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27
정릉 능침 해체
혼례를 끝낸 태종 이방원은 인사이동을 단행했다.
"하구와 노귀산을 좌군총제로, 김구덕을 우군동지총제로, 한옹을 한성부윤으로, 김점을 공조참의로, 맹사성을
판충주목사로, 탁신을 동부대언으로 한다."
하구는 하륜의 아들이다. 처음 하구를 도총제로 삼았으나 '도총제는 원로 장수의 직책인데 하구가 나이가 젊고
아는 것이 없으니 이 직책에 합당하지 않다 ' 는 하륜의 주청를 받아들여 한 등 내린 것이고, 태종 이방원의
지근거리에 있던 맹사성의 충주행은 하방이었다.
"광통교의 흙다리(土橋)가 비만 오면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 구기(舊基)의 돌로 돌다리(石橋)를 만드소서."
의정부에서 상언이 올라왔다. 정동에 있는 신덕왕후 강씨의 능침에, 병풍석과 신장석으로 사용된 석물을
해체 운반하여 돌다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의정부의 이름을 빌렸지만 감히 태왕후의 능침을 헐자니, 왕심(王心)을 읽어 내는데 천재성을 발휘하는
귀재의 복안이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 이성계는 웅장한 능침을 조성하라고 감역제조(監役提調) 김주에게
명했다.
"정동의 정릉과 요물고(料物庫)를 빨리 만들 필요는 없으나 사리전(舍利殿) 건축은 내가 원한 지가 오래
되었는데 지금 일을 마치지 않으면 후일에 이를 저지(沮止)시킬 사람이 있을까 염려되니, 빨리 성취하여
나의 소망에 보답하라."
먼저 간 부인에게 바치는 사부곡
산릉의 능침사찰로 흥천사(興天寺)를 짓고 사리전(舍利殿)을 지으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기 대가 아니면 중지 시킬 수 있으니 빨리 서두르라는 것이다.
이 때 태조 이성계가 사찰 공사를 저지시킬 수 있는 자로 지목한 사람은 바로 이방원이었다.
이방원이 아무런 직책이 없는 야인으로 권력의 변방에 서성거리고 있지만 그의 야심을 잘 알고 있었다.
유학을 공부하여 성리학을 숭상하고 있는 이방원이 언젠가 왕위에 오르면 불교를 배척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덕왕후 능침과 흥천사 공사에 속도가 붙었다.
태조 이성계 곁에 항상 붙어 다니던 환자(宦者) 김사행이 잔재주와 아첨을 떨어, 능침과 흥천사가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완공되었다.
당대 최고의 석공을 동원하여 조각한 화엄신장을 둘러싼 구름무늬가 있는 병풍석은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덩굴무늬를 아로새긴 열두 개의 돌은 태조 이성계가 먼저 간 신덕왕후 강씨에게 바치는 사부곡(思婦曲)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능침에 수호군 수백 명을 배치하여 시위하게 하니 백성들의 원성이 비등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허약한 수호군 100명을 골라내어 원대 복귀시키기도 했다.
또한 청해도(靑海道) 사람 최백안과 부개 등 일곱 집을 상주하게 하고 그들이 안심하고 능침 봉사에
전념하도록 과주에 전지 2결씩을 주었다.
능지기도 감투이련가. 주변 백성에 대한 이들의 횡포가 심했다.
태조 이성계가 몇 번 경고를 주었으나 이들의 나쁜 짓이 그치지 않았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최백안과 부개를 연변(沿邊) 지방으로 내쳐 군대에 편입시켜 버렸다.
신덕왕후의 영정(影幀)을 정동에 있는 정릉 흥천사에 봉안한 태조 이성계는 흥천사 탑전(塔殿)에서 7일 동안
불사를 베풀었다. 사리(舍利) 4매(枚)가 분신(分身)하니 유동(楡洞)에 불당을 짓고 사리를 안치했다.
또한 금강산으로 유람을 떠나기 전 흥천사를 방문하여 정근법석(精勤法席)을 베풀고 자신이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벗어 부처에게 시사(施捨)하였다.
"장차 대산(臺山)과 낙산(洛山)에 거둥하려 하니 길을 밝혀주소서."
태조 이성계가 금강산을 다녀와서 맨 처음 찾는 곳이 정동에 있는 정릉이었다.
흥천사 계성전(啓聖殿)에 친히 전(奠)드리고 중관에게 명하여 정릉에 전(奠)드리게 하였다.
사리전(舍利殿)에 들어가 직접 분향하고 부처에게 배례(拜禮)하고서 산릉을 돌아보면서,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아버지 이성계가 정성을 들인 곳이 정동 정릉과 흥천사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어있고 흔적이 남아있는 정릉을 헐어 낸다는 것이 태종은 불효인 것만 같았다.
우선 산릉 권역을 줄이기로 했다.
"정동 정릉이 도성에 있는데도 영역이 너무 넓으니 백성들의 원망이 많다. 능에서 1백 보(步) 밖에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살도록 하라."
태종 임금의 명이 떨어지기 바쁘게 세력가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좋은 땅을 선점하였다.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 좌정승 하륜이 여러 사위를 내세워 많은 땅을 차지했다.
태조 이성계의 제2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잠들어 있는 정동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게 눈엣 가시었다.
아버지 이성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여인이었지만 태종 이방원에게는 원한이 맺혀있는 여인이었다.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에 앉히고 방원으로 하여금 시름을 삭이며 야인생활을 하게했던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전후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귀재가 주청했다.
"옛 제왕(帝王)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정동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館舍)에서 가까우니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옮기도록 하소서."
"정동 정릉의 능침을 헐어 광통교를 짓고 정자각(亭子閣)을 헐어서 누(樓) 3간을 짓고 태평관의 구 건물을
가지고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으로 나누면 목석(木石)의 공력을 덜고 일도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정자 터를 높이 쌓고 가운데에 누각을 짓고 동쪽과 서쪽에 헌(軒)을 지으면 아름다울 것이다'고 한
황엄의 의견에 따른 것이다."
"석인을 가지고 주초(柱礎)를 메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희가 말했다.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을 주초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옳지 못하다. 땅에 묻는 것이 마땅하다. 정릉의 돌을 운반하여 돌다리 놓는데 사용하고, 그 봉분(封墳)은
흔적을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할 것이며 석인(石人)은 땅을 파고 묻도록 하라."
태종은 결단했다. 태평관 감조제조(監造提調) 이귀령에게 명했다.
능침을 헐어서 다리를 만들고 정자각 터에 사신을 위한 누각을 만들라는 것이다.
황엄은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견한 내사였다.
이렇게 하여 웅장하게 조성된 정동의 정릉을 헐어내고 오늘날의 정릉으로 간소하게 이장했다.
정동의 구기 터에 남아있던 병풍석과 석물을 옮겨와 돌다리를 만들었다.
오늘날의 광통교다. 이때가 태종 10년 8월 8일이었다.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광통교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최근이다.
일제 강점기와 청계천 복개로 땅 속에 묻혀있던 광통교의 병풍석과 신장석이 청계천 복원으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다음. 128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