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세요.
(사무엘하 19 : 16-2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용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용서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으면 자신이 괴롭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 핵심적인 임무가 있다. 하나는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할수록 영혼은 더 건강해집니다.
1. 관용을 베푸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욕설과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으로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피난 갈 때 돌을 던지며 심한 욕설과 저주를 했던 사람입니다(16:5-8). 그때 그의 모습은 매우 용감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다윗에게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 다윗이 반란군을 진압하고 예루살렘으로 환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위기를 느끼고 서둘러 다윗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용감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이끌고 나와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비겁한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시므이만의 모습이 아니라 죄에 빠진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상대가 약할 때는 무자비하게 짓밟다가도 상대가 강해지면 태도를 바꾸어 굽실대며 아부하는 비겁한 모습, 이것이 바로 죄에 빠진 세상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연약해져 있을 때, 시므이는 기고만장해져서 다윗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 다윗을 붙잡으시고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악인 시므이는 그 앞에서 엎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재물을 모으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교만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짓밟으며 불의를 행하고도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마치 가진 자가 누리는 특권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악을 행하는 자는 곧 끊어질 것이며, 결국에는 온유하고 의로운 자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시 37:9-17).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세상의 악인들로부터 괴롭힘과 멸시와 조롱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똑같이 악한 모습으로 대항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처럼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다윗은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는 아비새의 주장을 물리치고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비새의 주장은 불합리하거나 감정에 치우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나 도덕에 의해서나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시므이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 죄를 지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윗 자신도 시므이로부터 받은 저주를 생각하면서 그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전혀 갖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2. 하나가 될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시므이에게 관용을 베푼 것은 이 일이 자신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베냐민 지파를 끌어안을 수 있고, 분열되었던 이스라엘을 하나가 되게 할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시므이에게 관용을 베푼 것은 나라의 화합을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왕의 권세를 개인의 원수를 갚는데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아량을 보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를 안정시키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자신의 분노를 이스라엘의 일치와 평안을 위해 다스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오늘날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주장만 밝히다가 교회를 둘로 나누어지게 하는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교회를 섬긴다고 고백하면서도 조그마한 의견 차이 때문에 분열하고 분쟁하고 상대를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는 모습들이 너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다툰 것처럼 지금 이 시대의 교회도 사소한 것으로 파당을 만들고 서로 견제하고 다툽니다(고전 1:12-13).
여러분, 이렇게 성도들이 서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다툴 때 가장 마음 아파하실 분은 누구이시겠습니까? 그리고 반대로 좋아할 존재는 누구이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예수님의 지체로서 자기 유익을 위해 다른 지체를 미워하고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초대교회 때로부터 ‘관용’을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로 삼아 왔습니다.
빌립보서 4장 5절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야고보서 3장 17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짖이 없나니”
지금 이 시대의 교회에는 더이상 관용을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목회자가 조그마한 실수라도 하면 그것을 트집 잡아 세상 법정에 송사하고 쫓아내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용서와 관용은 너무나도 희소한 가치가 되었고, 혹 용서하고 관용하면 교회가 부패했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관용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죄인을 용서하고 그들을 선한 길로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드리고 용서와 사랑으로 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용서하도록 연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꼭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하라고!
용서는 구원과 직결된 단어입니다.
죄지은 인간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용서는 구원의 큰 전제조건입니다.
우리가 죄인인 것은 맞지만 용서받은 죄인이 되었을 때 천국에 이르게 되기에 우리는 모두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라고 하시면서 조건을 하나 붙이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양극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만 용서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해야 한다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서운하게 하고, 거짓말을 하고, 나를 곤란에 빠뜨린 사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다 용서할 수 있을 때 내 죄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내 죄가 크게 보이면 용서가 쉬워집니다.
그가 불쌍해 보이면 용서가 쉬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나도 예수님처럼 용서하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용서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면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속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목마름을 강하게 느끼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를 깊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깊은 용서가 있습니다.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깊은 은혜가 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속에서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문제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지심으로 죄, 가난, 질병, 저주에서 해방되고 다 이루어가신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는 것입니다.
시편 39편 13절에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용서 받음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4절에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회개하고 돌아오면 언제든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용서 받았으면
감사의 생활입니다. 죄를 짓어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용서 받았으면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해야 합니다. 용서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고 표현할 때 구원이 약속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끈질깁니다.
내 안에서 나간 마귀는 자기보다 강한 자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나를 또 유혹해서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으로 온전히 성령님께 지배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 도와주세요!
나도 용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강조하고 계십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함을!
마태복음 18장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6장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제자 아무나 되는 거 아닙니다.
천국 아무나 가는 거 아닙니다.
천국의 상급 싸구려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고 용서 받았다면
용서 받은 자의 삶을 살아라!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용서가 쉬운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나도 용서받고 천국을 향하여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천국백성이 되겠습니다.