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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동학,증산 스크랩 해월 강원도 인제 -, 갑둔리, 귀둔리, 느릅정이, 성황거리
멩이 추천 0 조회 131 08.01.23 23: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원도 인제 지역 답사기

- 갑둔리, 귀둔리, 느릅정이, 성황거리

 

 


  

  스승님의 발자취를 찾는 일은 후학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지만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미적미적하다 이제야 하나씩 하나씩 정리하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스승님의 발자취를 찾아 정리하는 모임이 많이 있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같이 참여할 기회를 갖기도 한 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구의 답사팀보다 먼저 시작해서 많은 성지 정보들을 정리하고 있는 부산시교구의 한울산악회가 해월신사께서 계셨던 강원도 북부지역을 답사한다고 하는 소식을 성지순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 접하게 되어 그곳이 그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라서 선뜻 마음을 내어 우리 부부가 같이 다녀왔습니다.

  

  지난 6월 5일 저녁 8시 40분에 부산 서면의 메디컬센터 앞에서 우리 부부를 포함한 10명의 성지 순례팀은 렌트카에 몸을 싣고 어둠을 뚫고 출발했습니다. 내수도가 부산시교구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저도 오랜 기간 같이 부산시교구를 들락거려 다들 친숙한 분들이라 별 어려움 없이 금새 한울산악회 분위기에 익숙해졌습니다. 강원도까지는 제법 먼 길이라 빠른 길인 신대구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나 홍천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부치고 새벽에 다시 이동하여 유적지를 순례하자는 잘 짜여진 답사 일정과 순례와 관련된 정보를 담은 유인물도 잘 준비되어 그동안의 답사와 산행으로 쌓인 한울산악회의 내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밤길을 달려 경상도와 충청도를 지나 강원도로 들어서니 날이 바뀌었고 우리가 숙영지로 목표했던 홍천에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홍천에 도착해서 잠잘 곳을 알아보았으나 마땅치 않자 부산시교구의 정순당께서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식당을 찾아 내일 새벽까지 잠시 쉬어가자는 사정을 이야기하니 주인할머니께서 선뜻 허락을 해줘 강원도 홍천에서 해물탕에 맥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잠시 눈을 부쳤습니다.


   다음날 새벽 5시 전에 일어나 새벽기도식을 심고로 대신하고 홍천을 출발하여 한 시간 가량 달려 도착한 곳은 인제군 남면 신풍리의 신남휴게소였습니다. 수암 정의수 동덕은 이곳이 해월신사께서 계시던 인제의 느릅정이의 최영서의 집이 있던 자리인데 지금은 이렇게 변했습니다라는 설명과 함께 이곳에 대해 상세히 알려 주었습니다. 설명을 듣고 참례식을 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그러나 이곳도 다른 유적지처럼 어떤 표식도 없어 가슴이 찡했습니다. 이곳이 몇 사람들의 유적지로만 남아서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루 속히 교단 차원의 유적지 정비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제 느릅정이는 해월신사께서 동학혁명 이후 약 1년간 피신을 한 곳입니다.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조정에서는 해월신사에 대한 체포령이 거세졌고 신사님께서는 전라도 지역을 벗어나 포덕 36(1895)년 1월에 강원도 홍천을 거쳐 이곳에 도착하셨습니다.  당시 해월신사를 모시던 의암성사는 끼니가 여의치 않자 동생인 병흠과 함께 간성을 지나 원산에서 장사를 하여 이득을 많이 내어 여러 사람이 몇 달 숙식을 해결할 정도의 재산을 모아 이곳으로 돌아와 해월신사를 모셨다는 교사의 기록도 전합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이곳에서 “군자 환란에 처하여는 환란의 도를 행하며 곤궁에 처하여는 곤궁의 도를 행함이 가하니 제군은 오직 천리에 순하여 기회를 기다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동학혁명의 실패 이후 무너진 교단의 중흥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셨습니다. 깊은 산중인 이곳은 피신하기에 적절한 곳이었고 또 이 지역이 동학혁명과 직접 관련된 곳이 아니어서 탄압이 심하지 않았기에 꽤 오래 머무르지 않았나 보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이해 12월까지 이곳 느릅정이에 계시다가 산이 더 깊은 원주 치악산 한 가운데인 수례촌으로 이주하십니다.


   다음으로 우리 일행이 들른 곳은 인제 남면 갑둔리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갑둔리는 해월신사께서 포덕 21(1880)년 한문 경전 『동경대전』을 간행한 곳입니다. 해월신사게서는 경북의 청송을 거쳐 영월을 지나 포덕 20년 4월이 이곳으로 오십니다. 당시 이곳에는 많은 교인들이 있어 해월신사께서 김현수의 집에서 대설법을 하셨다고 『천도교백년약사(상)』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많은 제자들이 있었던 이곳에서 해월신사께서는 그간 지목이 심해 행하지 못했던 교단의 역사를 정리하고 교단의 발전을 위해 경전을 간행하십니다. 그리하여 포덕 20(1879) 11월경에 인제군 방시학의 집에 유적편집소를 설치하고 편집정리가 끝난 유적을 날인하여 봉함한 후 뒷날을 기약하면서 유시헌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상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도원기서』가 이 유적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포덕 21(1880)년 5월 9일 김현수의 집에 경전인쇄소를 설치하고 6월 14일에 경전을 완공하여 이튿날에 봉고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곳에서 간행된 경전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종이공장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인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지식이 많았을 것이고 이곳 심산유곡인 갑둔리에는 좋은 목재가 많아 목판으로 경전을 간행하기에는 적절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제와 정선의 교인들이 해월신사의 뜻을 받들어 경전 간행에 관한 경비를 염출하여 무리없이 완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찾은 갑둔리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몇 년 전 군사시설로 편입되어 이곳에 있던 민간인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갑둔초등학교와 몇몇의 가옥만 폐가로 남아있었습니다. 예전에 이곳을 다녀가신 분들의 말씀대로 김현수의 집을 찾으려고 했지만 마침 이곳에서 군작전이 진행중이라 결국은 쫓겨나다시피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갑둔초등학교 부근에 고려시대의 갑둔리3층석탑이 남아있어 이곳이 갑둔리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갑둔리는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갑둔리란 이름도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주둔하던 곳’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이 군사시설로 될 때 마을 노인들이 옛날의 마을이름이 그대로 전해져 결국 군사시설이 들어선다 하면서 고향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휑하니 뚤린 가슴을 달래며 고개에 올라 안개에 쌓인 갑둔리의 전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기약하는 심고를 드리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성황거리도 갑둔리 부근에 있다고 하였지만 갑둔리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부근을 지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새벽 일찍 출발해서인지 이른 시간에 두 곳을 답사하고 아침을 떡으로 대신하고 다음으로 찾은 곳은 인제읍의 귀둔리로 향했습니다. 귀둔리는 대신사의 큰아들 세정이 신미교조신원운동의 여파로 관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곳으로 와서 은거하던 곳입니다. 세정은 이곳에서 포덕 13(1872)년 1월 양양옥에 수감되고 처인 강릉 김씨와 여동생은 인제옥에 수감됩니다. 세정은 양양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 이를 이기지 못하고 이해 5월 12일에 장살당하니 당시 나이 26세였습니다. 대신사의 장자인 세정은 아버지를 따라 순교합니다. 최근 총부에서 이곳의 땅에서 채토하여 경주의 선영에 모셔져 있는 김씨부인의 묘와 합장을 하고 묘비제막식을 행하여 그의 순교를 교단 차원에서 정비했는데 이는 교단사적으로도 매우 뜻깊은 일이라 여겨집니다. 귀둔리는 자연 부락이 여러 곳이어서 제법 큰 동리로 어느 곳에서 세정이 있었는지는 확연치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귀둔리의 마을 표지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심고를 드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오전 10시를 넘겨 귀둔리를 출발하여 진부령을 넘어 고성으로 향했습니다. 일행은 차를 타고 진부령을 넘어 설악산을 지나가면서 교사에 해월신사께서 설악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으면 교인들이 스승님의 행적도 찾고 설악산의 절경도 즐길 수 있는데 그런 기록이 혹시 없는지 잘 살펴보라고 우스개소리를 하면서 넘었습니다. 해월신사께서 한가로이 여행을 다닐 형편이 아니었겠지만 인제에서 고성을 넘어가는 길이 설악산 줄기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설악산을 가로지르는 진부령을 지나 도착한 곳은 강원도 고성의 왕곡마을이었습니다. 왕곡마을은 해월신사께서 포덕 30(1889)년 10월 충북의 괴산군 신양동에서 인제의 김연호, 김현경의 집을 거쳐 설악산을 넘어 3개월간 피신하던 도인 김하도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해월신사께서는 이곳에서 10여 호를 포덕하시어 이후 강원도 북부지방의 동학의 거점이 되어 동학혁명 당시 양양, 속초, 거진 지역의 동학군이 기포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동학군과 관련된 일화로 유명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군이 기포하여 이곳에 주둔하자 관군이 이곳을 습격하였는데 급히 쫓기던 동학군들은 지니고 있던 전대 등을 함일순의 집 오줌통에 숨겨 놓고 ‘후일 다시 들릴 때까지 잘 보관해 달라.’는 당부를 하였으나 그 후 동학군들의 소식이 없자, 10년이 지난 후 함씨 일가는 당시 묻어두었던 돈을 밑바탕으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의 도움을 기억한 함씨 후손들이 이곳에 동학사적지를 건립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을 입구의 땅 150평을 기증하여 영동지역의 천도교관의친목회와 함께 《동학의 빛 왕곡마을》이라는 사적지를 조성하였습니다. 마을입구의 잘 조성된 사적지에서 참례식을 가지니 이전의 순례와는 다르게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해월신사의 포덕이 형상으로 나타난 결과를 볼 수 있어 흐뭇했습니다. 더욱이 왕곡마을이 민속촌으로 꾸며져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라 마을입구의 《동학의 빛 왕곡마을》은 더 빛나 보였습니다.


    이제 차를 남으로 몰아 양양군청으로 향했습니다. 세정이 장살당한 양양옥이 있던 곳입디다.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양양군청에서는 당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없어 사진에 군청을 담고 또 남으로 차를 돌려 강릉으로 향했습니다. 강릉은 동학혁명 당시 정선, 평창, 영월, 원주 등의 동학군이 충청도의 제천, 청주 지역의 동학군과 연합하여 대관령을 넘어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던 곳입니다. 전라도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관아를 점령한 곳이 강릉입니다. 그리고 동학혁명이 실패한 후 홍천의 차기석 대접주를 비롯한 많은 동학군들이 체포되어 이곳으로 끌려와 강릉교장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강릉관아는 구 강릉시청이 자리했던 곳으로 지금은 객사문만이 남아 있어 강릉부의 잔영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광지로 조성하고 있는 객사문에서 심고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찍고 순례 일정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강원도 설악산 부근의 해월신사 유적지 순례는 작년 6월부터 준비했지만 이번에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부산에서 제일 먼 거리인 이곳의 순례는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순례를 떠난다 떠난다 하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했던 곳을 한울산악회의 도움으로 쉽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녁 해질 녘에 부산에 도착해 순례소감을 나누며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숙제를 하나 마친 초등학생의 심정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런 성지순례 모임들이 많아지고 순례가 일상화될 때 스승님의 발자취가 사라지지 않고 교인들의 신앙이 깊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승님이 계시던 곳에서 심고를 드리고 주문을 외울 때 우리가 평상시 느끼지 못하던 스승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숨결을 느끼면서 한사람의 신앙인이 자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 한 달 후면 하계 방학이 시작됩니다. 방학이라고 해도 다들 바쁘시지만 시간을 내서 스승님의 숨결을 찾는 발걸음을 한 번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느릅정이가 있던 곳은 이곳 신남휴게소 부근이라고 함)
(갑둔리 전경)
 
 
 
 
 
 
 
 
 
 
 
 
 
 
 
 
 
 
 
 
 
 
 
 
 
 
 
 
 
 
 
(귀둔리 입구 표지석)

(세정이 장살당한 양양감영자리에 들어선 양양군청)

(고성 왕곡마을 입구의 동학의 빛 사적지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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