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야승(大東野乘) / 歷代要覽 / 洪武
○帝覽賀正表箋。怒以爲有戱侮字。徵撰表人鄭道傳。道傳稱疾。權近請曰。撰表之事。臣亦預知。願隨使赴京。及入朝。叩頭曰。小國事大。不因表文。無以達情。而臣等生於海外。學不通方。使我王之忠誠。不能別白於紸纊。誠臣等之罪也。帝然其言。待以優禮。命題賦詩十八篇。帝嘉嘆不已。因勅有司。備酒饌。具妓樂。使之遊觀三日。亦命題詩以進。帝乃親製長律詩三篇賜之。勅仕文淵閣。得與翰林學士劉三吾許觀景淸張信戴德彝相周旋。每稱上事大之誠。帝聞而嘉之。亟稱老實秀士。命遣還。○三十年。設奴婢卞正都監。○陪臣安翊於右順門欽奉聖旨。朝鮮國王我上出氣力。洪武二十一年。爾那小國軍馬起。將來打這中國。中那中不那。我這裡水路裡放幾隻船。旱路裡放軍馬整齊。可是來那時節。李諱一發回去。今如得了高麗改號朝鮮。自然天道。朝鮮國王至誠。○三十一年。夏閏五月。帝崩。建文卽位。諱允炆。太祖七年 八年。冊恭靖大王爲世子。九月禪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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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집 부록 제1권 연보(年譜)
○ 9월 19일 경오에 판서공 묘의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다. - 감사가 유지를 받들어 일꾼을 조달해서 훼손된 곳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
○ 다음날 소명(召命)에 응하여 서울로 떠나다. 도중에 명을 받아 사육신(死六臣)의 복관(復官)ㆍ치제(致祭)ㆍ사액(賜額)에 관해 헌의(獻議)하다. - 한 달 전에 상이 선대의 능으로 가던 길에 행차가 사육신의 묘를 지나게 되었는데,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이어서 그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고 묘우(廟宇)에 사액하라고 명하니, 조정의 의론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예관이 선생께 와서 수의(收議)하니, 선생이 도중에서 헌의하였는데, 대략에, “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는 천명과 인심을 거스를 수 없어 그런 부득이한 일을 하셨거니와, 저 사육신들은 절의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았으니, 그 마음은 곧 백이(伯夷)가 무왕(武王)을 그르다고 여긴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공자는, 주(周)나라 사람인데도 오히려 백이가 정벌을 말리다가 굶어 죽은 것을 두고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하셨으니, 어찌 백이를 칭술(稱述)한 것으로 인해 무왕에게 혐의되는 바가 있었겠습니까. 한통(韓通)이 주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추증(追贈)하기를 후하게 하였고, 경청(景淸)과 정몽주(鄭夢周)는 자신이 섬기던 군주에게 절의를 다하였으나 대명(大明)의 선종(宣宗)과 본조(本朝)의 태종(太宗)께서는 복관시켜 주거나 포증(褒贈)하셨으니, 모두 절의를 숭장(崇奬)하여 후세 신하들의 충의를 권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제 상께서 사육신을 포장(褒奬)하려 하시니, 이는 선종황제와 태종대왕과 같은 마음입니다. 게다가 세조대왕께서는 사육신을 두고 후세에는 충신일 것이라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참으로 송나라 태조가 한통을 후하게 추증했던 일과 같은 뜻입니다. 또 신원(伸冤)해 주라는 뜻을 넌지시 후세 자손들에게 보이셨으니, 이번의 거조는 참으로 선조의 뜻을 잇고 사업을 계승하는 일 중에 큰 것입니다. 그러니 또 어찌 조금이라도 혐의스러워하여 ‘조상이나 나라의 좋지 않은 일은 드러내지 않는다’는 의리에 견주기까지 하겠습니까. 후세로 내려오면서 풍속이 쇠퇴하여 윤상(倫常)이 무너져 버렸으니, 상께서 스스로 결단하여 서둘러 시행하신다면 풍성(風聲)을 부지하고 교화를 도와 이루는 도에 보탬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주-D032] 한통(韓通) : 오대(五代) 때 주(周)나라의 무신으로 용력(勇力)이 있었다. 송(宋)나라 태조가 황제가 되는 것에 협조하지 않다가 왕언승(王彦昇)에게 살해되었다. 태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왕언승을 벌하려고 하였으나 개국 초인지라 차마 벌하지는 못하고 대신 생사여탈권을 부여하는 절월(節鉞)은 내리지 않았다. 《宋史 卷484 韓通傳》
[주-D033] 경청(景淸) : 명(明)나라 진녕인(眞寧人)이다. 성제(成帝)가 제위(帝位)를 찬탈하자 방효유(方孝儒) 등과 순국하기로 약속하였다가 혼자서 비수를 품은 채 청나라 조정에 들어갔는데, 성제의 의심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明史 卷141 景淸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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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암집(葛庵集) 이현일(李玄逸)생년1627년(인조 5)몰년1704년(숙종 30)자익승(翼昇)호갈암(葛庵)본관재령(載寧)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홍여하(洪汝河), 정시한(丁時翰), 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
葛庵先生文集卷之五 / 獻議 / 六臣復官致祭賜額議 辛未九月
숙종 | 17 | 1691 | 신미 | 康熙 | 30 | 65 | 4월, 본직에서 체직되다. ○ 5월, 다시 대사헌이 되다. ○ 7월, 이조 참판이 되다. ○ 11월, 주강에 입시하다. 〈御屛十六贊〉을 지어 올리다. ○ 12월, 상소하여 君德과 時務를 아뢰다. |
迺者主上殿下輦過六臣墓。嘉其忠義。以復官致祭賜額祠宇之意。下大臣諸宰議。旣又詢及遠外疏賤之臣。臣玄逸懵不曉事。且長途跋涉之餘。神精耗憒。茫然不知所以爲對。然竊感聖主詢蕘之至意。聊誦所聞。以備財擇。臣竊惟世祖大王迫於天命人心。爲此不得已之擧。而彼六臣者。乃心所事。抗節致忠。至死不變其心。則伯夷非武王之心也。其事則與周之韓通。明之景淸。麗之鄭夢周。同一規模也。傳曰。武王克商。義士猶或非之。夫以伯夷之非聖人而自是如此。孔子是周人。猶以諫伐而餓。爲求仁而得仁。何嘗以稱述伯夷之故。爲有所嫌礙於武王哉。韓通效死於周室。而宋太祖追贈優厚。景淸,鄭夢周盡節於所事。而大明宣宗。本朝太宗或命復官。或加褒贈。皆所以崇奬節義。爲後世人臣忠義之勸也。今我聖上欲爲褒奬六臣。則宣宗皇帝復景淸官。太宗大王褒贈鄭夢周之義也。豈不爲曠世之盛擧乎。況我世祖大王以六臣爲後世忠臣之敎。實與宋太祖優厚韓通之意同。而且示微意於後世子孫。今茲之擧。實繼志述事之大者。又豈有一毫嫌礙於其間哉。夫王者公天下爲是非。六臣事設或有所嫌礙。猶不可以廢天下公議。況以伯夷,武王之事及宣皇,太宗待景淸,鄭夢周之義觀之。則亦何所嫌難而至擬之以諱親諱國之義乎。今若有所避就而必欲爲之隱諱焉。則竊恐其或反有累於光廟應天順人之擧。而非所以闡揚先朝寬弘博大之度也。世降俗末。倫紀敗壞。人將不復知忠孝節義之爲何事。今聖上之爲此擧。實出於深識遠覽。非常情凡慮之所可及。臣愚以爲繼自宸衷。早賜施行。其於扶樹風聲。助成治化之道。不爲少補。臣玄逸誠惶誠恐。謹昧死仰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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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집(松沙集) 기우만(奇宇萬)생년1846년(헌종 12)몰년1916년자회일(會一)호송사(松沙), 학정거사(學靜居士)본관행주(幸州)특기사항정재규(鄭載圭), 조성가(趙性家), 정의림(鄭義林) 등과 교유. 조선 말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松沙先生文集卷之二十四 / 神道碑銘 / 皇明欽差左僉議都御使景公神道碑銘 幷序
生我褊邦。入仕天朝。與方孝孺,鐵鉉二公齊名。爲建文三忠者。景公諱淸是已。公登洪武己酉文科。事建文皇帝。踐歷至左僉議都御使。時運値一元。維新未久。人才之盛。可埒唐虞。而公以陪臣。仕至崇品。其德業聞望。蓋匪夷所思。輔少主致泰平。指日可期。而永樂帝以燕主入。建文帝遜位出宮。素抱貞忠。非吾君不事志。誓圖報。懷匕首上殿。時太史奏客星犯座。命搜衣帶。公直前將擧事。爲左右收縛。抉齒剝皮。備受酷刑。噴血濺座。罵舌愈厲。竟至成仁。懸屍長安門。翌朝駕過。懸斷犯駕怒。命焚屍赤其族。中州人士慕其義。立祠湖上。事載皇明史。二弟在本國。曰濱溶。濱之子時行嗣公後。招魂返國。以衣履藏于瀛州之巨麻面水湯後新房洞酉原。以替佳城。舊有石。泐頑不可讀。將改豎以新之。幷碑于神道。景氏貫詩山。九世祖磋登高麗文科。以樞密副使。左遷爲東南道兵馬使。尋入爲門下侍中平章事泰山府院君。諡文穆。泰山君洩淨文科大提學。有靖亂勳。諡忠翼。詩山君世貞兵馬節度。諡忠度。公八世若五世。高祖曦集賢殿大學士。曾祖成傑寶文閣提學。諡文忠。祖光侑典客寺副令。考寅修文殿大提學。妣善山吉氏父塘。夫人中山王徐達女。時行三男。辰奉事。參,星進士。嗚呼。公危忠孤節。雖謂之天下士。無異辭。而後先於莊陵六臣。爲其前茅。爲我國萬億年小中華消息。而襃忠之爵諡不及。錄後之寵命不行。爲五百年闕典。可勝歎哉。吾欲公而誦之。以告嗣後而執國命者。後孫在禧,明鎬,承鎬聯轡過余。謁爲銘。公扶植民彝。當與天壤同傳。宇萬亦民彝中一物。曷敢以病且老而辭。銘曰。
忠臣義士。從古可數。究其成仁。臣爲其主。建文三忠。莊陵六死。事同義類。扶植人紀。卓卓景公。三忠其一。古罕其儔。齊名方鐵。方鐵猶可。天朝之臣。陪臣而能。其事尤難。生於褊邦。爲天下士。以余所知。惟公是已。湖上之祠。三忠一軆。聖朝獨闕。志士增涕。煌煌明史。我嘗擊節。天壤同久。其他何說。衣履爲藏。庸替幽宅。高山景行。我銘其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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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 숙종 20년 갑술 > 5월 26일 > 최종정보
숙종 20년 갑술(1694) 5월 26일(계해)
20-05-26[03] 홍수헌ㆍ안세징 등이 권환ㆍ권처경ㆍ심계량 등의 처벌을 논핵하다
집의(執義) 홍수헌(洪受瀗), 장령(掌令) 안세징(安世徵)ㆍ김홍정(金弘楨)이 논핵하기를,
“해주(海州) 부용당(芙蓉堂)은 바로 선조(宣祖)께서 어가(御駕)를 잠시 머무른 곳인데, 효종조(孝宗朝)에 나성두(羅星斗)를 목사(牧使)로 삼아 잔폐(殘廢)한 것을 다시 일으키는 공로가 있었으며, 송시열(宋時烈)이 그 사적(事蹟)에 대해 서술하여 벽 위에 걸어 양조(兩朝)의 휘호(徽號)가 아울러 기문(記文) 가운데 나열되어 있었는데, 권환(權瑍)이 일찍이 본도(本道)의 감사(監司)가 되어 누판(樓板)을 쳐서 깨뜨려 부엌의 땔감으로 대용하였습니다. 명(明)나라의 철현(鐵鉉)은 제남(濟南)을 지키며 연왕(燕王)의 군대를 방어하기 위해 태조(太祖)의 위패(位牌)를 성(城) 위에 설치해 놓았더니 병사들이 감히 화살을 전혀 쏘지 못했다고 합니다. 권환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기문을 찬출(撰出)한 사람을 미워하여 이런 흉패(凶悖)한 행동을 해서 스스로 임금을 경멸한 죄에 빠진 것입니까? 청컨대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경외(京外)의 여러 관사(官司)에서 국기일(國忌日)과 탄신일(誕辰日)을 적어서 판목(板木)에 새기어 벽 위에 걸어놓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런데 평산 현감(平山縣監) 권처경(權處經)이 일찍이 장원 별검(掌苑別檢)이 되었을 때 중궁(中宮)의 탄신일이 판목 위에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패륜적인 말을 마구 하며 깎아내도록 하였습니다. 밑에 아전들도 그것이 잘못된 일인 줄 알았기 때문에 숨겨서 화를 면하였으니, 청컨대 변방으로 멀리 귀양보내소서. 지난 해에 채이장(蔡以章)이 군문 장교(軍門將校)에게 글을 발송하여 중전(中殿)을 위해서 진소(陳疏)하려고 하였는데, 심계량(沈季良)이 전례가 없는 행동으로 핑계를 대며 급급하게 입주(入奏)하기를 마치 상변(上變)이나 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채이장이 이런 논의를 제창한 것은 그 뜻이 칭찬할 만한 일로서 처벌할 수가 없는 일인데, 심계량이 겨우 복합(伏閤)을 정지시키자 또 사람을 모함하고자 하였으니, 또한 홀로 무슨 심산이었습니까? 청컨대 매우 먼 변방에 안치시키소서. 전(前) 부사(府使) 송상주(宋尙周)는 권간(權奸)에 들러붙어 감히 한 장의 상소문을 얽어서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설로써 선후(先后)를 침범하여 핍박하고 중전(中殿)을 무함하여 헐뜯으며 제멋대로 속였습니다. 동료들의 만류로 인하여 비록 올리지는 못하였지만 그가 윤대관(輪對官)으로 입시(入侍)하였을 때 또한 일찍이 이 상소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중의(中外)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마음을 놀라게 하고 뼈에 사무치게 하였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안치시키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주-D001] 양조(兩朝) : 선조와 효종.[주-D002] 철현(鐵鉉) : 명(明)나라 등(鄧) 사람. 급사중(給事中)ㆍ산동 참정(山東參政)ㆍ병부 상서(兵部尙書) 등의 벼슬을 역임했음. 연왕(燕王)이 군대를 동원하여 침공해 왔을 때 철현이 제남(濟南)을 지키며 누차에 걸쳐서 연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전공을 세웠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심성섭 (역) |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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陈桥兵变又称陈桥驿兵变,是赵匡胤发动的取代后周,建立宋朝的兵变事件,此典故又称黄袍加身。
959年,周世宗柴荣驾崩,七岁的周恭帝柴宗训即位。殿前都点检、归德军节度使赵匡胤,与禁军高级将领石守信、王审琦等掌握了军权。
960年正月初一(1月31日),传闻契丹联合北汉南下攻周,宰相范质等未辨真伪,急遣赵匡胤统率诸军北上御敌。周军行至陈桥驿,赵匡胤和赵普等密谋策划,发动兵变,众将以黄袍加在赵匡胤身上,拥立他为皇帝。随后,赵匡胤率军回师开封,京城守将石守信、王审琦开城迎接赵匡胤入城,胁迫周恭帝禅位。 [1]赵匡胤即位后,改国号为“宋”,仍定都开封。石守信、高怀德、张令铎、王审琦、张光翰、赵彦徽皆得授节度使位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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铁铉(1366年—1402年),字鼎石,邓(今河南邓州)人,元代回回人后裔。明朝初年名臣,洪武年间,由国子生授礼科给事中。历官山东布政使、兵部尚书,在靖难之变时不肯投降造反夺位的燕王朱棣,并召集溃败的士兵坚守济南,击退燕王朱棣,在朱棣夺位后被施以磔刑,时年37岁。
后人尊敬其忠义不屈,在各地建立铁公祠来纪念他。南明朝廷追赠他为太保、加谥号忠襄,清乾隆时重新谥为忠定。
在山东各地,有很多“铁公”祠庙,皆是祭奉铁铉,济南人民更视他为乡土神或城隍爷。河南荥阳、陕西西安、辽宁沈阳等地铁姓回族都是铁铉后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