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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이상국전집 제16권
●고율시(古律詩)
목차
庚辰八月。予自桂陽。以起居注禮部郞中被召。入直西省有作。
友人家飮席贈妓
次韻孫吏部哭趙相國冲
栗詩
宿金鍾寺明日作
朝闕
路上詠雪
冬日。與僧飮戲贈。
次韻金承制仁鏡謝規禪師贈歸一上人所畫老檜屛風
次韻陳少卿和權員外謝人寄躑躅杖詩。
明日復以四首寄之。
入關侍宴
次韻文禪師哭覺月首座
謝李樞副勣見訪
燈夕。與劉大諫冲祺。聯行侍宴有作。
劉見和。復答之。
王大后挽詞
謝申大丈敎授愚息澄。
賀同年兪侍郞升旦初侍燈夕宴
兪君見和。復答之。
雨中邀飮。又用前韻贈之。
大學韓大博昌綏,尹學正復圭,崔學諭宗裕,皇甫學諭琯見和。復用前韻各答。
雨後訪友人
飮兪侍郞家。明日以詩謝之。雙韻廻文。
兪公見和訪來。因置酒復答。
春感
酒席答少年
聞僧錄光敍入山
惜花
續將進酒歌
題普濟寺住老規禪師壁上畫竹
醉樵人
憎烏啼
次韻劉大諫冲祺喜門生進士金允升一年連捷。仍召入天院。
苦熱
八月十四日。拜先壙後題巖泉。示李補闕百順。
九日
出山吟
禮成江樓上。次板上諸公韻。
又樓上觀潮。贈同寮金君。
江上晚雨
初冬江上
仲冬雨
詠雪
路上逢故人口號
種花
苦雨
詠筍
遊天磨山有作
詠蟬
海棠
紅芍藥
放鼠
啄木鳥
贈李道士
東郊卽事
雪詠
冬柏花
聞友人以銀杯換馬
病中作。示友人。
客至忽歸有作
宿廣明寺。示堂頭禪老。
二月雪
絶句
櫻桃
旱雲
炤鬢有感
閨情
綠瓷枕
端午郭外有感
○경진년 8월에 계양(桂陽)에서 기거주 예부낭중(起居注禮部郞中)으로 부름을 받아 올라와 서성(西省)에 입직하여 지음
우사의 맑은 벼슬에 예조를 겸하니 / 右史官淸帶禮曹
강군 이 년간 노고를 갚을 만하네 / 足償江郡二年勞
금지는 물결 넘쳐 옛모습 그대로인데 / 禁池瀲灩猶依舊
늙은 봉이 다시 와서 깃털 씻누나 / 老鳳重來浴羽毛
계양에 좌천되어서는 거의 죽을 지경이더니 / 桂陽謫去方瀕死
약성에 다시 돌아오니 되살아난 듯하네 / 藥省重廻似更生
상머리에 놓인 하사주(下賜酒) / 員案前陳官醞釅
백 리의 한 고을 원보다 낫구려 / 猶勝百里强專城
[주C-001]계양(桂陽)에서……입직하여 : 고종(高宗) 6년(1219) 봄에 이규보가 탄핵을 받아 좌사간(左司諫)에서 면직되고 다시 이해 5월에 계양도호부부사 병마금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鈐轄)로 나갔다가 이듬해 8월에 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禮部郞中起居注知制誥)로 부름을 받고 서성(西省)에 입직하였다. 서성은 중서문하성이다. 《東國李相國集 年譜》
[주D-001]우사(右史) : 임금의 언행(言行)의 기록을 맡은 벼슬. 기거주(起居注)와 같다.
[주D-002]늙은 봉이……씻누나 : 이규보가 변방인 계양도호부 부사로 있다가 다시 중서성에 불려들어와 임금의 은총을 입는다는 뜻이다.
[주D-003]약성(藥省) :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별칭.
○친구 집 술자리에서 기생에게 줌
외로운 신하 마음 오랫동안 삭막하더니 / 久作孤臣心已灰
명기를 만나매 눈이 활짝 뜨이네 / 忽逢名妓眼方開
아리따운 복사꽃 일찍 서로 아는 사이요 / 桃花髣髴曾相識
유랑이 가버린 후 심은 것 아니로다 / 不是劉郞去後栽
[주D-001]아리따운 복사꽃……아니로다 : 유랑(劉郞)은 유우석(劉禹錫)을 가리킨다. 당(唐) 나라 덕종(德宗) 말엽에 유우석이 상서 둔전원외랑(尙書屯田員外郞)으로 있으면서 탄핵을 받아 낭주 사마(朗州司馬)로 좌천했다가 헌종(憲宗) 10년에 다시 서울로 불려들어와서 지은 ‘현도관에 놀면서 꽃 구경하는 사람을 읊은 시[遊玄都觀看花君子詩]’에 “현도관 안에 복숭아나무, 죄다 유랑이 가버린 후 심은 걸세.[玄都觀裏桃千樹 總是劉郞去後栽]”라 하였는데, 옛날에 보지 못했던 것을 새로 보게 됨을 읊은 시이다. 《舊唐書下 卷160 劉禹錫傳》 여기서는 유우석의 시와 반대로 본디부터 잘 알았던 것을 말한다. 여기에 말한 복사꽃은 곧 기생을 가리킨 말이다.
○손 이부 상서(孫吏部尙書)가 조 상국 충(趙相國冲)을 곡한 시에 차운함
한 발자국도 상도(常道)를 밟지 않음이 없고 / 一步無非蹈典常
온화함은 겨울날의 태양 같고 늠름하기는 서릿발 같네 / 溫如愛日凜於霜
좁은 소견으로 그 누가 하해(河海) 같은 공의 도량 짐작하리 / 挈甁誰測河源浩
전란을 당해서야 그의 성품 충량(忠良)함을 알았네 / 烈火方知玉性良
공이 원수가 된 후 사람들이 더욱 어진이로 여겼다.(公爲元帥。後人益賢之。)
사막에서 삼 년 동안 군병(軍兵)을 거느려 / 沙漠三年專斧鉞
자손이 백세토록 영화를 누리겠네 / 雲來百世享膏粱
슬프다 내가 화성에 오는 것 너무 늦어서 / 嗟予大晩來華省
태광이 정당 빛냄을 보지 못하네 / 未覩台光耀政堂
나는 서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공의 부음(訃音)을 들었다.(予入京未幾。聞公薨。)
사생과 수요는 인생의 상도지만 / 死生壽夭是人常
공의 부음 듣고나니 오장(五臟)이 싸늘하구려 / 及聽公薧五內霜
지난날 오랑캐 침략을 꾀할 적엔 / 左衽昔年圖寇擾
병권(兵權) 잡아 충량을 다하였네 / 右符當日付忠良
한 몸으로 나라를 진정하여 태산같이 굳건하게 했는데 / 一身鎭國難搖嶽
만조 백관은 부질없이 녹만 먹었네 / 百執盈庭謾粱
현명한 아들들은 구법(舊法)을 지키니 / 幹蠱諸郞典刑在
훌륭한 자손이 장차 다시 괴당에 번창하리라 / 蘭蓀行復藹槐堂
[주D-001]태광(台光) : 태(台)는 별 이름인 삼태성(三台星)을 말하는데,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태광은 즉 조충을 가리켜 한 말이다.
[주D-002]괴당(槐堂) : 삼공(三公) 지위의 높은 관직을 말한다. 송(宋) 나라 때에 왕호(王祜)가 자기 마당에 손수 느티나무[槐] 세 그루를 심고 말하기를 “내 자손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의 둘째 아들 단(旦)이 재상에 올랐다. 《蘇東坡集 三槐堂銘》
○율시(栗詩) 병서(幷序)
밤[栗]은 사람에게 이로움이 많아서 아가위[楂]ㆍ배[梨]ㆍ귤[橘]ㆍ유자[柚]처럼 잠깐 목을 축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고인의 시집(詩集)에는 밤을 읊은 것이 대체로 적다. 그래서 나는 이를 읊는다.(栗實利人多矣。非若楂梨橘柚之特一時解煩而已。然古人詩集中。賦者蓋寡。予爲賦之。)
잎은 여름철에 나고 / 葉生朱夏候
열매는 가을철에 익네 / 實熟素秋時
틈이 딱 벌어지면 방울 같고 / 罅發呀鈴口
껍질은 흰 살덩이를 겹으로 감싸네 / 苞重祕玉肌
제삿상에는 대추와 함께 놓이고 / 饋籩兼棗設
여자의 폐백에는 개암[榛]과 짝지어지네 / 女贄與榛隨
오는 손만 대접할 뿐 아니요 / 不但供來客
우는 아이도 그치게 하네 / 偏工止哭兒
이익은 천호후(千戶侯)와 맞먹고 / 堪將千戶等
만인의 굶주림도 구제할 만하구려 / 足濟萬人飢
맛을 탐내어 한 움큼 쥐고 / 握重緣貪味
껍질을 쉬 벗기고자 앞니를 날세우네 / 牙銛易褫皮
화롯불에 굽고 / 煨憑爐底火
솥에도 삶네 / 烹代竈中炊
처음 주울 땐 원숭이에게 빼앗기기도 / 始拾遭猿奪
저장하면 쥐도 막아야 하네 / 收藏杜鼠窺
가시 많음을 꺼리지 말라 / 莫嫌攢刺棘
달디단 엿맛이 사랑스럽구려 / 聊愛蘊甘飴
등급은 삼진록에 들었고 / 品入三秦錄
이름은 오원에 떨쳤네 / 名標五苑奇
의당 곡식과도 맞먹는데 / 尙宜方穀粒
어찌 아가위나 배 따위에 비교하랴 / 詎可譬楂梨
고슴도치 털 같은 껍질이 쌓이면 / 遺殼蝟毛積
넉넉히 땔감이 되리라 / 薪樵尙可期
[주D-001]이익은……맞먹고 :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에 “연(燕)ㆍ진(秦)에서 밤나무 1천 그루를 가지면 이익이 천호후(千戶侯)와 맞먹는다.” 하였다.
[주D-002]등급은……들었고 : 신씨(辛氏)의 삼진기(三秦記)에 “한 무제(漢武帝)의 과원(果園)에 있는 큰 밤은 열 다섯 개로 한 말[斗]이 된다.” 하였다. 《淵鑑類函 卷403 果部5 栗》
[주D-003]이름은……떨쳤네 : 전국 시대 진(秦) 나라에 크게 기근(饑饉)이 들자, 응후(應侯) 범수(范睢)가 소왕(昭王)에게 청하기를 “오원(五苑)의 채소와 밤[栗] 등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소서.” 하였다. 《韓非子 卷14 外儲說 右下》
○금종사(金鐘寺)에서 묵고 이튿날 지음
멀리 종소리를 찾아 / 遙尋一聲磬
날 저물어 절에 드니 조용하구나 / 暮入招提靜
향 사르고 부처에 절하니 / 拈香禮眞人
불상은 어찌 그리 빛나느뇨 / 金像何煥炳
실바람에 흔들리는 불등 / 微風搖佛燈
꺼지려다 다시 밝아지도다 / 欲滅還炯炯
승방에는 이불이 없어 / 僧房無衾裯
앉아서 새우자니 추운 밤이 길기만 하네 / 坐度寒夜永
가물거리는 등잔불 돋우고 / 撥火餘殘紅
스님은 아직도 좌선(坐禪)만 하누나 / 主人猶在定
새벽에 바위 언저리를 거니니 / 天明步巖陬
우물에 물긷는 소리 들리누나 / 轆轤響石井
다시 앉아 잠깐 기다리노니 / 更坐當少須
눈은 어지러이 날고 바람 또한 드세구려 / 雪亂風復猛
○조궐(朝闕)
입궐(入闕)이 늦을세라 / 朝天猶恐後
바삐 말[馬]을 몰았네 / 劫劫着鞭催
눈길에 발자취 없어 / 雪路無人跡
그제야 맨 먼저 옴이 기쁘네 / 方欣第一來
○길에서 눈을 읊음 2수
꽃을 본떠 새기기를 잘했고 / 學花工剪刻
춤을 익힌 듯 돌기를 잘하네 / 解舞巧徘徊
나의 머리털 이미 온통 희어졌거늘 / 我鬢曾渾白
어찌 너마저 묻어 오느냐 / 何須更點來
가벼이 나부끼는 옷자락을 사랑하여 / 初愛輕飄袂
몸 덮는 걸 온통 잊었네 / 都忘備障身
점점 쌓여 갓이 무거워지니 / 漸堆寒弁重
되려 삿갓 쓴 이가 부럽구나 / 翻羨笠簦人
○겨울에 중[僧]과 술을 마시고 희롱삼아 지어줌
술은 추위를 막나니 / 酒能防凜冽
속담에 ‘겨울 갓’이라 이른다네 / 俗諺號冬冠
그대 같은 대머리는 / 禿首如吾子
어한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 能無備禦寒
○승제(承制) 김인경(金仁鏡)이, 귀일 선사(歸一禪師)가 그린 늙은 전나무[老檜] 병풍을 선사한 규 선사(規禪師)에게 사례하는 시에 차운함 2수
오사가 그린 전나무 참으로 생동하니 / 吳師寫檜眞寫生
청풍이 이는 듯하구려 / 颼颯似欲生淸風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들은 해산물(海産物)을 그리려면 / 自言人欲狀海錯
십 년 전부터 어부가 되지만 / 十年先作釣魚翁
나는 전나무 그리려 구차히 배우지 않았어도 / 吾於畫檜非苟學
늙도록 산에 살매 솜씨가 익어 / 白首栖山所以工
소나무 잣잎의 묘를 깊이 터득했노라 하니 / 松身柏葉深得妙
그 말이 공변됨을 알겠네 / 始知吳老言之公
나 또한 오사의 그림을 자세히 보니 / 我亦飽看吳老筆
늙은 장사치가 물건을 알아봄 같구려 / 望如老賈知西東
규 선사가 간직한 전나무 그림 더욱 기이하여 / 禪師所蓄尤奇絶
분분한 속화는 온통 없애버렸네 / 紛紛俗畫渾掃空
귀문(貴門) 자제는 금과 비단을 쓰면서 / 侯門子弟費金帛
구하여도 얻을 계책이 없었는데 / 求之不得計已窮
공의 인품 남달리 맑고 깨끗하기에 / 緣公獨是蕭洒人
하루아침에 보내와서 서재에 걸렸구려 / 一朝輟送書軒中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속인이 간직하여 / 不然世俗安得藏
귀머거리가 소호를 듣는 격이 되리요 / 如以韶濩奏於聾
바라건대 공은 이 나무처럼 향수하시어 / 願公享壽如此樹
선약(仙藥)을 먹지 않고도 동안(童顔)이 되소서 / 不待鍊藥顔還童
예로부터 그림을 논하자면 송백을 귀히 여기나니 / 古來論畫貴松柏
맑고 깨끗한 군자의 풍도를 사랑하기 때문일세 / 愛有蕭然君子風
송백과 형제간인 것이 전나무인데 / 昆松弟柏是曰檜
우뚝하고 꿋꿋함이 소나무 같도다 / 亦似偃蹇蒼髥翁
강남산인은 솔 그리기를 즐겨 / 江南山人喜寫松
만년에는 잣나무를 가장 잘 그렸네 / 晩年畫檜又最工
규 선사는 어디에서 이 그림을 얻어 와 / 師從何處得此本
계림공에게 선사하였느뇨 / 寄與天上鷄林公
계림학사 풍도가 예스러워 / 鷄林學士襟韻古
옥같이 맑은 풍채 해동에 빛나네 / 玉立淸標映海東
규 선사가 그이 정절 밝히고자 / 吾師有意表貞節
방장이 비게 돼도 아끼지 않고 선사했네 / 贈之不惜方丈空
그림 얻은 계림공은 기뻐 잠 못 이루고 / 鷄林得畫喜不寐
벽을 향해 감상(鑑賞)하는 마음 끝이 없구나 / 面壁吟賞心無窮
시 읊어 묘사한 모양 그림보다 나아 / 作詩摸狀又勝畫
하늘을 찌르는 만장의 기운 가슴속에 치솟네 / 攙天萬丈生胸中
쇳소리 나는 곳에 내 귀 솔깃하여 / 金聲擲處側我耳
기울여 듣다 어느새 막힌 귀가 열렸네 / 聳聽不覺驚披聾
시상(詩想)을 음미함이 그림 보는 듯하니 / 看詩風味如見畫
하필 푸른 나무를 친히 대하랴 / 何必親對靑童童
[주C-001]귀일 선사(歸一禪師) : 고려(高麗) 스님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주D-001]그렇지 않았다면……되리요 : 소(韶)는 순(舜) 임금의 악(樂)이고 호(濩)는 탕(湯) 임금의 악. 어리석은 사람이 어떻게 성인의 음악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는 뜻으로, 김인경(金仁鏡)이 훌륭하기 때문에 귀일 선사(歸一禪師)가 그린 훌륭한 그림을 선사받게 되었다는 뜻이다.
[주D-002]방장(方丈) : 선사(禪師)나 국사(國師) 등 높은 중들의 처소를 말한다.
[주D-003]쇳소리 나는 곳에 : 진(晉) 나라 손작(孫綽)이 시문을 잘했는데, 일찍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어 범영기(范榮期)에게 보이면서 “경(卿)은 이것을 땅에 던져 보라. 응당 금석(金石) 소리가 날 것이다.” 하였다. 《晉書 卷56 孫綽傳》
○진 소경(陳少卿)이, 철쭉장[躑躅杖]을 보내온 이에게 사례하는 권 원외랑(權員外郞) 시에 화답한 것을 차운함 수문전(修文殿)에서 호종(扈從)하면서 즉시 읊다.
한번 늙어 시든 얼굴 다시는 젊어지지 못하나니 / 老去衰顔更不春
백금의 좋은 약인들 어찌 보배가 되리요 / 百金良藥若爲珍
그대가 선사한 지팡이 때문에 / 賴君輟贈扶持物
힘차게 걷는 몸 되었네 / 得作人間健步身
[주C-001]진 소경(陳少卿) : 소경은 벼슬 이름. 진 소경은 곧 진화(陳澕)를 가리키는데, 그는 문과에 급제한 후 우사간(右司諫) 등을 지냈고 시와 문장에 뛰어나 이규보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이튿날 다시 네 수를 지어 보냄 모두 권군(權君)을 대신하였다.
봄내음 감도는 꽃나무 한 가지를 꺾어 / 減却花中一朶春
깎아 만든 지팡이 보배롭기도 하여라 / 削成手杖尙堪珍
꽃가지여 늙은이를 따른다고 한하지 말라 / 芳情莫恨隨殘叟
나도 예전엔 조금은 행복했던 몸이라오 / 我亦從前薄倖身
활짝 필 적엔 봄을 온통 독점하더니 / 繁英曾占十分春
어찌 알았으랴 끝내 늙은이의 보배 될 줄이야 / 豈擬終成老境珍
사람 마음 고달프게 하던 꽃도 늙으니 / 惱盡人情花亦老
문득 내 한가한 몸을 붙들어주누나 / 却來扶我一閑身
조용히 산사 찾는 봄나들이 / 靜尋山寺醉尋春
걸음 빠르니 지팡이가 보배롭기만 하구려 / 步捿方知杖是珍
좋은 경치 구경하고 늙음을 보낼 수 있으니 / 觸境歸來堪送老
그대가 평생 동안 나와 함께 있어줌을 감사하노라 / 感君專與百年身
게으른 늙은이 마치 흙인형 같더니 / 晩年慵似泥人春
여섯 자 늙은 몸에 점점 힘이 나는구려 / 六尺殘軀漸自珍
몇 발작도 지팡이에 의지하거니 / 寸步尙期扶杖起
내 몸 온통 지팡이에 맡기리 / 都將拄杖作吾身
○입궐(入闕)하여 시연(侍宴)함
이 년 동안 시골에서 사슴만 벗삼다가 / 蓬艾二年尋鹿徑
오늘은 높은 궁궐에서 임금을 모시누나 / 雲霄今日侍龍墀
강성의 박주도 일찍 마셨거늘 / 江城薄酒猶曾飮
이같은 하사주(下賜酒)를 사양할 수 있으랴 / 如此宣杯得可辭
○문 선사(文禪師)가 각월 수좌(覺月首座)를 곡(哭)한 시에 차운함
세상은 불도의 대덕현인(大德賢人)을 잃었구나 / 世喪彌天釋苑賢
부음 듣고 나니 슬프기 그지없네 / 我方聞訃倍凄然
여악의 연사는 헛되이 남고 / 空餘廬岳裁蓮社
화정의 달 실은 배 다시 띄울 수 없네 / 無復華亭載月船
시평이 있다는데 보지 못하여 애석하다 / 聞有詩評嗟未覿
스님은 일찍이 시평을 지었는데, 나에게 보이지 않았다.(師嘗著詩評不示予。)
일찍부터 엮던 고승전(高僧傳) 겨우 마쳤네 / 早修僧傳僅終編
스님은 일찍이 고승전을 엮었다.(師曾修高僧傳。)
법문의 대들보 이제 꺾였으니 / 法門梁棟今頹折
후학은 누구를 의지하여 십현을 토구(討究)하랴 / 後學憑誰討十玄
[주C-001]각월 수좌(覺月首座) : 일명 각훈(覺訓). 호는 고양취곤(高陽醉髡)인데, 화엄 수좌(華嚴首座)라고도 한다. 글을 잘했고 저서에는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 있다.
[주D-001]대덕현인(大德賢人) : 지혜와 덕망이 높은 스님을 칭하는 말. 본래는 부처님을 일컫던 말인데 뒤에 사문(沙門)의 존칭으로 되었다.
[주D-002]여악(廬岳)의 연사(蓮社) : 중국 강서성 강남부(江南府)에 있는 여산(廬山)의 백련사(白蓮寺)를 말한다. 동진(東晉)의 효무제(孝武帝) 때에 고승 혜원(慧遠)이 맨 처음 이 산에 들어가 백련사를 결성하고 염불을 수행하였는데 그의 문도(門徒)가 수천 명이나 되었고, 그 후부터 그곳이 강남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주D-003]화정(華亭)의……없네 : 옛날의 운치 있던 생활을 되찾지 못함을 한탄한 말이다. 진(晉) 나라 육기(陸機)는 화정에 살면서 학(鶴) 우는 소리를 듣곤 하였는데, 뒤에 참소를 입어 죽게 되자 “화정의 학 우는 소리를 어찌 다시 들을 수 있으랴.” 하였다. 《晉書 卷54 陸機傳》
[주D-004]십현(十玄) : 열 가지의 현묘(玄妙)한 연기(緣起)를 뜻하며 불법(佛法)의 근본 원리로 삼는 ‘십현연기 무애법문(十玄緣起 無礙法門)’을 가리킨다.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이적(李勣)의 방문을 사례함
문앞의 새 그물[雀羅]을 오래 한했더니 / 長恨門前雀可羅
공으로 말미암아 사대부 집으로 알려졌네 / 賴公方辦士夫家
동리(洞里)는 모두 성신의 강림에 놀라고 / 閭閻共駭星辰降
동복들은 다투어 재상이 지나감을 자랑하누나 / 童僕爭誇宰相過
따르자니 좋은 술 없어 부끄럽고 / 酌酒自慙無綠蟻
권하자니 아리따운 여자 없어 부끄럽네 / 勸君還愧欠靑蛾
이제는 오막살이에 만족하리니 / 從今也任蝸廬小
높은 수레 옥가 울렸음이로세 / 已度高軒響玉珂
[주D-001]옥가(玉珂) : 옥으로 장식한 말의 굴레를 말한다.
○연등(燃燈)날 저녁에 대간(大諫) 유충기(劉冲祺)와 함께 시연(侍宴)에 가서 지음
벼슬은 비록 아경에 머물러 있어도 / 盤桓雖滯亞卿聯
연석에는 옥좌 앞에 함께 배석하누나 / 宴席同陪玉座前
법종에 참여할 이 몇 사람뿐이거늘 / 法從參登無幾輩
법종에는 품계가 높은 시신(侍臣)만이 시연한다.(法從中唯上階侍臣侍宴。)
미관으로 외람히 참석하니 제현께 부끄럽네 / 微官忝赴愧諸賢
나는 대제(待制)로 시연하였다.(予以待制侍宴。)
소매 속의 귤은 향내를 풍기고 / 袖中仙橘天香洩
머리 위 어사화(御賜花) 아름답구나 / 頭上宣花國色姸
성상(聖上)이 손수 술 따르고 말씀 주시니 / 御手斟杯還賜語
깊은 감격에 두 줄기 눈물 샘 솟듯하네 / 感深雙淚瀉如泉
[주D-001]법종(法從) : 임금의 행차에 호종(扈從)하는 일을 말한다.
[주D-002]대제(待制) : 벼슬 이름. 매일 교대로 대기(待機)하여 임금의 조칙(詔勅) 등을 초(草) 하였다.
○유 대간이 화답하므로 다시 이에 답함
외람되이 팔 년 동안 관직에 함께 참여했으나 / 八載叨參奉引聯
일찍이 어전(御前)에는 올라보지 못하였네 / 未曾超上赭袍前
대보름밤 오늘에야 어연에 시립케 되니 / 元宵御宴今宵侍
어제의 어리석던 내가 오늘 어진이 되었구려 / 昨日愚儒此日賢
낭예 부화에 어찌 열매 있으랴 / 浪蕊浮花那有實
붉은 분으로 거짓 아름다움 꾸몄도다 / 紫鉛丹粉假成姸
사품(四品)의 시신은 모두 정대(鞓帶)를 임시로 착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四品侍臣皆假鞓帶故云。)
부럽다 그대는 서액의 청화한 직책 맡아 / 羨君西掖淸華地
샘솟듯 넘친 시상에 작약시(芍藥詩)를 읊네 / 芍藥吟高思湧泉
[주D-001]낭예 부화(浪蕊浮花)에……있으랴 : 낭예와 부화는 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쓸데없는 꽃이란 뜻으로, 이규보가 자신을 겸손히 비유한 말이다.
[주D-002]서액(西掖) : 중서성(中書省)의 별칭. 궁성의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액이라 이른다.
○왕태후(王太后)에 대한 만사(挽詞) 태상황모(太上皇母)이다. 왕명을 받고 짓다.(大上皇母。受勑述)
사록에서 일찍 복을 받고 / 沙麓曾膺慶
은황에서 일찍이 근원을 길렀도다 / 銀潢早毓源
손자는 왕후이고 / 孫爲王后貴
아들은 상황이네 / 子作上皇尊
대낮에 선궁은 잠기고 / 白日璇宮鎖
붉은 상엔 옥새만 남았도다 / 彤床玉璽存
백성은 옛 덕을 그리워하여 / 國人懷舊德
상여를 전송하며 통곡하누나 / 痛哭送鷖軒
일찍이 동조 열어 만민을 무양하더니 / 曾闢東朝母萬民
이젠 조용한 지하에서 정신 섭양하는도다 / 別開閑館攝精神
태상 황모(太上皇母)가 동조(東朝: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말함)를 파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以大上皇母罷東朝故云。)
별이 빛을 잃으니 하늘도 무색하고 / 軒星掩彩天無色
궁궐에 꽃다움이 사라지니 초목도 봄을 잃었네 / 蘭殿銷芳草不春
범절(範節)은 이미 동관의 기록에 들었고 / 內範已書彤管手
후궁은 아직도 그의 옥체(玉體) 기억하누나 / 後宮猶認玉衣身
신선으로 옥황상제 뵈어 즐거우시리니 / 仙遊謁帝應差樂
통곡하는 세인들아 눈물 거두라 / 抆淚哀號世上人
[주D-001]사록(沙麓) : 지명.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에 “80년 후에 사록 땅에서 귀녀(貴女)가 태어나 천하를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신 대장(申大丈)이 내 아들 징(澄)을 가르치는 데 사례함 신군은 나이 80여 세인데 항상 학생을 모아 가르쳤다.
내 셋째아들 징은 / 我家第三兒曰澄
썩은 나무 같아 새길 수 없네 / 性不可雕如朽木
장성한 나이인데 글을 알지 못하니 / 行年壯大不解書
밥주머니가 되어 곡식만 축내누나 / 此是飯囊空貯粟
자식 바꿔 가르친단 옛말이 있지만 / 易子而敎古所聞
초파리 같은 놈 깨우칠 이 없었다오 / 無人爲發醯雞覆
그대는 늙을수록 학문 더욱 정심(精深)하여 / 大丈年耆學更精
오경(五經) 상자인 효선의 배로다 / 孝先經笥便便腹
심신은 청랑하고 눈도 거울 같아 / 骨淸神朗眼如鏡
오경을 깨알같이 베껴 읽네 / 五經寫作蠅頭讀
동몽들이 배우기를 청하면 거절하지 않으니 / 童蒙來求不敢拒
학생이 모여들어 서숙(書塾)을 이루었네 / 學子成林家有塾
참새는 다투어 난봉을 따라 날고 / 鳥雀爭附鸞凰飛
뽕벌레는 다행히 나나니벌 만나 닮기를 비네 / 螟蛉幸逢蜾蠃祝
내 자식 우둔함을 혐의치 않고 / 不嫌阿兒鋒刃鈍
갈고 다듬어 옥 만들기를 기약하누나 / 着手磨礱期切玉
그대의 후의를 무엇으로 갚을까 / 感君厚意何以報
장수하여 머리털 다시 검기만 바랄 뿐일세 / 但願長生鬢還綠
들으니 노 나라 신공은 / 吾聞魯國有申公
집에서 학동을 가르치며 늙을수록 부지런하여 / 居家敎授老彌篤
한 무제(漢武帝)가 학문을 중히 여겨 포륜으로 부르니 / 虎皇重學蒲輪徵
팔십에 비로소 대부의 녹을 먹었다네 / 八十方食大夫祿
선생은 어쩌면 그의 자손으로 / 先生家世豈其孫
조상의 풍도를 크게 일으키려 하심인지 / 欲振祖風將大復
폐백(幣帛)으로 부를 날 멀지 않으리니 / 束帛加璧召未晩
모년의 영귀를 쉬 기약하리 / 暮年榮貴行可卜
[주D-001]썩은 나무……없네 : 버린 사람이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거늘 공자가 ‘썩은 나무에는 새길 수 없다’ 했다.” 하였다.
[주D-002]오경(五經)……배로다 : 효선(孝先)은 후한(後漢) 때 변소(邊韶)의 자이다. 변소는 문장에 뛰어났고 제자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 《후한서(後漢書)》 변소전(邊韶傳)에 “뚱뚱한 배는 오경 상자이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신 대장(申大丈)을 효선에 비유한 말이다.
[주D-003]뽕벌레는……비네 : 나나니벌[蜾蠃]은 본디 새끼를 낳지 못하므로 뽕벌레를 기르면서 자기를 닮으라고 빈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훌륭한 선생에게 잘 배우기를 빈다는 뜻이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소원(小宛) 장에 “뽕벌레의 새끼를 나나니벌이 데려가네. 네 자식을 가르쳐 좋은 도를 닮게 하라.” 하였다.
[주D-004]노(魯) 나라 신공(申公) : 신공은 일찍이 제(齊) 나라 사람인 부구백(浮丘伯)에게서 시(詩)를 수학했고 그 후로는 평생 집에서 후진을 양성했는데, 문하에 모인 제자가 무려 천 여명이나 되었다. 그는 나이 80이 되어서야 한 무제(漢武帝)의 부름을 받아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었다. 《漢書 卷88 儒林傳》
[주D-005]포륜(蒲輪) : 덜거덕거리지 않게 하기 위해 부들잎으로 바퀴를 싼 수레이다.
○동년(同年)인 시랑(侍郞) 유승단(兪升旦)이 처음으로 등석연(燈夕宴)에 시종(侍從)하므로 하례함
아미반 속 많은 어진이 / 蛾眉班裏許多賢
천계에 오르니 허리가 모두 붉도다 / 上到天堦腰必赤
그대 처음으로 새 정대 갖추고 / 喜君始綰鞓帶新
궁중 등석연(燈夕宴)에 시종하니 그를 기뻐하노라 / 彤墀侍宴趁燈夕
이날 저녁 관등놀이 참으로 번화하여 / 此夕觀燈信繁浩
강안전 아래 구경꾼들 베 짜놓은 듯 빽빽하네 / 康安殿下人如織
생소 소리 무르익어 천수의 잔 올리니 / 笙簫聲酣獻天壽
한 가닥 홍조가 용안(龍顔)에 어리도다 / 一沫紅潮侵玉色
손수 술 따라 시신에게 주며 / 御手斟觴授侍臣
한 말씀만 내리셔도 감격하거늘 / 一言見賜猶感激
하물며 그대를 친구처럼 대접함이랴 / 待君况以故人禮
금상(今上)과 옛 친분이 있다.(與上有舊。)
안부까지 물으니 그 감격 백 배나 더하리라 / 語及寒暄應倍百
멀리서 짐작하노니 그대 어전에 엎드려 / 遙知俯伏赭袍前
두 줄기 감격의 눈물 술잔 속에 떨어뜨리고 / 雙行感淚盃中滴
선화 가득 꽂고 취한 몸 부축해 돌아올 제 / 宣花滿揷醉扶廻
길가는 사람들은 손으로 가리키며 신선이라 하리 / 路人指道神仙客
슬프다 오랫동안 나는 배사의 헛된 생각 때문에 / 嗟予久被杯蛇誤
나는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予以病未參故云。)
뒤따라가 함께 시종하지 못하였네 / 未躡後塵同侍側
[주D-001]등석연(燈夕宴) : 음력 4월 초파일에 ‘등석(燈夕)’이라 하여 등을 달고 등대를 세우고, 밤에 불을 켜서 석가모니의 탄생일을 기념하는 잔치이다. 관등(觀燈) 놀이와 같다.
[주D-002]배사(杯蛇)의 헛된 생각 : 아무것도 아닌 일을 쓸데없이 걱정하여 괴로와하는 일을 말한다. 진(晉) 나라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마실 때 그 친구가 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이 섬뜩하여 그로 인해 병들었다가, 나중에 그 뱀의 그림자가 벽에 걸린 활의 그림자임을 안 후 병이 절로 나았다 한다. 《晉書 卷44 樂廣傳》
○유군(兪君)이 화답하므로 다시 답함
문평의 문하에 이름 적은 이들 / 文平門下署名人
하많이 모였는데 허리는 누르고 눈은 붉도다 / 多至腰黃兼眼赤
조ㆍ한 두 재상이 제일 먼저 달려오고 / 趙韓兩相絶先馳
나머지도 나는 듯 달려와 등석(燈夕)에 참여하도다 / 餘尙翩翩參拜夕
선생은 만진으로 예기(銳氣) 뛰어나지만 / 先生晩進銳飛騰
신금을 어찌 쉽게 짜랴 했더니 / 神錦何曾容易織
일조에 임금님 옷 마련하여 / 一朝手補舜衣裳
봉채 용문이 오색으로 빛나도다 / 鳳彩龍文輝五色
동방의 네 사람 옥폐에 오르니 / 同牓四人登玉陛
사림들은 부러워 마음 격동하누나 / 士林歆豔心爭激
생각건대 그대는 등석연 한창 무르익을 제 / 謂君燈夕宴方酣
술에 취해 줄곧 생소만 분 줄로 여겼더니 / 醉擁笙簫攢指百
어찌 알았으랴 험상궂은 비가 기쁨을 가로막아 / 豈知雨惡寢淸歡
입술에 하사주 한 방울 축이지 못했음을 / 燥吻未霑霞液滴
보내온 시를 보고서, 이날 저녁 큰 비 때문에 잔치가 무의미했음을 알았다.(見來詩然後。知是夕因大雨除宴。)
훗날 시연 때 재추(宰樞)의 열에 오르면 / 他年侍宴綴樞班
오늘의 동렬보다 높은 예우 받아서 / 禮絶今時同列客
선화 여덟 가지를 번듯이 꽂고 / 宣花剩揷八枝春
재추는 여덟 가지고 시신은 여섯 가지다.(宰樞八揷侍臣六插。)
나에게 기울어진 관(冠) 자랑하리라 / 向我應誇瓊弁側
[주D-001]문평(文平)의……이들 : 문평은 이지명(李知命)의 시호. 그는 명종 때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규보(李奎報)ㆍ유승단(兪升旦) 등 명환(名宦)을 발탁하였다. 《高麗史 卷99 李知命傳》
○우중에 초청되어 술을 마시며 또 앞의 운으로 시를 지어 줌
바둑은 강적을 만나야 기쁘나니 / 手談端喜逢勍敵
조기를 빼앗고 붉은 기 세우려 하네 / 欲拔趙旗立幟赤
그대 위축되어 오래 오지 않아서 / 因君畏縮久不來
죽창 아래 외로이 등잔불만 속였네 / 竹窓孤負燈明夕
손이 오지 않아 술잔엔 먼지만 끼고 / 塵生盞斝沒來賓
문에는 거미줄만 어지러이 얽히었네 / 蓬戶謾看蛛網織
피지 않은 홍도는 더 입술을 다물고 / 未發紅桃轉噤脣
피려던 붉은 살구도 다시 빛을 잃었네 / 欲開緋杏還無色
은빛 소나기 하늘을 꽉 메워 내리니 / 白雨飄空銀竹垂
읊조리는 소리만 은연히 떨리도다 / 空餘吟吻聲微激
청춘의 하루를 차마 헛되이 보내랴 / 靑春一日忍虛抛
이태백은 삼백 잔도 기울였다네 / 謫仙杯可傾三百
이런 때 찾아오지 않음은 진정 어질지 못한 일 / 此時不訪良不仁
독 안엔 한갓 술방울만 떠돌리라 / 酒槽空見眞珠滴
그대 몸 아껴 마시지 않으려지만 / 君雖嗇養佯不飮
그대 이웃에 술 찾는 이 있다 하니 / 聞有比隣索酒客
손 잡고 함께 오지 않으려는가 / 相將携手肯來無
오기만 학수고대 기다리겠소 / 鵠頸久翹難暫側
[주D-001]조기(趙旗)를……세우려 하네 : 한신(韓信)이 조(趙) 나라를 칠 적에 거짓 패주(敗走)하자 조군(趙軍)이 성을 비우고 추격하였다. 그 사이에 한신의 군사가 조 나라 성을 점령하고 한(漢) 나라의 붉은 기를 세워 승리하였다. 《史記 卷92 淮陰侯列傳》
○대학(大學)의 박사(博士) 한창유(韓昌綏), 학정(學正) 윤복규(尹復圭), 학유(學諭) 최종유(崔宗裕), 학유 황보관(皇甫琯)이 화답하므로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각각 답함
한 박사에게(韓大博)
지난날 용방에 이름 함께 올라 / 昔年龍牓共題名
한 폭의 홍패(紅牌)를 다투었었지 / 一幅賜牋霞鬪赤
곡강에선 녹파의 봄을 호쾌히 읊조렸고 / 曲江吟快綠波春
달밝은 밤 어원(御苑)에선 잔치가 무르익었네 / 瓊苑宴酣明月夕
동방끼리의 성대한 모임 예전엔 미처 없었던 일 / 同年盛集古猶無
아낙네들 구경하느라 모두 베짜기를 잊었더라네 / 婦女貪觀皆罷織
그때의 동방생 몇이나 남았느뇨 / 當時桃李幾枝在
남은 자 모두 안색이 초췌하구려 / 在者尙皆憔悴色
회상하노니 지난날의 한바탕 꿈 / 廻首舊遊渾一夢
삼십사 년이 번개처럼 빠르구나 / 三十四年如電激
반백 주름살은 슬퍼하지 말지니 / 鬢斑面皺不須嗟
내 나이 반백 년이 지났구려 / 算却行年餘半百
나는 늙어서야 문신(文臣) 끝에 참여하니 / 我方老綴詞臣尾
병든 나무가 봄 이슬에 조금 소생하네 / 病樹粗蘇春露滴
그대도 겨우 박사에 임명됐지만 / 君亦才除博士官
궁한 서생(書生)을 면치 못하누나 / 酸寒未免靑衫客
그대보다 뒤늦게 시종에 참여하니 / 遲君踵到法從聯
기왓조각이 구슬 옆에 선 것을 비로소 놀라네 / 瓦礫始驚珠在側
윤 학정에게(尹學正)
선생의 집안은 대대로 병권(兵權)을 받아 / 先生家世受黃鉞
칼 끝에 묻은 오랑캐 피 지금껏 붉도다 / 釰頭胡血餘殷赤
견양의 무리를 한꺼번에 무찌르던 그때 / 當時一掃犬羊群
승리의 봉화 갑자기 감천에 이르렀네 / 捷熢忽到甘泉夕
삼한을 다시 일으킨 것 어찌 그의 공 아니랴 / 再造三韓豈其賜
지금껏 만백성 편안히 지내도다 / 至今萬戶安耕織
지난날 오랑캐가 국토를 침범할 제 / 往年虜騎犯封疆
온 나라가 놀라서 사색이 되었었네 / 一國面蒼皆死色
그때 그대 조상 훌륭함을 더욱 사모하여 / 是時益慕乃祖賢
하늘에 닿는 그 영기 본 듯하구려 / 想見薄天英氣激
후손 중에 그대 특히 웅호하여 / 後孫君獨雄且豪
한 독수리가 백 마리 매를 삼키누나 / 一鶚平呑鷙鳥百
집에 간직한 철권은 상 후히 받아야 하련만 / 家藏鐵券賞宜豐
말직(末職)으로 이제 겨우 조그만 은총 입는구려 / 薄宦才霑恩一滴
머지않아 그대 또한 청운에 오르리니 / 行到靑雲亦未暮
아직도 홍안 소년과 다름없으리 / 猶是韶顔少年客
하물며 지금 공도는 고풍에 돌아가 / 況今公道復古風
공정하여 반측이 없음이랴 / 玉秤誠懸無反側
최 학유에게(崔學諭)
선생의 시 사림을 울렸건만 / 先生詩韻鳴詞林
내 늦게 앎이 부끄러워 얼굴 붉히네 / 我愧晩知雙頰赤
지난날 읊조림 자랑거리 못 되나니 / 從前歌唱不堪夸
헛되이 추위를 부르짖는 벌레 소리 되었구려 / 虛作寒蟲號露夕
큰 무당은 작은 무당의 기운을 빼앗고 / 大巫已奪小巫氣
솜씨 있는 여자는 솜씨 없는 여자가 짠 베를 업신여기는 법 / 巧婦應欺拙婦織
맑은 시 한 번 보매 얼굴 대한 듯하니 / 一見淸詩似覿顔
고매한 인품 다시 대하지 않아도 되리라 / 不須更待瑤林色
눈으로 직접 범을 보지 않아도 / 眼前雖未見雕虎
십 리 청풍에 울부짖는 소리 우렁차네 / 十里淸風隨嘯激
혜택은 한 쌍의 흰 구슬을 받는 것 같고 / 貺重如承白璧雙
값은 백금(百金)에 맞먹는도다 / 價擡足敵黃金百
그대의 재주는 경륜(經綸)을 펼 수 있고 / 君才合把演綸手
쾌히 강호를 기울여 벼룻물을 댈 수도 있거늘 / 快倒江湖供硯滴
어이 아직 광문의 가난에 머물러 / 胡爲尙作廣文寒
좌상객으로 앉을 자리조차 없느뇨 / 無氈可坐座上客
누가 그대 위해 경국의 중매인이 되어 / 爲君誰作傾國媒
뽑아다 군왕 옆에 서게 하려나 / 便令選在君王側
황보 학유에게(皇甫學諭)
계양에서는 요행히 동료가 되어 / 桂陽江郡幸同寮
쌓인 문서 눈앞이 어지러웠네 / 簿領堆前紛黝赤
박봉이라 한껏 마신 자리 드물었지만 / 祿薄雖稀痛飮場
때때로 밤늦도록 취해봤었네 / 時時載酒醉侵夕
산루에서 바라본 바다 푸른 기름처럼 맑았고 / 山樓望海碧油澄
관사에서 감상한 꽃 붉은 비단 같았었네 / 官舍賞花紅錦織
시 읊기 아니면 무엇으로 즐기리요 / 除却吟詩何以娛
기생 있어도 미색이 적었도다 / 雖有倡兒少嬌色
선생의 호쾌한 필치 빠르기도 하여 / 先生筆捷騁豪邁
많이는 천 편이요 적게도 백 편이었네 / 多至千篇小猶百
나 같은 둔재가 어찌 감히 당하리 / 如予鈍刃安敢當
붉은 번갯불 푸른 서리처럼 기상도 늠름하여라 / 紫電靑霜凜相激
그대의 시 좋아함이 나같은 이 없으련만 / 飽君詞藻莫我如
천형할 길 없어 부끄러운 마음 그지없네 / 無路薦衡慙泚滴
세상에 단리 없으니 누가 중개인이 되랴 / 世無短李誰爲餌
나는 헛되이 무지개 낚싯줄로 자라 낚는 사람 되었구려 / 虛作虹竿釣鼇客
미관 말직이 어찌 그대에게 가당하랴 / 鹽虀官冷豈宜君
임금 곁에서 윤지(綸旨)나 초함이 마땅하리라 / 合草龍綸居帝側
[주D-001]곡강(曲江) : 곡강은 못 이름인데, 당(唐) 나라 때에는 봄에 그해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자들을 모두 곡강의 정자에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舊唐書 卷13 德宗紀》 여기서는 과거에 급제한 것을 뜻한다.
[주D-002]광문(廣文)의 가난 : 당(唐) 나라 때 광문관 박사(廣文館博士) 정건(鄭虔)은 시서화(詩書畫) 삼절(三絶)로 일컬어질 만큼 재명(才名)이 뛰어났으나 매양 빈궁에 쪼들렸고, 어려서는 종이가 없어서 감나무 잎[柿葉]에다 글씨를 익혔다. 《新唐書 卷202 鄭虔列傳》
[주D-003]경국(傾國)의……하려나 : 백낙천(白樂天)의 장한가(長恨歌)에 “한의 황제가 경국 미녀 좋아하여……하루아침에 임금 곁에 뽑아오도다.[漢皇重色思傾國……一朝選在君王側]”란 데서 보이는데, 여기서는 최 학유를 좋은 관직에 추천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탄식한 말이다.
[주D-004]천형(薦衡) : 남을 천거하는 것을 이른 말이다. 형(衡)은 곧 후한(後漢) 때의 예형(禰衡)을 가리키는데, 공융(孔融)이 예형의 재주에 감탄하여 조조(曹操)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後漢書 卷80下 禰衡傳》
[주D-005]단리(短李) : 당 나라 이신(李紳)의 별칭. 그는 체구가 아주 왜소했기 때문에 ‘단리’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신은 처음에 재질과 절조로써 진용되었다가 뒤에 소인들의 모함으로 거의 화란을 당할 뻔했으나 다시 정인(正人)들의 극력 구호로 풀려나 길이 공명을 누렸다. 《舊唐書 卷173 李紳傳》
[주D-006]무지개……낚는 사람 : 당 나라 이백(李白)을 칭하는 말. 전하여 인품이 호매(豪邁)함을 비유한다. 당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이백이 재상(宰相)을 찾아 뵙고 쪽지에다 “바다에서 자라 낚는 나그네.[海上釣鼇客]”라고 써 바쳤다. 재상이 묻기를 “선생은 자라를 낚을 때 낚싯줄을 무엇으로 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무지개로 낚싯줄을 삼습니다.” 하였다.
○비온 뒤에 벗을 찾음
말 나눌 이 아무도 없어 / 百一無人接緖言
고결한 그대 찾아 어지러운 마음 씻고자 / 想攀瓊樹洗煩魂
봄비 개인 진흙탕 길을 / 雨晴街上春泥滑
간신히 걸어 그대 문에 이르렀네 / 踏作千跟始到門
○유 시랑(兪侍郞) 집에서 술 마시고 이튿날 쌍운회문시로 사례함
푸른 시냇물 얼음처럼 맑고 / 藍翠潑溪氷破鏡
복사꽃 살구꽃은 붉은 빛으로 흠뻑 물들었네 / 酣紅浸暈生桃杏
발은 미풍에 나부끼고 서늘한 정자 고요한데 / 簾颺輕風凉榭靜
짹짹거리는 새소리 졸음을 깨우도다 / 喃喃啼鳥呼睡醒
쟁반에 쌓은 맛좋은 안주에 / 兼味佳肴釘盤皿
술병 더해가며 자꾸만 권하누나 / 添壺頻勸督嚴令
세 사람은 차만 마시는데 / 三人高絶淸飮茗
주인과 두 손은 마시지 않았다.(主人與兩客不飮)
부끄럽다 나만 술을 마시니 / 慙我獨傾杯倒罄
비뚤어진 의관 다시 바로잡고 / 衫帽着顚斜復整
담소(談笑) 끝나 돌아오니 석양이로세 / 談罷始還方側景
[주C-001]쌍운회문시(雙韻廻文詩) : 한시(漢詩)의 별체(別體)인데, 시구를 위에서 내리 읽거나 밑에서 거슬러 읽거나, 평측(平仄)과 운(韻)이 알맞게 구성되어 있는 데다 매구(每句)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에 각기 운자(韻字)를 붙인 것이다.
○유공(兪公)이 화답하고 찾아왔으므로 술 마시며 다시 답함
검은 머리 백발 되어 거울 보고 수심겹더니 / 藍換雪髥愁曉鏡
불그스레 취한 얼굴 살구꽃일레 / 酣顔仗得侔紅杏
발 걷힌 창문에 평상(平床)은 고요하고 / 簾捲半窓閑榻靜
짹짹거리는 새소리에 술이 깨누나 / 喃喃話到醉還醒
술과 안주 그릇에 가득하니 / 兼酒與肴盈器皿
등불 밝히고 시를 짓도다 / 添燈夜席詩開令
석 잔 술 다 들고 다시 차 달이는데 / 三盃淺酌交湯茗
나는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아 부끄럽네 / 慙愧吾腸詞竭罄
흐트러진 의관 여미고 바르게 앉아 / 衫生皺任坐欹整
담소 무르익어 좋은 광경 선뜻 떠날 수 없네 / 談劇未輕抛好景
○춘감(春感) 2수
봄빛 무르익어 마음 들뜨게 하고 / 春光蕩蕩蕩人情
바람은 꽃을 날려 편편이 나부끼네 / 風送飛花片片輕
어느 곳인가 발 걷힌 저 누대 속에 / 何處樓臺簾半卷
푸른 옷 입은 공자가 누워 생황 부네 / 翠衫公子臥吹笙
성 가득히 노래소리는 봄바람에 취하는데 / 滿城歌管醉春風
온종일 이 늙은이 찾는 이 없네 / 盡日無人訪老翁
누대 앞 한 그루 버드나무만이 / 唯有樓前一株柳
반가운 눈으로 창가에서 아양 떠네 / 解擡靑眼媚窓櫳
○주석(酒席)에서 소년(少年)에게 답함
젊은이여 꽃 꽂은 이 늙은이를 웃지 마오 / 少年莫笑揷花翁
백발인들 붉은 빛이 뭐 그리 해로우랴 / 霜鬢何妨映紫紅
달빛 속을 거닐며 그림자 보면 / 看取月明歸路影
그대의 머리와 똑같을 거네 / 較君頭上一般同
○녹광서(錄光叙) 스님의 입산(入山)을 듣고
벼슬이 싫어서 보기조차 꺼리더니 / 厭被都官不愛看
관복 버리고 청산에 드는구나 / 紫衣脫却入靑山
속인이야 어찌 참견하랴마는 / 紛紛俗子何容語
불도(佛徒)의 누른 가사가 부끄럽지 않는가 / 禪敎緇黃尙厚顔
○꽃을 애석히 여김
봄은 알뜰히도 꽃을 피우는데 / 春君用意剪成花
어찌하여 광풍은 꽃을 날리느뇨 / 其奈狂風擺落何
바람은 봄바람인데 봄이 그를 막지 못해 / 風是春風春不制
어이 차마 붉은 비단을 진흙탕에 버린단 말가 / 忍敎紅錦委泥沙
○속장진주가(續將進酒歌)
이하(李賀)의 장진주사(將進酒辭)에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도를 깨달은 말이다. 그러므로 이 말을 부연하여 속장진주가라 이름한다.(李賀將進酒曰。酒不到劉伶墳上土。此誠達道之言也。故廣其辭。命之曰續將進酒云。)
쪽빛 술아 너에게 말하노니 / 寄語杯中藍色酒
평생토록 서로 만나기를 꺼려 마오 / 百年莫厭相逢遇
청춘이 그 얼마나 되겠는가 / 綠髮朱顔能幾時
이 몸 위태함이 아침 이슬 같구나 / 此身危脆如朝露
하루아침에 이 몸 죽어 소나무 아래 무덤 되면 / 一朝去作松下墳
천고만고에 뉘 날 찾아 주리 / 千古萬古何人顧
하염없이 나는 것은 쑥덤불이요 / 不期而生蒿與蓬
부르지 않아도 오는 것은 여우와 토끼리라 / 不速而至狐與兎
술은 평생 손 위의 물건이건만 / 酒雖平生手上物
그 누가 굳이 와서 한 잔 따라 주려나 / 爭肯一來霑我味
달통하였도다 유백륜이여 / 達哉達哉劉伯倫
몸소 술 싣고 길이 취하였구나 / 載酒自隨長醉倒
그대여 이 말 듣고 술 사양치 말지어다 / 請君聽此莫辭飮
유영의 무덤 위에 술 이르지 못하나니 / 酒不到劉伶墳上土
[주D-001]술은……못한다 : 술을 매우 좋아한 유령(劉伶)이었지만 한번 죽은 후에는 술을 마실 수 없다는 뜻이다. 유령은 완적(阮籍)ㆍ혜강(嵇康)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였는데, 진(晉) 나라 사람으로 술을 좋아하여 항시 술병을 휴대하고 다녔으며,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라다니게 하면서 “내가 죽으면 묻어달라.” 하였다. 《晉書 卷49 劉伶傳》
○보제사(普濟寺) 주지 규 선사(規禪師)의 벽에 걸린 대 그림[竹畫]에 제함
스님이 가리킨 벽의 대 그림이여 / 禪公指點壁間竹
물 속에 뿌리 박은 대는 이것뿐이로다 / 根立水中唯此獨
위천의 천 이랑을 나는 보지 못하였고 / 渭川千畝未曾看
소상의 한 언덕 또한 보지 못했지만 / 瀟湘一岸猶未矚
나는 스님의 소견이 이 대에서 그릇된 게 아닌가 생각하네 / 我導師之所見無奈誤此竹
천생의 대가 아니라면 / 不是天生綠
아마 도망가는 한 마리 용이 / 應是一逋龍
갑자기 해신에게 쫓기어 / 忽被海神逐
머리 쳐들고 물에서 나오려는데 / 昂頭露角欲出水
우뢰가 천지를 경동하여 / 雷公剨擊驚震地
푸른 비늘 흩어져 잎이 되고 / 蒼鱗散成千葉紛
야윈 뼈 우뚝이 장대가 되었으리 / 瘦骨卓作一竿峙
신물은 참으로 범상치 않아 / 神物固不凡
죽어도 추위를 이겨 푸르구나 / 雖死猶爲耐寒翠
오직 서려 있는 발 때문에 / 唯有蟠跟與蟄足
지금껏 창파 속에 서 있도다 / 至今猶在滄波裏
[주D-001]위천(渭川)의 천 이랑[千畝] : 위수(渭水)의 연안(沿岸)에 대가 많이 나는 곳이 있음을 이른 말이다. 《史記 卷129 貨殖列傳》
[주D-002]소상(瀟湘)의 한 언덕 : 소상강(瀟湘江) 근처에는 반죽(斑竹)이 나는데, 옛날 요(堯) 임금의 두 딸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舜) 임금의 비(妃)가 되었다가 순 임금이 돌아가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피눈물을 뿌린 자국이 반죽으로 화했다는 전설이 있다.
○술취한 나무꾼
삼베 쇠코 잠방이에 흰 칡베옷 입고 / 犢鼻麻褌白葛衣
가죽 채찍 대 피리 풀밭에 내동댕이치고 / 革鞭筠笛草間遺
수소는 암소 쫓아 달리는데 / 牡牛逐牝奔騰去
취하여 산기슭에 누워 세상 모르네 / 醉臥山邊都不知
○까마귀 울음소리를 미워함
온 세상이 너를 어여삐 여기는 이 없거늘 / 擧世無人憐爾者
어이 그리 요란스레 자주 우느뇨 / 如何多作百般聲
농우에 시 좋아하는 이 있으니 / 有如隴右喜吟客
아침저녁으로 너무 울지 말아다오 / 朝暮啾啾莫善嗚
[주D-001]농우(隴右)에……말아다오 : 농서(隴西)에서 태어난 시인 이백(李白)은 일찍이 ‘황운성가에 까마귀가 깃들려고 날아와서 까악까악 가지 위에 운다.[黃雲城邊烏欲棲 歸飛啞啞枝上啼]’로 시작되는 시를 지었다. 《李太白集 卷3 烏夜啼》
○대간(大諫) 유충기(劉冲祺)가 문생인 진사(進士) 김윤승(金允升)이 한 해에 연달아 과시에 합격하여 천원(天院)에 소입(召入)됨을 기뻐한 시에 차운함
수십 일에 거듭 급제함이 뭐 그리 어려우랴 / 數旬連捷也何難
묘수는 공을 포개는 신기(神技)가 있느니라 / 妙手神於累二丸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윽이 감탄하고 / 過客夾街猶竊嘆
우리 동료들은 영광을 함께 하도다 / 吾儕同道合榮觀
주머니 뚫고 재주 나타내기는 문객(門客) 모수(毛遂)요 / 脫囊材露門人遂
큰 집 지은 공로는 대목 반수(般倕)로다 / 架厦功歸老匠般
김 진사(金進士)의 연첩을 축하하기보다는 / 不賀此郞稠沓慶
그대 일찍이 쑥과 난초 가려냄을 축하하노라 / 賀君曾得辨蕭蘭
위는 유공(劉公)에게 준 것이다.(右贈劉公)
높이 나는 새 두 마리 한꺼번에 떨어뜨리기 어려운데 / 戾天高鳥落雙難
황금 탄환 하나만을 썼을 뿐이로다 / 只費黃金一彈丸
임금은 시장(試場)의 방명(榜名) 보고 놀라서 다시 듣고 / 簾陛認名驚再聽
잠신들은 얼굴 알아 전에 본 것 기억하네 / 簪紳識面記曾觀
그대처럼 뛰어난 이는 세 번 급제도 마땅하거니와 / 超如吾子宜三得
그 재주 흩어서 범인에게 주면 몇 번이나 할까 / 散與平人作幾般
맑은 향내 퍼뜨림이 뉘의 힘이뇨 / 扇播淸香誰有力
유군이 곡간(谷間)의 난초 뽑아내었네 / 劉君先擷谷中蘭
위는 김 윤승에게 준 것이다.(右贈金允升)
[주D-001]주머니……모수(毛遂)요 : 주머니를 뚫는다는 말은 송곳이 주머니를 뚫듯 재주가 나타남을 말한다. 전국 시대 진(秦) 나라가 조(趙) 나라를 쳤을 때 조 나라 평원군(平原君)의 문객인 모수(毛遂)가, 자기를 데리고 초(楚) 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한다면 큰 효과를 얻으리라고 자천(自薦)하므로 평원군이 그와 함께 초 나라에 갔는데, 과연 모수가 칼을 뽑아들고 초왕을 위협하여 합종(合從)의 협약을 맺게 하였다. 《史記 卷76 平原君列傳》
[주D-002]반수(般倕) : 고대의 유명한 목수인 노반(魯般)과 공수(工倕)를 말한다.
○더위에 고생함 2수
찌는 더위 불보다 매서워 / 酷熱甚於火
일천 화로에 숯불 이글거리듯하네 / 千爐扇炭紅
풍이도 더위먹어 죽으리니 / 馮夷應暍死
불이 수정궁에 미치리라 / 燒及水精宮
누워서는 벌떡 일어나려 하고 / 臥欲起奮飛
일어나서는 다시 벗고 누우려 하네 / 起思還裸臥
시루 속에서 찜을 누가 가엾이 여겨 / 誰憐甑底蒸
물 속에 옮겨 주려나 / 移向水中坐
[주D-001]풍이(馮夷) : 물을 맡은 신(神)의 이름이다.
○8월 14일 조상 무덤에 절한 다음 바위와 샘을 읊어 보궐(補闕) 이백순(李百順)에게 보임
바위 사이 흐르는 물 본래 정이 없거늘 / 石間流水本無情
어찌하여 세인이 와 발 씻는 걸 부끄럽게 여기랴만 / 豈恥世人來濯足
나는 세상의 때 많이 묻었기에 / 我緣世上埃垢重
물에 발 담그기도 전에 먼저 부끄럽구나 / 脚未下泉先愧恧
발바닥 때 씻고 나서 / 待渠洗了足底塵
손 담그니 부끄럽지 않아 맑은 물결 희롱하네 / 下手無慙弄澄綠
○중양절[九日]
젊었을 때는 중양절 만나면 / 少年遇重陽
부지런히 황국을 찾았었네 / 汲汲索黃菊
좋은 술 나쁜 술 따지지 않고 / 不論酒醇醨
이것 띄우니 향내 풍기더라 / 泛此香馥馥
지금은 녹봉 좀 넉넉하여 / 如今祿稍豐
독 안에 좋은 술 담겨 있어도 / 甕有浮蟻綠
내 늙고 게을러서 / 緣我老且慵
정취(情趣) 없어 삭막하도다 / 索莫情味薄
국화야 피거나 말거나 / 任爾霜葩開
시절 빠른 것만 슬퍼하누나 / 但悲時節促
손이 오매 굳이 잔 씻어 / 客來强洗盞
한 잔 술에도 즐거움 족하구나 / 一酌歡已足
울타리 옆 꽃으로 하여금 / 免使籬邊花
부끄러움 면하게 했네 / 厚顔終愧恧
○산을 나오면서 읊음
밝은 달은 나를 맞으러 와 / 明月迎我來
밤의 맑은 시내에 들고 / 夜入淸溪曲
흰구름은 나를 전송하러 / 白雲送我廻
새벽 산기슭에 나타나네 / 曉出靑山麓
가나오나 다 짝이 있으니 / 去來皆有伴
누가 나보고 혼자 논다 하느뇨 / 誰謂予遊獨
○예성강(禮成江) 누(樓) 위에 걸려 있는 판상(板上)의 제공(諸公)의 시를 차운함 고(故) 승선(承宣) 김돈중(金敦中)의 시가 첫머리에 있었다. (故承宣金敦中首題。)
백사장 머리 빽빽이 모인 배 / 才看畫鷁簇沙頭
썰물에 모두 떠나는구나 / 趁得廻潮摠不留
바다에 뜬 나그네는 풍랑을 시름겨워하지만 / 海客自愁風浪苦
바라보기엔 한가히 노는 듯하니 어찌하랴 / 望中無奈似閑遊
어부가 노를 멈추고 자주 돌아보는구나 / 漁叟停橈屢轉頭
묻노니 그대는 무슨 일로 머무는가 / 問渠何事故成留
배에서는 누의 낙을 부러워하지만 / 舟中應羨樓中樂
누에 있는 사람은 도리어 너의 놀이를 부러워하노라 / 樓上人還羡爾遊
○또 누 위에서 조수(潮水)를 보고. 동료 김군(金君)에게 줌 나는 공사로 몇 달 동안 왕래하였다. (予以公事往來數月)
조수의 기세 어찌 그리 미친 듯하느뇨 / 海潮勢壯何狂顚
일천 군사 앞을 다투어 달리누나 / 組練千軍倍道爭相前
행인의 걸음마다 먼지 일던 곳 / 行人步步生塵處
순식간에 질펀한 못이 되고 / 須臾漫汗成河淵
갑자기 다시 말아붙여 평지 만드니 / 忽復卷去作平地
창해가 하루아침에 상전이 되었는가 / 却疑蒼海一旦變桑田
포구는 자랑스레 실컷 삼키더니 / 浦口我誇呑浩浩
토하여 다시 구덩이 만드니 메우기 어렵도다 / 吐了更作坑難塡
물의 변태만 이럴 뿐 아니라 / 不獨水中變態如此耳
하늘의 일월도 찼다 이지러졌다 하네 / 天上日月猶虧全
만물의 차고 기우는 것은 본디 떳떳한 이치요 / 物之盈縮固常理
이는 천수라서 편벽되지 않도다 / 此是天數非玆偏
조수는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 潮來復潮去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도다 / 來船去舶首尾銜相連
아침에 이 누 밑을 떠나면 / 朝發此樓底
한낮이 못되어 남만에 이르도다 / 未午棹入南蠻天
사람들은 배를 물 위의 역마라고 말하는데 / 人言舟是水上驛
바람처럼 달리는 준마도 이만 못하도다 / 我導追風駿足較此猶遷延
만약 돛단배 바람 속에 달리듯 한다면 / 若使孤帆一似風中去
순식간에 봉래 선경(仙境)에 이르리니 / 焂忽想到蓬萊仙
어찌 달팽이 뿔 위에서 아옹다옹 다투리요 / 何況區區蠻觸界
배 타면 어딘들 가지 못하랴 / 假此木道何處不洄沿
○강 위의 저녁 비
강 언덕에는 사람 드물고 백로는 나는데 / 江岸人稀白鷺飛
어부는 해 저물자 고기 싣고 돌아오네 / 漁翁日暮得魚歸
엷은 구름 어찌 비가 되랴만 / 輕雲薄薄那成雨
바다 기운 하늘에 치닿아 진눈깨비 되었네 / 海氣干天偶作霏
○초겨울 강 위에서
누른 갈대는 줄기 부러져 드리우고 / 黃蘆折脛垂
비오리는 머리 박고 조누나 / 彩鴨挿頭睡
싸락눈은 도롱이에 뿌리고 / 乾雪響漁蓑
만 어귀에는 배만 외로이 / 灣口孤舟艤
한가히 조랑말 타고 / 閑騎果下駒
홀로 강가의 절을 찾노라니 / 獨往江邊寺
바닷바람 갑자기 모래를 날려 / 海風忽吹沙
얼굴을 때리는구나 / 浙浙衝面起
강촌(江村)은 빨리 추워져 / 水國天早寒
초겨울에도 귀를 찢누나 / 初冬已裂耳
오가는 일 원망하지 말아야지 / 往來不須嗔
벼슬아치 일인데 어이하랴 / 官事安可避
○동짓달의 비
천지가 크게 폐응하여 / 天地大閉凝
비 없으리라 여겼는데 / 想無雨霎霎
아마 눈이 내리다가 / 應是雪飛來
녹아서 비 되었겠지 / 冬溫融作汁
○눈을 읊음
예로부터 형용한 말 다 묵었으니 / 今古形容語已陳
새 뜻 꾸며 옛사람 압도하려는데 / 欲裁新意倒前人
어찌 알랴 너는 되려 내 마음 괴롭혀 / 豈知爾反令心苦
시에는 들어오지 않고 살쩍에만 더하여짐을 / 不入詩來入鬢新
살쩍에 더해진 흔적 모두 눈이라 / 入鬢新痕都是雪
비유하지 않아도 서로 같도다 / 不勞譬況此相同
다만 한 가지 같지 않음은 / 唯餘一段未同處
머리털은 녹지 않아도 너는 쉬이 녹느니라 / 鬢上難融汝易融
녹으면 물이요 얼면 얼음이라 / 融成流水凍成氷
무궁한 변화 너 홀로 하는구나 / 變化無窮獨爾能
눈 되어서는 내 살쩍과 흰 것을 겨루고 / 作雪爭吾雙鬢白
얼음 되어서는 내 맑은 마음 닮았구나 / 爲氷學我一心澄
○길에서 옛 친구를 만나 읊조림
장안 거리에서 손목 잡으니 / 握手長安路
눈물이 절로 흐르네 / 潸然涕自零
살쩍은 언제부터 희어졌느뇨 / 鬢從何日白
반가운 눈길은 옛날 그대로구나 / 眼是舊年靑
○꽃을 심음
꽃을 심을 적에는 피지 않을까 걱정하고 / 種花愁未發
피면 또 져버릴까 시름하네 / 花發又愁落
피고 짐이 다 사람을 시름겹게 하나니 / 開落摠愁人
모를레라 꽃 심는 즐거움을 / 未識種花樂
○비에 시달림
쏟아지는 빗줄기 베 짜듯하니 / 雨絲紛似織
구멍 뚫린 하늘 기울 수 없네 / 天罅裂難緘
마루에서도 우산 받치니 / 堂上猶持繖
거리에서는 돛을 달 만하구나 / 街中直掛帆
○죽순(竹筍)을 읊음
대는 곧고 굳세지만 / 此君眞勁抗
또한 아이 안을 때가 있네 / 還有抱兒時
아름다운 줄기 되기 전에는 / 未作琅玕股
아직 비단 껍질에 싸였도다 / 猶包錦繡皮
뾰족한 뿔 막 나오면 / 才看尖角出
줄기 기다랗게 금세 자라네 / 已見遠鞭馳
그 중에는 하늘에 닿는 줄기도 있어 / 中有干霄幹
먹으면 배고픔도 참을 만하네 / 饞脣且忍飢
○천마산(天磨山)에서 놀며 지음
산에 들어 길 잃고 숲 속에 빠지니 / 入山迷路墮叢薄
빈 골짜기 그윽한 꽃 절로 피고 지네 / 空谷幽花自開落
깊은 시냇물은 산 허리를 밟아 돌고 / 深溪流水山半脚
하늘의 한 줌 구름 절벽 위에 외롭구나 / 絶壁孤雲天一握
몇 백 척 암벽 위에 올라가 / 跳上巉巖幾百尺
나무 사이 뛰어다니며 원숭이와 다투네 / 身行木末爭猿玃
칼날 같은 창바위는 누구를 찌르려뇨 / 戟巖攢鍔欲誰格
흰 바위가 창과 같아서 사람들이 창바위라 한다.(白巖如戟人號戟巖。)
딱딱한 돌북[石鼓]이 어찌 울리랴 / 鼓石無聲那得咢
북 같은 바위가 있다.(有石如鼓。)
바람은 속인의 얼굴 쓸어버릴 듯 불어오고 / 風吹俗面似掃掠
골짜기는 사람 소리에 대답하듯 메아리치네 / 谷答人聲如唯諾
울퉁불퉁 돌밭길 따라가다가 / 初從石徑行犖确
되돌아서 소나무 사립 두들겼네 / 旋向松扉敲剝啄
문에 나와 웃으며 손 맞는 중 / 山僧出門笑迎客
그 모습 늙은 소나무에 천년학일세 / 貌古松頭千歲鶴
곤하여 송헌에 누우니 산 달은 훤하고 / 困臥松軒山月白
차 달이니 암천 마름을 물을 것 없네 / 煎茶不問巖泉涸
나는 즐거워 시름 잊는다 하니 스님은 껄껄 웃으며 / 我樂忘憂師大噱
본래 시름 없거늘 무어 그리 즐거우랴 하네 / 本自無憂誰是樂
내일 아침에는 완부의 나막신 밀칠하리니 / 明朝共蠟阮孚屐
무엇하러 다시 도퇴의 짚신을 사리오 / 何必更買桃椎屩
[주D-001]완부(阮孚)의……밀칠하리니 : 진(晉) 나라 완부가 나막신을 매우 아껴 항상 신에다 밀[蠟]을 칠하여 신고 다녔다. 《晉書 卷49 阮孚傳》
[주D-002]도퇴(桃椎)의 짚신 : 당 나라 주도퇴(朱桃椎)가 산 속에 오막살이를 짓고 살면서 항상 짚신을 삼아 길거리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은 그 짚신을 보고 “주 거사(朱居士)의 신이다.” 하고 쌀로 바꾸어 갔다. 《新唐書 卷196 朱桃椎傳》
○매미를 읊음
아득히 먼 옛날 제 나라를 생각하노니 / 緬思齊日夐迢迢
궁녀의 천년 원한 가시지 않네 / 宮女千年怨未銷
소리는 산승의 경쇠 소리 잇고 / 聲續山僧敲罷磬
날개는 연객이 짠 명주 조각이로다 / 翼偸淵客織殘綃
맑은 새벽 이슬 먹은 푸른 느티나무 잎 / 曉淸露重綠槐葉
비 갠 석양의 높은 버들가지에 / 雨霽日斜高柳梢
가을이 깊었다고 이별을 고하지 말라 / 莫爲秋深空訴別
제도는 아직도 시중의 관식(冠飾)에 있느니라 / 典刑猶在侍中貂
[주D-001]아득히……가시지 않네 : 제왕(齊王)의 후(后)가 왕을 원망하다가 죽어서 매미가 되었으므로 매미를 제녀(齊女)라 한다는 전설이 있다.
[주D-002]연객(淵客)이 짠 명주 : 연객은 교인(鮫人) 즉 인어(人魚)이다. 물 속에 사는 교인이 인가(人家)에 머물면서 명주를 짜놓고 돌아갔다 한다.《蒙求卷上 淵客泣珠》
[주D-003]시중(侍中)의 관식(冠飾) : 옛날 시중(侍中)의 관을 초피(貂皮)와 매미깃[蟬翼]으로 꾸몄는데 이를 초선관(貂蟬冠)이라 한다.
○해당(海棠)
깊은 잠에 축 늘어진 해당화여 / 海棠眠重困欹垂
양 귀비 술 취한 때와 흡사하구나 / 恰似楊妃被酒時
꾀꼬리 소리에 꿈 깨어 / 賴有黃鶯呼破夢
다시 미소 지으며 교태 부리누나 / 更含微笑帶嬌癡
○붉은 작약(芍藥)
곱게 단장한 두 볼 취한 듯 붉어 / 嚴粧兩臉醉潮勻
서시의 옛 모습 전하는구나 / 共導西施舊日身
웃음으로 오 나라를 망치고도 부족하여 / 笑破吳家猶不足
또다시 누구를 괴롭히려뇨 / 却來還欲惱何人
[주D-001]서시(西施)의 옛 모습……망치고도 : 서시(西施)는 춘추(春秋) 때 월(越) 나라 미녀의 이름.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패한 뒤에, 그의 모신(謀臣) 범여(范蠡)가 서시를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자, 마침내 오 나라의 정사가 어지럽게 되어서 멸망하기까지에 이른 사실(史實)을 인용하여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작약을 서시의 아름다움에 비유한 말이다.
○쥐를 놓아 줌
사람은 천생의 물건을 훔치는데 / 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의 훔친 것을 훔치는구나 / 爾盜人所盜
다같이 먹기 위해 하는 일이니 / 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랴 / 何獨於汝討
○딱따구리[啄大鳥]
나무 구멍에서 벌레집 찾아 / 木穴得蟲藪
딱딱 쪼는 소리 문 두들기는 듯하도다 / 剝剝如扣戶
너는 오색의 아름다움으로 / 將汝五色姸
어찌하여 벌레 쪼기를 좋아하느뇨 / 胡爲好蠱
한 본에는 “누가 너의 부리를 빌어 사람 벌레를 쪼아버릴꼬.”[誰能借汝觜 啄去人中蠱]라 되어 있다.(一作誰能借汝觜。啄去人中蠱。)
○이 도사(李道士)에게 줌
집은 천단 몇 겹이나 둘렀느뇨 / 家在天壇第幾重
잠깐 속세에 내려와 붉은 티끌 밟는도다 / 暫來人世踏塵紅
칠유의 옥 자물쇠로 현궐을 잠갔고 / 七蕤玉鑰封玄闕
팔소의 경진은 강궁에 새어나도다 / 八素瓊津洩絳宮
문무(文武)의 불로 금솥을 달이고 / 文虎火煎金鼎底
군신 비약 푸른 주머니에 들었도다 / 君臣藥祕綠囊中
《황정경》 읽고 나니 화로에 향불 꺼지고 / 黃庭讀罷爐香冷
한 마리 청란이 하늘에서 내려오도다 / 一隻靑鸞下碧空
[주D-001]팔소(八素)의……새어나오다 : 도가(道家)의 용어로서, 팔소(八素)는 8가지 원소이고 강궁(絳宮)은 곧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즉 팔소의 좋은 진액(津液)이 마음에서 새어난다는 뜻이다.
[주D-002]군신 비약(君臣祕藥) : 아주 좋은 약이라는 뜻이다. 병을 다스림에 있어 주약(主藥)과 보조약(補助藥)이 있는데, 군(君)은 곧 주약이고 신(臣)은 곧 보조약이다.
[주D-003]《황정경(黃庭經)》 : 도가(道家)의 경(經)이다.
○동교(東郊)에서 읊음
삼 척의 남여 타고 천천히 가노라니 / 三尺藍輿取次行
못 앞뒤서 그윽한 정취 자아내도다 / 池南池北稱幽情
비 실은 구름은 산을 둘러 나가고 / 黑雲將雨環山過
푸른 보리는 바람에 나부껴 언덕에 가지런하도다 / 綠麥搖風際岸平
출몰하는 고기 백로를 조롱하고 / 出沒游魚欺白鷺
높고 낮게 나는 제비 꾀꼬리를 지키도다 / 高低輕鷰護黃鸎
들 암자 굳이 가서 찾지 않음은 / 野庵不敢敲門訪
한가한 사람에게 수고 끼칠까 염려해서네 / 恐使閑人費送迎
○눈을 읊음
물을 조각내 눈 만들더니 / 剪水作浮花
순식간에 다시 물 되누나 / 須臾復爲水
이는 심한 희롱인 듯하나 / 此甚似幻戲
생각컨대 하늘이 그렇지는 않으리라 / 想天必不爾
아마 하늘에서 비가 내려오다가 / 常疑雨墮空
추위에 견디다 못해 / 苦逼寒威被
중도에서 얼어붙어 / 半路凍凝華
우연히 꽃봉오리 닮게 되었으리라 / 偶肖瓊葩耳
만약 이것이 비의 조화라면 / 若是雨所化
조각내고 새긴 자 누구뇨 / 剪刻者誰是
여섯 모의 교묘함 자세히 보니 / 詳看六出巧
하늘의 솜씨임이 분명하도다 / 定自天工費
과연 하늘의 희롱함인가 / 天果幻戲耶
끝내 그 뜻은 알 수 없도다 / 終未測其意
햇빛 보면 녹아 진눈깨비 되니 / 見日融成汁
도리어 큰 비와 같도다 / 還與雨潦似
다시 꽃 되려 하여도 / 雖欲復爲花
어찌하랴 땅에 빠져버렸으니 / 其奈已淪地
천기는 따질 수 없고 / 天機祕難詰
술이나 마시고 취할 수밖에 / 置酒但一醉
○동백꽃
복사꽃 오얏꽃이 비록 아름다워도 / 桃李雖夭夭
부화한 꽃 믿을 수 없도다 / 浮花難可恃
송백은 아리따운 맵시 없지만 / 松栢無嬌顔
추위를 견디기에 귀히 여기네 / 所貴耐寒耳
이 나무에 좋은 꽃 있어 / 此木有好花
눈 속에서도 잘 피도다 / 亦能開雪裏
가만히 생각하매 잣나무보다 나으니 / 細思勝於柏
동백의 이름 옳지 않도다 / 冬柏名非是
○친구가 은잔[銀杯]으로 말[馬]을 바꾸었다기에
입술과 발이 모두 그대 것이어늘 / 脣足皆君身上物
입술은 잊고 발만 아끼니 그 뜻 모르겠노라 / 忘脣愛足意難知
그대 사기잔으로도 취할 수 있다 하니 / 君言瓦盞尙堪醉
취한 뒤 말 달리면 둘 다 마땅하리라 / 醉後驕馳兩得宜
○병중(病中)에 지어서 벗에게 보임
육체는 나무허수아비 같거늘 / 洞想形骸同木偶
그 누구의 시킴이뇨 이맛살 찌푸려 괴로워함이 / 孰敎矉額苦啾啾
배사의 헛된 생각 풀 수 있고 / 杯蛇妄意如能釋
상의의 헛소리도 좀 거둘 수 있거늘 / 床蟻虛聲亦少收
조화의 아이가 나를 괴롭히려 하니 / 造化小兒謀欲困
사생은 한 꿈인데 무엇을 근심하랴 / 死生一夢我何憂
몹시 아파 진정 위로할 만하니 / 此非常痛眞堪賀
하늘이 괴로운 사람 아껴 편히 쉬게 함이리 / 天惜勞生擬遣休
[주D-001]배사(杯蛇)의 헛된 생각 : 아무것도 아닌 일을 쓸데없이 걱정하여 괴로와하는 일을 말한다. 진(晉) 나라 악광(樂廣)이 친구와 술을 마실 때 그 친구가 잔 속에 비친 뱀의 그림자를 보고 마음이 섬뜩하여 그로 인해 병들었다가, 나중에 그 뱀의 그림자가 벽에 걸린 활의 그림자임을 안 후 병이 절로 나았다 한다. 《晉書 卷44 樂廣傳》
[주D-002]상의(床蟻)의 헛소리 : 진(晉) 나라 은중감(殷仲堪)의 아버지가 귀를 앓을 적에 와상(臥狀) 밑에서 개미 움직이는 소리가 소 싸우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는 고사이다. 《晉書 卷84 殷仲堪傳》
[주D-003]조화(造化)의 아이[小兒] : 고칠 수 없는 중한 병을 말한다. 아이란 곧 병마(病魔)의 뜻이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두 아이[二豎子]가 고황(膏肓 : 심장과 격막의 사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병이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左傳 成公 10年》
○손이 왔다가 곧 가므로 지음
무엇을 보고 가느뇨 / 何所見而去
그대 어찌 종회의 무리이랴 / 子豈鍾會倫
나는 단류객 아니니 / 吾非鍜柳客
와룡인 만들지 말아다오 / 莫導臥龍人
[주D-001]무엇을 보고……만들지 말아다오 : 단류객(鍛柳客)은 진(晉)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을 가리키는데, 그가 대장일[鍛冶]을 좋아하여 자기집 버드나무 아래서 대장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는 종회(鍾會)가 혜강의 집을 찾아왔는데, 혜강은 그를 잘 대우하지 않고 그가 가려 할 때 묻기를 “무엇을 들으러 왔다가 무엇을 보고 가느냐.” 하자, 종회가 “들을 것을 들으러 왔다가 볼 것을 보고 간다.” 하고 떠났다. 그 후 이로 인해 종회는 혜강에게 감정을 품고 문제(文帝)에게 참소하기를 “혜강은 와룡(臥龍 : 흔히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을 지칭한 말이나 여기서는 잠복해 있는 간웅(奸雄)이라는 뜻)입니다.” 하여, 결국 혜강은 죽임을 당하였다. 《晉書 卷49 嵇康傳》
○광명사(廣明寺)에서 자고 주지 스님에게 보임
병 많은 몸 등잔불 아래 누워 / 多病一身燈影裏
빗소리에 외로운 꿈 꾸려 하네 / 欲殘孤夢雨聲中
내 지금 눈살 찌푸린 사람 아니니 / 我今不是攢眉客
절에 몸담아 끝내 원공을 따르리라 / 投社終隨老遠公
[주D-001]내 지금……원공(遠公)을 따르리라 : 원공은 곧 동진(東晉) 때의 고승 혜원(慧遠)을 말한다. 혜원이 여산(廬山)에 백련사(白蓮社)를 짓고 도연명(陶淵明)에게 들어오기를 권하였으나 도연명은 눈살을 찌푸리고[攢眉] 가버렸다. ‘눈살 찌푸린 사람[攢眉客]’이란 곧 도연명을 가리킨다. 《事文類聚 前集 卷35 仙佛部 儈》
○2월의 눈
이월 날씨 포근한 기운 펴려는데 / 二月融怡氣欲舒
하늘 가득히 눈 내리니 무슨 뜻이뇨 / 連霄放雪意何如
광풍이 아마 봄 솜씨를 흩으려 / 狂風應散春工手
끝없이 매화를 가위질하는가 보다 / 無限梅花剪出餘
○절구(絶句) 3수
송정에 봄날 긴데 / 松亭春日永
놀라서 낮잠 깨니 / 午枕夢初驚
비 내리려 주춧돌 먼저 젖고 / 欲雨礎先潤
바람 불어 거문고 절로 울리네 / 有風琴自鳴
나무 그림자 창에 비끼고 / 樹影晩斜窓
꽃 그늘 땅에 가득차네 / 花陰晴滿地
거문고 타기도 게으르니 / 素琴猶懶彈
비로소 일 없음 알겠네 / 始覺眞無事
따스한 봄이라 새 소리 아름답고 / 春暖鳥聲軟
석양이라 사람 그림자 길도다 / 日斜人影長
작은 동산에 산의 정취 넉넉하니 / 小園山意足
내 뜻대로 노니노라 / 隨意自倘佯
○앵두
하늘의 솜씨 어찌 그리 기묘하뇨 / 天工獨何妙
시고 단맛 알맞게 만들었도다 / 調味適酸甘
한갓 탄환처럼 둥글게 생겨 / 徒爾圓如彈
뭇새의 쪼아댐을 막지 못하는도다 / 難防衆鳥含
○한운(旱雲)
일산 같고 깃발 같다가 다시 번기(幡旗) 같으니 / 如蓋如旌復似幡
가고 오고 모이고 흩어짐이 본래 정한 바 없네 / 去來屯散本無根
광풍이여 함부로 불어버리지 말고 / 狂風愼勿輕吹卷
문득 줄기찬 비 한번 뿌려다오 / 儻作霏霏雨一番
한 본에는 “그것으로 하여금 천 가지로 변화하게 하면서 줄기찬 비 한번 뿌리지 않는도다.” [使渠變化多千狀 未作霏霏雨一番] 하였다.(一作使渠變化多千狀。未作霏霏雨一番。)
○살쩍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지음
서리와 눈은 / 霜雪之於物
가을과 겨울이 각각 맡음이 있거늘 / 秋冬各有司
어찌하여 사람의 살쩍에 / 如何人鬢上
한 번 붙으면 떨어지지 않느뇨 / 一着不曾離
○규정(閨情) 2수
적적한 빈 방에 / 寂寂空閨裏
비단 이불 누구를 위해 펴느뇨 / 錦衾披向誰
깊은 밤 상사의 한을 / 相思深夜恨
등잔불만 알리라 / 唯有一燈知
눈물은 마음속에서 나오나니 / 淚從心底出
눈과 서로 약속이야 했으랴만 / 豈與眼相謀
찬 샘물이 / 不似寒泉水
무정하게 흐름과는 같지 않도다 / 無情亦自流
○푸른 사기 베개[綠瓷枕]
푸른 사기 베개 물보다 맑고 / 綠瓷琢枕澄於水
옥을 만지듯 매끄럽구나 / 入手如捫玉肌膩
몸 날려 그 속에 들지 말라 / 跳身愼勿入其裏
어지러운 황량몽이었지만 / 擾擾黃粱夢中事
한단의 청구가 부끄럽기야 하랴 / 邯鄲靑駒何必恥
[주D-001]황량몽(黃梁夢) : 황량몽은 곧 한단몽(邯鄲夢)과 같은 말이다. 당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도사(道士)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에서 소년 노생(盧生)을 만났는데, 노생이 여옹에게 자기 신세를 한탄하자, 여옹은 노생에게 베개를 주면서 “이것을 베면 부귀영화를 뜻대로 누릴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옹은 기장[粱]으로 밥을 짓고, 노생은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일평생의 부귀영화를 실컷 누리고 그 꿈을 깨어 보니 아직 기장밥이 익지 않았었다는 고사이다.
[주D-002]한단(邯鄲)의……부끄럽기야 하랴 : 청구(靑駒)는 한단몽에서 나오는 노생의 말[馬] 이름인데, 여기서는 곧 노생을 지칭한다. 아무리 푸른 사기 베개를 베고 노생의 한단몽처럼 허무한 꿈을 꾼다 한들 무어 그리 부끄럽겠느냐는 뜻이다.
○단오날 교외에서 느낀 바 있어 지음
옛 무덤 새 무덤 서로 이웃하였네 / 舊墳新壙接相隣
한평생 술 취한 이 그 몇몇이뇨 / 幾許平生醉倒人
오늘 자손들 다투어 술 올리지만 / 今日子孫爭奠酒
한 방울인들 입술을 적실까보냐 / 可能一滴得霑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