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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 교장 카메오 출연기
이원우
나더러 나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주문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화답(?)하리라.
“난 ‘기인(奇人)’이다! ‘괴짜’라 해도 좋고말고!”
내가 여기 낯선 곳에 올라오기 전, 부산에 살 때 내게 그런 별명을 붙여 준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중에 어느 북구청장은 그 두 음절에 애정과 긍정의 뜻을 담아서 여럿에게 홍보(?)해 줬다. 고맙고말고. 물론 정상궤도를 이탈한 네 삶의 궤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망설이지 않더라, 나도 손사래를 칠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머지않아 고고의 소릴 내게 될 소설집 제목도 <교장 카메오 출연기>로 잡았다. 스물세 번째인 이번 졸저(拙著)의 제목은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 ‘교장’ 앞에다, ‘괴짜’를 넣어 볼까 하는 유혹을 받는 참이다.
지난번에 책 낼 때 이야기를 좀 하자.
난 적잖이 고민을 했었다. 난 기인으로서의 행적을 앞뒤 날개에다 빼곡히 적어 넣었다. 남들은 더러 손가락질을 했으리라. 아니면 콧방귀를 뀌었든지….
그 중에서도 ‘방송 출연 기억’이라는 소제목 밑에 적은 아래 사항들을 행여 접한 독자가 있다면? 쯧쯧, 혀를 찼을지도 모른 일이다. 거부감으로 되돌아오리란 근심 따윈 잠시 접어 두고 여기 옮겨 본다. 부산 KBS-TV 및 부산 MBC-TV, 부산 KNN-TV, 국방 TV, 부천경찰방송, TKBN-TV 등 출연 50회 안팎. 물론 라디오 방송 출연은 별도로 명기하지 않았다.
더 이상 보태면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을 테지만 그래도 입을 열자. 콘서트를 열여덟 번 열었음을 보탠다. ‘야구장에서의 애국가 선창 및 시구’, ‘쟈니리와 두 번 공연(共演)’한 흔적 등도 눈 질끈 감고 덧붙일 참이다. ’기인‘임을 은근히 내세우려는 내 충정(?)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이번 소설집 제목은 <괴짜 교장 카메오 출연기>로 하고 싶다. 표제작과 동일한 셈이다. 앞 책날개에 따로 <PSB-TV> 2부작 연속극 ‘우리 동네 보안관 카메오 출연’이라고 명기(明記)할 테고…. PSB-TV는 현 KNN-TV의 전신(前身)이다. 다른 것들은 생략해도 좋다.
그 전에 내가 꼭 거쳐야 할 일이 있으니 밝히려고 한다.
지금의 내 일상을 비중으로 나눈다면, ‘소설 창작’과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취재’ 등이다. 수필과의 이별이 못내 아쉽지만 대신 나는 인터넷 신문 기자로서 열띤 취재를 하는 걸 새로운 삶의 보람으로 여긴다. 물론 시원찮지만 그 열정만은 가상하다는 자평을 내린다. 특히 특집 인터뷰 기사를 많이 썼는데, 취재원은 다행히 약속이나 한 듯이 연예계 거목(巨木)들이었다.
‘노란 샤스의 사나이’의 한명숙을 세 시간에 걸쳐 만났으니, 그 한 예다. 실제 신문에 일곱 회에 나누어 보도한 사실이 있다. 그런데도 누가 내게 또 허풍을 떠느냐며 비웃으랴, 참, 고(故) 금사향은 여덟 회, 오기택 ‧ 차도균은 다섯 회, 박병호(탤런트)는 네 회 연재했다.
아직도 내가 수첩과 카메라를 가지고 마주앉아야 할 원로 연예인은 수두룩하다. 취재원이 없어 고충이 많다고 하는 동료 기자들을 보며 난 연민의 정을 보낸다. 왜 그리 큰소리냐고 묻는다 치자. 내가 하는 대답은 이거다.
“내가 대한가수협회 정회원이거든? 아마도 문인 중에서는 유일할 거야.”
물론 완전 사실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과거의 이력 하나가 내 입을 가볍게 열게 한다.
“조용필이나 나훈아 남진이 야구장에서 애국가 독창(선창)을 했다는 소릴 들어봤어? 나는 거 기다가 시구까지 했단 말일세. 연예인은 아니지만 테너 아쉽게도 ㅇ 교수도 정작 야구장 마 이크 앞에 선 경력은 없어. 아이러니지. 대신 시구는 정말 멋지게 하더군. 그와 나는 그걸 화두로 삼은 적이 있어”
어쨌거나 이 코로나라는 괴질이 물러나면 내가 취재해야 할, 국민 누구나가 아는 연예인이 둘 있다. 바로 탤런트 이덕화와 최종원이다. 묘하게도 우린 초면이 아니다. 해후(邂逅)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둘을 각각 두 번째 만나는 셈이니까 하는 말이다.
한명회(韓明澮)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리라. 1415년에 태어났다. 당시로선 드물게 일흔세 살까지 이승에 머물렀던, 조선 전기의 정치가로 후대에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설계자였다. 그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알려졌다. 계유정난이라 함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수양 대군이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10월 10일의 정변으로 김종서, 황보인 등은 피살되고 수양 대군이 정권을 쥐게 된다. 한명회는 정남 공신 서른일곱 명 중에서 가장 큰 지략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남긴 전해오는 일상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는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했단다. 또한 재물을 탐하고 색을 즐겼다나? 너른 집을 소유하고 어여쁜 첩들을 많이 두었다고도 했다. 예까지만 들어도 우리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한명회를 말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그는 어머니 뱃속에서 일곱 달 만에 태어난, 말하자면 칠삭둥이, 즉 미숙아였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동안은 사지가 완전치 못했다더라. 한데 차츰 장성하면서 체구가 보통 사람보다 갑절이나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설마하니 그게 사실이겠는가? 거짓말을 보탠 거겠지. 그러나 그 설(說)이 어느 정도는 근거가 있다고 보았을 때 그의 키가 6척쯤 되었으리라. 그렇게 나는 짐작하고 동료들 앞에서 떠든 적이 있다. 그들 일고여덟 명 중 아무도 내게 시비를 걸지 않더라.
그는 딸 둘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두 임금의 장인이 된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별난 처세를 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권력의 정점 전후에서 얽히고설키는 역사는 거의 다 극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명회 그를 화두에서 어떻게 빠뜨리랴. 한명회가 나오는 사극을 보면 재미 하나는 넘친다.
그는 말년에 한강 변에 압구정(狎鷗亭)을 지었단다. 그래서 그의 호도 압구정. 狎은 친압할 ‘압’자다. 친압이란 ‘너무 지나치게 친하다’의 어근이다. 비둘기 鷗 자니까 비둘기와 더불어 지낸 정자, 뭐 이렇게 풀이하면 맞으리라.
한명회가 등장한 사극(드라마)은 수두룩하다. 열 손가락으로써는 세기조차 힘들다 할 수밖에. 글쎄다, 수십 개쯤 되지는 않을는지….
자못 흥미로운 사실. 그 걸출한 인물(?)을 가장 잘 연기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갓 우스갯소리일지 모르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질문’이고도 남는다.
누군 이덕화라고도 하고 정진이라고도 한다. 두엇만 더 들먹이자. 주호성과 최종원을 합해서 넷. 이들 중 투표(?)에 의해서, 최고의 한명회 역 탤런트를 뽑았는데 이덕화라고 하더라.
2000년도 초반이었다. 나는 당시 부산 북구 화명동 소재 어느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정년퇴임을 2~3년 앞두고서…. 더부살이를 하는 신설 초등학교 열다섯 학급 관리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힘든 자리였다. 학생 수만 1500명이었으니, 연방 사고가 터질밖에. 몸서리쳐질 정도였다고나 하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 중에도 오후엔 교장실에서 어느 케이블 TV 방송에서 내 보내는 사극 ‘한명회’를 가끔씩 시청했다. 엉뚱한 동기가 작용해서였다 할까? 거두절미하고 고백하자.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시하기를 기뻐하는 한명회의 생활에서 나와 공통분모를 찾았기 때문이다. 실제 그 무렵에도 나는 교문 밖의 일에 허둥댈 정도로 힘을 쏟고 있었으니까.
한명회와 다른 점은 물론 더 많다. 내 키가 겨우 다섯 척 반 정도인 것에서부터, 몸을 뉘일 만한 좁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던 점. 재물과는 담 쌓고 살았다는 사실도 둘 사이에 부등호를 긋는 근거라 된다 하자. 여자? 아서라, 그런 걸 거론하면 이 졸작으로써는 고고의 소릴 못 만들어낸다. 추측에 맡기자.
다만 경천동지할 비밀이 내게 있으니, 나도 칠삭둥이는 아니지만 여덟 달을 조금 넘기고 태어났다는 사실. 그때 십 리 밖 손 의사(물론 면허가 없는 분, 같은 해에 태어났던 내 친구의 아버지)가 가까스로 나를 살렸다는 후문을 지금도 듣고 있다. 그렇게 생명을 건졌으나 한명회처럼 성장을 하지 못했으리라. 그 사실은 세월이 갈수록 더 나 자신에게 연민의 정을 쏟는 계기가 될 수밖에. 하기야 내 아버지는 5척 단신이었으니 내가 이 정도 자란 것은 부모가 애지중지 길러 준 덕분이라 하자.
어쨌든 어느 목요일 오후 직원들이 따로 모여 연수회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피곤하다며 핑계를 대고 ‘한명회’를 연속 시청하고 있었다. 실은 그때 나는 몹시 아파, 약 힘으로 그나마 ‘식물 교장’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간이침대에 누우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나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습관대로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손달수 교장입니다.”
“교장 선생님, 저 PSB 박 피디입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바쁘시지 않으면 제가 무슨 말씀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말해 보게나. 난 지금 ‘한명회’ 재방송을 시청 중일세.”
“교장 선생님, 제 청을 언제나 들어주셨지요. 시내 수많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계시지만, 저희 방송국 제작에 협조를 해 주실 분은 오직 교장선생님 한 분이시라…. 교장 선생님, 아자!”
“자네 넉살은 여전하구먼. 이번엔 또 뭔가?”
“에, 저희 방송국에서 두 번째 드라마를 제작합니다. 2부작입니다. ‘우리 동네 보안관’이라 는….”
“그런데?”
“번잡한 거리에서 퇴직 경찰관이 혼자서 대상 범죄 예방 및 단속을 위해 봉사 활동을 합니 다. 어느 날 그는 어린이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마약 사범 무리를 체포하게 됩니 다.”
“…….”
“그는 경찰청에서 표창장을 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합니다. 재직 중에 수도 없이 표창장을 받 았으니까요. 대신에….”
“대신에?”
“‘우리 동네 보안관’이라는 일종의 명예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겁니다. 그것 도 경찰관서장이 아니라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임명장을 주시는….”
박 피디의 부연 설명은 이랬다. 무대는 매우 복잡한 시내 어느 동(洞) 근처다. 그만큼 거긴 상대적으로 봐서 우범 지대이기도 하다. 대신 내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데다. 1 ‧ 2 부의 대부분은 그 우범(虞犯) 동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내가 뭘 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박 피디는 퇴직 경찰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장면을 어린이 1,500명 앞에서 녹화하면 된다는 거다. 임명장 수여식만 짧게 카메라에 담으니까, 시청자는 명덕초등학교와 시내 중심가와는 완전 별개의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는 거다.
박 피디는 사전 충분히 연구를 한 셈이었다, 내가 봐서도. 그가 너스레를 떨면서 나에게 매달리는 까닭은 한명회를 닮은 내 성정 때문이었다고 강변해야겠다. 그런 간 큰 짓을 할 만한 교장으로서는 내가 적격이다? 이게 아마 제작진에서 내린 결론이기도 하리라.
내가 물었다.
“주인공이 누구야? 아니 우리 동네 보안관 역을 맡을 탤런트가 누구냐 말이지.”
“아직 확정된 건 아니어서 섭외 중입니다. 교장 선생님, 지금 ‘한명회’를 시청 중이시라 하셨 지요? 한명회 역을 맡았던 탤런트입니다.”
“누구야? 혹시 이덕화?”
“조금 기다려 보셨으면 합니다. 하여튼 거물이니, 교장 선생님이 카메오의 출연을 욕되게 하 지는 않을 겁니다.”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쾌재까지 불렀다. 35여 년 만에 이덕화와의 해후가 이뤄질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뭐 서로를 비교해 보면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는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 교장이라면 어린이들의 선호 대상 1위 아닌가? 상대가 아무리 톱 탤런트라도 내가 꿀릴 건 없지. 게다가 만약 성공리에 모든 게 끝났다 치자. 부산과 경남 전 지역의 주민들이 나를 마치 큰인물이나 되는 것으로 여길 테고….
이덕화를 아느냐고 누가 당연히 묻겠지. 내 대답은 이거다.
“이덕화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당연히 그를 알지. 대신 그가 나를 안다고는 장담하 지 못하겠구먼, 허허. 농담일세.”
이 수수께끼 같은 화두(話頭)의 설명을 아래에 적는다. 전혀 근거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란 뜻이다. 66년도에 나는 어느 사단 부관참모부에서 붓으로 사단장 표창장을 쓰고 있었다. 병장이었고, 계급은.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부서 혹은 중대를 세 개만 들라면 부관부와 헌병대, 그리고 군악대 등 셋이었다. 이덕화의 실형(實兄) 이덕봉이 군악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었다. 내무반(생활관)도 셋 다 이웃해 있었으니, 웬만하면 서로의 얼굴을 익힐밖에. 더더구나 세 끼 식사를 한 데서 했으니까. 더 이상의 설명은 군더더기다. 하여튼 이덕화가 어릴 때였다.
내가 두 형제를 특히 기억하는 까닭은 또 있다. 둘의 아버지가 이예춘인데, 당대를 풍미한 성격 배우(주로 악역)로 이름을 드날렸다. 내가 명문 중의 명문 부산 중학교 3학년 재학 중 악동들과 휩쓸려 나쁜 짓을 저지를 끝에, 수습을 못 하고 가출을 결심한 적이 있었다.
부산 발 서울 행 십이 열차를 타기 몇 시간 전 역전 ‘철도 문화관’이라는 3류 극장에서 이예춘이 주연한 ‘나그네 서름(설움)’을 보았다. 너무나 많이 울었던 기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게 했던 이예춘이었다. 거의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예춘의 열렬한 팬이었고말고!
그런 이예춘의 아들 이덕봉이 바로 사단 군악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이덕봉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안달을 냈다. 일부러 시간을 맞춰 표창장 쓰기를 멈추고 식당으로 내려가곤 했고.
그러던 중 일반 하사로 진급된 어느 일요일이었다. 나는 연병장의 지휘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휴게실 겸 면회소에 부관부 후임 대여섯과 함께 들렀다. 그런데 세상에 이예춘이 미소년(?)과 함께 나란히 앉아, 맞은편에 이덕봉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짖었다. 야, 배우 이예춘(李藝春)이다!
셋과 우리 사인엔 한마디 이야기도 오고가지 않았지만, 나는 느닷없이 노래 한 곡을 불렀다. 웃고 오는 인생이냐 울고 가는 나그네냐/ 대장군 마루턱엔 고향 꿈이 그립구나/ 짖궂은 운명 속에 떠다니는 나그네 몸/ 돌부리 사나운데 눈물 속에 길은 멀다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우리보다 이예춘 쪽이었다. 왜냐 하면 그 노래는 영화 ‘나그네 서름(설움)’의 주제곡(인생은 나그네)이었기 때문이다. 이예춘은 한쪽 손을 들어 흔들며 싱긋 미소를 보내 주었다. 나는 후임들에게 이런저런 사연을 설명하였고. 미소년이 이덕화라는 건 며칠 뒤 이덕봉을 통해 알았다.
그 이덕화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드라마에 내가 카메오로 출연한다? 아무리 지방 방송이지만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닌가 말이다. 카메오가 무어냐고 행여나 누가 물을까 봐 적는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되니까, 사전 풀이를 옮겨보자. 저명한 인사가, 극(劇) 중 예기치 않은 짧은 순간에 등장하여 하는 빛나는 연기나 활동!
아무리 곱씹어 봐도 신나는 일이었다. 내 그동안 수도 없이 방송 출연을 했지만, 직접 연기(?)를 한 것은 처음 아닌가 말이다. 부산 KBS-TV의 아침 마당 2회, 같은 방송 ‘이야기 두 마당(왕종근 대담)이 책날개에 기록되어 있으니 허언이 아니다. 부산 MBC-TV의 ’이웃과 이웃들, ‘사람과 사람들’ , ‘르포 부산 사람들’ 등도 있다. PSB야 더 들먹이면 진부한 느낌만 줄 따름일 테고…. 원종배 아나운서 등과 라디오 대담한 것도 부지기수였음을 밝히고 싶다.
나는 이윽고 커튼을 열어젖히고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인생은 나그네 2절을 허밍으로 ‘소화’시켰다. 이예춘에게 떨어진 자리에서였지만 1절을 선보이던 때부터 강산이 세 번 넘게 변할 세월이 흐른 뒤 아닌가!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여기서 다시 재현해 본다.허무한 게 인생이냐 덧없는 게 청춘이냐/ 애달픈 그 사랑에 조각조각 날아간 꿈/ 최 많은 이 아들을 자나깨나 기다리며/ 어머니 오지랖엔 눈물인들 마르리오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서 커튼으로 그걸 훔쳤다. 노크를 하고 연수가 끝났다는 걸 보고하러 들어온 교감은 적잖이 당황하곤 도로 문을 닫았다.
그런데 청천벽력과 다름없는 전화가 온 것이다. 도무지 믿기지 않을…. 며칠 뒤 녹화가 시작되는데, 이덕화의 일정이 잡히지 않는단다. 그래 한명회 역을 다른 탤런트가 맡에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박 피디의 전언이다. 그가 하는 말이다.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꿩 잡는 게 매라 했습니다. 아니 꿩 대신 닭이라 했습니다. 최종원 탤런트는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이고, 이덕화 탤런트에 비해 명성이 뒤지지 않습니다.”
“…….”
“교장선생님, 카메오 역할을 하시기에 오히려 더 좋은 조건일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조건이라니?”
“녹화 당일 교장 선생님이 보안관 아니 최종원 탤런트에 비해 뭔가 하나 우위(優位)에 서 있 다는 걸 느끼게 되실 겁니다. 이덕화 탤런트보다….”
드디어 첫 방송이 나간 모양이었다. 난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덕화가 최종원으로 바뀜으로써 실망감에 빠진 것도 까닭이었다. 그보다는 병중에서도 나는 내가 회장으로 있던 북구 문화 예술인 협회의 정기 전시회 준비에 바빴기 때문이라고 하자. 까짓 카메오 역할이야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심이 나를 부추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가끔은 혼자서 조례대 위에서 임명장을 건네주는 포즈를 취해 보았다. 단 대독문(代讀文) 따위는 아예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문중섭 사단장과 한무협 사단장, 김성원 부관참모와 이정우 부관참모를 존경했지만, 그 ‘대독’ 문화 혹은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난 제대하고 나서 교육 현장에서 그걸 재현시키기를 꺼렸던 거다. 난 교장 승진 이후엔 한 번도 내가 읽지 않은 상장이나 표창장 혹은 졸업장, 임명장을 준 적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임명장 원안을 한 번 만들어 보라고 두 교감에게 운을 떼었다. 한데 군 복무 시절 표창장과 감사장 일을 했던 나로서는 만들어 온 문면이 마음에 들 리 만무했다.
내가 다시 초안을 잡고, 붓으로 직접 쓸 수밖에. 상대 보안관의 이름은 최종원이 아니라 김병참이라 적었다. 극중 전직 경찰관인 주인공의 이름이 그거였으니까.
그날 두어 시간 머릴 맞대고, 녹화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교감과 교무 부장 등 서넛이 모여서. 모든 게 순조로웠다.
그래도 걱정이 안 되었다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카메오지만 그 역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면 학교 모양이 말이 아니지 않는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이 걸맞을지 모르지만, 몸도 아픈 나를 걱정해 주면서 자문을 해 주는 이가 있었다. 북구 문화원 원장이었다. 그가 수시로 들러, 당일 문화예술인 회원과 문화원 자문 위원들을 동원하자는 조언도 주었다. 그가 하던 말이 지금 생각해 봐도 재미있다.
“장(場)에는 장꾼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엑스트라로 출연하면 어울릴 겁니다. 학부모도 다 수 구경하러 나올 테니, 금상첨화겠지요.”
그것도 경사라면 경사라 할 수 있을까? 학교 안에서 간질로 인한 어린이 사망 사고가 났을 때였다. 교장실에서 신문 조서를 작성한 경찰관(경사)이 있었는데, 그가 내 앞에서 담배를 꼬나 문 것이다. 내가 불같이 화를 내며 호통을 쳤고말고. 꼬리를 내리던 그가 정보과 형사한테서 들었다며 녹화 당일 학교에 나와서 자리를 빛내(?) 주겠다고 한 것. 부산시의회 배(裵) 부의장을 통해서 그 자초지종이 경찰서장에게 알려졌고, 교장실에서의 행패(?) 때문에 경사가 혼이 났던 모양이었다.
드디어 당일 아침이 밝았다. 2월 28일경이었다. 학년말 방학을 하는 날이어서 별다른 일정은 없었다. 1500명 전교생 중 4~6년 학생들만 운동장에 나오게 하라고 일러두고 나름대로 난 준비를 했다. 나는 여느 때와는 달리 정장 차림으로 출근하였다.
한데 털어 놓지만 그때까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반발 아닌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입을 여는 사람들은 왜 사서 고생하느냐는 거였다. 뭔가 뒤숭숭하다는 느낌에도 지배당할 수밖에.
그건 또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우리 학교에서는 조회에 참여하는 전채 어린이들의 광경과 임명장 수여하는 나와 주인공의 모습만 카메라에 담는다. 대신 어린이 전문역의 다른 학교 아역 탤런트들이 설치는(?) 게 더러 찍히고.
게다가 말이다. 열서너 평 서민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 학구다. 한데 마약 퇴치를 위한 퇴직 경찰관이나 어린이들의 활동 공간과도 너무나 거리가 보안관이라면? 얼토당토않다는 항의가 들려왔다. 교장의 카메오 출연이 어린이들의 교육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뜻도 포함되었음을 바보가 아닌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결론을 말해 보자. 무지막지하지 않으면 꿈도 못 꿀 일과 맞닥뜨려 내가 이긴 셈이라고나 할까?
하기야 지금과 달리 학교 경영의 권한이 교장에게 상당히 쥐어져 있던 때였으므로 그게 가능했으리라. 그 일을 계기로 학교 앞 교통안전을 위한 펜스를 우선 설치해 줄 거란 전망을 섞어 가정통신문도 보냈다. 그 시설은 내가 배 부의장에게 내밀하게 부탁하여 약속을 받은 터여서 큰소릴 칠 만했다 하자.
9시 30분경에 최종원 탤런트가 피디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도착했다. 그는 생각보다 겸손했다. 허리를 깊이 숙이고 먼저 명함을 건네주기에 나는 그걸 얼른 받아 들었다. 다른 건 없었다. 한국 연극인 협회장 탤런트 최종원, 그리고 협회 사무실과 그의 휴대폰 번호 등등이 전부였다.
내 명함을 최종원이 살펴봤다. 복잡해서였을까? 그는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한 군데다 시선을 붙박는데…. ‘부산연예협회 창작분과고문/가수분과회원’을 뚫어져라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하는 말이다.
“아, 형님 가수이시군요. 데뷔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고 대답하기를 ‘부산노래 열아홉 곡’을 테이프에 녹음함으로써 그걸 바탕으로 가수 흉내를 낸다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회갑 기념으로 교통문화 회관에서 부산 노래 콘서트를 열었으니, 자격을 문제 삼지 말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남백송 원로 가수가 세 곡을 도와주어 성공리에 행사를 마쳤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참, 530명 교통문화회관에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는 장광설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얘기를 듣고 난 그의 표정은 더욱 부드럽고 진지해지더니,
“형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서도 열대여섯 권 되는 걸로 보아 형님은 집념이 굉장한 분이 시군요. 그건 그렇고, 부산 노래 중에 ‘울며 헤진 부산항’이 있지요. 그거 한 번 이 자리에서 열창하셨으면…. 제게 드라마 출연 기념도 될 겁니다.”
그때에 이미 도착한 상당수의 지역 유지들이 파안대소했다. 교장실이 왁자지껄할밖에. 박수 소리 또한 요란했다. 울며 헤진 부산항을 돌아다보니/연락선 난간머리 흘러온 달빛/ 이별만은 어렵더라 이별만은 슬프더라/ 더구나 못 잊을 사람끼리 음음음음을// 달빛 아래 허허 바다 파도만 치고…
내가 달인 녹차 한 잔씩을 하고 나니 교감이 녹화 준비가 다 되었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재빠른 직원 대여섯 명이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최종원에게 사인을 받는다. 나는 운동장으로 내려가면서 최종원 탤런트에게 내가 직접 쓴 거라며 임명장을 슬쩍 보여 주었다. 군대에서 모필병으로 일했노라고 했더니 그는 또 감탄사를 내뱉었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최종원은 내게 슬쩍 한마디 우스개를 건네는데, 바로 이거였다. 형님 이제 이덕화의 한명회에만 빠져 있지 말고 이 최종원의 한명회에도 눈길을 주시지요!
이제야 얘기지만 연기자 최종원의 비중은 이덕화에 뒤지지 않았다. 두어 해 전에 ‘왕과 비’라는 사극의 한명회 역으로 굉장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다만 나는 이덕화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게 그 까닭 아니었던가?
날씨는 생각보다 추웠다. 촬영 차량에 장착한 높은 사닥다리 위에 카메라가 여러 대 달려 있었다.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대본대로 최종원 아니 보안관을 불러내어 내 옆에 서게 했다.
그리고 그가 우리 동네 화명동 아니 남천동의 치안을 위하여 일한 것을 대략 소개하였다. 내빈들은 지휘대 옆으로 마련해 둔 의자에 앉았고. 이어지는 임명장 수여. 한데 말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최종원의 키가 생각보다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내게 그가 내려다보였으니까.
카메라 앵글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나와 마주선 그는 내가 수여하는 임명장을 받으려 했지만, 힘들어 했다. 하는 수 없이 급히 빨간 벽돌 두 개를 놓고 그 위에 서게 한 뒤에라야 수월하게 녹화를 마칠 수 있었다. 어린이들이며 수십 명의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박 피디가 하던 말이 순간 떠올랐다. 교장 선생님, 최종원보다 교장 선생님이 우위임을 알게 될 순간이 올 겁니다!
바빠서 뛰어다니던 박 피디가 순간 내 시야에 잡혔다. 다시 알 듯 모르듯 손을 흔드는 그를 보고 나도 미소로 답을 했다. 그리고 이덕화는 모르지만 최종원은 키나 덩치로 봐서 미스캐스팅일지 모르겠다는 진단을 했다. 이덕화는 키가 175센티미터나 되니까. 나는 중얼거렸다,
하기야 최종원도 170센티미터라 했으니 둘 다에게 속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당일의 모든 촬영은 무사히 끝났다. 내가 주머니를 털어 최종원과 방송국 제작진, 유지들에게는 인근 중국 음식점에서 간단한 점심을 시켜다 먹었다. 수저를 든 사람은 스무 명 안팎이었다. 학교 급식 메뉴로 대접을 할 수 있지만 그건 어떤 의미로든 바람직하지 않았다. 3월 15일 저녁 아홉 시에 방영된다고 했다. 나는 어린이들이 하교하기 전에 가정통신문을 급히 만들어 보냈다. 그날 잊지 말고 시청하라고.
그럴 땐 한명회를 내가 닮았다고 할 수밖에. 나는 안달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날부터 틈만 나면 ‘우리 동네 보안관’을 시청하라며 아는 사람 모두에게 연락하였다. 시골에 사는 누나며 종친들에게까지 극성을 부렸다.
그런데 사고가 난 것이다. 그걸 되뇌어 보면 지금도 식은땀이 난다. 3월 15일경이었으리라, 그날이. 저녁 무렵 난 다시 여럿에게 시청하라는 성화를 부리고 나도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내 모습과 우리 학교 어린이 이모저모는 손톱만큼도 안 나오는 게 아닌가?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일부터 얼굴을 들고 어찌 다니겠는가? 안 그래도 중환의 후유증 때문에 고생하는 중인데…. 당장에 박 PD에게 전화를 넣었다. 녀석의 대답이 기가 막힌다.
“교장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래도 점심 한 그릇 사 주십시오.”
“예끼 이 녀석!”
그 창피함이란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다. 그로부터 녀석과는 거래(?)를 끊었다. 지금은 KNN으로 바뀐 방송국과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서울 근교에서 여생을 보낸다.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압구정동에 간다. 한명회의 흔적을 보러 말이다. 두 탤런트 이덕화와 죄총원은 거기서 만날지도 모른다. 압구정동에서 어슬렁거리는 헙수룩한 차림에 하사 모자를 쓴 노병(老兵)에게 행인들은 어떤 시선을 던질까? 자못 궁금하다.
이원우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국제PEN한국본부 이사 ‧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한국가톨릭문인회 이사 ‧ 대한가수협회 정회원/ 수필집 <어머니의 초상화> 등 15권 ‧ 소설집 <母부대 女軍만만세> 등 6권, 기타 3권/ 황조근정훈장 ‧ 자랑스런 부산시민상 봉사본상 ‧ 부산교육상 ‧ KNN부산방송문화방송문화 대상 ‧ 화쟁포럼문화대상 ‧ 부산PEN문학대상 ‧ 경기PEN문화대상 ‧ 한국전쟁문학상 ‧ 표암문학대상 ‧ <문예시대> 문학대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