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로봇이 오감을 장착하면 인간과 같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미 사람처럼 눈과 귀와 코가 달린 그리고 손가락으로 감촉을 느끼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인공지능 로봇이 상용화 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일론 머스크는 이렇게 오감이 장착된 인공지능은 가장 똑똑한 사람보다 더 똑똑할 것이니, 앞으로 사람들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며, 직업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을 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기본소득을 주면 얼마나 줄까? 그 액수는 누가 정할까? 그것으로 충분히 인간다운 삶이 보장 될까? 만일 미니멈의 돈으로 생존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반려견이나 금붕어의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
❚ 그런데 진짜 인공지능이 가장 똑똑한 사람보다 더 똑똑한가?
똑똑하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인공지능이 계산을 더 잘하고, 더 많은 것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오류 없이 정확하게 대상을 알아 볼 것이며, 따라서 상황에 대한 판단력도 더 나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 더 똑똑한 것이 맞다. 하지만 이러한 똑똑함은 아직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 혹은 자아 더 나아가 영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공지능이 똑똑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두뇌의 용량, 즉 기억 용량이 엄청나다’ 그리고 ‘두뇌회전이 매우 빠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공감, 느낌, 연민, 불의에 대한 분노, 양심의 고뇌, 자비, 삶의 의미, 인생에 대한 지혜, 염원, 희망, 기도, 진리를 향한 갈증 등 등’ 인간의 영혼의 모습이 없다. 따라서 인공지능 로봇은 – 섹스는 할 수 있을 지라도 - 사랑할 줄을 모른다. 사랑은 두뇌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느끼고 갈망하고 희망하고 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입력하고 있더라도 '자기 세계'라는 것이 없다. 자기 세계란 한 인간이 가족, 친구, 동료, 민족, 삶의 고뇌, 기도, 염원 등 다양한 역사적 질곡과 개별적 삶의 한 가운데서 '자아가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만들어 가는 개별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가장 지능적인 사람보다 더 지능적이겠지만, 한사람은 평범한 선량한 사람은 가장 선량한 인공지능보다 더 선량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뿐이겠는가, "한 사람의 의로운 사람은 모든 인공지능들보다 더 의롭고, 한 사람의 양심적인 사람은 모든 인공지능들보다 더 양심적이고, 한 사람의 사랑스러운 사람은 모든 인공지능들보다 더 사랑스로운 것이다."
❚ 인간에게는 진짜 두뇌와 구별되는 정신 혹은 영혼이 있는가?
베르그송은 인간의 의식(정신)과 두뇌를 구분하고 있다. 그는 기억이란 것이 두뇌의 세포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는 의사들의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 『물질과 기억』에서 기억감소나 상실로 인한 실어증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두 번째 종류의 사태들(고유명사에서 동사에까지 점진적으로 기억을 상실하는 경우)에서 전체적으로 손상된 것은 기능이고, 첫 번째 종류의 사태들(사고 등을 당하여 잠정적으로 기억 전체가 사라진 경우)에서는 망각이 겉보기에 더 명확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결정적이지 않다. 어느 경우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뇌 물질의 특정 세포들 안에 위치하고 있는 기억들을 발견할 수는 없으며 이러한 세포가 파괴되면 세포는 소멸되고 말 것이다.” - <물질과 기억> 중에서-
위 진술에서는 기억과 정신과 뇌의 관계에 대한 베르그송의 입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뇌 세포의 특정부분에 과거의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으며, 기억이 상실된다는 것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뇌 세포에 손상을 입었기 때문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베르그송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기억이 저장되어 있는 곳은 정신(영혼)이며, 뇌나 뇌세포는 다만 정신과 육체를 이어주는 매개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기억이 상실된다는 것은 정신과 감각(육체)을 연결하는 연결기능(뇌나 신경의 기능)에 문제가 있거나 기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지 기억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다만 뇌의 종합적인 기능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뇌란 다만 정신의 도구일 뿐이며, 정신이란 비-물질적인 실체인가 하는 것이다. 전자는 꽁트의 실증주의와 유물론자들의 입장이며, 후자는 베르그송의 입장이며, 특히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비-질료적인 정신을 말할 때의 입장이다.
❚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개별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베르그송의 의식에 대한 근본입장을 이해한다면 보다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베르그송은 『의식에 주어진 직접적인 소여들』에서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는 방식을 눈덩이가 굴러가는 것에 비유한 바 있다. 작은 눈덩이가 굴러가면서 눈과 다양한 이물질들을 계속 자신에게 포함하면서 점차 큰 눈덩이가 되는 것처럼 의식도 그렇게 점차 보다 확장적이고 보다 개별적으로 형성된다고 본 것이다. 즉 인간은 과거의 모든 기억들을 자신의 의식 속에 내포하고 있으며, 과거의 어떤 경험과 유사한 경험을 할 때마다 그 경험이 의식 속에 종합되면서 기존에 경험하였던 것과 연합하여 보다 완전한 이미지나, 관념 등을 형성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의식의 과정 속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개인의 개별적인 삶의 의미이다. 즉 동일한 경험 동일한 사건을 맞이하는 두 개인은 서로 다른 의미, 서로 다른 가치를 산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지속성,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자아는 자신의 개별적인 삶의 의미와 더불어 유일하게 형성된 것이며, 이렇게 경험과 기억의 다발들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단일한 지속성(durée)을 이루는 ‘개별적인 정신 혹은 자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두뇌란 여기서 다만 이러한 정신을 육체와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매개체일 뿐이다. 두뇌가 일반성의 지평에 있다면, 자아 혹은 정신은 (일반성을 포함한) 개별성의 지평에 있다. 인공지능이 뇌의 표피에 어마 무시한 데이타를 탑재하고 있다면, 인간은 두 뇌를 넘어 비-물질적인 개별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이 게별적인 자아는 탄생시의 개인의 기질 성격,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치면서 가족적, 사회적, 민족적 역사를 살아온, 인생의 모든 체험들을 거쳐서 형성된 그 누구도 동일한 인생을 살아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자아이다. 이 자아는 뇌가 손상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뇌 손상은 이 자아가 육체와 연결되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인간의 정신 혹은 의식은 탄생과 더불어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자기’라는 것을 가진 비-물질적인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철학자들은 이를 생명의 원리가 되는 ‘영혼(Anima)’이라고 불렀다. 이 영혼은 육체가 소멸된다고 함께 소멸될 수 없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어떤 의미에서 놀라운 이성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에게는 지성, 즉 자아(영혼)가 없다. 그래서 그는 생명의 원리가 되는 영혼이 없는 것이며, 엄밀히 말해 영혼도 없고 생명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모두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커피 한 잔을 사더라도 살과 피를 가진
영적인 생명체인 한 인간의 손을 통해 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