중에 어떻게 보면 뭔가 자존심 싸움으로 느껴질 정도로 꼭 여기는 우리가 빼앗아야 돼 이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거든요. 이승만 대통령도 그리고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도 거기를 직접 방문을 해요. 보고 받고 격려하고 그만큼 윗 사람들도 신경을 많이 썼던 그런 전투죠.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영화 고지전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전쟁은 끝났다 이제 모든 전선을 고지전으로 돌입한다. 전쟁 막바지에 이제 전쟁은 이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고 고지쟁탈전이 1952년 중반부터 본격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상영: 백마고지가 지금으로 치면 어느 지방에 있는 건가요?
김지윤: 강원도 철원 쪽에 있는데 철원평야 있잖아요. 쌀도 많이 나고 비옥한 곳이에요. 거기서 군수물자도 확보할 수 있고 거기가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거기를 꼭 차지할려고 싸운거죠.
이시원: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 또 고지라는 지리적 유리한 점도 있고 고지를 점령을 하면은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적에 대해 공격을 퍼붓기 쉽고 고지 하나에 목숨 수천명이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그러니까 치열했던 것 같애요.
정병준: 사실은 당시 휴전 협상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휴전회담장에서는 많은 설전이 벌어졌구요 사실 전장에서는 혈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중국군은 자신의 장점인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주로 한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전선에 쏟아 부었습니다. 왜냐면 한국군이 미군과 같은 화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사기도 저하되었기 때문에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그걸 바꾼 전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네, 전역하고 예비군도 끝나고 민방위까지 끝난 예비역 병장 이광용, 백마고지 전황보고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중국군에 새로 투입된 부대는 마오쩌둥으로부터 만세군 이라는 영웅칭호를 얻은 제38군입니다. 중국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오후 5시부터 시작됩니다. 산 아래 전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를 퍼부었고요 북쪽 5킬로미터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시켜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죠. 국군 제9사단은 이날밤 3차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합니다. 이어 열흘 동안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죠. 12번의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 고지의 주인이 무려 7차례가 바뀌었습니다. 격전 끝에 1952년 10월 15일 마침내 우리 국군이 적을 완전히 격퇴하고 이 고지를 가져옵니다. 이겼다고 그냥 좋아할 때가 아닙니다. 왜냐 각 교전의 간격, 일시적으로 총성과 포성이 멈쳤던 시간을 보십시오.
구분 교전개시 교전종료 지속시간 교전사이간격
1차 10.06.19:15 10.06.20:15 60분 -
2차 10.06.20:40 10.07.00:00 200분 25분
3차 10.07.00:40 10.07.05:10 270분 40분
4차 10.07.14:00 10.08.02:40 760분 8시간 50분
5차 10.08.02:40 10.08.23:05 1225분 0분
6차 10.09.00:20 10.10.00:30 1450분 1시간 15분
7차 10.10.00:30 10.10.06:40 370분 0분
8차 10.10.08:00 10.10.13:20 320분 1시간 20분
9차 10.10.15:20 10.11.12:04 1244분 2시간
10차 10.11.12:15 10.12.13:20 1485분 11분
11차 10.12.13:40 10.12.16:50 190분 20분
12차 10.12.19:50 10.15.11:00 3시간
이광용: 얼마인지, 천재 배우 이시원씨, 계산해 보세요.
이시원: ???
이광용: 몇 초? 아, 이게 바로 계산이 안된다 말예요. 총 열흘간 열여덟 시간 밖에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채 하루도 못쉬고 밤낮없이 총을 쏘고 포를 날리는 엄청난 전투가 이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백마고지전에서 양쪽이 사용한 총포탄의 양, 얼마나 될지~짐작이 되십니까? 이게 열흘 동안 중국군이 5만 5천여발, 국군이 22만여발 총27만 5천발의 포탄이 이 전투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국군의 사망자가 3422명, 중국군은 5372명입니다.
다니엘: 하루에 천명 가까이 죽었네요.
이광용: 참혹한 전투였던 거죠. 이 고지의 원래 명칭은 395고지입니다. 하지만 이날 이후 지금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고지를 백마고지 라고 부르죠. 그 이유가 뭘까요?
이시원: 그쪽 지역에 눈이 많이 와서 혹시 하얘서 백마고지인가요?
이광용: 비슷했는데~ 전투가 끝난 직후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땅에 하얀 돌가루와 흙더미만 남아 있는 모습이 마치 백마가 쓸어져서 누워있는 모습 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시원: 눈 때문이 아니라 민둥산이 되어 버려서 하얗게 보였던 거예요?
이광용: 포탄이 30만발 가까이 쓰였잖아요.
박상영: 잿더미만 남겨져 있었던 거예요?
이광용: 백마고지전은 이처럼 영화 속에 나온 내용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김수진/당시 백마고지전투참여: 백마고지 자체도 높은 산이 아닙니다. 395고지 그래서 거기에 떨어진 포화가 28만 몇천 발이라는데 서울에서 부산을 갔다 올 수 있는 포탄 길이에요. 그러면 그만하면 알죠. 비오듯이 막 쏟아진 거예요. 열흘동안 밤낮으로~
손대익/당시 백마고지전투참여: 백마고지 올라가 보니까 중국군이고 아군이고요.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더라고 막 코를 찔러요. 그리고 우리 부대가 배치돼서 다시 호를 안팝니까. 교통호 파고 뭘 만들려고 땅을 파면 아군 시체의 다리가 나오고 중국군 다리가 나와서 작업하는데 지장이 많았고~
이시원: 저기서 살아 남으신 분들의 인터뷰를 보게되네요~
정병준: 이 백마고지 전투의 경우에는 중국군이 최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수류탄을 가지고 백여명 이상의 결사대를 동원해서 탈환할 정도로 방어를 한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습니다. 그리고 이 백마고지 전투 이후 한국군에 대한 미군이나 유엔군의 평판이 사실은 바뀌게 되는 거죠. 그것 때문에 9사단은 한국군의 사기와 전열이 굉장히 정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전투였습니다.
최원정: 교수님, 한국전쟁의 3분의 2 기간 이상을 38선 내에서 그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다고 저는 알고 있는데 맞나요?
정병준: 51년 1월, 1.4후퇴 이후에 38도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화됩니다. 더 이상 대규모 남진 북진 이런 것은 없구요. 진지전 고지전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최원정: 한반도의 면적을 누가 더 많이 차지 하느냐의 문제니까. 치열할 수 밖에 없었어요.
이시원: 마지막 남은 땅 따먹기 하는거 같애요.
최원정: 우리로서는 동부전선의 더 많은 땅을 좀 가져와서 강원도가 좀 넓어졌잖아요. 38선보다는, 지금보니까 거기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을 묻어놓고 우리 땅이라고 좋아해야 되는지~ 안좋네요~
박상영: 안타까운건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동안에도 휴전협정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루 이틀 동안 더 빨리 맺어졌어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텐데~
이시원: 그래서 영화에 그런말이 나오잖아요. 휴전할 동안에만 우리 전쟁 안하면 안되요.
-------------------------영화<고지전>--------------병사1: 말도 안돼요 진짜 이거는 전선 교착되고 나서 깨작깨작 땅 따먹기 2년에 죽은 사람만 50만이라는데~ 이거 미친 짓 아닙니까? 회담하는 동안이라도 휴전하면 되는데~
병사2: 남성식이 천재인데~ 네가 유엔군 사령관 해라,
병사3: 그래 네가 해라.
이시원: 그걸 안했다는게 참 이상해요.
다니엘: 어쨌거나 협상 중이면은 그럼 휴전할 마음이 있었다는 건데 그 사이에 왜 전투를 멈출 수 없었을까요, 교수님?
정병준: 원래는 최종 결정할 때까지 휴전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양측 다 전투를 계속해서 일종의 땅 따막기로 해서 영토를 늘려나가고 넓히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전투원칙이라고 하는 것에 양측이 합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한쪽에서는 협상이 벌어지지만 한편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병사들을 맷돌에 넣어 갈아버리는 것과 같은 참혹하고 끔찍한 일들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그건 위선적 이예요. 협상 테이블에 앉혀 놓고 아래로는 계속 툭탁툭탁 싸우고 있는 거예요.
이시원: 선전포고는 늙은이가 해도 희생은 젊은이가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왜 이렇게 휴전협상 기간이 길었던 건가요?
김지윤: 사실은 미국 측에서는 빨리 빼고 싶었어요. 우리도 너무 희생이 크다. 7월초 협상이 시작됩니다 (1951.7.10). 그러고서는 2년을 끈 거죠. 1953년 7월 27일에 협상이 끝나서 휴전이 되는 건데 그때 당시 열린 회의만 해도 575회 정도된다고 하고요. 그때 회담록 같은게 있잖아요. 딱 세워 놓았더니 너무 높아갔고 (2미터 10센티), 성인 키보다 사실 높은 거예요. 제가 알기로는 아마 휴전협상 중에 가장 긴 협상이 아니었나~
이시원: 575회 2년 동안 했다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었길래?
김지윤: 접근법도 달랐고 서로 간에 태도도 달랐던 것 같고 어쨌던 우리가 회담 시작이다 라고 할 수 있는게 1951.7.10에 개성의 내봉장에서 있었는데 처음에 굉장히 사소한 것 갖고 싸우는 거예요. 예를들면 서로 국기를 달고 오지 말고 백기를 달고 들어오는 걸로 하자. 백기를 달고 들어왔는데 이게 딱 보니까 유엔군 입장에서는 백기를 달고 북한군 점령지로 들어가는 거란 말이에요.
일동: 항복하는 건데~?
김지윤: 그걸 정치선동에 이용을 하고~
최원정: 쟤네 봐 쟤네들 항복하러 오는 거야~
-----------------북한방송: 그렇게도 오만, 무례하던 미제가 흰기를 들고 회담장으로 우리를 찾아 왔습니다. 강대국의 체면도 돌볼 처지가 못된 모양입니다.-----------------
김지윤: 회담장에 들어 갔더니 의자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내려다 보면 위에 있는 거잖아요. 북한이 유엔군 의자다리를 좀 잘랐다.
김시원: 혹시나 높이에 따라서 권위가 정해지기도 하거든요.
다니엘: 우리 높은 사람이랑 술 마실 때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데 그거 아세요? 그냥 마시면 머리가 위로 올라가서 아래를 쳐다보니까 그래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거래요.
박상영: 어디서 배우셨어요?
다니엘: 모르셨어요?
김지윤: 깃발도 인제 북한측 깃발을 좀 높게 만든다든지 크게 한다든지 권투시합을 보면 권투선수들 기자회견 하면서 상대방 눈을 째려보고 으르렁 하잖아요. 이런 기분이 드는 정도지요.
최원정: 휴전협정 안에 유엔군측과 공산군측이 만났을 때 2시간 11분 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째려보기만 했다면서요?
김지윤: 유엔군측에서도 오인사격인지 일부러 그랬는지 주변에 포탄이 떨어져서 놀란 일도 있었고~
이시원: 어떻게 보면 그냥 유치한 신경전이라기 보다는 굉장히 치밀하고 교묘한 심리전인 거죠.
정병준: 왜냐면 누군가 압도적인 전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좀 더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전전의 형태로 회담을 끌어갈려고 했기 때문에 온갖 사소한 것부터 큰 문제까지 다 논란이었습니다.
최원정: 오늘 우리 제목이 고지를 사수하라잖아요. 전투에서 고지를 사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휴전협상 테이블에서 누가 더 고지를 차지하느냐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그것도 굉장히 중요했다는 거예요.
정병준: 이게 이제 휴전회담의 중요한 다섯 가지 쟁점입니다. ①. 회의의제 채택, ②. 군사분계선 설정, ③. 정전감시기구 협의, ④. 포로교환, ⑤. 외국군 철수, 이 다섯 가지 안에서 회담이 굉장히 지연된 어떤 게 문제였을까요?
최원정: 5가지 사항 중 어떤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나? 저는 당연하게 2번 아닐까요?
이시원: 저는 3번일 것 같은데요~ 어떤 나라에서 감시기구를 하냐 그게 서로 달랐을 것 같애요.
박상영: 지금 저의 현실을 보건데 5번이 될 수도 있겠네요. 미군은 들어와 있고 누가 빠질래 이러면서~ 언제 빠질래~
정병준: 제일 중요한 문제는 포로교환문제였습니다.
박상영: 제일 간단한 문제아네요. 그냥 서로 교환하면 될 일이잖아요.
다니엘: 종전이 되면 고국으로 돌려보내면 되는데~
정병준: 포로문제가 사실은 한국전쟁 휴전협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은 포로의 숫자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최원정: 어느 쪽에 더 많았지요, 교수님?
정병준: 어느 쪽이 많았을 것 같아요?
박상영: 공산군이 많이 내려왔다 올라갔으니까 많이 잡히지 않았을까?
이시원: 웬지 유엔군이 포로관리도 잘하고 작전상 생포도 많이 하고 그래서 공산군쪽이 포로가 더 많았을 것 같은데~
정병준: 사실은 양측이 포로 명부를 교환해 보니까 공산군측에 포로가 되어 있는 유엔군 병사들은 1만2천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전쟁수행 내내 최소한 6만 5천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유엔군측은 공산포로를 얼마나 가지고 있었느냐면 13만명 정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약 10배 이상의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엔군측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측 포로라고 하는 것은 북한군과 중국군만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이래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한 남한의 국민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 청년들을 북한 포로라고 보낸 순 없는 것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사실은 포로 구성의 차이와 숫자의 차이 때문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북한은 전원 강제 송환을 주장했구요. 유엔은 당연히 1:1 송환을 하자 포로가 1만2천명 대 13만명 이니까 사실은 너무 큰 차이가 났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첫 출발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국가 대 국가 간에 전쟁이었으면 포로가 명확할텐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잖아요.
박상영: 또 같은 민족이니까~
정병준: 49년의 제네바 협정이라는게 포로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이 협정의 중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포로는 모국으로 돌려보낸다 라는 원칙이었습니다.
김지윤: 제네바 협정 말씀하셨는데, 7조 같은 경우에는 포로들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조항이거든요. 그런걸 적용해서 보자면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게 맞기는 한데 일단은 숫자가 너무 차이가 많이 나니까 13만명을 그냥 준다는 것은 군력으로 봐서도 굉장히 껄그러운 일이고~
정병준: 10개 사단이 늘어나는 거지요~
김지윤: 그게 결정적으로 또 굉장히 많이 유엔군측에서 잡았던 공산군 포로가 가기 싫다고 그랬어요. 북한으로 가기 싫다고 그러는 거죠. 중국으로 가기 싫다.
이시원: 고향이 북한인 사람도 많았을텐데~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요?
김지윤: 전쟁이 쭉 내려왔다가 한번 쭉 흩고 올라가잖아요. 그 와중에 남한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은 남한으로 와야지 북한으로 갈 수는 없는 거고, 중국군 내에서도 사실 국민당 군대에서 싸우다가 끌려간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에게 어디로 갈래 그러면 본토보다 자기들은 타이완으로 가겠다 라고 했었고 이것 저것 다 싫고 난 제3국으로 갈래요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박상영: 너무 복잡하네요.
정병준: 왜냐면 공산군의 경우에는 사실은 공산정권이 포로들을 어떻게 대하는 지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나 체험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 형법(제62조 조국 반역죄)에 보면 포로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군도 공산군 포로에 대해서 CIE 라는 민간정보교육국에 교육을 시킵니다. 목적은 뭐냐하면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성 위약성을 가리키고 민주주의의 장점을 가르킵니다. 돌아가면은 이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민주주의 전도사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육을 하는 거죠. 교육을 해보니까 이 사람들이 북한으로 중국으로 안돌아가고싶다. 그러면 선택하게 돼죠.
박상영: 사상교육을 통해서 전향을 시킨 경우네요~
정병준: 그런데 사실은 미국식 세뇌였다 라고하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이시원: 미국 입장에서는 꼭 조사도 안뺏기고 또 대대적인 홍보효과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렇게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택한 사람이 많다. 이런 식으로 홍보도 많이 했을 것 같애요.
김지윤: 이게 사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예요. 미국 입장에서는 봐라 우리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것인가~ 이걸 보여줄 수 있는 게 지금 포로로 잡힌 많은 공산군 포로들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품으로 가겠다 라고 얘기하는 것만큼 좋은 선전이 없거든요. 그래서 한번은 유엔군이 조사를 했더니 포 17만명중에서 10만명 정도가 안돌아가겠다.
박상영: 그럼 절반이 넘는 숫자잖아요. 교육이 엄청 효과 있었나 보네요.
정병준: 영화를 보여주었거든요.
박상영: 영화하면 할리우드 영화 보여주면 끝장나요.
정병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미국 서방세계의 자유로운 모습, 풍요의 모습들을 보니까 보고나서는 매료되는 거죠.
이시원: 공산주의 진영에서도 똑 같은 내용을 교육했을 것 같은데요.
정병준: 비교가 안되는 거죠. 전장에서 생사를 걸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지내다가 포로가 됐는데 내가 병사로 있던 시절보다 훨씬 더 좋은 영양상태, 아늑하고 따뜻한 포로생활, 게다가 문화생활 이런 걸 하게 되는 거죠. 그럼 포로생활이 이렇다면 나가서 인간의 세계는 어떨 것인가에 대한 상상을 하게 되고 그런게 심리전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사실은 포로를 둘러싼 휴전협상이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승리의 대체물이었다 그래서 이 포로문제가 이번 한국전쟁을 1년 이상 지체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거죠.
---------------------이광용: 긴급속보입니다. 포로송환문제는 휴전협상이 난항을 겪는 가운데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소장인 미국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됐습니다. 포로 수용소장이 포로들에게 포로가 되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현재 1952년 5월 10일 기준 78시간째 감금중입니다.
다니엘: 아니 수용소장이 납치되었다구요. 그게 말이 되요. 거기 경호가 어떻게 되어 있는데요.
이시원: 맞아요. 무장도 되어있을텐데~
이광용: 치밀한 사전 준비 작전이 있었습니다. 포로들이 일단 포로수용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는데요. 평소처럼 면담을 하려고 포로수용소 앞에 갔는데 갑자기 도드 장군을 수용소 안으로 끌고 들어가버린 겁니다.
이시원: 대담한 작전이네요.
이광용: 이게 포로들의 단독 범행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952년 4월 공산군측 휴전협상 대표인 남일이 비밀리에 지령을 내립니다. 역사저널 그날이 그 지령문을 단독 입수했습니다. 우리 박상영 작가가 읽어 주십시오.-----------수용소 당국이 포로심사를 하려는 어떠한 기도나~
이광용: 잠깐만, 박상영 동무 지금 북한측에서 내려온 지령인데 그렇게 읽으면 어캅니까? (연기가 어색한 박상영 작가~다음 부터는 연기경력 10년의 이시원 배우가~)
유엔 당국으로부터 포로 심사계획을 중단케하는 흥정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미군 장교 중에서 가능하면 고위 장교를 납치하라우~
이시원: 이런 지령을 받았다는 건 내통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 아닌가요?
이광용: 역시 맞습니다. 수용소에는 비밀 지하실이 있었고 그 안에 라디오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전협정의 내용까지도 포로들은 다 알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산군측에서 북한군 특별부대 소속의 공작원들을 수용소 안에 투입하였습니다.
이시원: 그럼 공작원들이 일부러 포로가 돼서 잠입해 있었던 거네요.
이광용: 맞습니다. 이 포로들은 포로송환문제에서 공산군측이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수용소장 도드를 납치해서 이른바 딜을 걸려고 했던 거죠. 전문가 여러분께 이 이후의 내용을 넘기겠습니다. 최원정 아나운서!
최원정: 공산군측은 정말 거제도에서 까지 치밀한 공작을 펼쳤군요.
정병준: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공산군 포로 총15만여명이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죠. 그런데 경비병력은 유엔군측이 9천5백명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폭동이 일어나니까 무력 충돌이 있으면 사실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포로들이 우리는 도드를 납치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치지 않겠다 라는 선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딜을 시작했는데요. 포로들에게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여기 남을 것이냐 하는 송환심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단하라는 얘기였습니다. 또 하나는 포로들에 대한 부당한 학대를 인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상영: 그런데 실제로 부당한 대우가 많이 일어났나요?
정병준: 한국군 병사보다 포로들이 더 잘 대우를 받고 잘 먹었습니다.
박상영: 그런데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라고 한거네요.
이시원: 그 포로들이 송환심사를 원하지 않는데 유엔군이 강제로 한 것처럼 포장을 할려고 한 거고 어떻게 보면 꾸민 거네요.
정병준: 어떻게 해결됐냐면 후임 소장을 파견하게 됩니다. 콜슨 이라고 하는 준장을 파견해서 포로들이 주장하는대로 부당한 대우했다 그리고 송환심사에서 고려해 보겠다. 그래서 이런 문서에 서명을 하고 결국 도드 준장을 석방시킵니다. 그리고 포로들이 이것을 보고서 드디어 아~ 이게 굉장히 좋은 방법이구나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제도 옆에 있는 봉암도 용초도에서 연이어서 공산군측 포로들이 폭동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최원정: 수용소장들은 진짜 후덜덜 했겠어요. 나도 납치되면 어떡 하나, 그저? 그러면 이게 휴전협정이 한창이었을텐데 그러면 유엔군 입장에서는 이게 뭔가 우리한테 굉장히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을텐데~?
정병준: 그러니까 유엔측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리한 무기를 쓰게 되죠.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사실은 북한에 대한 폭격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게 됩니다. 본격적으로 북한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댐, 저수지, 발전소 이런 것들을 폭격하게 됩니다.
다니엘: 이런 기반시설 같은 걸 싹 없애는 그런 작전을 한 거네요.
이시원: 그래서 전쟁의 반대말은 평화가 아니고 창조래요. 전쟁이 모든 걸 다 파괴해 버리니까~
정병준: 52년 6월에 수풍댐을 비롯한 4개 댐을 폭격을 했는데~ 이 당시 1400회 출격을 해서 15개발전소 중에서 13개를 파괴했다고 합니다. 북한이 2주 동안 완벽하게 전력이 차단되어 암흑세계였다고 하구요.
최원정: 수풍댐의 규모가 어마어마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정병준: 사실 52년 7월 11일에는 하루 1254대 폭격기가 2만3천 갤런의 네이팜탄을 투하해서 7천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평양의 일입니다.
박상영: 하루 동안에 7천명이?
정병준: 제가 군대시절에 원산폭격이라는 걸 많이 했습니다. 원산폭격이라는 말이 이 시절에 생겼습니다. 북한 원산에 가장 큰 정유시설과 철도주차장을 집중적으로 폭격을 했구요. 흥남도 폭격을 했구요. 나남도 그랬습니다.
최원정: 원산 폭격이라는게 머리를 땅에 박고 두손을 허리 뒤로 잡고 버티고 있는 거잖아요.
박상영: 그거는 다 알죠.
최원정: 한번 보여주세요. 우리 카메라 감독님 중에서 보여 주실분~ 없으세요? 이걸 어떻게 설명을 못하겠네~우리 이순형 감독님 한번만 해주시면 안돼요. 독일 청년 다니엘이 너무 궁굼해 하고 있어요~(우리 군대에서 많이 했던 것처럼 이승현 감독이 머리를 바닥에 박고 두 손을 허리 뒤로 잡고 두 다리를 바닥에 뻗고 있다).
다니엘: 알죠, 그러면서 엉덩이를 몽둥이로 때리잖아요. 알고 있었어요.
최원정: 그만 하세요~ 감독님이 연세가 있으신데도 저렇게 시범을 해주셨어요.
정병준: 사실은 평양이 집중적인 폭격의 목표물이 되었어요. 평양시가 온통 불바다에 연기로 덮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시원: 거기 사람들은 정말 공포에 떨었겠어요.
정병준: 2차 대전 때 독일 드레스덴에 대한 폭격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었습니다.
박상영: 생각해 보세요. 하늘에 전투기가 1254대가 떠있는 거면은 파란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것 아녜요.
최원정: 지금 북한에서 미제국주의 침략자를 얘기하는 게 그 원한이 이때 생겼을 것 같애요.
정병준: 이때 방공호 파는게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습니다.
다니엘: 드레스덴은 진짜 대표적으로 완전 파괴된 도시였거든요. 결국은 미국측과 유엔군측에서 아예 마침표를 찍겠다는 작전이었던 것 같애요. 아예 북한이 종전을 원하도록 강요했던 그런 작전~
김지윤: 사실 북한은 원했어요. 빨리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게 북한이 혼자 원한다고 되는게 아니거든요. 중국이 원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소련도 원해야 되는데~ 스탈린은 특히나 이것을 굳이 빨리 끝낼 필요가 없어요. 소련은 미국이 여기서 전쟁을 하고 있으니까 서유럽쪽이 공백상태잖아요. 그렇게 나쁘지 않은 상황이고 중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보면 잠재적인 라이벌인데 미국하고 싸워서 힘이 빠지면 나쁘지 않고, 소련이 도와주었다고 하지만 군사를 보내서 인명피해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중국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전쟁이었다. 미국을 상대로 해서 이겼다고 얘기를 해요. 휴전을 해서 누가 이겼다고 보기에 힘들 수도 있지만 중국측에서는 우리는 승리했다고 얘기를 하면서 마오쩌둥의 지배체제가 완전히 강화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뭐냐 북한하고 같이 침략국가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유엔 진출도 하고 국제사회에 드러내야 되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미국과 서방국가가 완전히 격리를 시켜 버리기 때문에 중국이 20년 동안 유엔에 못나와요. 데당뜨가 있을 때까지~
정병준: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미국의 승인을 받았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모든 것을 망가뜨렸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런 한국전쟁에 중국이 휘말리게 되는 것에 대해서 스탈린의 대음모, 대전략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김지윤: 중국이 소련한테 대게 서운했어요.
최원정: 지금 보니까 강대국의 이해관계를 보니까 소련이 제일 얄밉다고 그래야 되나요?
정병준: 스탈린 한테는 한국전쟁이 일종의 바둑으로 얘기하면 꽃놀이패 같은 거죠.
최원정: 또 우리가 간구하고 있는게 일본도 6.25 한국전쟁을 통해서 굉장히 많은 경제적 부를 축적했다면서요.
김지윤: 미국이 일본에 막대한 원조를 쏟아 붓기 시작하죠.
정병준: 독일과 일본, 두 나라가 구원을 받았죠. 한국전쟁으로 드디어 재무장을 하게 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는 거구.
이시원: 이렇게 지금 강대국들이 많은 이득을 얻고 있는데 그러면 이 전쟁이 점점 더 길어질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김지윤: 그런데 이제 전환점이 생겨요.
------------------------휴전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3년 1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이 취임한다. 당시 미국 대선 공약에서 한국전쟁은 빠질 수 없는 사안이었다. 미국의 새 대통령은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는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라 불린 아이젠하워였다. 휴전협정의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아이젠하워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대통령으로 평가 받고 있는데~ 휴전협정 중에 미국의 컨트롤 타워가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뀐 거예요.
김지윤: 아이젠하워는 다들 아시겠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영웅이죠. 유럽에서 총사령관을 지냈었고, 미국 사람들이 전부 좋아했어요. 맥아더 장군과 비교를 하는 데 맥아더 장군 같은 경우는 천상계에 있는 분이시고 조금 오만하기도 하고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이란 평을 받았죠. 대선 때 주요공약이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겠다. 미국 사람들이 너무 지쳐있었거든요. 2차 세계대전 끝난 지 얼마 안되어서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 우리나라 군인들이 아들들이 가서 죽어나가고 있는 것 그만하고 경제 좀 살리고 내치에 신경 쓰면 안되겠느냐 그게 요구였기 때문에 아이젠하워가 그걸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나는 당선이 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
박상영: 실제로 방문했나요?
김지윤: 방문했어요.
박상영: 막 당선된 대통령이 전쟁중인 한국을 방문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김지윤: 취임 전이었어요.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12월에 왔으니까,
이시원: 대통령들이 취임하고나서 첫번째 방문하는게 굉장히 상징적이잖아요.
김지윤: 중요하죠, 이걸 꼭 끝내겠다는 의미가 굉장히 컸던 거고 사실은 아들이 한국에서 복무중이었어요. 미2사단에서 복무중인 아들을 만나고 전선에 가서 병사들과 밥먹고 일선을 쭉 둘러본 거죠.
정병준: 저 화면은 미국 대통령을 환영하는 인파가 환대와 환호가 끝이 없었습니다.
김지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니까 빨리 끝내려면 군사적인 압박이 더 가해져야겠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국군 10개 사단을 늘리고 그리고 당시 대만해협에 미군 함대가 있었는데 그걸 철수하겠다고 얘기를 합니다.
박상영: 근데 우리나라와 대만은 어떤 관계인지 저는 선뜻 이해가 안돼요.
최원정: 저도 모르겠어요.
김지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미국은 7함대를 대만에 보냈어요. 중국이 본토에서 대만을 치면 어떻게 하나 라는 생각을 먼저 했던 거구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국민당도 만만치 않고 호전적이잖아요. 치고 올라가면 안되고 그러니까 중립적인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봉쇄를 하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여기서 철군을 하게 되는 이유는 사실은 그 어떤 나라도 전쟁을 두 군데서 하기는 굉장히 힘들어요. 전선이 두 군데 있고 거기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얘기할 정도예요. 군인출신이니까 그걸 아는 거죠. 여기서 우리가 만약에 함대를 빼면 호전적인 국민당이 갈지도 모르는데 잘 해 보시던지~ 이런 의미가 사실은 담겨져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중국을 압박한 거다 라고 할 수가 있죠.
정병준: 사실은 중국한테 일종의 청신호를 준 거죠. 중국을 봉쇄하거나 압박하는 7함대를 빼니까 휴전협상에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해달라 라고 하는 신호를 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시원: 중국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컨트롤 했고 소련은 어떤 식으로 휴전에 동참하게 되었나요?
정병준: 네,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뀐 것처럼 1953년 3월 5일에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기여한 가장 유일한 긍정적인 기여였다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완전히 급사한 거예요?
정병준: 뇌졸중이었는데 부하들이 누구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시원: 강력한 독재자다 보니까 건드렸다가 잘못되면 자기가 죄를 더 크게 뒤지어 쓸까봐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 가지고 죽었다고 해요 (골든 타임을 놓친 독재자의 말로).
정병준: 그러니까 사실은 마오쩌둥과 스탈린 역시 이 전쟁에서 손해볼 게 별로 없는 그런 판이었습니다. 김일성만 빨리 휴전을 하고 싶었지만 그런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이 그에게 최고의 선물을 제공한 것입니다.
최원정: 묘하게 휴전협정을 두고서 강대국들의 상황과 입장이 확 바뀌네요.
이시원: 그럼 이제 드디어 휴전이 되는 건가요.
김지윤: 아니오, 휴전협정이 갑자기 브레이크가 딱 걸려요. 이분(이승만)이 이제 휴전하는걸 반대하고 나섭니다.
이시원: 이분(이승만)이 그럼 갑자기 휴전을 하려는 와중에 갑자기 테이블 위에 딱 서서~
최원정: 다들 휴전을 원하는데 난 반댈세~하고
김지윤: 난 반댈세 만약 휴전하면 나는 유엔군에서 국군을 빼내서 그냥 북진하겠다---이승만: 우리 끼리만 이라도 밀고 올라가서 사생결단하여 좌우간 통일을 내겠다(1953.6.7).
박상영: 한국이야말로 국토에서 전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고 어떤 나라들 보다도 큰 피해를 입고 있는 와중이잖아요. 군인들 막 죽어나가는데~
이시원: 왜 이러셨나요?
정병준: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에 대한 사형 집행장이다. 지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인데 이걸 걷어차면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이대로 휴전하게 되면 분단이 유지된다.
다니엘: 잠깐만요, 본인이 예전에 단독정부 수립을 굉장히 주장했던 사람이잖아요. 왜 갑자기 분단이 된다라는 논리는 어떻게 된 거죠?
정병준: 한국의 국가적인 생존과 안보가 여전히 위기상황인데 그렇다면 미국이 공식적으로 어떤 안전보장에 대한 공약을 해야 되는데 그게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휴전에 동의하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실은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국무장관이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 민족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달려 있다.”
일동: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원정: 이게 지금까지도 한미동맹의 근간이 되고 있는데 한국전쟁에서 나온 조약이었어요.
김지윤: 원래 미국이 계획하고 있던 거는 북한이 남침을 한다든지 중국이 남침을 한다든지 이런 일이 생기게 되면은 그때는 유엔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도와줄게 그게 대제재 선언이라고 합니다. 그게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성에 안차는 거죠. 그런데 이게 상호방위조약이잖아요. 미국과 1대1로 붙겠다는 거예요. 유엔이나 다른 나라들이 들어오고 이런 거 말고 니네가 우리에게 약속을 해줘 어떻게? 일본에 준하는 걸로 만약에 누군가가 A라는 국가를 침범을 하면 B라는 국가가 자동적으로 개입을 해서 도와 주어야 되는 거거든요. 자동개입 조항이라고 있는데 이것을 넣어서 우리가 완벽하게 안보약속을 가질 수 있도록 보장을 해달라는 거죠. 이때 아이젠하워는 할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요. 단칼에 거절해요.
최원정: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을 경악하게 할만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광용: 속보입니다. 1953년 6월 18일 새벽, 반공포로 27389명이 탈출했습니다--------
다니엘: 탈출이요, 아니 아까 무슨 납치사건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렇게 많은 인원들이 탈출했다니 뭐 어떻게 된 거예요. 배후가 있었어요?
이광용: 그렇습니다. 그 배후는 다름 아닌 그 누구도 아닌 이승만 대통령이었습니다. 유엔군측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이승만 대통령의 직권 명령으로 석방됐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측근에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새가 날아가고 싶으면 가둬둔 것을 열어서 내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 보내주었다.” 익명의 포로들 증언에 따르면요 완전무장한 국군이 들어와 철조망을 굴처럼 뚫어 놓은 탈출구를 직접 안내해 주었다고 합니다. 탈출 후 반공포로들은 재빨리 인근 도시로 사라졌다는 군요. 2만7천여명의 도주 포로가운데 유엔군측에 의해 재수감된 포로는 단931명이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한편으로는 무모한 결정은 향후 휴전협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요?
최원정: 이거는 엄청난 돌출행동인데 유엔군 입장에서 보면 이건 동맹을 깨뜨리는 행동아닌가요.
김지윤: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 초반에 유엔군 사령관한테 작전지휘권을 주었어요. 이거는 작전지휘권 이양에 관한 협정을 위반하는 행동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경악스럽고 화가 나는게 문제가 아니라 공산군측에서도 화가 난 거죠. 너네 알고 같이 짠 거지. 그래서 결렬이 돼죠.
정병준: 이게 사실 이승만의 강점인 거죠. 다음날 자신이 직접 반공포로 석방을 명령했다 (1953.6.19)고 성명을 발표한다.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면 미군없이 작전지휘권 환수해서 단독으로 북진하겠다. 이걸 경고가 아니라 실력으로 보여준 것이죠.
최원정: 박사님, 일종의 벼랑 끝 전술?
김지윤: 그래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주 안좋아했어요.
이시원: 그렇다고 미국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김지윤: 굉장히 당혹스러웠어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일기에 이런 말이 적혀 있다고 해요(1953.7.24).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비협조적이다. 반항적이고 그런 사례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도 없다.” 라는 얘기까지 하게 됩니다. 미국이 그래서 이승만 제거 작전을 심각하게 생각해요. 플랜 에버레디 plan everready 라고 everready의 뜻은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라는 뜻이잖아요.
이시원: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플랜이란 거죠.
김지윤: 항거하게 되면 구금하고 유엔조정을 시행하겠다는 거예요. 미국이 그걸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이승만 이란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골치를 앓고 있었느냐를 알 수가 있는 거고~
이시원; 아무리 그래도 미국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렇게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왜냐면 ① 내정간섭이고, ②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가 없고, ③ 후임자가 이승만 보다 더한 사람은 어떻게 되겠어요.
김지윤: 미국도 그래서 망서렸죠, 대체자가 없어요. 고민 고민해서 실행까지는 안 옮기는데 휴전협상에 완전히 쐐기를 박아서 망가뜨려 버리는 일을 하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정말 심각하게 한번 고려를 하죠.
정병준: 사실은 6월 18일 휴전협정을 사인하기로 했던 날인데 그날 반공포로를 석방해서 휴전협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이 벌어지게 된 거죠. 국무부와 합동참모부가 여러 차례 회의를 열었습니다. 방법은 뭐냐 타협하는 것이다. 그럼 이승만과 타협하는게 필요하다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했냐하면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인 로버트슨 이라는 사람을 대통령 특사로 보내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과 약 보름간 회담을 하게 됩니다. 첫번째 협상의 중요한 안건은 뭐였느냐 결국은 이승만의 단독북진을 억제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엔군 통제하에 둔다면 이제 상호방위조약 논의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논의 끝에 결국은 한국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공유하는 대신에 한국정부는 휴전에 서명을 하지 않지만 반대하지 않겠다 이런 타협을 약속으로 받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한 딜을 추진하여 성공한 거네요.
김지윤: 미국의 외교안보 고위관료들이 모여서 한 대화가 있어요. 그 대화를 보면은 되게 재미있어요. 누가 정말로 이승만을 그렇게 싫어하는지를~Rhee in addition to being a shrewd, resourceful trader is also a highly emotional, irrational, illogical fantastic fully capable of attempting to lead his country into national suicide (美외교기밀문서(1953.7.1)-이승만 대통령은 빈틈없고 풍부한 인물일 뿐 아니라 동시에 국가를 자살행위로 몰고갈 충분한 능력이 있는 매우 감정적이고 분별력이 없고 비논리적인 광신자다). 1954년 11월에 비준을 봐서 효력을 보게 됩니다.
정병준: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것이 한국인들에게 오랫동안 우리가 필요로 했던 안보 혹은 미국을 대표하는 핵우산에 군사적인 든든한 그늘을 제공했다 라는 점을 부정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한미상호방위 조약은 군사조건을 제약당하는 안보와 군사조건의 맞교환이라고 하는 비대칭 조약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김지윤: 미국 입장에서 보면은 이걸 울며겨자 먹기식으로 해준거잖아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었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 당시는 한국이 굉장히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 라고 보기는 솔직히 아니었던 게 미국의 그 당시 주적은 소련이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주적이라고 까지 할 수 없지만 경쟁국이라고 하는 중국이 또 위치가 달라지잖아요. 그런 면에서 한국이 지정학적인 위치가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기 때문에 미국이 생각보다 더 좋은 결실을 얻었고 사실 더 중요한 건 한국이 경제성장도 이루고 민주주의도 이루었단 말예요. 그러니까 미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주고 동맹을 맺어준 이 국가가 정말 전쟁 때문에 폐허가 돼서 백년 동안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이 국가가 이렇게 성장을 했구나 라는 것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선점하는 가장 좋은 사례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상당히 뿌듯하고 예전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둘만한 그런 사안이죠.
--------------------1953년 7월 27일, 약2년간의 협상을 끝내고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 공산군측 대표 남일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작성된 세 통의 휴전 협정서와 부속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문산 유엔군 전방사령부에서 협정문에 서명했다. 국가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그날 오후 평양에서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다음날 개성에서 서명함으로써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은 1129일만에 총성을 멈춘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만이 참전 당사국 중 유일하게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최원정: 드디어 전쟁의 끝, 그날이 왔습니다. 1953년 7월 27일, 10:00시 정전협정이 조인됩니다.
정병준: 양측 대표들이 인제 2년전에 첫 회담 때 처럼 자리에 앉아서 인사말도 안하고 어떤 대화도 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협정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사실은 한국정부는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정문의 한글판은 북한이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공식명칭은 정전협정입니다. 이때부터 한국은 한반도 질서를 규정하고 있는 정전체제 휴전체제의 밖에서 존재하게 되는 거죠. 전쟁의 가장 최대 피해자였던 한국은 배제되어 있는 상태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박상영: 역사적으로 지금 굉장히 긴 시간 동안 어쨌든 휴전상태 정전상태이잖아요. 이 정도 기간이면 아예 전쟁이 끝났다고 봐야 되는 건지~
정병준: 두 가지 상태가 있는 거죠. 하나는 적대적인 관계, 하나는 평화적인 관계, 평화적인 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는데 다들 동감을 하고 있는 건지 그러면 누가 평화협정이 됐든 종전선언이 됐든 이 조치의 당사국이 될 것이나 저는 당연히 한국과 북한, 미국 3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북미평화협상을 중심으로 전개가 되지만 당연히 한국이 이 전쟁상태의 주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저는 개입하거나 관리해야 될 당연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법적으로 우리가 정전협정에는 사인을 못했는데 평화협정으로 가게 되면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이 사인할 수 있는 건가요?
김지윤: 네, 할 수는 있어요. 할 수는 있고, 중국이 들어오느냐 마느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은 얘기가 있는데 중국이 여기에 참여를 할 때 사실 인민해방군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거든요. 공식군대가 들어온 게 아니라 정전협정에 사인한 주체들을 보면 유엔군 사령부에 클라크가 있고 김일성이 있고 펑더화이(彭德懷)가 있거든요. 의용군 지원군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법적으로 중국이 들어올 건 없다라는 주장이기도 해요. 복잡해요.
정병준: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데~ 한반도에 국제법적인 평화가 회복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사실은 유엔 참전국들, 개입한 모든 나라들이 평화협정에 사인하고 그것을 한반도 평화관계의 회복을 기념하는 자리를 만들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최원정: 지금 사실 정전협정 체결하고 70년이 흘렀는데 이 자리에서 북한 핵을 완전 제거한 후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 느낌 아녜요? 그런 기대를 가집니다.
다니엘: 독일은 한국이랑 똑 같이 분단되었다가 통일을 이루었는데 저희는 서독 사람들이 동독으로 비자만 신청하면 갈 수가 있었고 동독 사람들도 나중에 60세나 65세 되었을 때는 서독으로 갈 수가 있었거든요. 편지할 수 있었고, 티브이 프로그램 서로 볼 수 있었고 저는 종전 너무나 급하다고 생각하고 종전이 되지 않더라도 이산가족이 서로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병준: 역사에서 이런 전쟁의 유산이 얼마나 지속될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예를 들어서 신라가 3국통일을 하게되는 순간에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3국통일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신라, 백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이라고 하는 의식을 3국유민의식이라고 하는데 몽골이 침략할 때 까지 500년간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우리가 300만명이 남북한에서 사상자가 낳다고 얘기합니다. 어마 어마한 숫자입니다. 한국역사가 만들어진 이래 최대의 희생자이구요. 5인가족으로 치면 1500만명 안에 희생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은 우리가 손을 뻗으면 우리 직계 가족 안에 희생자가 있는 나의 할아버지, 나의 삼촌, 나의 고모, 이모 안에 희생자가 있는 전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유산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쉽게 예측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두렵고 삼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회복하는 것도 좋지만 잊혀지지 않은 경험이 우리 공동체 안에 남아 있다 라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최원정: 70년간의 정전상태가 종식되고 우리 민족의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져야 된다 라는 간절한 마음이 더 깊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전쟁 70주년기획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끝. (KBS 역사저널 그날 266회에서 정리).
①6.25 한국전쟁은 1952년 중순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고지전으로 돌입하였다. 그 중에 가장 치열했던 고지가 백마고지였다. 1952년 10월 6일, 중국군은 국군이 점령한 백마고지를 공격한다. 전투발발 약 열흘 동안 무려 12차례의 고지쟁탈전이 벌어진다. 고지의 주인이 일곱번이나 뒤바뀐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휴전협정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지만 참혹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열흘간 양측이 하루도 못쉬고 밤낮없이 총을 쏘고 포를 날리는 엄청난 전투가 이어졌다. 양쪽이 사용한 총포탄의 양은 중국군이 5만 5천여발, 국군이 22만여발 총27만 5천발의 포탄이 이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국군의 사망자가 3422명, 중국군은 5372명이다. 하루에 천명 가까이 죽었다. 참혹한 전투였다. 원래 이 고지의 명칭은 395고지였다. 하지만 이날 이후 지금까지 이 고지를 백마고지 라고 부른다. 전투가 끝난 직후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고지에 하얀 돌가루와 흙더미만 남아 있는 모습이 마치 백마가 쓸어져서 누워있는 모습 처럼 보였다. 그래서 백마고지라 부르게 되었다.
② 백마고지 전투는 중국군이 최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이 수류탄을 가지고 백여명 이상의 결사대를 동원해서 탈환할 정도로 방어를 한 최초 대규모 전투였다. 그리고 이 백마고지 전투 이후 한국군에 대한 미군이나 유엔군의 평판이 바뀌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3분의 2 기간 이상을 38선 내에서 전투를 벌였다. 51년 1월, 1.4후퇴 이후에 38도선 근처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었다. 더 이상 대규모 남진 북진은 없고, 오직 진지전 고지전이 계속되었다.
③ 사실 북한은 휴전을 원했다. 그런데 중국과 소련이 원해야 되는데, 스탈린은 빨리 끝낼 필요가 없었다. 소련은 군사를 파견하지 않아서 인명피해가 없다. 중국한테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중국은 북한과 같이 침략국가가 되어버려서 오랫동안 20년 동안 유엔에 진출을 못하게 된다.
④ 한국전쟁으로 일본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아 굉장히 많은 경제적 부를 축적했고, 독일도 구원을 받아 재무장을 하게되고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휴전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3년 1월, 미국의 제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전쟁 종식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다. 미국의 컨트롤 타워가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뀌었다.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12월에 전쟁중인 한국을 방문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군사적인 압박이 더 필요했다 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국군 10개 사단을 늘리고, 당시 대만해협에 미함대를 철수하겠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만에서 철군을 하는 이유는 어떤 나라도 두군데서 전쟁을 하기는 굉장히 힘들다. 전선이 두 군데 있고 거기서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미국이 만약에 함대를 빼면 대만의 국민당이 중공을 칠지도 모르니까 사실은 중국을 압박한 거다.
⑤ 미국 대통령이 트루먼에서 아이젠하워로 바뀐 것처럼 1953.3.5일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에 기여한 가장 유일한 긍정적인 기여는 그의 사망이었다. 뇌졸중이었는데 그에게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골든 타임을 놓친 독재자의 말로). 김일성은 빨리 휴전을 원했지만 마오쩌둥과 스탈린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스탈린이 그에게 최고의 선물을 제공하였다. 그런데 이승만에 의해서 휴전협정이 갑자기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승만이 갑자기 휴전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만약 휴전하면 유엔군에서 국군을 빼내서 그냥 북진하겠다 우리 끼리만 이라도 밀고 올라가서 통일을 내겠다(1953.6.7). 이승만은 지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인데 휴전하게 되면 분단이된다. 본인이 예전에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는데 이번엔 갑자기 분단은 안된다는 논리다.
⑥ 휴전회담의 중요한 문제는 포로교환문제였다. 포로문제가 휴전협상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된 것은 포로 숫자에 큰 차이가 있었다. 양측이 포로 명부를 교환해 보니까 공산군측 포로에 유엔군 병사들은 1만2천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북한은 전쟁수행 내내 최소한 6만 5천명 이상의 포로를 잡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유엔군측은 공산포로를 13만명 정도 보유하고 있었다. 약 10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런데 문제는 유엔군측이 억류하고 있는 공산군측 포로는 북한군과 중국군만 있는게 아니라 북한이 남한을 점령한 이래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한 남한의 국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 동원된 한국인 청년들을 북한 포로라고 보낸 순 없었다. 그래서 포로 구성의 차이와 숫자의 차이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다. 북한은 전원 강제 송환을, 유엔은 당연히 1:1 송환을 1만2천명 대 13만명 이니까 너무 큰 차이가 났다. 이것이 문제의 첫 출발이었다.
⑦ 북한 형법(제62조 조국 반역죄)에 보면 포로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한다고 되어 있다. 미군도 공산군 포로에 대해서 CIE 라는 민간정보교육국에 교육을 시킨다. 목적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성 위약성을 가리키고 민주주의의 장점을 가르킨다. 돌아가면은 이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민주주의 전도사일 거라고 생각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대대적인 홍보효과로 인해 자유주의 민주주의를 택한 사람이 많다. 사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전쟁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봐라 우리 자유민주주의가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우월한 걸 보여주었다.많은 공산군 포로들이 자유민주주의의 품을 선택했다. 한번은 유엔군이 조사를 했더니 포로 17만명중에서 10만명 정도가 안돌아가겠다고 했다.
⑧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비밀 지하실이 있는데 북한군은 그 안에서 라디오를 숨겨가지고 들어와 휴전협정의 내용을 포로들은 다 알 수 있었다. 또 공산군측은 북한군 특별부대 소속의 공작원들을 일부러 포로가 되어서 수용소 안에 투입하였다. 포로들은 포로송환문제에서 공산군측이 우위를 점할 수 있도록 수용소장 도드를 납치했다. 공산군측은 거제도에서 까지 치밀한 공작을 펼쳤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공산군 포로 총15만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경비병력은 유엔군측이 9천5백명, 실은 폭동이 일어나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포로들이 우리는 도드를 납치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해치지 않겠다 라는 선전을 했다. 딜을 시작했는데, 포로 송환심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중단하라는 얘기였다. 포로들에 대한 부당한 학대를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포로들은 한국군 병사보다 더 잘 먹고 대우를 잘 받았다. 그런데 대외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라고 한거고, 포로들이 송환심사를 원하지 않는데 유엔군이 강제로 한 것처럼 포장을 할려고 한 거고, 후임 소장 콜슨을 파견해서 포로들이 주장하는대로 부당한 대우했다 그리고 송환심사에서 고려해 보겠다. 이런 문서에 서명하고 도드 준장은 석방된다. 포로들이 이것을 보고서 거제도 옆에 있는 봉암도 용초도에서도 공산군측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⑨ 공산군 포로들의 폭동과 반란에 대해서 유엔군측도 압력을 가하기 위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유리한 무기,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북한에 있는 댐, 저수지, 발전소를 폭격한다. 52년 6월에 수풍댐을 비롯한 4개 댐을 폭격했고, 이 당시 1400회 출격을 해서 15개발전소 중에서 13개를 파괴했다. 북한은 2주 동안 완벽하게 전력이 차단되었다. 사실 52년 7월 11일에 하루 1254대 폭격기가 2만3천 갤런의 네이팜탄을 투하해서 평양인구 7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군대시절에 원산폭격이라는 걸 많이 했다. 북한 원산에 가장 큰 정유시설과 철도주차장을 집중적으로 폭격을 했는데 원산폭격이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 이때 평양이 집중적인 폭격의 목표물이 되었다. 평양시가 온통 불바다에 연기로 덮였다. 압도적인 화력을 퍼부었다. 정말 공포였다. 생존을 위해 방공호를 파야했다. 하늘에 전투기 1254대가 떠있으면 파란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금 북한에서 미제국주의의 원한이 이때 생겼다고 본다. 미국과 유엔군측의 목적은 북한군이 휴전협상을 장난치지말고 즉각 임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⑩ 이승만이 판단하기에 한국의 국가적인 생존과 안보가 여전히 위기상황인데 미국이 공식적으로 안전보장에 대한 공약을 해야 되는데 그게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덜레스 국무장관이게, “한 민족 전체의 생명과 희망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달려 있다.” 원래 미국은 북한이 남침을 한다든지 중국이 남침을 한다하면 그때는 유엔 차원에서 우리가 함께 도와준다는 대제재 선언을 생각했다. 그게 이승만 대통령 입장에서는 불만이었다. 미국과 1대1로 붙겠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일본에 준하는 걸로 한국이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자동개입을 해 달라. 자동개입 조항을 넣어서 완벽하게 안보약속을 보장 해달라. 이때 아이젠하워는 단칼에 거절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새벽, 휴전협상 중에 있는 반공포로 27389명을 유엔군측의 동의도 받지 않고 탈출시킨다. 사실 이날이 휴전협정에 사인하는 날이다.
⑪ 미국은 당혹스러웠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일기에(1953.7.24). “이승만 대통령은 매우 비협조적이다. 반항적이고 그런 사례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 할 수도 없다.” 라고 썼다. 미국은 이승만 제거 작전을 심각하게 고려, 플랜 에버레디 plan everready 라고 everready의 뜻은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 라는 뜻, 언제든 실행할 수 있는 플랜, 항거하게 되면 구금하고 유엔조정을 시행하겠다, 미국이 그걸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이승만 이란 존재에 대해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미국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대통령을 그렇게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자가 없었다. 국무부와 합동참모부가 여러 차례 회의한 결론은 이승만과 타협하는 것이다.
⑫ 결국 미국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인 로버트슨을 대통령 특사로 보내서 이승만 대통령과 약 보름간 회담을 한다. 협상의 중요한 안건은 이승만의 단독북진을 억제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계속 유엔군 통제하에 둔다면. 미국은 한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공유하는 대신에 한국정부는 휴전에 서명을 하지 않지만 반대하지 않겠다. 결국 이승만의 강력한 딜은 성공하였다. 한국인들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의 핵우산으로 든든한 군사적인 그늘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조건을 제약당하는 안보와 군사조건의 맞교환이라고 하는 비대칭 조약이었다.
⑬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었네 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는 한국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지는 안했는데 미국의 그 당시 주적은 소련이었다. 지금은 중국이 경쟁국으로 부상하여 한국의 지정학적인 위치가 예전보다 많이 높아졌다. 미국은 생각보다 더 좋은 결실을 얻었고 더 중요한 건 한국이 경제성장도 이루고 민주주의도 이루었다. 이건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주고 동맹을 맺어준 이 국가가 전쟁 때문에 폐허가 돼서 백년 동안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이 국가가 이렇게 성장을 했다 라는 것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선점하는 가장 좋은 사례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미국은 상당히 뿌듯하고 예전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두게 되었다.
⑭ 1953년 7월 27일, 약2년간의 협상을 끝내고 마침내 휴전 협정이 체결된다.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 공산군측 대표 남일이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작성된 세 통의 휴전 협정서와 부속 협정서에 서명했다. 이어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이 문산 유엔군 전방사령부에서 협정문에 서명했다. 북한 최고지도자 김일성은 그날 오후 평양에서 중국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다음날 개성에서 서명함으로써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은 1129일만에 총성을 멈춘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만이 참전 당사국 중 유일하게 협정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⑮ 금년 2020년 사실 정전협정 체결하고 70년이 흘렀다. 독일은 한국이랑 똑 같이 분단되었다가 통일을 이루었다. 서독 람들은 통일전에 동독으로 비자만 신청하면 갈 수가 있었고 동독 사람들도 나중에 60세나 65세 되었을 때는 서독으로 갈 수가 있었다. 편지할 수 있었고, 티브이 프로그램 서로 볼 수 있었다. 한국은 이런 모든 인도적인 사업을 북한이 반대해서 못해 왔다. 종전 너무 서두르지 말고 종전이 되지 않더라도 이산가족만이라도 서로 자주 만날 수 있는 그런 날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이게 독일과 한국의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