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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 있습니까? / 눅 2:1-7
성탄 주일 아침에 주 앞에 나와 경배하는 여러분과 가정 위에 성탄의 축복이 넘치기를 바란다. 영어로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면 되고, 중국어로는 ‘성딴콰이러(聖誕快樂)’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메리 구리수마스’라고 인사한다고 한다. 요즘 시골에 결혼으로 온 다문화가정들이 많다. 필리핀은 따갈어로 ‘말리가양 빠스코’이고 베트남은 ‘청 명 지양 신’이라고 인사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아무튼 여러분의 성탄의 기쁜 마음을 담아서 서로 인사하라.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시조 왕이나 종교의 창시자 등 지체가 높은 인물의 탄생이야기는 신비롭고 화려하다. 사실보다 부풀려 포장하고 신격화한 모두가 허구가 아닌가? 2007년도 9월부터 방영했던 고구려 건국을 이끈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그린 ‘태왕사신기’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대단하지 않나? 그에 비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초라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나? 그러나 남들이 볼 때는 화려한 것도, 신비한 것도 없지만 그 탄생에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가 쓴 ‘그 이름’이라는 시를 아는가?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 예수 오 그 이름 /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소녀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다.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복판에서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렸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멩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얶떤 사람의 가슴 속에는 그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빛나는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 문화에 휩쓸려 살기 쉽다는 사실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권세를 추구하며 살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유혹이 되어 왔다. 가난하게 살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부자가 되려는 마음이 있다. 할 수 있으면 유명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고 존경해 주기를 바란다. 어떻게 해서든지 힘 있는 자리에 올라가 세도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은연 중에 있다. 이와 같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세상 문화가 교회 안에도 있고, 교인들 가운데서도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돈많은 사람들을 선망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저는 강남이나 분당 쪽에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은연중에 우월의식 같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쪽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그쪽 지역 사람들을 부러워한다는 사실이다. 부러워하는 쪽도 문제지만, 아무 이유없이 혐오하고 증오하는 반대쪽 사람도 문제이다. 모두 다 부유함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건강하지 못한 생각들이다. 그런가하면 명예와 권세에 대한 유혹도 만만치 않다. 우리 자녀들이 왜 명문대학에 들어가기를 바라나? 솔직하게 말한다면 줗은 학교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 돈도 많이 벌고 높은 명예와 권세를 가졌으면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결혼을 한다면, 어떤 배우자를 원하겠나? 아마 열이면 열, 대부분의 부모들이 좋은 혈통과 좋은 가문, 돈과 재산이 넉넉하고, 좋은 학교 나오고 지위와 명예가 있는 사윗감이나 며느리를 원한다. 5-6년 전의 TV의 일일연속극에 아주 돈많은 집의 회장 아들과 연변 출신의 조선족 처녀 사이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가 있었다. 우리는 시청자 입장에서 그 조선족 처녀가 정말 티없이 맑고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신랑될 사람의 어머니 곧 회장의 사모님이 그 처녀를 업신여기고 딱딱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분개도 하고 혀를 끌글 차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드라마이기 때문에 그러지, 만일 우리가 그런 입장에 처한다면 아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새상 문화에 휩쓸려 살아갈 때가 많다. 그래서 조금만 돈이 있어도 티를 태고 싶고, 조금만 명예가 있어도 자랑하고 싶고, 조금만 권세가 있어도 우쭐대고 위세를 부리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 그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넓은 길로 갈 때가 많다.
수년 전에 미국에서 라이나 화이트라는 18세된 소년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모습을 TV와 각종 언론이 앞다퉈 보도했다. 이 소년은 13세때 혈루병 치료 중 에이즈에 감염된 피를 수혈 받았다가 에이즈에 감염되어 5년 만에 숨을 거두는데, 이때 이 소년의 마지막 말이 미국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아버지가 ‘네가 이렇게 빨리 가야 하다니 너무 가습이 아프구나.’라고 말하자 아버지의 말을 들은 아들은 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 대신 아버지는 제게 소중한 선물을 주셧어요. 아버지는 제게 예수님을 알게 해 주셨잖아요. 저는 예수님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데 나는 조금 뻘리 가는 것 뿐이에요.’ 그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은 예수님 만나 예수님 믿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선물로 주신 ‘예수’라는 이름, 그것은 사람이 지은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이름이다. 마 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금년 성탄절을 맞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탄이 되기를 바란다. 눅 2: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예수님의 탄생은 아기 때부터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주고 있다.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그 표적을 마음에 새기며, 그 표적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배경이다.(1-2)
1절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를 지배할 때였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식민지 조세를 거두려고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황제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본적지에 호적하라고 하니, 당시 이스라엘이 포함된 팔레스틴 지방을 다스리던 수리아 총독 구레뇨가 호적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은 북쪽 나사렛에 살고 있었지만 다윗의 혈통인 유다지파였기 때문에 고향인 베들레헴에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하러 왔다가 예수님이 탄생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단순히 로마 황제가 식민지 조세를 거둘 목적으로 인구조사를 하기 이해 본적지로 돌아가 호적을 하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계시는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출생하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은 바로 역사의 분수령이 된다. 이 역사의 분수령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한다. 지금도 세계 경제가 어렵지만 세계 경제가 미국의 윌가의 증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운 경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올라가니(3-5)
물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요셉이 로마 황제의 명령에 따라 호적하러 본적지 베들레헴으로 갔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벌써 700여년 전에 선지자 미가를 통해 예수님이 배들레헴에 나실 것을 예언하셨다. 미 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바로 예언의 성취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친 요셉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간 것이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영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하면 역사의 수레바퀴를 당신의 뜻대로 돌리신다는 사실을 믿으라.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룩하시기 위해 로마의 시저도 들어쓰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남에 대해 예수님의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베들레헴은 본래 에브라다라로 부르던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 예고의 별을 보고 그 별의 인도함을 받다가 순간적으로 왕이 태어났으면 예루살렘 왕궁에서 태어났겟지 하고 예루살렘 헤롯 궁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박사들이 찾아간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아니했다. 그래서 다시 별을 따라 머무는 곳 바로 베들레헴 구유에서 예수님을 경배하게 되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영이 없으면 우리는 왕궁에 살기를 원하고 왕궁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러나 예수의 영은 우리를 왕궁에 있도록 하지 않고, 작은 마을 베들레헴 낮고 천한 구유로 인도한다. 이렇게 예수님의 탄생이 예언의 성취라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도 믿는 자에게는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는다.
3.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5)
그런데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와 고향 베들헤헴에 호적하러 왔을 때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말한다. 동정녀 탄생 역시 성서에 예언된 예언의 성취사건이다. 구약에 선지자 이사야가 7: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했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안티 기독교 세력들의 공격의 핵심이 바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다. 대표적으로 ‘다빈치 코드’나 ‘만들어진 신’이 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만다. 사람들에게는 동정녀 탄생이 얼마나 이해하기 힘들고 신비적인 사건인지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사 7장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람 나라와 이스라엘이 연합을 하여 형제 유다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 당시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했던지 7:2절하에 보면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라고 한다. 그런 위급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어 11절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라고 하니 아하스 왕이 12절에서 하는 말이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한다. 그럴 때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13하)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14)라고 말한다. 이사야의 예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보여주시는 징조이다. 어떤 징조인가? 지금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아람과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것과 처녀가 아들을 낳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어렵겠느냐? 하나님은 얼마든지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면, 대적들을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란 뜻이다. 그렇다. 교회와 우리의 신앙을 붙들고 있는 신앙고백 중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고백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에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믿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성탄의 중심인 동정녀 탄생을 믿는가? 그렇다면 성탄의 믿음을 나의 삶의 믿음으로 삼기를 바란다. 그리고 동정녀 탄생은 전에도 없었고 우에도 없는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이것을 가리켜 표적이라고 한다. 동정녀 탄생은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메시야이심을 증거해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우리 기독교가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이다. 동정녀 탄생이 주는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유전적 부패로부터 오염되지 아니한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심을 믿기 바란다.
4.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7)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자주 등장하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계시고, 주변에는 말을 포함한 몇 마리의 동물들이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목자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런 그림을 아주 목가적인 풍경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은 너무나 초라한 예수님의 탄생이다. 유럽 교회에 가보면 교회의 웅장함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교회마다 크리스마스의 마구간이 세워지고 어머니 마리아 앞에 아기 예수님을 눕히고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는 세트가 마련된다. 그 세트가 실물크기로 만들어졌으나 교회 건물이 하도 커서 돋보여야 할 구유의 예수가 한쪽 구석 휴지통같이 너무 초라하게 놓여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은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교인들의 마음이 아닐까? 교회란 구유 사건 위에 세워진 교회인데 어느덧 교회가 구유사건을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다. 점점 더 우리의 마음 속에 부각되는 것은 말구유의 예수가 어니라 궁궐 안에 있는 예수요,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과 쾌락의 예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런 만화가 있다. 크리스마스에 가장 잊여진 남자 - 예수라는 말이 있듯이, 성탄의 주인공 예수님이 없는 성탄이 세상을 요란하게 만들고 있다.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 종교학과 ‘오강남’이란 교수가 ‘예수는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한국사회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 책이 약 45,000부 정도가 팔렸다고 한다. ‘역사적 예수는 있지만 현대교회가 가르치는 에수는 없다.’ 이건 좀 생각해 볼 말이 아니겠나? 성탄은 있지만 예수가 없는 성탄, 성탄은ㄴ있지만 예수의 성육신의 삶의 본이 없는 성탄, 이런 면에서 예수가 없다는 도전에 할 말이 없는 교회이다. 왜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도전과 비난을 받나? 그것은 오늘날 교인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12절 말슴처럼 하나님의 표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표적인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비록 초라한 출생같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예수님은 1)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마 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 우리의 허물과 질고를 담당하신 분이시다. 사 53: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동정녀 탄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징조가 되고 표적이 되신 예수님이시다. 찬 96장 1-2절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 죽은 자의 부활 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3) 만왕의 욍이 되신 분이시다. 사 9: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다고 한다. 곧 만사를 다스리는데는 우리와는 수가 다르다고 한다.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아기, 장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모든 짐을 담당하신 구세주이시며, 정사와 평강의 다함이 무궁하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신앙고백이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자리잡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온 세상에 이 진리를 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5.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
예수님의 출생의 초라함이 가장 잘 나타낸 말이 7절의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이다. 로마 황제의 영을 따라 요셉과 마리아도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빈방이 없었다. 먼 여행길에 얼마나 피곤했겠나? 더군다나 마리아는 홀몸이 아니다. 다급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아마 이리저리 여관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빈방이 없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여관집 1층 짐승들이 쉬고 있는 곳에서 마리아는 해산을 하게 되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늦은 밤, 노부부가 호텔로 들어왔다. 하지만 호텔에는 남아 잇는 갹실이 없었다. 저녁 늦게 이 도시에 도착한 노부부, 찾아가는 호텔마다 만원, 마지막으로 찾아온 이 호텔도 객실이 없다는 말에 누부부는 직원에게 애원했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우린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네.’ 직원인 볼트는 노부부를 그냉 내보낼 수 없었다.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하루 쉬다 가시겠습니까? 제 방이 너무 지저분해서 치우는 동안 잠감만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해서 노부부는 그 직원의 허룸한 방에서 그 밤을 보냈다. 다음 날 노부부는 고마워서 호텔비의 3배를 주었다. 그런데 볼트는 객실이 아니기 때문에 돈을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그래서 직원에게 물었다. ‘자네 장래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 볼트는 대답했다. ‘제가 호텔에 있다 보니 호텔 하나 갖고 싶은게 꿈입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꿈이죠.’ 그로부터 2년 후 볼트에게 노부부에게서 편지 한장 날아왔다. 편지 속에는 그를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뉴욕 행 항공권 한장과 여행 경비로 수표도 들어있었다. 편지에 적힌 도시의 주소를 찾아가 보니 그곳은 바로 아담한 호텔이었고, 노부부가 반갑게 맞아한다. ‘지금부터 우리 호텔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자네가 마음씨 착하고 성실히 일하는 걸 보고 우리 부부가 의논한 끝에 자네를 부르기로 했네.’ 감동한 청년은 이 호텔에서 열심히 일하였고 호텔은 날로 번창했다. 뿐만 아니라 노부부의 딸과 사랑에 빠져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데, 이 청년이 바로 유명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체인을 이룩한 조지 볼트이다.
마리아가 첫 번째 성탄절에 예수님이 누울 곳을 찾기 위해 이집 저집 방문을 두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은 오늘도 자신이 거하실 방을 찾기 위해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계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이겠나?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아이가 열 살이 넘었을 때 아내를 잃었다. 상심이 컸던 그는 아들에게 더욱 정성을 쏟아부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거장들의 예술작품을 수집하여 그 슬픔을 잊으려 노력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유언에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주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소장품을 경매에 붙이라고 지시했다. 이 수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소장품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모두 대단한 것들이었으므로 사려는 사람들이 예상대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예술품들은 경매 전에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 한점이 있었다. 그것은 지방의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제목의 보잘 것 없는 그림이었다. 제일 먼저 경매에 붙여진 것은 바로 그 그림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은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앗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다. 그런데 그 순간 변호사는 경매를 중지시킨 다음 큰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다. ‘누구든지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이가 모든 소장품을 가지게 됩니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자신이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에게 징조요 표적이 된다. 예수를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소유한 성탄이 되기를 바란다.
(11 성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