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성의 소중함
연일 전파를 타고 들어오는 세계 각국의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할 말을 잊는다.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고, 무슨 다짐을 할 수 있겠는가? 아무 돌봄을 받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
얼마나 죽는 사람이 많은지, 시체를 보관할 곳이 없고 장례는 고사하고 묻을 곳조차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면서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누구의 잘못을 탓하겠는가? 몇 년 전 동물 전염병으로 인해 수만 마리의 돼지와 소를
땅에 생매장 하던 광경이 떠오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에는 조류독감으로 닭과 오리가 그렇게 매장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인가? 생명체가 지구에 너무 많아 자연이 스스로 균형을 잡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부질없는 사변을 접어버린다. 그래도 글 쓰는 일로, 매일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일을 업으로 하며 사는 사람이,
이런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느낌을 글로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피할 수 없어, 이렇게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린다.
평생을 세상에 절대 악, 절대 선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산 사람으로서 - 이것이 신을 믿는 사람의 믿음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는 말이 있지만 – 적어도 우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위로가 되는 말이 있다면,
나는 일상성의 소중함을 재발견, 재확인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얻는 교훈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일상성 가운데 가장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것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가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며, 숨을 쉰다는 것은 곧 탄산가스를 내뱉고
산소를 흡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산소 부족으로, 그것을 구하지 못해서, 병상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를 지켜보는 친지와 의료진이 발을 동동 구르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어떤 할아버지에게 기자가 물었다. 병이 나으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시고 싶으냐고.
그의 답은 불과 7-8십 마일 밖에 사는 손자 얼굴을 한 번 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평범한 말이 나의 심금을 깊게 울리기에 충분했다. 별것 아니고 바로 일상성의 소중함이다.
숨을 쉬고 산다는 것,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을 대하고 이야기 하고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 등
우리가 당연시 하는 일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죽음이 일상화된 오늘의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축복이 아닐까? 그 어떤 종교가 말하는 대단한 깨달음이나 각성보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매일 아니 매 순간 누리고 사는 평범한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날마다 확인하면서 산다면 그나마 좋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어느 영어 선생님이 하시던 말이 생각난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가서
히로시마 근교의 산에서 작업을 하던 중 원자폭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도 모르고 멀리서 버섯구름을 펼치면서
연기가 하늘로 솟는 것을 구경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님은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이라는 생각으로
본인도 사셨지만 철없는 학생들에게도 살라고 말씀하셨다.
이른바 죽음의 기억(memento mori)이 인생을 참으로 잘 살게 하는 지혜의 샘이라는 것이다.
첫댓글 이 또한 지나가리라, , , 그러하니 오늘이 바로 나의 마지막 날이 아니겠는가 , , ,
평범한 하루 하루의 삶이 가장 소중한 인간의 가치이군요~~
감사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