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방아 찧다 / 수필울 제 3 집 수록
권 덕 봉
오른발 앞축이 걸리며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머릿속에서 번쩍 빛이 난 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넘어지며 무의식 속에 두 팔을 내밀었던 것 같다. 의자들이 튕겨 나가며 오른쪽 가슴과 얼굴을 때린 모양이다. 놀란 아내와 딸이 일으켜 세우는데 바닥으로 액체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퍼진다. 급히 얼굴 아래로 모은 두 손바닥에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코피를 쏟는 것이 아니다. 딸이 피가 나는 곳을 화장지로 눌러 지혈을 시도했다. 아내가 집어 드는 내 안경을 보니 코 받침은 양쪽 모두 주저앉아 림에 붙어 있고 브리지에는 뜯겨나온 살갗이 묻어있었다.
안경의 코 받침이 오른쪽 콧방울과 콧등을 긁으며 눌려 무너지고 비근에 닿은 브리지가 비근을 덮고 있는 피부를 움푹 파버린 것이다. 나중에 보니 면이 두꺼운 청바지를 입었는데도 두 무릎이 모두 까지고 오른쪽 가슴에 퍼렇고 누리끼리한 멍이 보였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딸이 외식하자고 했다. 그녀가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간 곳이 휴무였다. 마침 근방에 내가 오래전에 다녔던 칼국수 집이 있어 그곳으로 아내와 딸을 안내하였다. 대기 고객 번호표를 손에 쥔 사람들이 출입구를 막고 있었다. 자리가 비어있는 대기 고객용 의자로 가다가 마루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방심하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딸에게 맡겨두어도 될 일이었다. 그냥 천천히 따라가 안내하는 대로 자리 잡고 내오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면 품위를 잃지 않았을 터이다. 아이들에게는 매사에 조심하라고 일렀었다. 그랬던 내가 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넘어질 줄은 몰랐다. 늙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점심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가장 이른 시간에 진료를 시작할 외과의원을 찾았다. 접수하던 직원이 상처를 보고 흉터가 크게 남을 것 같다며 성형외과로 가기를 권했다. 흉터가 남아도 괜찮으니 이곳에서 처치해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딸이 자기의 이마를 가리키며 가로막고는 성형외과로 가자고 했다. 딸이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도로의 경계석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가 심했는데 일반외과에서 적당히 꿰매고 말아 제법 큰 흉터가 남아있다. 한 번도 원망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마음속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아껴줄 것인가. 자기의 몸과 마음은 자신이 지켜야 한다. 내가 아프면 가족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대신 아파줄 수는 없다. 아내도 그리하자고 해 딸의 제안을 따랐다.
성형외과 의사가 뜯어진 피부를 가지고 왔는지 물었다. 그것이 없으면 다른 부위의 피부를 잘라내어 이식해야 한다고 했다. 잘린 손가락이나 부러진 치아를 소중히 챙겨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벗겨진 피부를 가져갔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딸이 화장지에 싸인 채 버려졌던 살갗을 바로 전에 들렸던 정형외과 휴지통에서 찾아왔다. 조그만 식염수 통에 담긴 피부 조각을 살피던 의사가 당일은 수술실에 여유가 없으니 다음날 수술하자고 했다.
늦은 점심을 감재옹심이가 들어있는 메밀 칼국수로 하였는데 모두 말없이 먹었다. 즐거웠어야 할 외식을 망쳐버린 결과가 됐다. 딸이 제집으로 떠난 후 단골로 다니는 안경원에서 코 받침을 다시 세웠다. 고쳐진 안경을 사진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려 아들도 보게 하였는데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수술대에 올라 누웠다. 둥그런 등이 보기 싫어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을 에워싼다며 두건을 씌우더니 얼굴을 소독한단다. 조그마한 상처를 꿰매는데 이처럼 큰 시설을 쓰는 것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부 마취할 때는 바늘이 매섭더니 꿰맬 때는 바늘과 실이 지나다니는 느낌은 있어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잘 꿰매졌으니 안심하라는 의사의 말이 반가웠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묘하다. 처음에는 ‘상처에 딱지가 몇 번 생겼다가 떨어지며 아물어도 좋다’라고 생각했었으면서도, 이제는 성형외과로 오길 잘했다고 여긴다.
열흘 동안 몇 차례 통원 치료했다. 콧방울과 콧등에 있던 긁힌 자국은 없어졌다. 열하루 되는 날 실밥을 뺐다. 꿰맨 살갗은 짙은 갈색으로 변하기는 했어도 딱지처럼 떨어지지는 않았다. 실리콘 패치를 상처 위에 붙여 꿰맨 자리가 보기 싫게 변하지 않도록 관리하라고 했다. 한 달 후부터 흉터 레이저를 하며 한 달에 한 번 간격으로 다섯 회를 기본으로 한다고 했다.
나의 마음에도 거룩한 신성과 음흉한 동물성이 혼재되어있다. 이 마당에 들어있는 보험을 떠올리며 어떻게 보험금을 청구할까 궁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