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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강원 감영(선화당)
간략설명고문의 서슬은 간곳없고
지번주소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2
원주시 일산동에 있는 강원 감영(江原監營)은 조선 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년)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다. 1830년에 편찬된 “관동지”에 수록된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를 보면 건물이 41동에 이를 만큼 규모가 컸으나 6.25 전쟁으로 대부분 사라지고 한동안 원주시 제2청사로 사용되면서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청(政廳)인 선화당(宣化堂)과 정문인 포정루(布政樓), 내삼문과 중삼문 등 4동은 원래 위치에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잘 남아 있었다.
조선 시대에 원주 일대의 죄인들은 감원 감영으로 끌려와 정청인 선화당에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당시 이곳에서는 국사범 등의 중죄인은 물론 잡범들에 대한 형도 집행됐는데,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잡혀 와 심문을 받고 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참수 처형되었다.
전국적으로 박해가 회오리처럼 몰아치던 당시에 전국 각 지방의 감영은 천주교인들을 잡아들여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온갖 고문을 일삼았다. 그래서 어느 감영이든 대부분 그때 흘린 순교자들의 피와 고통의 역사가 구전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지곤 했다.
강원 감영이 품고 있는 슬픈 역사 역시 동네 어른들의 입을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지고 때로는 아예 잊히기도 했지만, 그 순수하고 굳건했던 신앙의 정신만은 퇴색하지 않고 남아 있다.
강원감영으로 들어서는 정문인 포정루를 지나면 정청인 선화당이 눈에 들어온다. 우아하게 뻗어 내린 기와의 곡선이 아름답지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단지 천주(天主)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참하게 피를 흘린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네 군데 처마 끝에 기와로 구운 보호 장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이채로운 선화당은 관찰사의 집무실로 쓰였으며, 포정루와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는 1660년(현종 1년)에 목사(牧使) 이후(李候)가 다시 건립하였고, 6.25 전쟁 때도 손상을 입었으나 다시 복구하였다. 선화당은 1667년에 다시 세워졌다.
포정루 및 선화당은 조선 시대 감영의 형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래서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의 명칭은 강원 감영(문루 및 선화당)이었으나 2004년 1월 17일 포정루 및 선화당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강원 감영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박해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복자품에 오른 김강이 시몬, 최해성 요한, 최 비르지타 등 많은 순교자가 강원 감영으로 끌려와 혹독한 옥살이를 하고 참수 치명했다.
복자 김강이 시몬(金鋼伊, 1765?-1815년)은 1815년 을해박해 때 강원도 울진(현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체포되어 안동에 수감되었다가 원주의 강원 감염으로 이송되어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고문으로 생긴 상처와 이질로 인해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다. 최경환 성인의 일가인 복자 최해성 요한(崔海成, 1811-1839년)은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해 작은 교우촌을 이루고 살다가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원주 관장 앞에서 무수한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참수 치명했다. 복자 최 비르지타(崔~, 1783-1839년)는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 준 죄목으로 유배당한 남편이 죽은 후 유배지를 떠나 오빠가 사는 서지 마을에 와서 살았다. 강원 감영에 갇힌 조카 최해성 요한을 보러 갔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후 옥리들에게 목이 졸려 순교했다.
안타까운 것은 강원 감영의 옥터와 참수터, 서지 마을로 추정되는 곳은 있으나 그 정확한 위치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이미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어 복원이 어려운 상황이다. 원주시는 1995년 ‘강원 감영 사적공원조성 기본계획’를 수립하여 강원 감영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2005년 6월 선화당 권역 복원공사를 완료하고, 2011년 10월 선화당 뒤편에 있던 원주 우체국 청사를 철거한 후 2단계로 후원 권역 복원에 착수했다. 2014년까지 문화재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설계를 마치고 2015년 11월 후원 권역 복원공사를 마무리했다. 원주시는 2018년 11월 3일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철저한 고증을 거쳐 조선 시대 팔도 감영 중 처음으로 복원한 ‘감원 감영 복원기념 준공식’을 개최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9년 12월 26일)]
복자, 김강이 시몬(5.29) 기본정보
‘여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강이(金鋼伊) 시몬은 충청도 서산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성격이 고상하고 용맹한 데다가 재산도 많았다. 그러나 입교한 뒤에는 재산과 종들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의 가족과 함께 전라도 고산 땅에 가서 살았다.
1795년 초여름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고산을 방문하자, 김 시몬은 여러 차례 신부의 처소로 가서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지도층 신자로 지목되어 1년 동안을 피신해 다녀야만 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1년 동안 옥살이를 한 끝에 많은 돈을 쓰고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박해가 끝난 뒤 김 시몬은, 등짐장사를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데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온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장사를 그만두고 경상도 진보의 머루산(현, 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리)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일구었다. 이후에도 그는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군)에 가서 정착하였다.
경상도에서 1815년에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 시몬은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인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이때 김 시몬은 용감하게 관장 앞으로 나아가 포졸들이 빼앗은 자신의 재물을 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그의 요청을 순순히 들어주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김 시몬은 다시 찾은 재물을 굶주리고 있는 옥중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김 시몬은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아우와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의 수부(首府)인 원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도 다시 문초와 형벌은 이어졌고, 그러면서 그의 아우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김 시몬은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다.
김 시몬이 보여준 열렬한 신앙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러자 감사는 결코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형을 선고한 뒤, 임금의 윤허를 받고자 그 내용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때 원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김강이는 비밀리에 신자들에게 천주교 서적과 소식을 전해 왔으며, 여러 해 동안 천주교 교리를 외우고 익혀서 온몸으로 깊이 빠져 있습니다. 이에 합당한 법률을 시행토록 허락해 주십시오.”
임금은 곧바로 사형 집행을 윤허하였다. 그때 김강이 시몬은 이미 형벌의 상처가 아주 심한 데다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 결과 김 시몬은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에 옥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김강이 시몬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최해성 요한(5.29) 기본정보
‘양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최해성 요한(崔海成, Joannes)은, 1839년에 순교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먼 친척이다. 그의 집안은 본디 충청도 홍주 다락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았는데,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그의 조부가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온 가족이 그 지방으로 가서 생활하였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도 이곳이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우면서 성장한 최 요한은 성격이 온순하고 정직하였다. 그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자 가족과 함께 강원도 원주의 서지(현,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손곡 2리)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었다.
최 요한은 천주교의 모든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뛰어난 열성을 보였으며,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보살피는 일에 전심하였다. 그는 비록 가난하게 살았지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애긍을 잊지 않았다. 또 자주 교우들을 격려하면서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서지 교우촌에 선교사가 와서 성사를 베풀 때면, 최 요한은 말할 수 없는 열심에 불탔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이러한 덕행 때문에 그는, 그 마을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견진성사를 받은 뒤에는, 성령 칠은의 특은을 충만히 받은 징표가 나타났으며, 이내 그의 마음은 순교의 뜻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요한은 먼저 부모와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교회 서적을 가져오려고 다시 집으로 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포졸들은 쇠도리깨로 그를 때리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내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눌 수조차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그는 영혼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원주 관장 앞으로 끌려간 최 요한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형제들을 고발할 수 없다.’고 용감하게 대답하였다. 관장이 ‘네가 사악한 종교를 믿는다니 정말이냐?’라고 하자, 그는 “저는 사악한 종교를 믿지는 아니합니다. 하늘의 주님을 섬기는 천주교를 믿을 따름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최 요한은 일단 옥에 갇혔다가 며칠 뒤에 다시 끌려 나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여러 가지 말로 유혹하면서 배교를 권유하자, 그는 이를 거부하면서 “원주 고을을 다 주신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수 없고, 우리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후에도 최 요한은 자주 옥에서 끌려 나가 감사나 영장 앞에서 수없이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불평하지 않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도움만을 청하였다. 그는 살이 너덜너덜해지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매를 맞아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다시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게 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의 목숨을 보존하려고 한다면, 제 영혼은 영원히 죽을 것이므로 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임금과 의(義)를 위해 죽겠다고 약속하고 나서 배반하는 백성이 있다면, 그는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위대한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한 제가 어찌 형벌을 두려워하여 이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관장은 화가 나서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최 요한의 몸은 다시 피투성이가 되었고, 살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붙은 그의 영혼은 기쁨으로 용약하였다.
옥으로 돌아온 최해성 요한은, 일시적으로 유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우리 주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림으로써, 인성의 나약함을 억누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기쁨과 평화가 다시 그의 마음에 찾아왔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침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39년 9월 6일(음력 7월 29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최해성 요한은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녀, 최 비르지타(5.29) 기본정보
최 비르지타(崔, Birgitta)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에 신유박해 때 남편이 교우 황사영 알렉시오를 숨겨 준 죄로 체포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그녀도 남편을 따라 그곳으로 갔다. 1839년 원주에서 순교한 최해성 요한(崔海成, Joannes)은 그녀의 조카이다.
최 비르지타의 남편은 유배된 다음에 그곳에서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대세를 줄 교우를 불러올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남편이 다시 살아난다면 남편과 정결을 지켜 남매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 자신이 대세를 주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의지할 데가 없었으므로 오빠에게로 돌아왔다. 그 오빠가 곧 최해성 요한의 부친이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최 요한은 가족을 피신시킨 뒤에 집으로 천주교 서적을 가지러 갔다가 체포되어 원주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최 비르지타는 조카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렵지 않게 조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감옥으로 갔다가 관원들에게 발각되었다.
관원들이 신분을 묻자, 최 비르지타는 “옥에 갇혀 있는 최 요한의 어미요. 아들을 보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관원들이 “그렇다면, 너도 천주교 신자가 아니냐?”라고 하자, 그녀는 “그렇습니다. 틀림없는 교우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관원들은 ‘배교하지 않으면 아들을 만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최 비르지타는 배교를 거부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 아들을 다시 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하느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가 하느님을 배반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관원은 최 비르지타를 죄인이라고 지목하면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굴복하지 않고 이를 참고 견디어 냈다. 그러자 관원은 그녀를 옥에 가두고 굶겨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최 비르지타는 금방 죽지 않고 4개월 동안 옥중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4개월 뒤에도 최 비르지타가 죽지 않은 것을 본 관원은 다시 똑같은 명령을 내리면서 ‘3일 안에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때 옥리들은 3일 안에는 그녀를 굶겨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밤에 옥으로 들어가 그녀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으니, 이때가 1839년 12월 8일(음력 11월 3일)과 9일 밤 사이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6세였다.
최 비르지타가 순교한 뒤, 옥리의 어머니는 옥에 갇혀 있던 한 교우를 찾아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최 비르지타는 틀림없이 천당에 갔습니다. 그 여자의 목을 졸라 죽일 때에 그녀의 몸에서 한 줄기 빛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거든요.”
최 비르지타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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